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알렌은 최대한 표정을 유지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그가 문 앞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시선이 알렌을 따라갔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아.
알렌은 생각을 거듭하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고는 맥이 탁 풀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이 그가 있는 곳과 미묘하게 달랐다.
그녀는 맹인이었다.
그걸 깨달은 그의 정신이 차갑게 가라앉으며 냉정을 되찾았다.
“…존재하지 않는다니, 저는 하품하는 심연에서 제 자신을 증명했지 않습니까.”
“그래, 그것이 문제다.”
욕조의 물이 찰랑대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하게 변한 오두막은, 그녀와 알렌의 숨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아마 이 사실은, 나와 첫 번째밖에 모른다. 밖의 네 번째도 다른 곳의 둘도 모르는 이야기지.”
그녀는 두 손으로 욕조의 윗 테두리를 잡으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무엇을 말입니까.”
“순환교의 교리를 누가 정리했는지 아는가?”
“본래부터 전해져 내려오….”
“아니.”
물방울이 튀었다.
크게 고개를 흔든 그녀는 검은 안대 너머로 시선을 마주쳐 오는 듯 그를 쳐다봤다.
“대부분은 첫 번째가 했을 뿐이다. 나는 거들었을 뿐.”
“…그걸 제게 말해 주신 의도가 뭡니까.”
그렇게 말은 꺼냈지만 사실 알렌은 그녀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해했다.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는가.”
그녀가 안대를 풀었다.
새하얀 피부에 어울리지 않는 흉측하게 변한 피부와 하얗게 물든 백안.
꿈틀거리는 혈관이 그녀의 눈 주위로 맥동했다.
“순환교의 교리에 사도는 원래 없었다. 다른 신도들을 안정시키고 믿음을 주기 위해 만들었을 뿐. 그렇기에 특수한 공간인 하품하는 심연, 긴눙가가프(Ginnungagap)까지 빌려 실제 미래를 아는 이가 아니라면 증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맹인이었을 그녀가 알렌의 눈과 정확히 마주쳤다.
“‘진짜’가 나타났을 줄이야.”
그녀의 표정에 신기한 생물을 바라보는 듯한 궁금증이 섞였다.
“자, 말해 봐라. 알렌 라인하르트. 너는 누구지?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는가.”
알렌은 무언가가 자신을 꿰뚫어 보고 있다 느꼈다. 아마 기분 탓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만한 일은 아니겠지.
‘순환교에는 누구도 숨어들 수 없다.’
그런 말이 있다.
첩자나 거짓 혹은 음모의 목적으로 순환교에 숨어든 자들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들키고 만다고.
알렌은 틀림없이 그 소문의 진위는 그녀와 관계있다고 확신했다.
“존재하지 않는 사도를 자칭하는 자이자, 미래의 일을 알고 있는 너는 누군가?”
“나는.”
알렌은 거짓으로 속여 넘길 생각을 버렸다.
어차피 한 번은 거쳐 가야 할 시련이다. 그녀가 알렌을 홀로 기다린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번 대답에 달렸다.’
아직은.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총대주교가 그를 위해 마중을 나왔으며, 많은 신도가 그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당연히 순환교의 사도이자, 미래의 종말을 증명하는 자입니다.”
그녀의 이마가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능력은 무엇일까.’
진실을 가려내는 것인가 아니면 진심을 가려내는 것인가.
알렌은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대답을 했다. 양쪽 다 틀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는 ‘현재’ 순환교의 사도며, 미래에 있을 종말을 대변하기도 했다.
그녀는 알렌의 대답에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만… 됐다. 다시 묻지. 너는 무엇을 하려고 이곳에 왔지?”
알렌은 잠시 침묵했다.
“대답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지금과 같은 대접은 받지 못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그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던 조건을 충족한 사람이다.
그가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든 그의 존재 자체는 미래의 종말이 온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그가 신도들에게 어떤 찬양을 받든, 어느 정도의 지원은 해줄 수 있다.
“하지만, 드라기아스의 사룡(死龍)을 해결했을 때와 같은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 그가 가지게 될 권한도 크게 줄어들겠지.
“자, 다음의 기회는 없다. 한 번의 기회를 주지. 너는 무엇을 원하고, 어떤 이유로 이곳에 있는가.”
“미래의 멸망을 방해하는 변수를 죽이기 위해.”
그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알렌은 목적을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순환교에 빙의자에 대한 단서를 조금씩 뿌려 율리우스의 정체를 알리는 순간, 그들을 집어삼키려고 했다.
그를 위한 계획은 그들이 빙의자에 대한 정보를 요청할 때면 시작하려 했지.
그러나 계획은 언제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미래의 종말은 확실시되어 있습니다.”
알렌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일단 그의 말을 들어 보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마왕에 의해 ‘확실하게’ 멸망하는 미래가 있지요.”
그건 자신도 모르는 검은 책의 미래, 율리우스가 늘 입에 담던 ‘원작’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녀는 알렌의 말에 반발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미래라도, 어떠한 기준에 의해서 진실인지 판단하는 건가?’
아니면, 그 미래가 실제로 존재했을지도 모르지.
자신이 회귀한 것처럼.
“그러나 그 종말은 여러 변수에 따라 바뀔 수도 있습니다.”
율리우스의 몸을 빼앗은 김우진처럼.
그리고 회귀를 하게 된 알렌, 자신처럼.
“제 목적은, 종말을 막으려는 변수인 빙의자를….”
하이젤을 개심시키고, 새로 강림할 마왕을 막으려는 김우진을.
“죽이는 겁니다.”
그의 말에 그녀는 침묵했다.
알렌의 진의를 알아보려는 듯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고, 알렌도 틀린 말을 하지 않았기에 당당했다. 단지, 조금 순서를 바꿨을 뿐이지.
“이게 제 목적입니다.”
그를 죽이기 위해서 순환교를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세계의 종말을 막으려는 빙의자를 죽이기 위해 순환교에 들어왔다.
그의 침착한 대답에 그녀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는 듯 입을 다물었다.
긴 머리카락에 맺힌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졌고, 바닥에는 옅은 물기 자국만이 남아 진한 색을 보였다.
허공을 향하던 그녀의 시선이 알렌을 향했다.
“…….”
알렌은 목구멍에서 소리가 튀어나오려는 걸 참았다.
아무것도 안 보일 것이 분명한 눈동자는 잠시 빛을 내는 듯 영롱히 반짝이며 그를 꿰뚫었다. 그런 이질적인 시선으로 얼마나 보았을까.
“……진실이로다.”
그녀는 한동안 그 상태로 그를 바라보더니 욕조의 바깥으로 나왔다.
그녀가 넘어지리라 알렌이 생각한 것과 다르게 그녀가 하체를 바닥에 내디딘 순간, 그녀는 여느 사람처럼 두 발로 서 있었다.
그녀는 그의 앞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알렌이 멀뚱히 있자, 그녀는 잠시 그를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손을 주게.”
“어느 손을….”
“아무것이나.”
알렌이 조심스럽게 손을 펴자, 그녀가 무언가를 손 위로 올렸다.
매끈하면서 차가운 감촉.
“…이건?”
하얀빛의 진주.
안쪽에서 작은 빛을 내는 진주가 그의 손 위에 있었다.
“우리 왕국의 전해 내려오던 고대 유물이다. 앞으로 이걸로 연락하도록 하게. 괜히 시간을 들이지 말고.”
이미 멸망했지만.
작게 중얼거린 소리가 그에게 닿았다.
그녀의 귀를 바라보자, 한쪽에 알렌과 같은 진주로 만든 귀걸이가 걸려 있었다.
메마른 물결은 거기까지 하고는 손을 휘둘렀다.
공기 중의 수분이 모여들며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벌컥-
“이제 나가게. 오늘은 쉬어야겠으니.”
“바스러진 쇠붙이가 곧 오겠다고….”
“내가 알아서 하겠다.”
그녀는 안대를 다시 매며 몸을 돌렸다.
더는 그를 상대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사에 알렌은 오두막을 나섰다. 그가 나선 즉시 문이 닫히며 사라졌다.
알렌이 오두막을 나서자 이넬리아가 그의 몸을 확인하며 다가왔다.
“공자님 아무 일도 없으셨습니까?”
“그래… 별일은 없었지.”
그 일을 잘 넘기지 못했다면 달라졌겠지만, 알렌은 무사히 그녀가 준비한 올가미에서 빠져나왔다.
바스러진 쇠붙이는 알렌이 나오자 슬쩍 문을 쳐다보더니, 그를 향해 물었다.
“…혹시 그녀가 나가라고 했습니까?”
“예, 오늘은 피곤하니 그만 나가 달라고.”
그는 이런 일이 자주 있었는지 놀라지 않은 눈치였다. 그저 그에게 수고했다는 듯 신도 하나를 불러 그들이 지낼 곳을 안내하게 했다.
알렌과 이넬리아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그가 손을 휘둘렀다.
쿠구궁-
잠시 바닥이 덜컥이더니, 오두막의 주위로 회백색의 담장이 솟아올랐다.
바스러진 쇠붙이는 꼼꼼히 주변을 살피며, 조금의 틈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오두막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탁자 앞에 앉아 있는 메마른 물결이 보였다.
그녀는 그를 본체만체하지도 않으며, 허공을 쳐다봤다. 검은 안대로 가려진 시선이 향하는 곳은, 그 누구도 알 수 없겠지.
골렘은 석상처럼 벽 앞에 자리하다 입을 열었다.
“참인가 거짓인가.”
“참.”
“그렇다면 그가 죽였던 사도 후보는 거짓이 맞나?”
“아마도 그렇다.”
그 말에 바스러진 쇠붙이는 괜히 쉬지도 않는 숨을 길게 내뱉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다행이군.”
“무엇이?”
메마른 물결의 고개가 그를 향했다.
“우리가 틀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은 선지자다.
적게는 수십 년에서부터 많게는 수백 년 동안 교단을 이끌었으며, 그들이 향할 지향점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불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곳으로 나아가는 것이 옳은가.’
옛날, 신전이 제 기능을 하고 신이 존재감을 보이던 시절에는 없었을 우습기 짝이 없는 고민이겠지만 현재는 달랐다.
신은 추락했고, 신전은 몰락했으며, 진짜 종교는 사라졌다.
이제는 수많은 이교와 이단들이 판을 치고 서로 자기가 옳다 주장하는 시대가 도래했지.
그중에서 순환교의 규모가 큰 편이라지만, 그들도 순환교의 교리가 정말 옳은지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맞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런 고민이야말로 종교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일지 모르지.
그러나 알렌의 존재로 인해 그들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알렌의 앞에서는 다른 신도들이 열광하는 모습을 보며 덤덤하게 있었지만, 만약 그가 골렘이 아니었다면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확고한 목표가 있는 첫 번째.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두 번째.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 세 번째와 자신의 할 일을 다 하는 다섯 번째와 다르게 그는, 자신이 삶을 되찾은 목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었다.
겉으로는 불가능했을 자신의 존재는 세상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나타났다는, 교리에 의존한 이유를 덧붙이긴 했으나 그게 맞는지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대로만 나아간다면….”
그가 그렇게 말하던 순간, 거대한 폭음이 들렸다.
쾅!
“선지자님!”
바깥에서 들리는 부름에 그가 급히 땅을 박찼다. 오두막이 반쯤 부서지며 주위를 감싸던 담장마저 한쪽이 뻥 뚫렸다.
“무슨 일이냐!”
“언데드 입니다!”
“뭐라고?”
두두두두-
땅이 간헐적으로 흔들렸다. 이야기를 더 들을 필요 없다고 생각한 그가 손을 내리쳤다.
그의 발밑에서 돌과 광석이 모여들며 그를 하늘로 올렸다. 그렇게 성곽을 넘어, 저 너머의 지평선을 바라본 그의 얼굴에 여유가 사라졌다.
“……벌써 왔다고?”
“언데드다!”
성곽에서 밖을 감시하던 이들이 소리쳤다.
그들의 표정에 공포가 서렸다. 그만큼 밖에 나타난 언데드의 숫자는 남달랐다.
“언데드 군단이 나타났다!”
그가 멍한 표정을 짓던 그때, 공중으로 누군가 치솟았다.
청발에 냉정한 표정, 검을 들고 있는 그는 방금 숙소로 안내를 받던 알렌이었다.
그가 손을 휘두르자 그의 곁에서 수천, 수만 가닥의 실타래가 엮이며 숫자를 알 수 없는 군대의 위로 쏟아져 내렸다.
알렌이 크게 소리쳤다.
“뭐 하고 있나! 얼른 준비해라!”
그가 그 말을 내뱉으며 다시 땅을 박찼다.
잠시 혼란에 빠졌던 이들이 다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도 님을 도와라!”
“당장 움직여라! 움직여!”
바스러진 쇠붙이 역시 정신을 차렸다.
그가 부서진 성곽 쪽을 향했다.
당장 그곳을 막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