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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가 빙의를 싫어함-143화 (143/212)

143화

“가문의 역사서에 이르기를, 선조께서는 땅 밑 용의 축복을 받았고 그 능력을 인정받아 이곳에 가문을 세웠다 하였습니다.”

조화로운 악기가 섞인 음악이 소리에 영향을 주지 않을 만큼 작게, 배경음으로 자리 잡았다.

“그건 수백 년 전의 역사이자, 난세의 시기에 일어났던 일이라 그를 증명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하나, 드라기아스가 이곳에 있다는 것.”

화려한 만찬과 격식 있는 참가자들의 면면은 이곳에 있는 이들의 신분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보여줬다.

“드라기아스는 수백 년을 이곳에 있었고, 수백 년 후에도 이곳에 있을 겁니다. 그러니….”

알렌은 흥미로운 얼굴로 주위에 있는 사람을 확인했다.

수인 연합의 열두 족장 중 하나, 견왕 휴버트의 아들 휴즈.

오면서 들었던 것과 다르게 족장이 아닌, 그의 아들이 식사에 임하고 있었다.

‘지금 시기에 성급히 나서지 않겠다는 건가.’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별 관심이 없는 듯 식사에만 집중했다. 그러다 한 번씩 테라스를 힐끔거리는 것이, 얼른 축제를 즐기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알드니아 제국의 인물이 보였다.

수석 집행관 요한 라헨바흐.

제국 최강인 피에르 베르나프가 양지에서 전력을 과시한다면, 집행관은 수면 밑에서 조용히 일을 처리한다.

귀족의 비리와 지방의 반란 그리고 각종 사고를 조사하는 것까지.

그중에서 수석 집행관은 그 일 처리에 제일 뛰어난 이들에게 주어지는 칭호였다.

이곳에 자리한 것 역시 매년 있는 연례행사일터.

그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아는 듯 경거망동하지 않고, 조금의 틈 하나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외에도 이름이 알려진 이들은 많았다.

엘프 쪽에서도 숲지기 중 하나를 보냈고, 리브레 왕국을 비롯한 많은 왕국과 가문에서도 참석자를 보냈다.

핌불베트르는 여전히 미참이었고, 루피너스에서는 이번 우환을 핑계로 거절했다.

그래서인지 작년보다는 규모가 줄어 보였다.

‘지금 시기에 강자가 함부로 몸을 빼기 힘들 테니.’

알렌의 시선은 많은 이들을 거쳐, 중앙에서 말을 하고 있는 사내에게 향했다.

“…이번 추수제도 마음껏 즐기다 가시면 좋겠습니다. 이상, 말을 마치겠습니다.”

훤칠한 얼굴과 드라기아스 가문의 특징적인 자흑색 머리.

엘리프는 미소를 지으며 주변인들과 대화를 나눴다.

어제 보았던 것과 다르지 않은 얼굴로 주변인들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대부분이 무엇하나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속내를 숨기고 있는 것이 뻔히 보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으며 그들을 상대했다.

‘다른 쪽은….’

레이첼은 정보나 얻어 오겠다며, 다른 여인들에게 향했으니 조금 더 걸릴 것이다.

「알렌 저쪽이요, 저기. 구석에 어제 그 사람이 있는데요?」

베스틀라의 말에 구석을 살피자, 엘로스가 우울한 얼굴로 구석에 박혀있었다.

주변인들도 그의 분위기를 감지한 듯 괜히 건드리지 않고 자리를 피했다.

알렌은 엘레프 쪽을 한 번 살피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번 접촉해 보게요?」

‘그래.’

「…여기서 무슨 중요한 대화가 가능해요? 아니면 따로 만나려고?」

알렌은 고개를 저었다.

‘공개적인 곳에서 비밀스러운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건 편견이지.’

간접적으로 돌려 말하고, 속내를 표현하지 않는 것은 귀족들의 특기였다.

알렌은 평소에 그런 대화를 나눌 일이 적었으나, 못한다는 것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깊은 속내까지는 알 생각도 없지만, 그저 무슨 생각으로 자신과 대화를 나누려는지가 궁금했다.

“잠시, 이 자리가 비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엘로스는 알렌이 찾아온 것에 두 눈을 끔뻑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연히, 앞으로도 앉을 사람은 없을 테니 계속 비어 있을 겁니다.”

“그럼 잠시만 앉겠습니다.”

알렌이 자리에 앉자, 엘로스는 그의 뒤로 형을 살폈다. 엘리프는 그들을 힐끔 보기만 할 뿐, 다가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제 보고 오늘 또 보는군요. 라인하르트 대공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알렌을 보았다.

어제 자신과 형의 모습을 보며 관계를 짐작하지 못했을 리가 없을 텐데, 그가 왜 왔냐고 돌려 묻자 알렌은 목적을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흠….”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말라고 하지만, 그게 의지로 가능하다면 세상의 여러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간단히 말해, 궁금해서 찾아왔다는 것.

그는 탁 트인 주변과 알렌의 가벼운 태도를 보고 그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말해줘도 상관없고, 아니라도 괜찮다는 건가.’

이곳에서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기는 힘들다. 그러니 자신이 말한다면 그는 깊이 관여치 않고 정보를 들을 수 있을 테고, 아니라도 그냥 물러나면 될 뿐이다.

자신만큼 절박하지 않을 테니까.

엘로스는 웃음기 어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런, 그렇다면 제가 선물이라도 먼저 줘야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하하하.”

원래 판도라의 상자는 하나의 선물이었으니.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겠군요.”

알렌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마음을 먹었다. 어차피 엘리프가 만남을 막고자 한다면 먼저 나섰을 것이다.

차라리 이곳에서 가볍게 운을 띄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식사는 하셨습니까?”

“이후에 전야제를 즐길 예정이라….”

알렌이 넌지시 거절하자 그도 그냥 말해 봤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럼 남자끼리 뭐 할 것도 없으니, 제가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알렌은 경청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지역 근처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주변에 있던 이들이 귀를 슬쩍 기울이는 것이 보였다. 엘로스는 상관치 않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

“선조께서 이 지역에 가문을 세울 때, 근처에 자리 잡은 세력이 많았다고 합니다.”

알렌은 그의 말을 들으며 어떤 의미로 이 이야기를 하는지 파악하려 했다.

“거대한 평야가 있으니 일견 당연한 법이겠지요. 그런 곳에 새로운 세력이 들어오면 어떻겠습니까?”

“당연히 다툼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알렌이 누구나 할 법한 대답을 하자, 그도 그런 대답을 원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은 전투 한번 없이 저희 선조의 밑으로 들어왔습니다.”

그게 지금까지 내려와 드라기아스를 받치는 기둥이 되었지.

엘로스가 한 이야기는 꽤 유명한 이야기인 듯 주변인들의 관심이 순식간에 시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위대한 선조의 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는 이야기지요. 그런데….”

그는 주변의 관심이 적어지는 그때, 작게 물었다.

“만약, 그게 거짓일 수도 있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그 말은.”

“대화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는 알렌이 질문하기 원치 않는다는 듯 일어섰다. 알렌이 입을 다물자 그는 다시 엘리프와 알렌을 번갈아 보더니 입을 열었다.

“까마귀가 겉은 검어도 속은 희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도 있지 않겠습니까.”

엘로스가 고개를 숙이며, 단호히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바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알렌은 그를 붙잡지 않았다. 베스틀라는 그들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듯 그를 보챘다.

「알렌 빨리 말해 봐요. 뭐라고 한 건데요? 끝에는 누구를 말하는 거고요?」

‘엘리프 공자를 조심하라고 하는 것 같은데…, 앞의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려는지 모르겠군.’ 아니, 대놓고 이야기한 만큼 그런 뻔한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것을 말하려는지도 모른다.

“알렌!”

알렌은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그를 보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왜 구석에 혼자 있어요. 혹시 따돌림당해요?”

알렌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설마.”

“그럼 어서 나가요. 이제 시간도 됐고, 대충 들은 이야기도 있거든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따랐다.

그들이 나가는 방향으로, 엘리프의 눈동자가 쭉 따라가다 다시 시선을 돌렸다.

드디어 전야제가 시작되었다.

* * *

“엘로스 공자가 그렇게 이야기했다고요?”

“왜, 이상한 점이 있나?”

하늘에는 붉은 등이 촘촘히 떠올라 빨간 별 무리를 이루었다. 검은 밤의 장막 사이로 떠오르는 등불은 저 하늘의 찬연한 별빛 못지않았다.

알렌은 그녀와 전야제를 돌아보며,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게… 보통 선조의 업적이라고 하면 신비한 일이라거나, 선조의 위세에 굴복했다고 꾸며주지 이상한 일이라고 말하지는 않잖아요.”

“맞는 말이지.”

알렌은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거짓일 수 있다니, 잘못 말하면 가문 어른들한테 맞아 죽을 텐데. 누가 그렇게 이야기해요, 진짜.”

그녀는 역시 수상했다는 둥 거기서 빠져나온 게 다행이라는 둥 투덜거렸다.

“그런데 아까 들었다는 이야기는?”

“아, 맞아. 다른 공녀들 말고 이곳의 하녀들한테 몇 개 들었는데….”

수많은 사람의 말소리가 섞이고 퍼져, 그들의 대화는 가까이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안심이 안 된다는 듯 알렌에게 바짝 붙었다.

“생각보다 엘리프 공자와 엘로스 공자의 다툼이 심각한가 봐요.”

알렌은 흥미가 돋은 얼굴로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 그녀의 눈이 샐쭉해지나 싶더니,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십 년 전에 엘리프 공자가 망나니였다가 바뀌었다고 이야기했잖아요.”

“그래.”

“그런데 바뀐 직후부터 엘로스 공자가 엘리프가 진짜 형이 아니라며 난리를 쳤나 봐요.”

알렌의 몸이 잠시 멈칫했다. 가까이 있던 그녀는 그 떨림을 눈치챘는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왜요? 떠오른 게 있어요?”

“…아니, 잠시 발이 걸렸다. 이야기를 계속 부탁하지.”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다, 다시 말을 이었다.

“엘리프 공자가 망나니 생활을 할 동안 그에게 끼친 행패 때문인지 몇 개월 동안 난동을 부려서, 몇 년간 강제로 떨어트리고 나서야 잦아들었대요.”

“…….”

지나치게 비슷한 이야기였다.

“뭐, 지금도 사이가 그렇게 좋지는 않지만 엘로스 공자는 여전히 형을 경원시한다네요. 엘리프 공자는 달라진 모습 그대로 그를 이해한다고 말하고요.”

“…그렇군.”

어디선가 들어보고, 직접 경험한 듯한 이야기.

「알렌, 이 이야기는 당신이랑….」

‘조용.’ 김우진과 같은 예처럼 엘리프가 빙의자이거나 그런 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검은 책과 하얀 책이 난리 치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

그러나 비슷한 곳이 있는 건 분명했다.

“아마, 당신을 끌어들이려 했던 것도 요즘 당신이 아카데미에서 잘나간다는 소리가 들리니 후에 후계 분쟁에 끌어들이려는 게 아닐까 싶거든요.”

“…다른 이야기는 더 없나?”

“무슨 이야기요? 엘리프가 난리 친 거?”

“전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못 말할 것도 없다는 듯 들었던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엘로스는 연금술에 재능이 있어, 그걸로 사특한 약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엘리프가 바뀐 이후로 흠잡을 데 없는 예의와 예절을 보면서도 괜히 트집 잡았던 일화.

그가 항상 덤벼들었어도, 엘리프 공자는 단 한 번도 화낸 적 없다는 것까지.

그녀의 이야기는 누군가의 이야기와 비슷하면서 달랐다.

“일단 목적이 대충 보이니까 괜히 접근하지는 말고, 얌전히 축제나 즐기다 가요. 중간에 경매도 하나 있잖아요.”

“알았….”

알렌이 일단 알겠다며 말하려는 순간, 누군가 그와 부딪쳤다.

툭-

부딪친 사람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특색 없는 남자였다. 그는 알렌의 차림새를 알아보곤 기겁해서 고개를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다. 그런데….”

알렌은 부딪친 순간 손으로 들어온 쪽지의 감촉을 느끼며, 떠보듯 물었다.

“이곳에도 그대와 같은 인간이 많나?”

“알렌, 왜 그래요.”

알렌의 낌새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낀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알렌은 아무 말 없이 남자를 응시했다.

그는 알렌을 바라보더니,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예, 언제나 저와 같은 꿈을 꾸는 이들은 많지요.”

“알았네. 이제 가도 되니, 다음부터 조심하게.”

“감사합니다. 공자님.”

그가 떠나자 그녀는 알렌은 다시 고개를 걸음을 옮겼다.

“…알렌, 방금 일 아무 일도 아니죠?”

그녀가 평상시와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알렌도 평상시와 같이 답했다.

“당연하지.”

“…그래요?”

레이첼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그의 손을 더 강하게 잡으며 미소지었다.

“그럼, 어서 가요. 아직 다 돌아보지도 못했잖아요. …여기서 돌아가지는, 않을 거죠?”

그녀의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숨기지 못한 떨림이 섞였다.

「알렌.」

그는 베스틀라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원할 때까지 있어 주지.”

“가요. 오늘 밤,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 아니니까.”

“언제까지?”

그녀가 손을 아프도록 힘을 주었다.

“밤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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