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흠….”
엘로스가 단검을 꺼낸 순간부터 흥미로운 눈으로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엘리프는 그의 말이 다 끝나자 입을 열었다.
“그게 끝이냐? 동생아.”
엘로스는 그의 여유로운 태도에 불안감을 느꼈으나, 우위는 변하지 않았다.
“동생이라 부르지 마라, 현혹스러운 뱀아. 주위 모두를 속여놓고 나까지 속을까 싶더냐!”
“창고에 있던 살룡검 리딜(Ridill)이 어디 갔나 했더니.”
강하게 소리치는 엘로스와 정반대로 엘리프의 목소리는 잔잔하게 퍼졌다.
“너에게 있었구나.”
“모두 들으라!”
“참, 마음대로 물건을 가져가는 것도 그렇고 혼이 나야겠군.”
“저 요사스러운 뱀이 보이지 않느냐!”
“벌로는 무엇이 좋을까….”
“저놈은 형님이 아니란 말이다! 다들 무엇을 하느냐! 정신을 차리지 않고!”
“그래, 내 동생이니 이 정도 무례와 사고는 받아줄 수 있지.”
목소리가 대조적으로 경매장의 장내를 울렸다.
한 명은 간절함과 일말의 기대감을 담아 주위에 호소하고 있었고.
남은 하나는 짙게 깔린 오만과 여유로움이 담긴 눈으로 내려다봤다.
“지금 내 말이 들리지 않는….”
한동안 소리치던 엘로스는 2층에 있던 방계 혈족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엘로스와 눈을 마주치기 무섭게 시선을 회피했다. 크게 소리치던 엘로스의 목소리가 잦아들더니, 다른 이들에게도 고개를 돌렸다.
그와 친하게 지내던 집사도, 충성을 외쳤던 기사도, 가문을 위한다는 방계 혈족들도.
누구도 엘로스의 말을 외면했다.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피하고,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조금의 희망을 담아 1층을 바라보았지만, 도시 내에서 제법 부유하다 일컬을 만한 인물 중에서도 호응하는 자 하나 없었다.
엘로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왜! 왜 외면하는 것이냐. 지금 보았지 않았느냐!”
공허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를 바라보던 수석 집행관 요한이 작게 혀를 찼다. 잘못 걸렸다. 단순한 후계 다툼의 연장선인 줄 알았더니, 이런 복잡한 문제라니.
저들에게 있어서 누가 ‘진짜’ 엘리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몸을 빼앗기든, 다른 대역이든, 도플갱어의 일종이든.
‘중요한 건 그 ‘엘리프’가 행한 일이지.’
어쩌면 처음 십 년 전 처음 바뀌었을 때 폭로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 몰랐다.
그러나 이미 십 년이 지났고, 많은 이들이 ‘지금’의 엘리프에게 익숙해졌다. 그런 이들이 옛날의 망나니를 위해 힘을 빌려줄까?
‘아니.’
오히려….
“저, 엘로스 공자님. 무슨 착오가 있으신 게 아닙니까? 용이 몸을 빼앗았다니요.”
그가 잘못되었다 하겠지.
엘로스의 눈동자가 말을 한 이에게 옮겨졌다. 그는 저택에서 행정일을 도맡는 방계 중 하나였다.
“지금 시대에 용이라니….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습니까.”
“방금 그걸 보고도 뭐라는….”
“그게 공자님이 사용하신 환영이 아니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른 쪽에서 소리치는 게 들렸다.
“맞아요! 엘리프 공자님이 십 년간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셨는데, 그런 모함이라니.”
“아무리 후계 자리를 두고 다투고 싶다고 한들, 이번 일은 심하셨습니다.”
“우선 그 무기부터 내려놓으시지요. 그것을 든 이후부터 몸이 너무 뻣뻣합니다.”
엘로스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자신을 힐난하는 이들을 보았다. 그들은 일상의 행복이 깨지길 원하지 않는 자들이었고, 그가 신경 쓰지 않았던 이들이었다.
‘까마귀가 겉은 검어도 속은 희다고 했지. 그러니, 반대도 있을 수 있다 하던가?’
알렌은 어느새 엘로스의 성토장으로 변해가는 관중을 보며 생각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엘리프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겉은 백로라도 속이 까마귀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엘로스는 그 점을 신경 쓰지 못했다.
과거의 자신처럼.
엘로스는 그들의 목소리를 한순간 듣다가 이내 상관없다는 발을 내리찍었다.
쿵!
“모두!”
커다란 소리와 함께 목소리를 잠재운 그는 병력을 향해 소리쳤다.
“내가 직접 밝혀내면 될 일이지. 모두 형님의 껍질을 뒤집어쓴 저 괴물을 공격하겠다!”
그가 땅을 박찼다.
“이번일 만 성공시킨다면 보상은 약속한 대로 줄 생각이니 최선을….”
우뚝-
엘로스는 따라오는 이 하나 없이 자신의 발소리만 들리자, 무섭게 굳은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그들은 자신이 아니라 위층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로스가 시선을 돌리자, 엘리프가 방긋 웃으며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게 끝이냐, 동생아?”
그가 방긋 웃었다.
드디어 엘로스의 표정에 허탈과 절망이 눅눅히 달라붙었다.
“…모두, 모두 날 가지고 논 것에 불과한 건가?”
그가 이를 악물었다
“허, 충격이 꽤 심했나 보구나. 네가 장난을 준비했기에, 나도 작은 장난을 준비했단다.”
“…장난.”
엘로스의 얼굴에 자포자기의 빛이 여렸다.
자신의 형을 자처하는 저 괴물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완벽하게 막지 않았고, 자신은 멍청하게 가능성이 있다 믿으며 그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
결국, 이리될 것을.
엘로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주먹에 힘을 주었지만 곧 끝났다는 생각에 힘이 저절로 빠졌다.
“방금 전 장난은 조금 지나쳤구나. 너도 반성하고 있겠지?”
목숨만 부지하면 된다. 기회는 다음에, 언제라도 살아만 있다면 온다.
엘로스의 입꼬리가 딱딱하게 올라갔다.
“……예, 반성하고 있….”
그렇게 그가 입을 다물고, 모든 사태가 끝나려는 그때.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엘로스의 눈이 커졌다. 그들의 시선이 이곳으로 다가오는 청년에게 닿았다.
‘회귀 전에는 이번 일과 비슷한 소식을 조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알렌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회귀 전에도 이번 일은 일어났을 것이고, 이번처럼 아무 일도 없이 끝났을 것이다.
그때는 자신을 노리지 않았기에 더욱 은밀하게 일을 덮었겠지.
‘어쩌면 나와 같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상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적다.
하지만 자신은, 그를 온전히 동정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일 것이다. 그의 비슷한 경험을 했고, 실패를 겪고, 마지막을 보았기에.
저벅저벅-
허나 다른 점은 있었다.
“…라인하르트 대공자, 이곳에 나온 저의가 뭔가.”
알렌은 선을 넘어서까지 일을 저질렀고, 그는 그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자네와는 따로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때 가서 하지.”
알렌은 회귀를 하며 한 번의 기회를 얻었으나, 그는 그러지 못했다.
“알렌 라인하르트. 손님으로 대우하는 건 한계가 있네.”
“그 말씀은.”
그는 마지막에 실패했으나, 자신은.
‘성공할 것이다.’
알렌의 얼굴 위로 웃음이 떠올랐다.
그것이 불쾌했는지 엘리프가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프 대공자의 말씀입니까? 아니면… 죽은 악룡의 망언입니까?”
“…라인하르트 대공자! 방금 그게 무슨!”
주위에서 시끄럽게 떠들었지만, 알렌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저들은 그저 관객일 뿐이다.
이 극에 끼어들 자격이 없는.
엘로스가 그랬지. 선조가 이곳에 오자마자 원래 자리한 세력이 머리를 숙이고 들어왔다고. 그것이 정상적인가?
‘절대.’
이곳에 스스로 용혈을 뽑아낸 엘로스를 제외한 대부분 이들은 그저 꼭두각시일 뿐이다.
용의 아래에 속한 노예들.
그 영향에서 벗어난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는 수석 집행관, 견왕의 아들 그리고 일부 실력이 일부를 제외하고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베스틀라에게 용에 대해서 듣지 않았다면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점잔 떨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지금 보나 나중에 보나 할 짓은 다르지 않을 테니.”
알렌은 품에서 하얀 보석을 꺼냈다.
드라기아스 가문에서 추수제에 도적들을 보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표하는 이유도 알 수 없었고.
‘하지만.’
순환교에게 받은 고서와 수년간 축적한 자료, 그 모든 것을 살피며 놈이 그렇게 행한 이유에 대해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현자의 돌에 대한 것도 그때 들었지.
까마귀가 겉에 하얀 칠을 하며 속일 수 있다면,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다.
“이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엘리프 아니, 그 속에든 괴물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현자의 돌의 사용방법은 두 가지.
첫 번째 방법은 보석을 삼키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
두 번째는, 바라는 것을 빌며 현실을 개변하는 것.
‘어차피 한 번 실험해보기는 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건 설마.”
자신의 심장을 노리는 노괴물에게 해도 상관없지 않은가.
그의 손에 있던 불완전한 현자의 돌이 밝게 빛났다.
“전능의 돌로 무슨 짓을 하려는 거…!”
“조금 이따 보지.”
폭발하듯 솟구친 빛이 도시 전체를 전체로 퍼져나갔다.
* * *
병사들은 다급히 불을 진압하기 위해 힘썼다.
근처의 강에서 물을 길어오고, 흙으로 덮었다. 그러나 불은 그 노력이 우습다는 공기 중에서 타올랐다.
죽은 것만을 태우는 불이 병사들의 몸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의 놀람과 다르게 개의치 않아 했다.
이 불은 드라기아스의 수학을 불태우는 것이 목적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무슨 방법이 없나?”
“…저희도 이런 건 처음입니다.”
곁에 있던 영지 마법사들은 6위계란 거창한 실력임에도 불구하고 불을 끌 수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을 매번 꺼트려도, 주변의 태울 것이 남아 있는 것처럼 다시 거세게 타올랐다.
“분명, 이 짓을 일으킨 놈들이 무언가를 더 준비한 게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죽은 것만 태운다는 백염화가 이렇게 타오를 리가 없습니다.”
세상에 불의 종류는 많다. 그러나 그만큼 그에 대한 대처법도 많았다.
“…그럼, 우선 몇 명을 제외하고 돌아가는 게 어떤가.”
“현재 기사와 병사 그리고 마법사까지 가문의 병력 대부분이 이곳에 있네. 누가 일을 저지른다면 지금이 적기야.”
“아니, 도대체 누가 지금 일을 저지른다는….”
번쩍-
기사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이던 마법사의 웃음이 멈췄다.
그가 급히 뒤를 돌아봤다. 도시의 중앙에서 하얀빛이 솟구쳤다. 솟구친 빛은 파동처럼 퍼져나가 도시를 가두더니, 곧 둥근 막으로 변했다.
“미친.”
콰앙-
기사는 그 한마디를 내뱉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를 제외한 다른 기사와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백염화는 뒷전에 불과했다.
만약 드라기아스 가문에 커다란 타격이 생긴다면?
일 년 치 수확을 잃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달려가던 이들도, 하얀 막 안에 보인 광경에 몸을 멈췄다.
이곳에서도 훤히 보이는 드라기아스 가문의 거대한 저택, 그 위로 몸이 다 썩어 독액과 진물이 흐르는 악룡이 나타났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하늘에는 수천으로 모자란 유령 무리가 괴성을 질렀고, 땅에서는 고통에 울부짖는 망자들이 기어 다녔다.
도시의 내부 곳곳에 기상천외한 괴물의 형상이 나타나 도시를 활주했고,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괴물이 똬리를 틀었다.
그들이 멍한 얼굴로 도시를 올려다봤다.
악몽의 영지가 이곳, 드라기아스 가문의 중심 도시 벨딘에 강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