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아칸더스는 알렌에게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더욱 깊이 생각했다.
‘알렌 공자님이 나에게 말한 것이 전부일까?’
아니겠지.
그늘진 여왕에게 정보를 었다고는 했지만, 정작 그는 마하 황녀를 아카데미에서 떨어트리려는 이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걸 알고도 아칸더스는 묻지 않았다.
신뢰하는 부하라 한들 모든 것을 알려줄 필욘 없는 법.
주인이라면 숨길 부분은 숨기고, 알려줘야 하는 정보면 직접 세세하게 조절할 줄 알아야지. 시키는 일만 할 사람을 찾는 것이라면 말 잘 듣는 꼭두각시가 필요할 뿐인 것이다.
아칸더스는 그런 조직이라면 자신이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초인 한 명이 모든 일을 할 것이라면, 다른 이들이 왜 필요한가.
그저 골렘이나 하인, 요즘 한참 발전한다는 기계만 있으면 될 뿐이지.
아칸더스의 첫 번째 목적은 아버지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목적은 가문을 불태운 율리우스 라인하르트, 그 안의 악마에게 복수하는 것.
그는 그 목적을 위해 알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후에 율리우스의 뒤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뒤에는 그의 제안을 받은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기도 했고.
그렇기에 그는 증명해야 했다.
자신, 그리고 조직의 쓸모를.
지금까지 그는 알렌이 시킨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고자 노력했다.
실제로 다이크 상단과 연계하여 라인하르트 영지와 엘피스까지의 상단 경로를 닦았다.
그 후엔 알렌이 원한 조건의 이들을 포섭했고, 따로 사람을 조직해 율리우스의 뒤를 따라 사람들을 구해내기도 했지.
그러나 반대로 말하자면 그것이 끝이었다.
아직 어딘가에서 정보를 수집하거나, 한 지역의 여론을 조정할 수도 없고, 무력을 행사할 수도 없는 반쪽짜리.
사람의 수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고, 각자 맡은 역할에 대한 교육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결실을 보기에는 몇 달로는 모자랐다.
몇 년을 투자해야 하는 장기적인 계획.
‘스콜이 제대로 된 활동을 하려면 최소한 반년은 필요하다.’
조직다운 조직이라는 건, 사람이 모인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고 조직 내의 규율이나 원칙 그리고 목표 모두가 필요하다.
스콜에는 하나의 목표는 있으나 아직 규율이나 원칙에 대해서는 미진했다.
그 때문에 이번 일은 알렌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아칸더스에게 중요했다.
‘엘피스의 안이라면.’
스콜은 제한적이지만 움직일 수 있다.
알렌은 도시에 팔강을 비롯한 여러 세력이 얽혀있어 조심히 행동해야 한다고 했지만…, 아칸더스는 반대로 생각했다.
‘여러 세력이 얽혀있기에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지.’
팔강을 비롯한 다른 이들을 감시하는 눈이 있다고 해도 그건 알렌과 마리아 그리고 율리우스와 같이 주의할 인물을 살필 뿐이지 모든 사람을 감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도시의 용병 모두를 감시할 수 있을까? 그 하루의 쾌락을 위해 사는 놈들을?
“그럴 리 없지.”
거기에 그가 벌이는 짓은 아카데미를 습격하거나 하는 불온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단순한 소란을 일으킬 뿐.
‘그리고….’
자신이 머리가 좋다 여기는 자들은 일반적인 함정으론 끌어 내릴 수 없다.
그들은 그들이 자부하는 만큼 전체적인 전황을 보고 인위적인 상황인지 아닌지 찾아낼 직감을 갖고 있다.
아칸더스는 어떻게 움직일지 계획을 세웠다.
그의 계획을 살핀 알렌은 잠시 고민했지만, 그의 설득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날부터 아칸더스는 움직였다.
그의 목표는 단순히 황녀를 아카데미에서 내보내는 것이다.
그녀를 몰락시키는 것?
‘힘들겠지.’
알렌 앞에서는 자제했지만, 그는 그 일로 인한 결과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2황자가 정말로 도움을 준다고 가정한다면…, 가능은 할 것이다.
그녀가 황태자를 죽일 무기를 준비한 것이 사실이고, 그것이 그녀가 했다는 연관성을 그럴싸하게 엮어 압박한다면 그녀는 아카데미를 나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고의 기재라 불리는 그녀가, 자신을 노리는 듯한 함정을 눈치채지 못할까?
‘일부러 당하는 척하며 배후를 밝혀내려 할 것이다.’
그녀가 한마디만 하면 여론은 뒤집힐 수 있다.
그녀가 자신을 노린 함정이라 주장하며 눈물 한 방울만 흘린다면 황녀의 인기에 힘입어 금세 동정론이 떠오르겠지.
아칸더스 자신이었다면 분명히 그렇게 했을 테니까.
그는 그녀의 입장에 자신을 대입했다.
아니, 그녀가 자신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가정하고 계획을 실행했다.
우선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누군가 황태자를 암살하려 한다는데?”
“뭐, 정말?”
“그래. 누가 드워프 놈들한테 저주받은 무기를 의뢰했다더라.”
소문을 퍼트리는 것.
스콜의 장점은 율리우스에 대한 확고한 복수심으로 뭉쳐진 결속력과 계층별로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그들을 이용한다면 소문 하나를 도시에 퍼트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며칠 후, 엘피스에서는 한 가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소문은 간단했다.
-황태자를 암살하기 위해 누군가 드워프에게 무기를 주문했다.
간단하면서도 그럴듯한 소문은 사실 여부를 따지기도 전에 엘피스 전역으로 퍼졌고, 가까운 제국의 도시까지 흘러 들어갔다.
그런 실정이니 아카데미의 학생 중 이 이야기를 모르는 이들이 없었다.
진짜 의뢰를 한 장본인, 마하 하뷔에론에게 까지도.
“마하 님, 요즘 밖에서 흉흉한 소문이 돕니다.”
“누가 제국의 황태자를 노리는지… 참 간이 큰 인물 같네요. 안 그렇나요?”
“그게 진짜일지 아닐지는 누가 알겠습니까.”
마하 하뷔에론은 자신들 앞에서 떠드는 인물을 바라봤다.
‘누구였더라….’
보통 사람이라면 가치가 없는 인물은 잊기 십상이었으나, 그녀의 우월한 기억력은 그들의 신분과 이름을 내놓았다.
‘카자크 왕국의 4왕자 메딘 리에크. 다인 공국의 일공녀 사나 벨페인, 비난 협곡의 수행자 마다르.’
다른 이들이 보기엔 이번 기수 중 뛰어난 이들이라지만, 그녀의 눈에 차는 인물은 단 하나도 없었다.
카자크 왕국의 4왕자는 왕족의 혈통답게 뛰어났지만, 딱 그 정도.
그녀의 형제자매만도 못한 인간을 신경 써 줄 필요가 있을까?
다인 공국의 공녀 역시 마찬가지.
서부와 중부에 걸친 다인 공국은 그 지리적 위치상 상업적 부를 쌓았으나, 그 위치의 특성 때문에 어느 한쪽으로 나아가기 힘들었다.
‘차라리 한쪽에 완전히 붙었으면 평가가 달라졌을 텐데.’
우유부단한 왕의 성정 탓인지 사나 벨페인 역시 그의 성격을 닮아있었다.
그리고 가장 떨어지는 이는, 비난 협곡의 수행자 마다르였다.
비난 협곡은 대몰락 이후 스스로 고행을 쌓아 세상과 단절되는 것을 선택한 이들.
그런 이들이 나설 때는 협곡 안의 수행자 모두의 동의를 받았을 때거나….
자격이 미달되어 쫓겨났거나.
그가 괜히 진중한 척 그녀에게 접근했으나, 마다르는 그녀가 보기에 이들 중에서 가장 쓸모없는 이였다.
“여러분, 제가 피곤해서 그런데… 오늘은 일찍 일어날 수 있을까요?”
“예, 그러십시오. 제가 미리 신경 쓰지 못한 것 같습니다.”
“소문으로 제일 걱정하실 황녀님을 너무 오래 붙잡았네요.”
“제가 지켜드릴 테니 안심하십시오.”
다른 이들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것에 반해 마다르가 끝까지 달라붙어 왔으나, 그녀는 표정 한번 찡그리지 않고 그를 털어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어요.”
그녀가 마차 위로 올라타자, 마하 황녀의 전용 호위이자 시녀 그리고 어릴 적부터 그녀가 손수 교육한 소피아가 다가왔다.
“…황녀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반응하지 말아요. 누군가 단서를 붙잡고 흔들어 보려는 것 같은데….”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드워프 지저도시에 의뢰를 넣을 때 특별히 신경 썼다. 의뢰 내용이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드워프의 흥미를 끌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노릇.
“제 이름이 나온 것이 아닌 이상 큰 움직임을 보일 필요 없어요. 아니, 차라리 나오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녀는 잠시 고민했다.
이 소문에 올라타서 가련한 황녀의 이미지를 만들까?
‘아니.’
아직은 그럴 필요 없었다. 황제가 되려면 흠 하나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충분히 수습할 수 있다고 일부러 오물을 덮을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들킬 수도 있다는 건 예상했어요. 수석 집행관 하나가 뒤를 캐고 있다고 들었으니까.”
그녀의 줄을 잡은 다른 수석 집행관이 알린 정보였다.
어차피 그가 물었다면 황제에게 정보가 들어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저런 소문은 지나갈 뿐이다. 마하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운명의 사람을 기다린다고 했는데….’
언제쯤 그녀를 황제로 올려 줄 진짜가 나타날까.
여느 사람처럼, 그녀도 어릴 적에 호기심이 왕성했던 시절이 있었다.
호위를 몰래 따돌리고 도시의 축제를 즐겼을 때, 그녀는 자신을 예언가라고 하던 여자에게 점을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황제로 만들어줄 운명의 인물을 이 시기에 아카데미에서 만날 수 있다고 했다.
‘분명 거짓이 분명할 텐데.’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 여자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후에 그녀를 찾았지만 흔적조차 찾지도 못했다. 그 이후부터 그 예언은 항상 그녀의 기억 한쪽에 남아있었다.
보면 알 것이라고 했지.
그를 만나기 위해 대놓고 그런 소리까지 했음에도 아직 그녀의 눈에 찬 인물이 없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마차의 옅은 진동이 자장가처럼 그녀를 수면 밑으로 끌어들였다.
* * *
“오랜만에 얼굴을 봐서 좋구나.”
“황자님도 별문제는 없으셨습니까.”
“나야 항상 똑같지.”
일라이자는 오랜만에 알렌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몇 개월간 파란만장한 사건을 겪었던 알렌과 다르게 편안한 안색이었다.
알렌은 아칸더스가 세운 계획대로 이곳에 오게 되었다.
“공자님, 다과를 준비했습니다.”
그들의 사이에 이넬리아가 직접 정제한 찻잎으로 만든 차가 준비되었다.
린벨은 은근슬쩍 알렌의 쪽으로 다과를 더 가깝게 두고는 물러갔다. 알렌은 속으로만 헛웃음 짓고는 모른 체했다.
그렇게 대화를 이어 가던 중, 알렌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벤자민 선배는 어떻습니까. 그 이후로 보지 못한 것 같은데.”
“그는….”
일라이자는 잠시 표정을 어둡게 물들이더니, 짧게 답했다.
“잠시 떠났네.”
“…떠났다는 말입니까?”
의외의 소식에 일라이자가 복잡한 마음을 대변하듯 찌푸린 얼굴로 답했다.
“그가 남부의 작은 마을 출신이라는 것은 알겠지? 요 며칠 남부가 뒤숭숭한데, 그의 부모와 연락이 끊겼다는군.”
“…그렇습니까?”
알렌은 율리우스와 관련되었나 싶어 눈을 가라앉혔다.
“그래, 얼마 걸리지 않는 일이라며 돌아오겠다 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군. 그는 장래에도 나를 보좌해줘야 하니.”
“차라리 거처를 옮기는 것을 권해보는 게 어떻습니까.”
“흠… 그것도 괜찮으려나? 한 번 권해보도록 하지.”
알렌은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곧인가….’
알렌은 일라이자와 대화를 나누면서 아칸더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알렌 공자님. 이번 일을 원만하게, 완벽히 해결하기 위해서는 해야 합니다.’
‘…네가 말한 것이 정말 확실한가?’
‘모든 걸 장담할 수는 없지만… 반 정도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가 호언장담한 것 치고는 확률이 낮았지만, 알렌은 결국 허락했다. 그의 말대로 원만하게 일을 끝낼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약속된 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알렌은 그에게 진짜 본론이라는 것처럼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요즘 도는 소문에 대해서 말입니다만.”
“형님을 암살하려는 자들에 대해서 말인가?”
“예.”
“그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지?”
알렌은 그의 물음에 조금의 걱정을 담아 말했다.
“일라이자 저하 역시 조심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 역시?”
“예, 저런 소문이 그냥 도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저하 역시 조심하셔야지요.”
그의 걱정에 일라이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제국의 황위 구도나 권력다툼에 대해 물어보면 답해주기 곤란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그가 그것과 관련된 부탁을 한다면….
‘들어줬을까, 들어주지 않았을까.’
도와주긴 했겠지만, 실망감도 들었을 테지.
“나는 괜찮다. 내 실력이 있는데 누가 나를 노리겠는….”
그가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
콰앙-!
그를 노린 듯한 강력한 마법이 떨어졌다.
알렌과 일라이자가 있던 자리에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학생들 역시 뒤늦게 소리쳤다.
“일라이자 황자님이 피습당했다!”
“누군가 황자 님을 노린다!”
“2황자 저하를 누가 습격했다!”
한참 황태자의 암살에 대한 것으로 관련해서 시끄럽던 아카데미에, 누가 거대한 기름을 통째로 부었다.
소문이 거세게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