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제국을 떠올릴 때 흔히들 붉은 태양을 떠올리곤 한다.
알드니아 제국은 여러 고대 유적 중 스팀펑크와 관련된 유적에서 기틀을 쌓고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스팀펑크와 관련된 유적에서 흔하게 나오는 붉은 연료.
제국의 초대 황제는 극히 드물게 발견되는 보안 장치가 없는 유적을 발견했다.
작은 태양을 떠올리게 하는 그것을 본 제국의 초대 황제는 손수 붉은 태양을 제국의 문양으로 삼겠다 선포했다.
드워프, 수인들이 힘들게 기계와 마도구를 모방하는 것에 반해 인간은 기술이 떨어져 갈슈딘 아카데미가 위치한 엘피스를 제외하고는 발전이 늦는 게 당연했다.
그것이 몇백 년 전이라면 기술의 격차가 더 벌어졌을 시기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이 여러 왕국이 난립했던 서부나 통일되지 못한 남부와 다르게 제국을 세울 수 있었던 건 유적의 물건을 연구함으로 발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탑 도시가 자리한 서부 지역은 마법으로, 그 끝에 자리한 엘프들은 정령술로.
온갖 사교와 부족들로 시끄러운 남부는 일부 주술과 저주술로, 대륙 중앙의 북쪽에 자리한 수인들은 오러와 기계로.
이에 드워프의 뛰어난 단조술도 떼어 놓을 수 없었다.
일부 재능있는 자들이 프라나를 터득한 뒤, 가문의 비전이 담긴 무기술을 개발할 동안 제국은 증기 기관을 통해 발전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엄청난 발전을 이뤄내거나 발명품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이제야 조금씩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기반 지식도 없이 시작된 연구는, 그 유물로 인해 제국을 세울 수 있게 만들었을지언정 막대한 지식을 주지는 못했다.
다른 나라와 다른 점이라고 해봐야 특이한 건물의 형태와 옷차림 정도일까.
어차피 같은 인간인 이상 마법을 사용하지 않을 수도 없었고, 무기술과 프라나를 배척할 필요성도 없었다.
제국은 그렇게 초기에 세웠던 야망과 다르게 골고루 발전해왔다.
혼란스러운 제국을 하나로 묶고자 실력주의를 표방하며 지금의 알드니아 제국이 완성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묵직하고, 위엄 서린 목소리가 울렸다.
이 목소리의 주인을 아는 자든 모르는 자든,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압박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만큼 지금 말한 자의 지위는 평범하지 않았다.
다리안 하뷔에론.
알드니아 제국의 황제.
“어떤 것을 말입니까.”
그런 황제의 물음에 앞에 있던 남자는 선선히 웃으며 답했다.
황태자, 다리안 하뷔에론, 그가 남들과 달리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자 금세 위엄 어린 모습을 지웠다.
“이번 황위 다툼이 심해진 것 같다고 생각하느냐?”
다리안은 항상 그랬으니.
누구에게도 웃으며 남들을 배려하는 호감형 인상.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으로 같이 있고 싶게 만드는 군주.
그러면서도 단호해야 할 때는 단호하게 판단하는 자.
다른 자식들과 다르게 삼십 대 초반의 나이에 달하는 그는 당장 왕의 자리를 맡기더라도 훌륭히 수행할 수 있었다.
“폐하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본다.”
황제의 말에 답하지 않고 도리어 물음을 던져 옴에도 대답을 해주는 모습은 황제가 얼마나 황태자를 총애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네 바람대로 이번에 올라왔던 보고는 조용히 처리하려 했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알렌의 예상대로, 아니 그보다 더 빠르게 요한은 이 일의 중대성을 깨닫고 지저도시 쪽을 조사했다.
작정하고 파헤치는 그의 행동력에 실마리는 금방 잡을 수 있었고, 그에 관한 내용은 알렌에 대한 것까지 합쳐져 황제에게 들어갔다.
그 암살의 대상이라 여겨지던 황태자에게도.
“배후에 대한 것도 너의 요청을 받아 너에게 맡길 예정이었지.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거라.”
황제가 말한 주변이 이 작은 방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그는 알았다.
“제국의 변방, 각국의 인재들이 모인 엘피스가 시끄럽게 변했지. 설령 그것이 누군가의 음모라 하더라도, 조용히 처리하기에 무리가 있어 보이는구나.”
“그렇겠지요….”
다리안은 잠시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로서는 어린 동생들이 황위를 위해 그런 짓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의심하고 싶지 않았으나 권력이란 그런 것이니.
그렇기에 황제에게 간청하여 황실 내부의 일로 끝낼 예정이었는데….
“거기다 일라이자가 습격을 당했다지.”
황제는 마치 겁을 주듯 시험하듯 은근한 말투로 덧붙였다.
“요한에게 직접 정보를 알려 준 아이랑 대화를 나누던 중에 습격당했다고 하더구나.”
다시 나타난 그늘진 여왕의 아래에 있거나, 그녀의 협력을 받는 것으로 추정되는 상대.
그가 일라이자에게도 정보를 알려주려 한 건지, 아니면 평소에 나눴던 친분으로 회포를 풀기 위함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일로 인해 소문에 기름을 끼얹은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으레 그렇듯 음모론처럼 삽시간에 떠올랐다가 몇 년간 사람의 입에서 오르내리며 자연스레 사라질 이야기가, 일라이자의 일로 크게 주목되었다.
황실에서도 조용히 일을 처리하기에는 불가능한 상태.
어느 정도의 입장을 내보여야 한다.
가장 쉽게 분노한 제국민을 달랠 방법은 간단하다.
“슬슬 제국 내에 자리 잡은 기생충을 정리할 때가 됐지.”
본래 황제가 직접 나서기보다는, 황자나 황태자의 업적을 더해주는 용도로 생각했었지만, 지금 같은 경우에도 유용했다.
“그건….”
다리안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망설였다.
조용히 정보만 획득했을 때라면 모를까, 만방에 소문이 퍼져나갔고 황자까지 습격당한 상태다.
이걸 그대로 놔두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다른 방법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어서 말해 보아라.”
황제는 내심 기대를 감추며 말했다. 그는 언제나 황태자의 재능과 일 처리에 만족했지만, 가족과 관련되면 또 모를 일이다.
황제는, 제국의 왕관을 쓴 자는 무정해야 한다.
형제가 반란을 일으킬 수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하며, 누가 권력에 눈이 멀지 모르니 속으로 항상 경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번 무투제 때 얼굴을 보일 권리를 포기하겠습니다.”
“…설마.”
그의 결단에 황제의 표정이 변했다.
“그것으로 현재 동생들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폐하.”
“…그 기회를 포기할 정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
그의 얼굴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예,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황제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숙고하더니, 차라리 잘됐다는 듯 중얼거렸다.
“흠…, 그래. 이참에 자식들의 생각을 알아보는 것도 좋겠지. 허락하마. 그럼 너는 어떤 방식으로 일을 벌이려 하느냐?”
그가 황제의 허락에 안도한 어조로 답했다.
“당연히.”
그가 미소지었다.
“좀 충격적이어야 동생들도 헷갈리지 않겠습니까.”
* * *
-황태자가 누군가에게 피습당해 몇 달간 치료가 필요할 만큼 큰 부상을 입었다!
며칠 후, 하나의 소식이 아카데미에 강타했다.
2황자가 아카데미 내부에서 기습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황태자 역시 피습당했다는 것.
그 소식에 아칸더스는 알렌과 자리를 가졌다.
“계획은 이제 어떻게 됐지?”
“제가 생각한 것보다 그 이상의 결과가 나왔으니, 좋다면 좋습니다만….”
그는 황태자의 대담한 결정에 놀란 듯 보였다.
“왜 그러지?”
아칸더스가 세운 계획의 골자는 이랬다.
처음에 스콜을 이용해 엘피스 내부로 소문을 흘린다.
여러 계층에 사람이 있는 것이 장점인 스콜은, 소문이 인위적으로 퍼졌다고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돌게 할 것이다.
두 번째는 2황자 일라이자를 습격하는 것.
아칸더스는 이를 실행하기 위해 자신의 계획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렌에게 이야기해야 했다.
알렌은 그것을 듣고, 일라이자가 정말 다치지 않는 선에서 일을 진행한다는 전제하에 이를 동의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제국 무투제.’
그는 시야를 아카데미로 한정하지 않았다.
제국의 정치적 구도와 시기 그리고 황녀에 관한 사실까지 모두 듣고 나서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제국 무투제는 실력주의를 표방하는 제국의 꽃이자, 일 년에 한 번씩 열려 제국민 모두가 함께 즐기는 축제다.
현재 팔강이자 제국 최강으로 불리는 피에르 베르나프도 이 대회의 우승자 출신.
심지어 일 년에 한 번, 그에게 덤벼드는 기간도 제국 무투제의 끝에 걸쳐 있어 많은 이들이 그 광경을 보고자 수도로 찾아올 정도였다.
그런 제국 무투제에는 하나의 전통이 있다.
무투제의 우승자는 마지막 날에 얼굴을 비춘 황제의 자식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
보통 이때 얼굴을 보이는 이는 대대로 다음 황제로 유력하다 생각되는 이가 맡는 경우가 많았다.
예외적인 몇 번을 제외하고는 제국 무투제가 열렸을 때부터 이어져 오던 전통이라 제국의 시민들도 이 사실을 익히 알고 있을 정도였다.
아칸더스는 마하 황녀의 야망과 알렌의 목적을 이것과 엮었다.
“알렌 공자님이 요한 라헨바흐에게 전해준 정보가 있다 하더라도 원래라면 이렇게 큰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겁니다.”
원래 알렌의 계획대로라면 2황자를 끌어 들어야 해 볼 만했겠지.
“기껏해야 남아있던 반동분자들의 숙청과 죄질이 나쁜 이들의 목을 내건다면 자연히 사그라들 일이었겠지요.”
물론 뒤에서 조사는 계속하겠지만.
무려, 황태자를 죽이기 위해 드워프에게 저주받은 무기를 의뢰하는 놈이니, 찾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수십 개 나라에 속한 학생들과 물류의 중심지인 이곳에서 소문이 돈다면…. 조용히 일을 처리할 수 없게 됩니다.”
당연히 소문은 소문일 뿐이니 반응하지 않으려 할 수도 있겠지.
“그래서 2황자를 습격한 것처럼 꾸미게 됐지요.”
황태자의 암살을 위해 저주받은 무기를 주문했다는 소문과 더해서 2황자의 습격 사실까지 알려지면 황실은 무조건 움직일 수밖에 없다.
황실 내부로 요한이 보낸 보고서까지 있을 테니 그냥 모른 체하기도 힘들겠지.
그는 두 가지 수로 황실에게 대답을 강요한 셈이 된다.
거기서 그들이 앞으로 할 행동에 따라 아칸더스가 할 행동도 달라질 터.
최악의 경우는 제국에서 실속 없이 겉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일을 벌일 경우.
그때는 마하 황녀까지 습격해서 제국에서 남은 황자와 황녀 모두를 수도로 돌아가게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이 일에 대한 위험성을 말하자면 입만 아팠다.
까닥하면 아카데미의 전 병력과 더불어 제국에서도 눈에 불을 켜고 그 범인을 찾게 될 테니.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아칸더스도 더는 자신이 없었다.
그가 생각한 최상의 결과는 제국 무투제의 마지막에 얼굴을 비출 그 권리를 황태자 스스로가 포기하는 것.
그렇게 된다면 황제 자리에 욕심이 있는 이들은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제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혹시 일라이자를 습격한 것이나 저주받은 무기를 주문한 것이 그들 중 하나가 아니냐는 의혹의 눈길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만큼 그 자리는 중요했다.
한 번 그 자리에 섰다는 것은, 다음에도 그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을 뜻하니까.
마하 황녀도 황제 자리에 야망을 품고 있다면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못할 것이다.
“알렌 공자님, 똑똑한 이들이 제일 경계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는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두드렸다.
“스스로의 머리입니다.”
아칸더스는 그녀를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제 발로 아카데미를 나가게 만들기 위해 상황을 조작했다.
누군가 자신의 등을 떠미는 것 같은 상황에 의심이 들어도, 그녀는 쉬이 그 기회를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습격당한 척을 하다니.”
아칸더스는 질린 얼굴로 저 멀리 제국의 수도가 자리할 법한 곳을 바라봤다.
“아칸더스, 반대쪽이다.”
“아, 밀실이라 착각했군요. 하하하.”
잠시 머쓱한 표정을 지은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거, 아무래도 황태자가 단단히 마음을 먹었나 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알렌의 물음에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어떻게 말해야 할지 생각이 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히 말해서 이겁니다.”
그는 황태자의 오만인지 자신감인지 알 수 없는 그의 속마음을 추측했다.
“자신 있으면, 누구라도 내 자리를 빼앗아라.”
나는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다.
지극히 광오하고도, 자신만만한 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