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그러니까, 이 일을 함부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알렌은 아카데미에 돌아온 후, 바로 아칸더스를 만났다.
“예, 공자님께서 얻으신 정보는 생각보다 더 조심스럽게 다뤄야 합니다.”
“생각보다 더 조심스럽게….”
이번 마하 황녀의 일을 처리하기 전에 그의 의견을 들어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계획한 것만으로도 모자라나?”
알렌의 물음에 아칸더스는 그의 눈치를 보는 듯하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예, 부족합니다.”
아칸더스의 녹안이 잠시 알렌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솔직히 공자님께서 왜 마하 황녀를 몰락시키려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일라이자 황자와 친하게 지내더라도, 저희는 알드니아 제국의 귀족이 아닙니다.”
“그렇지.”
“그러니 양쪽 다 선을 만들어두고, 적당히 거래하면 그만입니다. 저희가 라인하르트 가문의 일원인 이상 그들도 그 이상 요구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아칸더스의 지적은 타당했다.
알렌은 누가 뭐라고 해도 리브레 왕국의 귀족이다.
알드니아 제국의 귀족이 아닌 이가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능력이 좋음을 입증하는 것이지 지탄받을 일이 아니었다.
“솔직히….”
그는 이 이야기를 꺼낼 때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곧 대범하게 입을 열었다. 이 공간은 알렌과 짐승왕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진 밀실이다.
설령 다른 팔강인 자크니르나 짐승왕 본인이 와도 엿듣는 건 힘들었다.
‘…이 분야의 정점인 그늘진 여왕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그는 불길한 상상을 지워냈다. 모든 일에 대비해야 하는 건 맞으나, 그로 인해 심력을 소모할 필요는 없었다.
“마하 황녀가 황태자의 목숨을 노린다는 사실 자체를 믿지 못하겠습니다.”
“그럴 수 있지. 나도 이해하네.”
“만약 이 정보를 가지고 온 것이 알렌 공자님이 아니었다면, 또 이 정보의 제공자가 그늘진 여왕….”
아칸더스는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주위를 둘러봤다. 역시, 밀실에는 그들밖에 없었다.
“…이라고 말씀해주시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겁니다.”
알렌은 마탑 교류회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외부 조력자 중 하나인 그늘진 여왕에 대해서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알렌은 곧 그녀의 존재 자체가 남들이 모르는 정보의 출처로 대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저번 드라기아스 가문에서 깨달았다.
그가 모르는 정보, 알기 힘든 정보를 알고 있어도 그늘진 여왕의 이름을 댄다면 대부분은 그냥 넘어가기 쉬울 것이다.
아칸더스는 여러 가정을 했는지 알렌이 그늘진 여왕의 이름을 댔음에도 한순간만 놀란 표정을 보였을 뿐,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로부터 정보가 나왔다면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는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었다는 듯 목을 가다듬었다.
“알렌 님이 아시는 것과 같이 마하 황녀는 제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그 인기가, 아카데미에서도 마찬가지라 그렇지요.”
그는 알렌이 바깥에서 일을 처리할 동안 아카데미에서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 처음이라 시행착오도 잦았지만, 스콜은 점점 그 기틀을 갖춰나갔다.
“그녀가 아카데미에 입학한 지 이제 두 달쯤 됐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 그녀가 맺은 인연이 얼마나 되는지….”
그는 유명한 이들의 이름만 언급했다.
“이번에 입학한 카자크 왕국의 4왕자, 그리고 서부와 중부에 어중간하게 걸친 다인 공국의 유일한 공녀, 고행자로 유명한 비난협곡의 수행자도 있습니다.”
그뿐인 줄 아십니까?
이번에 같이 입학한 기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임무를 수행하느라 바쁜 4학년 선배 중 차기 족장으로 불리는 남부 나가 부족의 후계자, 수인 연합 묘왕의 둘째 딸, 그리고 이번에 3학년 편입에 성공한 프란시스카 님도 있습니다.”
“…그 많은 이들을 두 달의 짧은 기간 동안 만나고 다녔다고?”
“만나고 다녔다는 건 조금 어폐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직접 ‘찾아’왔으니 말입니다. 그 아랫급의 인물들을 논하자면 샐 수도 없습니다.”
알렌은 그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마하의 인기를 피부로 실감했다.
“그녀가 그렇게 유명하다는 건 조금 이상하지 않나?”
“…그녀가 이번에 입학하면서 했던 말이 유명합니다. ‘운명’을 찾으러 아카데미에 왔다고.”
“아.”
알렌은 비슷한 말을 회귀 전에 들었다. 분명, 율리우스를 보고 그렇게 말했었지?
“아름다운 외모와 황제의 막내딸이라는 신분 그리고 엄청나 재능까지.”
거기다 그녀가 한 말까지 섞여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이 꽤 많다고 한다.
“그들 모두가 그녀의 편이라고 할 수 없겠지만…. 황태자 전하를 살해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면, 누명이라 나서줄 인물이 하나도 없겠습니까?”
“…내가 경솔했군.”
대신 증언해주겠다며 나설 인물이 못해도 열은 될 것이다.
알렌의 원래 계획은 제국 집행관에게 흘린 정보를 바탕으로 그녀를 압박할 생각이었다.
후에는 그와 제법 끈끈한 인연을 맺어둔 일라이자 황제에게 정보를 알릴 생각이었지.
아카데미 내외부에서 압박한다면 그녀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여차하면 집행관과 일라이자 황자를 연결해 함께 행동하게 할 수도 있고.
“알드니아 제국의 권력 싸움에 끼어들지 않으려는 선택은 옳습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공자님께서 하신 일대로 처리한다면 필연적으로 허점이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직접 나서지 않으니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직접 나서지 않기 위해 일라이자 황자와 연을 맺었는데도 안된다는 건가?”
“…그 같은 경우에는 복잡한 혈통 문제 때문에 오히려 나서지 않으려 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돋보여봤자 황태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군.”
일라이자는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울 것이다.
오죽하면 2황자의 신분으로 아카데미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겠는가.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렇다고 내가 직접 나선다면, 그건 선을 넘는 게 분명하게 되니.”
다른 쪽에서 손을 써야 하나? 순환교는 한 번 보였다. 이럴 때 사용하려던 패가….
알렌이 어떤 수단을 써서 마하 황녀를 율리우스에게서 떼어낼까 생각하던 때, 아칸더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저한테 맡겨주십시오.”
“…너에게?”
아칸더스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공자님께서는 제 의견을 들어보시고 괜찮다고 생각했을 때, 따라주시면 됩니다.”
독단적으로 일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고, 아니다 싶으면 알렌이 곁에서 제지할 수도 있다.
나쁘지 않은 제안에 알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께서 원하시는 건 한 가지 아닙니까. 황태자니, 일라이자 황자니 다 상관없이 그녀를 제국으로 돌려보내는 것.”
아칸더스가 말했다.
“아닙니까?”
그가 정확한 핵심을 찌르자, 알렌은 선선히 동의했다.
“그렇지. 그를 이루기 위한 가장 강력한 방법으로 그녀가 실제로 저지르려는 황태자 살해 사건을 들추려 했으니.”
“그렇다면 그런 식으로 압박을 주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일에는 순서가 있고, 방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듯 알렌의 계획은 강력하나 위험했다.
“그녀를 몰락시키거나 죽이려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일은 더 간단해집니다.”
오히려 그녀의 처리는 수면 밑에서 은밀히 처리될 것이다.
* * *
철컥-
아칸더스는 몇 가지 더 알아볼 것이 있다며 밀실을 빠져나갔다.
알렌은 그늘진 밀실의 모퉁이 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 들으셨으면 그만 나오시지 그렇습니까.”
“아가, 실력 많이 늘었구나.”
그의 말이 끝나자 어느새 그의 앞에서 여성 한 명이 홀연 듯 맞은 편에 나타났다.
그녀는 고혹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며 살짝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태도에서 여유가 묻어나왔다.
“부상은 조금 괜찮으십니까?”
“음- 제공해준 엘릭서의 등급이 괜찮아서 회복이 빠르네. 아마, 몇 개월이면 완전히 나을 거야.”
“다행이군요.”
알렌은 그녀와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다, 진짜 본론으로 이야기를 틀었다.
“이름을 마음대로 마음대로 사용한 점은 죄송합니다.”
“알고는 있구나?”
그녀가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서늘하게 알렌을 응시했다.
“내 이름을 팔아서 나도 모르고 있던 정보를 알려주고…. 언제 그런 허락을 해주었는지 모르겠는데, 아가.”
그녀는 기세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때로는 짖는 개보다 은밀히 기회를 노리는 뱀이 무서운 법이었다.
알렌은 그녀가 저런 반응을 예상했기에, 준비해둔 변명을 꺼내 들었다.
“사냥개로 활동하는 데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아니, 변명조차 아니었다.
이건 그의 진심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으니.
“필요한 일이었다?”
그녀의 반문에 알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늘진 여왕께서 커다란 음지를 되찾는 데 오래 걸리니 그를 대신 처리해줄 손발을 얻으려 했던 것이 아닙니까.”
그녀는 무슨 의도로 말하는지 몰랐으나, 일단 그의 장단에는 맞춰줬다.
“맞아, 그런 계약이었지.”
“그러니 제가 알고 있는 정보를 드러냄으로써 그늘진 여왕이 아직도 건재하다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알린 겁니다.”
“흐음?”
알렌은 천천히 설명했다.
“제가 한 이야기는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음지의 권력자나 다른 세력의 고위층쯤 되면 언젠가 알게 될 겁니다.”
애초에 정보를 숨길 생각이었다면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되었다.
알렌이 자신이 회귀했다는 것만큼은 철저하게 감추려는 것처럼.
“그렇다면 그들은 저에게서 이야기가 나왔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그늘진 여왕께서 그 정보를 알아냈다는 사실에 더 주목하겠지요.”
그들의 입장에서 알렌은 작은 왕국의 백작가 출신이다.
그가 아카데미의 차석이라는 점은 그들의 관심을 끌만 했지만, 그 사실이 그늘진 여왕이 건재하다는 사실보다는 더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에게는 제가 그늘진 여왕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드러냄과 동시에 한 번 몰락했음에도 아무도 알지 못했던 정보를 알아챘다는 사실에 경악할 겁니다.”
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의 말에 집중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비밀 역시 그녀가 알고 있을까 불안함을 품게 만들겠지요.”
그것으로 자신이 처음에 말했던 목적과 합치되었다.
“그늘진 여왕께서는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새롭게 일군 세력이 있으며 그 힘이 예전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알리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그저 일시적인 속임수에 불과할 뿐이라도.
이번 행위로 그녀를 배신한 음지의 세력들은 위축되는 놈들도 있을 것이고, 혹은 그에게 찾아오는 이들도 있겠지.
어느 쪽이든 그녀가 원했던 사냥개의 역할을 하기에는 충분했다.
다가오는 먹이를 물어 죽이기만 하면 되니.
“흐응.”
그녀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알렌을 쳐다봤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알렌이 그녀와 눈을 맞추는 것이 점점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쯤, 그녀가 툭 내뱉었다.
“마음에 들어.”
“…예?”
“마음에 든다고. 솔직히….”
그녀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알렌의 몸도 때맞춰 그림자로 녹아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느새 알렌의 뒤로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사냥개니 뭐니, 최근 아무런 행동도 없길래 나를 기만한 줄 알았단다.”
그녀의 어조에 즐거움이 깃들었다.
“그런데 조금 억지스럽기는 해도, 계약을 지키고 있다고 말하니. 그래, 허락하도록 할게.”
그녀는 알렌의 피부에 스며든 그림자를 만져보고는 다시 사라졌다.
그늘진 여왕이 나타난 것은 알렌이 앉아있던 의자였다.
“내 이름을 마음껏 사용해도 좋단다. 대신, 주에 한 번 따로 보고를 받도록 하지. 그 정도는 괜찮겠지?”
“예, 괜찮습니다.”
“그럼 나는 가보도록 할게, 잘 있으렴.”
그녀는 알렌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밀실에서 사라졌다.
나타났을 때와 같이 제멋대로였다.
「…당신 때문에, 중간에 내 심장이 얼마나 떨렸는지 알아요? 진짜 그런 말재간은 어디서 배워가지고.」
알렌도 긴장이 풀린 얼굴로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이번 일은 그에게도 중요했다.
왜 김우진이 무언가를 얻었을 때면 저택의 서고 핑계를 대는지 알 것 같았으니.
그녀의 대화를 다시 떠올리던 중,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아.”
그녀는 알렌의 이야기를 듣고, 단 한 번도 아가라는 말로 부르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야 제대로 인정받은 건가.’
참 성격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고, 종잡을 수 없는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