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살룡검 리딜.
용을 죽이는 검이 순간의 틈을 타 용의 심장에 박혀 들었다. 엘로스의 목에 걸려있던 모래시계가 깨져나가며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한순간 멈췄던 악룡이 꼬리를 휘둘렀다.
그 일격만으로 엘로스는 힘없이 공중을 날았다.
“크-아-아-아-아!”
두 쌍의 날개가 크게 펄럭였다. 고함을 지르던 니드호그가 먼지 바람을 날리며 하늘로 솟구쳤다.
날개가 떨어질 듯 휘청였고, 몽환적인 보랏빛 하늘은 그런 니드호그를 검은 그림자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니드호그의 몸이 요란스레 흔들렸다. 마치 무언가를 빼고 싶다는 듯, 실수로 가시에 박힌 아이가 난리 치듯 거체가 요동쳤다.
알렌은 그런 놈의 등에 매달려 있었다.
거센 바람이 몰아쳤지만, 한쪽 팔로 붙잡으니 균형을 잡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알렌, 이건 너무 높은 거 아니에요?」
아래를 내려다보니 일행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때 무엇인가 지상에서 날아올랐다. 금속 투창. 휴즈의 것이었다.
후웅-
투창은 아쉽게도 니드호그의 발끝까지 올라왔다 떨어졌다.
“크아아아아!”
니드호그가 비명의 지르며 하늘을 가로질렀다. 놈의 몸이 갈수록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던 사기의 양이 줄어들었고, 돋아났던 두 쌍의 날개가 끊어질 듯 덜렁였다.
‘백염화가 드디어 효과를 내는군.’
알렌은 불투명한 도시를 쳐다보다 힘겹게 놈의 몸을 타고 올랐다. 니드호그는 살룡검의 고통이 너무 큰 듯 알렌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이 그에게는 호재였다.
알렌이 베스틀라를 들었다. 검 위로 뿜어져 나오는 냉기는 그의 살갗을 스쳐 죽은 악룡의 피부에 뿜어졌다.
니드호그가 무언가를 눈치챈 듯 고개를 털었다.
날개를 흔들고 몸을 뒤틀며 그를 떨어트리려 했지만. 알렌은 니드호그의 등에 생겨난 얼음층의 중앙에 검을 꽂은 상태였다.
화아아악-
엄동설한의 냉기가 괴물의 몸을 파고들었다. 중앙의 날개 한 쌍이 경련했고, 깊이 쑤신 검 끝으로 뼈가 걸렸다.
“그만! 그만둬라!”
도시의 하늘을 맴돌던 니드호그가 소리쳤다. 이제야 정신을 차렸나.
“협상, 그래 협상을 하자! 날 살려라! 그리고 심장의 검을 뽑아라! 그럼 너를 같은 용족으로 대우해주겠다!”
「당신! 설마, 아니죠?」
알렌은 피식 웃으며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척했다. 5계를 사용하기에 충분한가? 아직, 조금만 더.
“용족으로?”
“그래! 너도 어차피 동족의 노심을 가지고 있으니 용이라 할 수 있지 않느냐? 그리고… 세계의 비밀을 알고 싶지 않나?”
“비밀이라….”
알렌의 시선이 그곳으로 쏠리는 듯하자, 니드호그가 말을 이었다. 니드호그의 궤도가 살짝 아래쪽을 향했으나, 알렌은 눈치채지 못한 척했다.
“그래, 어차피 이 세계는 멸망할 거다. 그건 정해져 있는 일이지.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나?”
“회색의 멸망.”
“…뭣!”
“그게 끝인가?”
충분한 시간을 준비했다. 이제 상관없겠지. 알렌은 시선을 돌렸다. 뾰족한 첨탑이 가까이 있었다. 정신을 집중했다.
“어떻게 그걸? 아니, 너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왜….”
니드호그는 놀라는 척 몸을 뒤집었다.
니드호그가 노호성을 지르며 남은 마력을 짜냈다. 피어가 그의 몸을 고정했고, 알렌의 몸이 허공에 날며 첨탑에 몸이 꿰일 듯 가까워졌다.
“죽어라-!”
몽환적인 하늘과 불어오는 바람. 알렌의 안색은 조금의 변화 없이 평온했다.
니드호그가 무언가 잘못된 것을 직감한 듯 급히 날개를 파닥였다.
알렌은 베스틀라를 쭉 뻗고 준비했던 것을 풀었다.
요툰스베르드 오계(J?tunnsverd 五界)
죽음의 대지에는 태곳적부터 망자를 얼리는 바람이 불어오고, 그 대지는 영원히 잠든 자들이 살아간다.
발쿄사(Valkjosa)
“잠깐, 잠깐 방금은 실수였다! 다시 이야기를….”
“아니.”
알렌이 피식 웃으며, 손을 내렸다.
“다음은 없다. 여기서 넌, 죽는다.”
니드호그의 등 위, 얼어붙은 얼음층의 위로 검은 연기로 물든 검 하나가 떨어졌다.
악룡은 미친 듯이 날개를 저었다.
저것에 맞으면 분명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썩은 피가 빗방울처럼 도시로 떨어져 내렸고, 끊어질 듯 달랑거리던 날개 두 쌍이 모두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검은 기이하게도 얼음의 영역 위를 벗어나지 않았고, 니드호그의 발버둥은 헛수고로 변했다.
죽음의 선택이 악룡의 등에 내리꽂혔다.
니드호그는 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날개를 퍼덕이지도 않았고, 팔과 다리를 흔들지도 않았다.
그저 고요히, 한순간이나마 놈은 그 상태로 허공을 날았다.
알렌이 가볍게 첨탑 위로 내려섰다. 용의 노심에서 마력이 물처럼 샜다. 첨탑 꼭대기를 뒤흔드는 바람에 알렌이 검을 박아넣었다.
‘…성공했나.’
알렌은 확신이 들지 않아, 5계를 한참이나 더 유지했다.
콰앙-
니드호그의 몸이 땅에 박혀 들고 다른 이들이 다가가서 확인하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알렌은 마력을 끊었다.
밝은 빛이 그의 얼굴로 쏟아져 내렸다.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악몽의 영지의 시간이 끝나가는 것이다.
보랏빛으로 몽롱하게 물들던 하늘은 물에 씻기듯 흩어졌고, 땅을 기던 망자와 하늘의 유령 무리는 밤의 꿈처럼 사라졌다.
눈에 힘을 주자 거리를 거니는 주민들이 보였다. 도시의 성문에서는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뛰어왔고, 저택에서 마차들이 줄지어 튀어 나갔다.
악몽의 영지가 허깨비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알렌은 원래대로 돌아온 도시와 그것을 보며 혼란스러워하는 엘로스와 다른 이들을 보며 눈을 감았다.
베스틀라가 슬며시 땅에서 빠져나와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알렌, 니드호그가 말하던 정보를 안 들어도 괜찮아요?」
“상관없다.”
다 알면서 묻기는. 마탑의 사건에서 망설이지 않겠다 했다. 그럼 그걸로 끝이었다.
“알게 될 정보라면, 알게 되겠지.”
검은 책과 하얀 책 그리고 회색 책, 이 세 권의 책은 강제로 그를 폭풍에 휘말리게 할 거다.
알렌은 첨탑에 등을 기댔다.
준비와 요행 그리고 행운이 겹쳐 팔강급의 존재를 잡아냈다.
물론 진짜 짐승왕이나 그늘진 여왕을 홀로 잡아낼 수는 없겠지만, 적절한 준비와 약점을 찌를 비수가 있다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 컸다.
그들과 자신 사이에 놓인 벽은 크고 두꺼웠으나, 결코 넘지 못할 것이 아니었다.
‘아카데미에 더 있을 필요가 있을까?’
알렌은 쓸데없는 고민을 그만두었다.
이곳에 온 까닭은 율리우스를 찾을 단서와 더불어서 김우진과 친분을 쌓고 미래의 세력을 이룰 인재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지금까지 그 일은 잘 진행되고 있고, 순조롭게 영역을 넓혀나가고 있다.
‘다음은….’
마하 하뷔에론.
제국의 문제를 해결할 때가 되었지.
오래도록 묵혔던 그녀에 대한 일을 처리할 때가 되었다.
악몽이 끝났다.
* * *
추수제의 대한 이번 습격은 순환교에서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순환교의 표식과 그들의 흔적이 기다렸다는 듯 도시의 곳곳에서 드러났고, 평원을 불태우며 유유히 빠져나가는 모습을 본 병사들의 증언이 뒤따랐다.
“순환교 놈들이면… 이곳에 뭐가 있던가?”
“미친놈들의 생각을 어찌 알겠나.”
도시의 주민들은 괜히 이상한 악마 같은 것이 숨어 있었다, 아니면 추수제를 망쳐 다른 세력과 이간질하기 위해서라며 떠들어댔다.
그러나 드라기아스 가문은 제대로 된 발표를 하지 않고 침묵했다.
도시 밖에 있었던 기사와 마법사는 처음 악몽의 영지가 강림했을 당시 보았던 괴물에 대해 건의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순환교에서 수작을 부린 환영이었다는 것 하나였다.
그들도 처음에는 의심했지만, 따로 조사해도 나오는 게 없었기에 점차 수긍하기 시작했다.
알렌은 며칠간 도시를 봉쇄할 동안 드라기아스 가문에서 편히 휴식을 취했다.
엘로스가 다시 깨어났을 때는 경매장의 내부였다.
깨어나자마자 그는 주위를 둘러봤다. 대부분 이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고, 몇몇 이들만이 방금의 일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엘로스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이들을 보며 소리쳤다.
“순환교에서 수작을 부렸으니, 모두 나의 지시에 따르라!”
“예, 옙!”
멍한 얼굴을 하던 병사들이 뒤늦게 그의 명령에 맞춰 움직였다.
방금까지의 기억이 모호했지만, 그가 명령한다면 따라야 했다. 엘로스는 병사들을 지휘하며 이곳에 있는 이들을 저택으로 압송했다.
그 후에 기절한 엘리프를 방에 데려다 놓고, 가문의 비처로 향했다.
다행히도, 앞선 경험이 가짜가 아니라는 듯 니다푤에는 니드호그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
벨리프 드라기아스.
드라기아스의 가문의 가주인 그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 누구도 모르게.
엘로스는 그 사실을 숨겼다. 그 덕분에 그는 전권을 위임받은 척 가문을 장악했다.
똑똑-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예, 객이 주인을 마다할 수 없지요.”
알렌의 답에 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며칠 동안 바쁘게 움직인 엘로스 드라기아스였다.
그는 며칠 동안 세세한 검사와 감시를 통해 사실관계를 파악하느라 눈 밑이 검게 변했다.
“…우선.”
그는 알렌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저희를, 아니. 저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라기아스 가문의 입장에서는 니드호그가 있더라도 나쁘지 않다. 순전히 이번에 이득을 본 이는 엘로스 그 혼자밖에 없었다.
‘아니, 그것도 아닌가.’
가주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면, 드라기아스 가문에도 권력을 노리기 위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시작되겠지.
알렌이 거기까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며칠 동안 갇혀있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불편하면 점은 없었습니까?”
“오랜만에 쉴 수 있어서 괜찮았습니다.”
그는 잡담을 몇 마디 더 나누다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경매장에 있던 이들은 그때의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건 라인하르트 대공자 덕이겠지요?”
알렌은 답하지 않았다.
그도 상관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가주님은 저택에 돌아왔을 때 이미 사라진 상황이었습니다. 아마도… 악룡의 마지막 발버둥이 아닐까 싶습니다.”
「알렌, 다 못 끝냈는데 위험한 거 아니에요?」
‘방심할 생각은 없지만…, 지금처럼 위험할 것 같지는 않군.’ 알렌은 엘로스에게서 니드호그의 노심을 받아냈다. 반쯤 썩은 보랏빛의 보석. 엘로스는 알렌의 의견에 크게 동의했다.
‘노심이 없는 니드호그, 거기다 가주는 7위계의 실력밖에 되지 않는다지.’
실질적인 위험은 니드호그의 조종을 받은 벨리프가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알렌을 공격하는 것.
그러나 그것도 심각하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건은 공자가 피해 보는 일이 없도록 제가 신경 써 처리하겠습니다. 어차피 다시 돌아오더라도….”
그의 자리는 남아 있지 않을 테니.
엘로스의 확신을 담은 눈이 빛났다 가라앉았다.
알렌은 저 모습을 보며 못해도 십 년 안에 그가 드라기아스 가문을 장악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남은 이들은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아, 용병을 말하는 거라면… 이미 처리했습니다. 신용을 어긴 이들의 말로는 한결같지요.”
알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엘리프 공자를 지지했던 이들은?”
“그건….”
엘로스는 고심하는 얼굴로 턱을 쓸어내리더니, 이내 굳게 결정을 내렸다.
“한 번의 기회를 더 줄 생각입니다.”
그는 제 생각이 맞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눈을 밝게 빛냈다.
“사람이 살면서 실수를 할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고, 그럼에도 변함없는 모습을 보인다면….”
알렌은 그가 말을 끝내지 않았으나, 남은 이들이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도시 주민들 모두를 핍박할 생각은 아닙니다. 그건 제가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에 따라 여론은 뒤바뀔 수 있으니.”
“자신 있어 보이는군요.”
“그럼요,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대충하겠습니까?”
그는 전에 보였던 것과 달리 자신만만한 태도로 답했다.
엘로스는 얼추 말할만한 것을 다 말했다고 판단해 일어났다. 그가 알렌에게 온 이유는 정보를 알려주기 위함도 있으나 잠시 쉴 시간도 필요했으니.
충분히 쉬었으니 다시 움직일 차례다.
“그럼 저는….”
그가 그렇게 일어나려던 때, 알렌은 문득 생각난 것을 물었다.
“엘로스 공자.”
“예, 말하십시오.”
그는 자리에서 엉거주춤 다시 엉덩이를 붙였다.
“…실례라는 것을 알지만, 엘리프 공자는 원래 망나니였지 않습니까.”
“형님은… 예, 그랬지요.”
대가문에서는 어느 정도 여론을 움직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엘리프가 망나니라고 퍼질 정도면 얼마나 질이 나빴다는 말인가.
“그런데 왜, 그를 되찾으려고 했던 겁니까.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형의 역할만을 따지자면 니드호그가 더 잘하지 않았습니까.”
“왜라….”
그는 자세히 생각해본 적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더니 툭 내뱉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형님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매일 노름이나 즐기고, 위대한 혈통을 타고나서도 천성이 천박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작게 미소지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 선조와 계약했다고 쳐도 감히 형님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이를 주위 사람들은 좋다며 떠받는 게 싫었습니다. 예, 처음에는 그것이 컸습니다.”
그런 반발감이, 어느 순간부터 진짜 형님을 위하려는 마음으로 변했다.
“어쩌면, 다시 깨어난 형님을 보고 화가 날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내버려 둘걸, 그런 위험을 건너는 게 옳았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죠.”
그는 알렌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나 지금은 후회하지 않습니다. 형님을 구하려는 게 후에 따라온 목적이었다 해도, 지금의 저는 그를 위해 노력했으니 말입니다.”
알렌은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숙였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쁘실 텐데,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하군요.”
“하하, 저를 도와준 은인인데 얼마든지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는 한바탕 웃음을 터트리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
알렌은 고요함에 물든 방 안에서 홀로 속삭였다.
“…처음부터 그를 위하려던 게 아니었다.”
알렌은 반대였다.
처음부터 율리우스를 구하기 위해서였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그때의 그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