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들어온 사람은 레이첼의 숙부인 벨프가 아니었다.
아무리 그가 젊게 보인다고 해도 상아색 머리카락이 자흑색으로 보일 일은 없을 테니까.
“이런, 제가 너무 갑자기 나타났나 봅니다.”
알렌이 알던 것과 비슷한 외모, 하지만 창백했던 엘닉스의 안색과는 다르게 그는 건강한 혈기가 돌았다.
끝부분이 자줏빛에 가까워지는 검은색 머리, 다부진 체격과 자신감 넘치는 눈동자는 그의 신분을 짐작하게 했다.
“제 이름은 엘로스 드라기아스입니다. 잠시 여러분께, 아니 라인하르트 대공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무례를 범하고 찾아왔습니다.”
엘로스 드라기아스, 그는 갑작스럽게 나타났음에도 태연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알렌과 레이첼은 대답하지 않았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을뿐더러, 그가 왜 이런 짓을 벌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열린 문으로 조심스럽게 중년 남자가 들어와 입을 열었다.
“갑작스러웠으니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짧은 상아색 머리와 두툼한 배를 가진 적당한 덩치의 중년 남자.
벨프 그라나프는 자신이 이 자리의 주인이 아니라는 듯 그의 뒤에 조용히 기립했다.
“숙부님, 이게 무슨 일인가요.”
그녀는 딱딱한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 약속을 핑계 삼아 다른 이를 데리고 온다고?
‘알렌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 주다니.’
레이첼은 숙부의 몰상식적인 행동에 부끄러움이 몰려들었다. 그냥 약속은 거절하는 거였는데.
같이 오면 두 명에게 어울릴 물건을 준다고 해서 왔을 뿐이다.
“약혼자를 보고 싶다고, 줄 게 있다며 초대하신 게 아니었나요?”
“레이첼 편지의 내용은 진실이다. 준다고 했던 선물은 줄 거야. 단지, 대화 상대가 살짝 달라진 것 뿐이지.”
그는 그 말이 억지에 가깝다는 걸 자신도 아는지 겸연쩍은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숙부님.”
그녀의 실망감 어린 시선이 벨프에게 향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알렌의 팔을 잡아끌었다.
“됐어요. 알렌 가요.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해요. 그냥, 그냥 쉬는 게 더 나았는데.”
그녀가 싸늘한 분위기를 풀풀 풍기며 금방이라도 나갈 것 같은 움직임을 보이자, 그때까지 대화를 지켜보던 엘로스가 끼어들었다.
“너무 화내지 마십시오, 레이첼 공녀. 그 역시 가문을 위해 한 행동입니다.”
“아니, 엘로스 공자님. 거기까지는….”
“제가 라인하르트 대공자와 은밀히 자리를 마련해 달라 했고, 그 대가로 드라기아스에서 3년 치 식량을 구매할 수 있는 거래권을 주었습니다.”
벨프는 그가 거래 내용을 불자 기겁한 표정을 지었으나 엘로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이야기했다.
“괜히 악역을 자처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레이첼은 입을 다문 벨프를 한 차례 쏘아보다가 엘로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누그러진 상태였다.
“…그래도 사전 연락도 없이 이러는 건 무례한 행동이에요.”
만약 알렌을 노리는 암살자였다면?
그녀는 알렌을 볼 낯이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말에 엘로스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하지만 제 이야기를 들어 보신다면 이해를 하실….”
“그럼 나도 들어도 되겠느냐, 동생아.”
엘로스의 얼굴이 굳었다.
-잠깐, 지금 손님들이 대화를….
-조금만 기다려 주신다면….
분주한 발소리와 말소리. 엘로스가 무언가를 말하기도 전에 접견실의 문이 열렸다.
철컥-
“무례한 행동을 저질러서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라….”
드라이가스 가문의 대공자이자, 십 년 전 망나니로 유명했던 남자.
“나도 궁금하니 들려줄 수 있겠느냐?”
엘리프 드라기아스.
그가 싱긋 웃으며 자리에 난입했다.
* * *
결론을 말하자면 자리는 파투났다.
엘리프가 갑작스레 난입하자,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응시하던 엘로스는 다음에 따로 초대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프는 그것을 막지 않은 채, 옆으로 몸을 비켰다.
엘로스는 낯빛이 어두워진 얼굴로 그를 응시하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벨프 그라나프도 당황스러운 상황에 어찌하지 못할 때, 엘리프가 먼저 사랑하는 동생이 이곳에 있다는 소리를 들어 온 것뿐이라며 금방 떠났다.
그는 떠나기 직전, 알렌에게 다음 날 저녁 만찬 때 보자고 말했을 뿐이었다.
모든 게 한순간에 일어났다. 사라진 자리에 남은 건 알렌과 레이첼 그리고 벨프밖에 없었다.
레이첼은 알렌에게 미안하다며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고 한 뒤 그를 먼저 보냈다.
그녀는 이번에 벌어진 상황에 대해 제대로 된 변명을 들어야 할 터.
알렌은 축제 준비가 한창인 대로를 홀로 걸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혼자라고도 말할 수 없었지만.
거리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중앙 평야의 중심에 자리한 도시 벨딘의 특징은 하나다.
화려함.
동부 협곡의 광석으로 지어진 바이데른이 여러 광석으로 장식된 투박한 색채가 있다면, 제국과도 가깝고 대사막도 멀리 있지 않아 여러 출신의 사람이 흘러드는 벨딘은 도시가 전체적으로 화려했다.
햇빛에 번쩍이는 건물 장식과 밤을 대비하는 듯 걸어 둔 등불.
다음날이면 시작될 전야제의 기대와 흥분이 섞여 열기를 내뿜었다.
그 화려한 거리가 추수제로 인해 더 화려하게 꾸며지는 모습은, 왜 주민들이 평소에 용의 레어라며 자부심을 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마련된 여관에 가까워질 때쯤,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알렌, 아까 내가 말한 거 있잖아요.」
알렌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그거 이제 좀 알 것 같아요.」
‘아까는 확실해지면 말한다더니, 이제는 확실해졌나?’ 검신이 살짝 움직였다.
「네. 좀 전까지 긴가민가했는데, 아까 두 명을 보고 나서 확실히 깨달았어요.」
그녀는 자신의 감각을 콕콕 찌르는 무언가가 있었다고 했다.
그 감각은 도시에 들어온 순간부터 미세하게 뿌려진 모래를 밟는 것 같았다고.
「저번에 내가 그, 엘닉스인가? 걔를 보고 더러운 도마뱀 냄새가 난다고 했잖아요.」
알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엘닉스가 다가오기만 하면 난리를 쳤는지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엘로스인가, 걔한테는 그런 냄새가 안 나더라고요. 그런데 엘리프, 대공자라는 놈은 어찌나 심한 악취를 흘리는지.」
정말 시원하게 욕이라도 퍼부을까 했지만, 혹시나 싶어 입을 다물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심한 악취를 맡고 나니까, 그녀는 자신을 거슬리게 만들던 무언가의 정체를 깨달았다고 한다.
「알렌, 축제가 끝나면 당장 이곳에서 떠나요. 아무래도 조만간 무언가 일어날 것 같아요. 그러니까 도시 전체에서….」
기분 나쁜 도마뱀의 기운이 풍겨 나오고 있어요.
끝도 없이.
* * *
레이첼은 그날 저녁, 이야기를 다 마친 듯 후련한 얼굴로 여관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다시 알렌에게 이런 일은 없을 거라며 미안하다고 한 후, 잠시 무언가를 망설이듯이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얼버무리듯 입을 열었다.
“당신, 내일 저녁 초대 받아들일 생각이에요?”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드라기아스 가문의 초대.
그냥 초대된 여러 손님 중의 하나로 참석해 식사할 뿐이다.
그곳에서 인맥을 쌓든 얌전히 식사만 하든 상관없다.
강요한 것도 아니니 불참해도 되고.
“저는… 솔직히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오늘 봤잖아요.”
그녀는 갑작스러운 엘로스의 대면과 대화하기 직전 자리를 파투낸 엘리프를 떠올렸다.
엘리프는 그렇다 쳐도, 엘로스의 은밀한 접촉이 그녀는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그러나.
“난 참석할 생각이다.”
알렌은 처음부터 놈들이 가문의 지하수로에 숨어든 이유를 밝히려고 했다.
“어차피 추수제 기간 동안 이곳에 있어야 할 텐데, 피해 봤자 이곳이 그들의 영역이라는 점은 여전하지.”
수상한 접촉? 그들의 목적? 다 상관없었다.
‘상관없다.’
베스틀라의 증언으로 이곳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더 명확해졌다.
게다가 알렌의 실력은 7위계의 마법사와 동등하게 전투를 벌일 수 있으며, 고대의 괴물이 덤벼들어서 밀리지 않을 육체를 가졌다.
알렌은 오히려 그들이 대놓고 나와주기를 바랐다.
“차라리 직접 그들의 목적을 알아내는 게 더 낫지 않겠나?”
“…그건, 네. 그게 더 나을 것 같네요. 어차피 도망칠 수도 없고.”
그녀는 알렌의 말에 수긍했다.
결국, 드라기아스 가문의 영역이다.
그가 한 번 피할 수 있다고 해서 축제 동안 영원히 피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오만이었다.
“그럼 참가하는 거로 알게요. 저녁 식사 전에는 전야제 좀 돌아다니고.”
“그렇게 하도록 하지.”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그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한순간 그림자가 겹치며, 순식간에 떨어졌다.
“그, 그럼 잘 자요! 내일 아침에 늦지 말고요!”
그녀는 손부채로 얼굴을 식히다, 그의 표정을 볼 틈도 없이 빠르게 멀어졌다.
알렌은 살짝 어두워진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알렌, 그녀한테 언제까지 숨길 거예요?」
‘……잘 모르겠군.’
「언제까지 숨길 수 있지 않잖아요. 가뜩이나 발을 걸친 곳도 많은데.」
그늘진 여왕, 순환교, 스콜, 루피너스 그리고 악마에 빙의 당한 율리우스를 되찾기 위한 이유로 끌어들인 이들까지.
시간이 갈수록 그의 세력은 불어나고 있다.
몇 년이 더 지나 세력전의 향상으로 넘어간다면, 빼도 박도 못하게 들키고 말 것이다.
「이대로 아무것도 모른 채 놔둘 거예요? 그녀가 왜 축제에 같이 오려 했는지 알잖아요.」
알렌은 그녀를 율리우스와 관련된 일에 끌어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건 과거의 기억에서 비롯된 후회였다.
하지만, 이미 많은 이들이 그와 함께하고 있다.
거기에는 그녀와 비슷한 입장인 린벨도 있었고, 노아도 있었다. 그녀도 다를 것이 없다는 거다.
그런데 이렇게 망설이는 이유는….
「선택은 당신이 하는 거기는 한데, 될 수 있으면 빨리 내리는 게 좋을 거예요. 나중에 후회만 한다니까요?」
‘그건 네 경험담인가?’
「으흠흠, 숙녀의 과거를 캐묻는 건 실례니까 대답하지 않을게요. 그래도….」
그녀는 알렌의 눈앞으로 슥- 떠올랐다.
「저는 언제나 당신의 선택을 따를게요.」
그것이 검의 역할이니까.
알렌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지 않았다.
축제가 시작되기 전의, 마지막 밤이 깊어졌다.
* * *
거대한 화랑의 중앙, 거대한 원탁의 곁으로 셋이 자리해 있었다.
그들 모두가 큰 로브를 입고 있어 생김새를 알 수 없었다.
이제 참석할 만한 이가 모두 왔다고 판단될 때쯤, 식어 버린 불꽃이 입을 열었다.
“남은 두 명은 오지 않는다. 각자의 일을 처리하느라 참석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말에 참석해 있는 두 명 중 하나, 바스라진 쇠붙이가 답했다.
“왜 그걸 지금 말하지?”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또 무슨 문제인가.”
그의 물음에 마지막 남은 선지자, 빈곤한 토양이 답했다.
“사도 때문인가?”
그 말에 식어 버린 불꽃이 답했다.
“예의주시하던 곳에 사도가 향했다. 마침 일이 벌어지리라 생각했으니, 운명이라 할 수 있도다.”
“끈질기게 목숨을 부지하는 뱀 때문이군.”
“성공할 수 있나? 그들을 건드리는 건 우리의 총력을 다해도 모자라다.”
식어 버린 불꽃은 하얗게 변한 동공을 드러내며 웃었다.
“엎드리고 있던 우리의 동포들이 도움을 줄 것이다.”
“사도의 실력이라면 그 정도로 충분하겠지.”
“그럼 이번 일도 흘러가게 놔두겠다.”
셋이 말하고, 셋이 답했다.
둘이 고민하고, 하나가 결정했다.
하나가 제안했고, 둘이 검증했다.
셋의 토론이 끝났다.
다시 토론이 시작되었다.
“다음 안건은 사도가 줬던 ‘빙의자’에 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