160화
수천, 수만 가닥의 실들이 전방에 다가오던 언데드들을 조각냈다.
다가오던 언데드의 일부가 말 그대로 지워지는 모습을 확인한 그는 성곽 위에 내려섰다.
수천은 될법한 언데드 군단이 성곽을 향해 다가왔다.
그아아아아아-!
괴물의 종류는 다양했다.
녹슬고 부서진 갑옷을 입은 스켈레톤 병사나 검게 물든 채 단단히 무장한 데스나이트, 해골 군마를 탄 창기병과 그들의 머리 위로 축복을 내리듯 울부짖는 밴시까지.
인류의 그것처럼 정렬하지는 않았으나, 흩어진 모습으로도 위압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아-아-아-아!
괴물과 괴물의 울음소리가 섞여 쪽빛 하늘을 음울 지게 만들었다.
그때 베스틀라가 얼른 나가라는 듯 소리쳤다.
「알렌, 4계 사용해요. 빨리! 저런 잡스러운 괴물 따위 한방이라니까요?」
‘한방이라고 해서 저 많은 수를 한 번에 죽일 수 있다는 건 아니지.’
「또, 또 그런다.」
베스틀라가 작게 코웃음 쳤다.
알렌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았다.
도시의 하늘을 뒤엎은 사룡과 단단한 유적의 지반을 깨부수고 나온 거조를 상대한 것이 그다.
아무리 수가 많다고 한들 저들이 상대가 될 리 없지.
다만….
“사도시여.”
한참 생각에 잠긴 그의 곁으로 남자 하나가 다가왔다.
“빨리 움직여라!”
“당장 마법진을 작동시켜!”
많은 병사가 뒤늦게 움직이고 소리를 질렀다.
그 사이에서 동요 없이 그를 바라보는 인물은 특출나 보였다.
곁의 병사들과는 한 단계 높은 무장과 장식, 얼굴에 서린 노련함은 그가 다른 이들과 신분이 다르다는 것을 나타냈다.
“누구지?”
“이곳의 병사를 책임지는 지휘관인 에이손입니다.”
그는 병사들이 돌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여러 물건을 옮기는 것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묘하게 침착한 그의 모습에 알렌은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었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이번 주만 벌써 네 번째입니다. 오늘만… 두 번째고 말입니다.”
잠시 주위를 살피자 성곽 병사와 신도들의 얼굴 위로 지긋지긋한 감정이 떠오른 것을 눈치챘다.
공포에 질린 것도 잠깐일 뿐, 그들은 사도와 선지자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제 목숨도 바칠 수 있다. 그런 광기가 그들의 눈에 서려 있었다.
“무슨 일인지 놈들이 한 달 전부터 난리입니다. 성곽을 보수하는 거야 네 번째 선지자께서 도와주셨기에 근심을 덜었지만….”
피로는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는다.
알렌은 피로한 모습을 보이던 두 번째 선지를 떠올렸다. 보통 그녀가 나서서 저들을 해치웠겠지.
이곳의 이들이 대부분 전투를 수행할 수 있다지만, 수만씩 쏟아지는 괴물을 지속적으로 상대하기에는 힘에 부칠 테니.
차라리 그녀 혼자 나서서 쓸어버린다면 쉽게 해결될 것이라 여긴 것이리라.
그아아아아아-!
기괴한 함성을 내지르며 전진하는 언데드 대군.
제외한 다른 방향에는 언데드들이 몰려오지 않았다.
언데드들이 성곽에 다다르는 찰나 땅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쿠구구구궁-
바닥에 옅은 진동이 울리며 석벽이 겹겹이 솟구쳤다.
“…저건.”
알렌이 기시감을 느끼며 묻자, 에이손은 그의 생각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네 번째 선지자께서 힘을 쓰신 것 같습니다. 다만….”
그는 무언가 걸리는 게 있는 듯 걱정스러운 얼굴로 성곽의 아래쪽을 바라봤다. 작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보통 저렇게 막대한 힘을 쓰시지 않는 걸로 아는데…, 어찌.”
“그게 무슨 말이지?”
솟아오른 벽들은 전방에 다가오던 군대를 막아냈다. 놈들은 벽을 두들기며 괴성을 질러댔다.
부지런히 움직이던 병사들의 표정에 한줄기의 안도가 깃들었다.
스켈레톤 병사 사이에서 바닥을 기던 시귀도 여러 겹으로 솟은 벽을 뚫지 못했고, 밴시 역시 주제를 아는 듯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알렌이 나서기도 전에 상황이 마무리될 것 같아 보이자 그가 답했다.
“보통 선지자님께서는 저렇게 힘을 막 쓰시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기에 이곳의 돌로 지어진 건물이 많았는데….”
“보통 원재료만 끌어올려 두시지, 저렇게 형태를 빚는 일은 더 많은 힘이 소모되기에 지양하시는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저러신 것을 보면 필시 다른 뜻이 있으시겠지요.”
그는 네 번째 선지자, 바스러진 쇠붙이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아는듯했다.
알렌은 에이손과 같은 자가 많은지 모르겠지만, 바스러진 쇠붙이가 신도들에게 있어 영향력이 적지 않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러고 보니 썩어버린 뿌리도….’
그를 보좌하는 이와 함께 다른 신도들도 그가 고블린임에도 업신여기지 않았지.
순환교는 이교였으나, 내부는 생각한 것만큼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공자님.”
“이넬리아?”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를 찾은 것인지 어느새 그의 뒤로 다가온 이넬리아가 옅게 숨을 내쉬었다.
“처리할까요?”
그녀의 시선이 두껍게 쌓인 벽의 너머를 향했다.
“…그게 좋겠지. 저렇게 막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점은 없을 테니까 말이야.”
“그럼 권능을 사용하는 것을….”
그녀는 슬그머니 그에 대한 것을 입에 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투기에 휩싸인 것을 보니 얼른 새롭게 얻은 능력을 시험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알렌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감지력이 성곽 아래에서 다가오는 인영을 잡아냈다.
“그래, 최대한 빠르게 권능에 익숙해지는 게 좋겠지.”
“예, 알겠습니다.”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고.”
“……예, 반드시 명심하겠습니다.”
그녀의 신체가 변화했다. 잿빛으로 변한 피부와 등 뒤로 나온 열두 쌍의 반투명한 날개. 그의 당부에 붉게 물든 귀가 더욱 뾰족하게 변했다.
그녀가 땅을 한 번 박차자 성곽 위로 그녀의 몸이 떠오르며 언데드 대군을 향해 날았다.
시선을 돌리니 에이손이 눈을 크게 부릅뜬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들을 힐끔힐끔 살피던 병사들도 놀란 얼굴로 날고 있는 이넬리아를 보았다.
“…사도님, 저분은.”
“내 시녀니 놔둬도 상관없네.”
“도울 필요는….”
“없네.”
그녀의 능력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처리를 끝낼 테니 말이야.
그리고….
알렌은 성곽 아래서 그에게 손을 흔드는 골렘을 보았다.
네 번째 선지자가 다시 자신을 불렀다.
* * *
알렌은 숙소로 안내되었던 조금 전과 다르게 다시 메마른 물결을 마주했다.
바스러진 쇠붙이 역시 테이블의 한쪽 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오늘 이야기하게 되었구나.”
그녀의 표정에는 방금 전 내보내고 다시 만난 것에 대한 민망함은 없었다.
“예, 편하게 여독을 풀 시간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녀의 시선이 알렌을 향하다 그의 뒤쪽을 향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도들의 환호성이 들려오는 쪽을.
“오오…! 역시 사도님이 데려온 사람이다!”
“그 많은 수를 이렇게 빨리….”
웅성거리는 소리와 간간이 사도와 선지자의 이름이 함께 울리는 찬양.
“사도가 데려온 사람인가?”
“예, 제 시녀입니다.”
그녀의 물음에 알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사도는 에스테도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전조도 없는 이야기였으나, 알렌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며 그녀가 종잡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악마 계약자와 마녀, 흑마법사를 비롯한 이들이 몸을 담고 있고, 마왕을 다시 현세에 소환하기를 원하는 이들이라는 것은 압니다.”
그들에 대해 축약하자면 저것이 전부였다.
반대로 말해 알렌이 아는 것도 저게 전부라고 봐야겠지. 에스테도르에 관한 정보는 회귀 전 율리우스가 상대했던 주적이었음에도 정보가 적었다.
힘으로 다 깨부쉈기 때문에 정보가 필요 없다 생각한 건가?
“그것을 위해서 마탑 도시를 습격했고… 현재도 많은 사건을 일으키고 있겠지요.”
아마 대륙의 변방인 이곳에 대놓고 언데드 대군을 날뛰게 만들 정도로 그들의 영향력이 높아졌다.
“그럼 그들이 언제부터 날뛰기 시작했는지는 알고?”
“몇 달 전부….”
“137년 전.”
묘하게 자세한 숫자에 알렌이 말을 멈췄다.
어디선가 들어본 숫자였다. 분명, 이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 것 같았는데….
‘아.’
미니마 부족과 아라흐니 부족.
그들에게 석판에 관한 이야기를 물었을 때, 그리고 모든 사정을 설명해주겠다며 유적 실습 후에 그에 대한 걸 들었다.
“137년 전에 이리저리 흩어져있던 에스테도르가 지금과 같은 변혁을 맞이했다.”
한 남자가 9개의 별이 그려진 석판을 보고 태양계라 소리쳤다고 했었다. 그리고 부족에서 99일간 보살펴주었다가 쫓아냈다고 했지.
“그 변혁의 중심에는 한 남자가 있었고.”
“그걸 말씀해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처음에 말했지 않나. 그들이 언제부터 날뛰기 시작했냐고.”
“그 말은….”
“그들이 제일 처음 한 일은.”
그녀의 목소리가 음울하게 변했다.
바스러진 쇠붙이는 이미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는 듯 조용히 있을 뿐 끼어들지 않았다.
“남해의 바다 깊숙이 위치한 우리 왕국을 멸망시키는 거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음울했으나, 이야기는 담담히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근처의 인간의 왕국과도 교류하지 않고, 바다 깊숙한 곳에서 조용히 사는 이들은 처음의 목표로 노리기에 안성맞춤이었겠지.”
알렌은 아까 욕조에서 보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물고기 같은 하반신과 은색의 비늘, 희귀 종족이라는 인어가 분명했다.
“물론 바다 깊숙이 조용히 살아간다고 해서 우리 종족이 약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지. 그러나 우리는 멸망했다. 왜 그런 것 같나?”
알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그녀는 개의치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 때문이다.”
알렌의 생각대로 그녀는 그의 대답에 상관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종족이 작은 종족으로 전락하고, 왕국이 멸망한 이유는, 한 남자의 말만을 믿고 속은 여자 때문이지.”
한여름 밤의 꿈 같았던 공주의 사랑은, 최악의 형태로 돌아와 끝을 맞이했다.
알렌은 뻔히 예상되는 결말에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당신입니까? 메마른 물결?”
“그 이후로 나는 첫 번째의 말에 감화되어 그의 사상에 따라 두 번째가 되었지.”
그녀가 안대를 풀었다.
흉측한 모양새의 피부와 옅은 푸른빛이 감도는 백안이 그를 응시했다.
“왜 나를 이렇게 지칭하는지 아는가? 사도. 나는 더 이상 누구든 믿지 않아.”
상대의 악함을 눈치채지 못한 두 눈은 필요 없다 여겨 스스로 불태웠을 때부터, 그녀의 감정을 뒤흔들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세상의 종말을 제외하고는.
그렇기에 메말랐다.
“하지만 이 눈은 믿을 수밖에 없지. 알렌 라인하르트, 스스로 자칭하기를 순환의 사도. 그대의 말을 내 눈이 옳다 긍정하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녀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었다는 듯 처음과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멸망의 변수를 죽이고 싶다고 했지. 그렇다면 사도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다. 그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왜, 마왕을 소환하려고 하는지.
“그를 알지 못한다면 그 또한 종말의 변수로 작용하게 될 테니.”
그녀는 그것을 끝으로 입을 열지 않았다.
바스러진 쇠붙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알렌도 그를 따라 오두막을 나섰다.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도, 그녀는 알 수 없는 얼굴로 자리에 앉아있었다.
끼익-
문이 닫혔다.
그날의 대화는 이것으로 끝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