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감히, 이딴 짓을 저질러-!”
저택 위로 거대한 형상을 드러낸 악룡이 울부짖었다.
그의 고함에 공간이 물결쳤고, 하늘을 맴돌던 수천의 유령 무리가 비명을 질렀다. 지상의 망자들이 거미처럼 지상을 기어 다녔다.
알렌은 어느 건물의 옥상에서 그의 분노어린 모습을 지켜봤다.
도시 곳곳에 나타난 기괴한 괴물과 현실이 아닌 것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
이곳은 조금 전까지 있었던 현실이 아닌, 불완전한 현자의 돌로 빚어낸 악몽 속 공간이었다.
진실과 거짓 그리고 몽상과 악몽이 뒤섞인 공간은 현실에서 하지 못 할 짓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성공했나.”
알렌은 감지력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을 보며, 자신의 계획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렌이 며칠 동안 준비한 것은 현자의 돌이 어떤 효과를 내느냐에 달려 있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순환교에게 들었던 고대의 괴물을 상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악룡은 이미 엘리프의 몸을 차지한 상태.
그 상태에서 그 괴물을 죽여 봤자. 그의 계획을 늦출 수 있을지언정,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 없다.
그렇다면?
‘놈의 본체를 공격해야 한다.’
알렌이 아무리 준비한다고 해도 대륙의 삼대 가문 중 하나를 통째로 상대할 순 없었다.
그렇기에 여러 계획을 준비했다.
순환교에 부탁해 평원을 불태우는 척 병력을 끌어내고, 도시 주위에 감돌던 사기를 불태워 용이 힘을 흡수할 상황을 막는다.
이것으로 병력은 줄었지만, 여전히 삼대 가문 중 하나인 드라기아스의 힘은 강대했다.
만약 그들이 보유 중인 비장의 무기를 쓴다면 알렌 자신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렇기에 반대로 생각했다.
‘드라기아스 가문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라면.’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알렌이 검을 뽑았다. 부드럽게 뽑히는 베스틀라는 언제나 날카로운 예기를 유지했고,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서도 기운찼다.
「이제 제 차롄 거죠? 진짜, 진짜 오랜만이다.」
이곳은 악몽이었다.
깨어나면 잊어버리고, 눈을 뜨면 사그라드는 악몽.
자신과 같이 있던 이들 중 일부를 제외하면 환상처럼 잊어버릴 꿈.
‘다른 이들도 어딘가에 있을 텐데.’
알렌은 현실임을 자각할 소수의 인원이 누가 있나 생각하다 가볍게 옥상을 박찼다.
쾅!
거대한 기둥이 그가 있던 옥상을 부수고 건물을 무너뜨렸다.
바닥에 착지해 고개를 올리자, 거대한 용의 머리가 하늘아래서 그를 내려다봤다.
진물이 흐르는 육체는 끔찍한 모습이었고, 떨어져 내린 독액은 나무, 벽돌 할 것 없이 모두 녹이고 있었다. 용이 쇠를 긁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뭘 하려는지 눈치챘구나.”
“그럼, 당연하지. 동생 두 명이 그렇게 관심을 보이는 것과 다르게 혼자 여유로운데, 어찌 모르겠나.”
알렌의 답에도 용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는 그저 불쾌한 웃음을 흘렸을 뿐이다. 알렌의 근육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한껏 웃은 놈이 답했다.
“그래서 의심만으로 일을 저질렀다?”
“우리 영지의 추수제를 망쳤으니, 나도 똑같이 갚아 줘야 하지 않겠나.”
“크흐… 상관없다.”
알렌의 발밑을 타고 그림자가 올랐고, 들고 있던 검에는 정반대로 하얀빛이 가득 찼다. 이윽고 용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네 말대로 어떻게 하든 결과는 다르지 않을 테니.”
쾅-
알렌의 몸이 그림자로 녹아들었다. 검게 흩어지는 잔영 사이로 태양과 같은 빛이 떠올랐다. 코앞에 용의 비늘이 보였다.
료스솔. 빛의 태양이 용의 몸뚱이째로 날렸다. 알렌이 그를 즉시 쫓았다. 후려친 손이 얼얼했다.
용은 용이라는 건가.
“불쾌한 기술을 사용하는구나!”
용은 방금의 기술에서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소리쳤다.
알렌은 그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베스틀라를 강하게 부여잡고, 크기를 키웠다. 용을 조각낼 거대한 검이 붉게 물들었다.
니드호그는 그를 피할 수 없다 판단한 듯 한쪽 날개를 휘둘렀다.
알렌이 요툰스베르드, 거인의 검 중 첫 번째를 자주 쓰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의 분노라는 이름을 가진 검은 계속 사용하다 보면 그 분노에 잠식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꽈아앙! 거검과 날개가 충돌했다. 붉은빛이 흩어지며 산산이 깨어졌고, 날개의 비늘이 금이 갔지만, 그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알렌!」
베스틀라가 소리쳤다.
「성체보다 더 지난 고룡이에요! 죽은 육체지만 생전의 강도는 저희와 비교해도 안 밀릴 거예요.」
“그렇겠지.”
고대부터 살아왔던 괴물 중 약한 놈은 없었다.
베드르폴니르도 그랬고, 비도프니르도 그랬다. 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다른 화신이 잠에 들어 전성기에 미치지 못한 힘을 갖고 깨어났다면.
“과분한 검을 가지고 있구나.”
놈은 수백 년간 깬 상태에서 힘을 축적했다는 것.
니드호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알렌의 공격을 받아내며 그의 수준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밖에서는 이름 좀 떨칠 만한 힘이나, 자신에게는 아니었다.
그는, 힘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기에 이곳을 선택했을 것이다.
저 강대한 공격에 도시가 부서질까 걱정했을 수도 있고, 하지만 그가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은….
“그 수준으로는 멀었군.”
니드호그 역시 피해에 상관없이 힘을 쓸 수 있다는 것.
슈슈슉! 니드호그의 몸에 수백 자루의 창날이 쏟아졌다. 알렌이 한 손으로 수인을 맺으며 다시 검을 전진시켰다.
알렌이 다시 검을 휘두르려는 차에 니드호그의 몸에서 독액이 뿌려졌다. 알렌은 급히 베스틀라를 땅에 박았다.
치이이익-
그의 곁으로 독액이 스친 바닥에 구멍이 뚫렸다.
알렌은 당황하지 않고 실타래를 당겼다. 수백 가락의 실타래가 구불구불 진동하며 충격파를 터트렸다.
독액이 옆으로 퍼지자 니드호그는 공격을 그만두었다.
“왜, 계속해 보지 그러나.”
그의 틈을 노리려던 알렌은 그의 재빠른 반응에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놈은 알렌이 그림자로 변하는 것을 보고 어떤 쓰임새로 쓸지 벌써 파악한 것이다.
알렌은 그 후에도 몇 번이고 니드호그와 부딪쳤다.
그러나 그는 알렌이 어디서 공격할지 안다는 듯 대부분의 공격을 최소한의 피해로 막아냈다.
수십 합을 부딪친 알렌이 뒤로 물러섰다.
니드호그는 용안을 번뜩이며 그를 보았다. 입가에는 옅은 비웃음이 걸려있는 게 알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용은 오감으로만 세상을 보지 않는다지.’
그가 알렌의 공격과 반응을 한 박자 먼저 파악할 수 있는 이유기도 했다.
이대로 간다면, 결국 그에게 휘둘리기만 할 뿐이겠지.
‘감지력만 사용할 수 있었어도…. 아니 잠깐.’
알렌은 저 용과 비슷한 감각을 끌어낼 방법이 있었다. 감지력과는 다른, 사용 방법을 찾지 못했던 방법이.
지금의 오감만으로 부족하다면 그 이상의 한계를 풀면 된다.
이 공간은 감지력을 사용할 수 없을 뿐, 오감에는 문제가 없었으니.
딸깍-
머릿속에 무언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
다섯 가지의 감각이 미친 듯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동공은 수백 미터 뒤의 먼지 하나를 놓치지 않았고, 도시를 기는 망자들의 울음소리는 천둥처럼 들렸다.
진짜 세상이 아니라 그런지 느껴지는 후각이나 미각에는 엄청난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피부 위로 닿는 바람에 살갗이 베인 것처럼 촉각이 민감하게 변했다.
‘분명 환상종의 감응력이라고 했었지.’
알렌은 처음 감응력이라는 능력을 신수에게 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이 감각의 진면목을 알 수 없었다.
아니, 분명 며칠 전까지도 그랬다.
간간이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오감을 증폭시킨 적은 있었어도, 이렇게 한꺼번에 사용한 적은 처음 이후로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니드호그를 보고 나서야 이 능력의 진짜 사용처를 깨우칠 수 있었다.
용의 감각을 모방(模倣)하는 것.
‘본래는 더 일찍 알아내야 했으나, 마법사의 감지력 탓에 늦었다.’
오히려 전사가 되었다면 더 일찍 알았을 것이다.
뒤죽박죽 석인 오감이 별의 세례로 강대해진 정신력 아래에 통제되었다.
알렌은 잡념을 떨치고 몸을 날렸다. 니드호그의 날개가 움직인다. 그러나 알렌은 그가 움직이기 전부터 그 전조를 파악한 상태였다.
팔을 휘둘렀다.
그림자가 층층이 겹쳐지며 그의 움직임을 막아 세웠다. 알렌의 검이 니드호그의 머리로 떨어져 내렸다.
콰직-
“…잡스러운 능력으로 감히, 용의 감각을 모방하다니.”
아쉽게도 검은 놈의 몸을 스쳐 땅을 파고들었다.
알렌이 처음 능력을 사용했을 때를 제외하고 니드호그는 알렌의 공격을 파악했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감각을 알렌도 공유하고 있었다.
그가 웃었다.
“이제 좀 제대로 붙어 보지.”
알렌의 작은 몸이 니드호그의 몸을 타고 올랐다.
니드호그는 고함을 지르며 거구를 휘둘렀다. 베스틀라로도 깨기 힘든 비늘이 쭉 미끄러지며 알렌의 참격을 흘렸다.
알렌이 썩은 살을 내려치자, 진물이 터져 나오며 악룡이 비명을 자아냈다.
거인과 용이 수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거친 육박전을 벌였다. 거대한 힘과 힘의 부딪침은 도시를 박살 냈으나, 그걸 슬퍼할 사람들은 없다.
몇 번이나 부딪친 니드호그는 알렌의 힘에 확신이 들자 크게 날아올랐다. 끝까지 추적하는 검은 꼬리로 쳐냈다.
니드호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어두운 산맥의 주인이었다. 짙은 땅굴의 지배자였고, 떨어진 죄인의 유일한 간수였다.
“이곳이 너에게만 유리하리라 생각했나? 가라, 미천한 죄수들아.”
수백의 망자들이 알렌을 향해 기어갔다.
수천의 유령이 하늘에서 그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이것으로 그를 쓰러트리기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한순간의 시간을 끌기엔 충분하겠지.
거인이 강대한 생명력과 압도적인 힘으로 모든 것을 부순다면, 용은 마나의 주인이라 불리며 여러 마법을 다룬다.
그리고 거인에게는 없는 무기가 있었다.
니드호그가 숨을 들이마셨다.
썩은 살과 비틀린 뼈의 사이로 반쯤 망가진 노심이 빛을 내며, 불의 정점에 섰다 할 만한 용화가 솟구쳤다.
그러나 니드호그가 불의 숨결을 내뱉으려는 순간, 무언가 그의 턱을 후려쳤다.
콰앙!
목구멍을 지나던 용의 불꽃이 입 안에서 폭발했다.
‘……잠시의 시간도 끌지 못했다고?’
입 안이 터져나가며 살점이 튄 시야 사이로, 하얀 안개로 가득 찬 지상이 보였다. 그 안에는 얼어붙은 동상들이 가득했다.
망자와 유령으로 이루어진 얼음 동상들이.
그걸 눈치채기 무섭게 검은 그림자가 솟아나며 동상들을 박살 냈다. 니드호그의 분노가 짙어졌다.
‘어떻게.’
저들은 자신에게 속한 망자들이었다. 죽어서도 고통받고, 머리가 잘리고, 혓바닥이 뽑힌들 소멸하지 않는 망자. 그런데, 그 망자들과의 연결이 끊겼다.
‘신성력이 사라졌다. 하늘을 빛내던 별은 떨어졌고, 그 찌꺼기만이 남아 있지.’
애초에 신성력의 파동도 느끼지 못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용의 눈이, 안개 속에 있던 알렌의 입 모양을 읽었다.
요툰스베르드 사계(J?tunnsverd 四界).
“카스니플(Kaltnifl).”
태곳적부터 망자들을 얼리는 차가운 안개가 죽은 자들을 휩쓸었다.
「봐요! 제가 엄청나다고 했잖아요! 그러게 진작 익히지! 4계는 어차피 5계를 펼치기 위한 사전준비밖에….」
알렌은 베스틀라가 우쭐거리는 것을 한 귀로 흘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행동이 용의 분노를 일으킨 것인지, 자신보다 배는 더 많은 양의 마력이 놈에게서 솟구쳤다.
용의 주위로 뿜어져 나온 마력은 그가 알지 못하는 수십 개의 마법으로 변화했다.
“…과연, 진정 용인가.”
인간은 용에게서 마나를 베꼈고, 그로 인해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용이 직접 사용하는 마법은 얼마나 대단할 것인가?
“손해는 나중에 메울 수 있다. 우선, 너의 심장을 뽑고 생각하지.”
철판을 긁는 불쾌한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니드호그의 말 뒤로 지상을 부술 운석, 거대한 폭풍, 해안가를 휩쓸 파도, 지상을 불태울 번개와 같은 것들이 나타났다.
각각 한 문명을 박살 낼 수도 있는 재앙(災殃)들.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에 제한이 있는 반면, 용이 사용하는 마법에는 취향이 그대로 묻어났다.
니드호그는, 땅굴로 숨은 악룡은, 세상을 종말에 빠트릴 마법을 좋아했다.
“그러니 덜떨어진 거인을 떠올리게 하는 네 몸 따위는 필요 없겠지?”
모든 것을 흙과 재로 뒤덮을 수 있기에.
악몽의 영지 위로, 종말의 짐승이 재해를 떨어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