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마하 하뷔에론은 무표정한 얼굴로 수도에서 방금 도착한 보고서를 읽어내렸다.
샤락샤락-
보고서는 몇 장 되지 않았다.
다급한 소식에 그녀의 심복이 최대한 정보를 간추리고 간추려 필요한 정보만을 담아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한 번 봤던 내용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내렸다.
무언가 걸린 듯 인상을 찌푸리던 그녀의 곁으로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쪼르륵-
소피아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어느새 바닥을 드러낸 잔에 찻물을 더했다. 은은한 꽃향기가 마하의 코끝을 간질이며, 생각에 잠기던 그녀를 깨웠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소피아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움직였다.
자신의 주인은 언제나 그렇듯 답을 찾아낼 것이다. 그녀에게 풀지 못할 문제는 없었으니. 소피아가 해야 할 일은 그녀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철컥-
소피아가 나가고도 몇 번이나 보고서를 읽던 그녀는 드디어 종이를 내려놓았다.
아칸더스의 예상했던 것보다 그녀는 황태자의 태도에 더 큰 혼란을 느끼는 중이었다.
“폐하는 무슨 생각이신가요.”
정확히는 그가 아닌 그 뒤에 있을 황제에게.
황태자가 뛰어나다는 사실은 그녀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이 황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할지언정, 그를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상대를 파악하지 않고 뛰어넘겠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도 우스웠다.
문제는 자신의 아버지, 황제가 무슨 생각으로 이번 일을 허락했는가.
‘…황태자가 다쳤다는 것은 사실이겠지.’
그러나 그것이 제국 무투제 끝에 있을 권리를 포기할 정도는 아닐 것이다.
몸을 거동하기 힘들다고 한들, 얼굴을 한 번 비추는 게 어렵지는 않을 테니. 아니, 오히려 제국인들이 보기에 다친 상태에서도 나섰다는 것에 더욱 환호할 것이다.
그리고 몇 달간 요양?
‘…웃기네요.’
차라리, 대놓고 꾀병이라고 하지 그러셨나요.
황태자의 의도는 뻔했다. 이번에 여러 차례 터진 사건을 빌미로 황위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을 가려내겠다는 거겠지.
이번 제국 무투제에 얼굴을 비추고자 하는 이들은 황자들이 습격받은 것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의혹을 받게 될 것이다.
황태자를 노린 이유는 황위 다툼 때문에 벌였다는 것이 중론이었으니까.
정말 황위에 관심 없는 이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바짝 몸을 숙일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자신과 같이 황위에 관심 있는 자들이라면 절호이기도 했다.
이번 기회는, 의혹과 의심을 감내하고도 필요했다.
‘이렇게 기다렸다는 듯이 연이어 사건이 터지는 게 걸리지만….’
상관없다.
일은 이미 벌어졌다.
벌어지기 전에 그 정황이라도 파악했다면 반응을 달리했겠지만, 상대는 그녀가 무엇을 할지 안다는 것처럼 은밀히 일을 계획했다.
그렇다면 지난 일에 관심을 둘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이해되지 않는 건 한가지였다.
‘황태자라면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어요.’
황제 자리에 어울리는 듯 단호하다가도 한편으로 유약해 보이기도 하는 그 성격에, 그는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황위 다툼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정리해버리려 할 것이다.
황태자로서 다른 황자와 황녀의 도전을 받아들이고자, 또 가족으로서는 괜한 피를 묻히기를 원하지 않기에.
하지만 황제가 일을 크게 키우게 허락했다는 건 뭘 뜻하는 무슨 의미인가.
‘…이 시기에 괜한 이목을 집중시켜서 좋을 게 없을 텐데요.’
에스테도르가 날뛰기 시작하고 대륙 변방에서부터 사라지는 사람과 마을의 수가 늘고 있다고 한다.
아카데미의 일학년까지 동원되어 임무를 수행할 정도로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이런 커다란 사건이라니. 세간의 이목이 전부 몰릴 텐데.
‘무투제에 강자들이 모여들기 때문에 괜찮다는 걸까요?’
도저히 생각해도 나오지 않는 답에 그녀는 미각을 꾹 누르며 생각을 끝마쳤다.
여러가지 가설이 나왔으나 어느 것 하나 이것이다 말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시간이….”
주홍빛으로 변한 하늘이 짙은 푸른 하늘과 불규칙한 경계선을 그렸다.
잠시 밖을 살펴본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이럴 때는 바람을 쐬며 걷는 게 좋다.
‘겸사겸사 맡긴 물건도 찾아오고.’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공자님, 계획이 잘 풀렸으니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아칸더스는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마하 황녀가 반응을 보일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남은 뒷작업으로 할 일이 있다며 사라졌다.
한가롭게 기다려도 되는 알렌과 달리 아칸더스는 2황자 호위대의 추적을 따돌려야 했다.
일라이자는 황자다.
아무리 그가 다른 이들과 같이 수업을 듣고, 기숙사에서 지낸다고 한들 그가 황자라는 사실에 변함이 없다.
그를 호위하기 위한 이들로 같이 아카데미에 입학한 학생만 셋이 있었고, 황자 몰래 그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이는 이가 다섯을 더 될 것이다.
이곳이 여러 학생이 모이는 아카데미라 그 정도지, 제국에 있었다면 공격이 닿기도 전에 실패했을 터.
그를 공격한 건 스콜의 일원 중 하나였으니 아칸더스는 그를 끝까지 책임져야 했다.
알렌은 그가 바쁘게 움직일 동안 만나지 못했던 이들과 만났다.
처음은 신드리 남매.
신드리 남매라는 것과 다르게 알렌은 그녀의 남동생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항상 그가 있을 때 우연히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다니 언젠간 볼 수 있으리라.
“오, 오랜만입니다. 공자님. 저, 저는 그런데 지저도시에 대해서 아무것도….”
그녀는 알렌에게 인사를 하다 무언가 생각난 것이 있는지 오들오들 떨었다.
“아니, 네가 드워프와 관련이 없다는 건 내가 제일 잘 아니 걱정할 필요 없다.”
알렌이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답하자, 그녀는 다행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와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눈 후에 소네드를 만나려 했지만, 그는 중요한 상행에 나선 참이라 만날 수 없었다.
‘신드리 남매는 순조롭게 성장 중이군.’
이대로 자라나서 미래에 지금 드워프 수준의 무구를 양산해내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아니면, 드워프가 저주받은 명검으로 유명하니 비슷한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다음에 만난 이는 짐승왕, 가이온.
그와는 항상 어딘가에 갈 때나 돌아올 때 제일 먼저 만나러 오지만, 확인해야 할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그가 자리한 곳은 도서관의 옥상이었다.
알렌은 제발 데려가 달라는 사서의 부탁을 받으며 그를 마주할 수 있었다.
“왔느냐.”
널브러진 술병들.
알렌은 그것에 시선 하나 주지 않으며 드라기아스 가문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는 알렌이 하던 이야기를 쭉 듣다가 흘러가듯이 물었다.
“그래서, 강했냐?”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알렌이 조금의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는 상관없다는 듯이 술을 들이켰다.
“말해주지 않을 생각이라면 상관없다. 언젠가 한번 붙어보고 싶었는데 아쉬울 뿐이지.”
그는 쩝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딘가로 가려는지 그가 술이 남아있는 술병을 챙겨 들었다.
알렌은 잠시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대답했다.
“약했습니다.”
“그래?”
그럼 상관없지.
그는 크게 웃으며 옥상을 박찼다. 옥상의 바닥이 박살 나며 주변으로 흩어졌다.
“아니, 또 이러시지 말라고 몇 번이나….”
그 소리에 사서가 울상인 얼굴로 뛰어왔다.
알렌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에게로 수리비를 청구하라 이르고, 연구지대로 가 일리아나를 찾았다.
그녀는 린벨과 함께 있었다.
“앗, 공자님!”
“오랜만이네요.”
일리아나는 무언가를 하고 있었는지 작업대 근처에 있었다.
“그건 뭐지…?”
“아, 이거, 누가 수리해달라고 의뢰를 해서 만드는 중이에요.”
그녀가 손에 든 건 정교한 손목시계였다.
수많은 톱니와 톱니가 겹쳐져 움직이는 시계. 그녀는 작업이 거의 다 끝난 듯 시계는 말끔히 변한 상태였는데, 신기한 점은 시계를 움직이는 동력이 없다는 점이었다.
알렌은 궁금증이 들어 입을 열었다.
“그런 시계는 희귀한 편인가?”
“이거요? 이건 희귀하다는 수준으로 말할 수 없을걸요?”
그녀는 어떤 시계라도 동력이 필요하지만, 이건 정교한 기술의 결정체나 다름없다면서 유물 중에서도 상위급에 달한다 했다.
알렌은 마력 같은 힘의 파동도 없는 물건이 그 정도의 가치가 있나 싶었지만, 기술자의 관점으로는 다른 듯했다.
“…안의 정보를 제대로 분석해서 다른 건물이나 물체에도 적용할 수 있다면 저희는 무한동력으로….”
“그래서.”
“그래서라니요? 이 물건이 얼마나 가치가 높은데…!”
그도 그녀의 설명을 듣고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지만, 그녀의 설명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말을 돌렸다.
“이 물건의 주인이 누구길래, 그런 것을 가지고 있지?”
“그건….”
그녀가 입을 열려던 때, 가까워지는 구두 소리가 들렸다.
또각또각-
“의뢰인에 관한 비밀조항은 필수가 아닐까요? 아니면.”
누군가 그녀가 있는 작업실로 들어왔다.
“아직 학생이니 상관없다는 건가요?”
당당한 표정과 나른함이 섞인 표정.
그녀의 얼굴은 알렌이 익히 알고 있는 이였다.
“지금쯤 의뢰가 끝났을까 싶어서 왔는데….”
제국의 막내 황녀의 시선이 일리아나에서 알렌으로 옮겨졌다.
“오길 잘한 것 같네요.”
만나고 싶었던 사람도 있고.
알드니아 제국의 막내 황녀, 마하 하뷔에론이 그곳에 있었다.
* * *
“일은 어떻게 됐느냐.”
어둠 속에서 나이대를 짐작하기 힘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패했습니다.”
말을 한 이는 그 사실이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그것으로도 모자란 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큰일이라도 저지른 표정이었다.
“니드호그를 포섭하려 했으나, 저희가 찾는 것보다 빠르게 북쪽의 여왕이 손을 쓰는 게 빨랐습니다.”
“여왕이라….”
무언가 고민에 잠긴듯한 목소리.
남자는 생각을 방해하지 않고자 조금의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나서야 하는 시간보다 9년이 빠르구나.”
“…….”
“니드호그가 힘을 키우고 나와야 하는 시기도 너무 일렀어.”
놈은 좀 더 힘을 키우고, 바닥에 숨어들어서 생을 연명하다 우연히 드라기아스 가문의 비밀을 발견한 영웅에게 토벌당했어야 했다.
북쪽의 여왕 역시 마찬가지.
얌전히 가족 놀이나 하며 앞으로 몇 년은 북쪽의 구석에 더 박혀있어야 하는데, 대륙에 손을 뻗는 시기가 지나치게 빨랐다.
그녀가 생각을 마치고 물었다.
“다른 쪽의 변고는 없었느냐?”
“없었습… 아. 제국 쪽의 황위 계승 다툼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도 이르구나.”
그녀가, 그들이, 그분이 세운 계획보다 지나치게 일이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루피너스 가문에 숨어든 악마도 몇 년간 화신의 몸에 숨어들었다가, 알맞은 시기에 모습을 드러냈어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진체마저 부상을 입은 채 앞으로 수백 년은 요양해야 할 처지가 됐지.
이것도 ‘계획’의 일환이십니까?
어느 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분은 그녀의 물음에도 아무 말도 답해주지 않았다.
“계획을 더 빠르게 진행한다. 김우진의 앞으로 고행에 몸을 숨기던 전 전대 팔강과 만남을 갖게 만들어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니, 그건 상관없겠구나.”
프란시스카나 마하 하뷔에론이 알렌과 엮이게 되었지만, 거기까지는 그녀가 손을 대서는 안 되었다.
알렌 라인하르트를 건드려서는 안 되니.
“하이젤 카일루스, 그가 현재 시도하는 일이 성공할 수 있도록 은밀히 돕거라.”
세상이 빠르게 움직인다면, 그들도 그에 맞춰 움직이면 된다.
그녀의 명령에 남자는 경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반드시 실패 없이 행하겠나이다.”
그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카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