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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가 빙의를 싫어함-141화 (141/212)
  • 제141화

    세상에 여러 세력이 있다지만, 가장 강한 가문을 뽑자면 세 가문이 있다.

    동부 협곡의 루피너스.

    북평 설원의 핌불베트르.

    그리고 중앙 평야의 드라기아스 까지.

    흔히 삼대 가문으로 불리며 각자의 영역에서 강대한 세력을 이룬 이들.

    입이 가벼운 자들은, 이들 덕분에 인간이 다른 종족에게 멸시당하지 않고 대등한 거라며 나불대곤 한다.

    그만큼 그들의 움직임은 각종 호사가의 이목을 끌었다.

    동부 협곡에 자리한 루피너스는 전전대 팔강을 배출한 이후 움직임이 줄어들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유가 무성했으나, 흔히 있는 세대교체가 다가왔다는 의견이 중론이었다.

    마땅한 후계자를 찾지 못해 잠깐의 시간 동안 침묵하는 것이라고.

    알렌은 그것이 진실 반, 거짓 반이 섞였다고 느꼈다.

    ‘이미 루피너스에 닥쳤던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럼에도 아직 대외적인 활동이 뜸해진 이유는 본래 후계자 격이었던 엘리자가 다른 가문에 시집간 영향이 컸을 것이다.

    마침 내실을 다지기 위한 명분도 있으니 준비가 끝난다면 다시 모습을 보일 터.

    다음은 핌불베트르.

    북평 설원에 자리한 핌불베트르 가문은 삼대 가문 중 제일 영향력이 약한 가문이다.

    중앙 갈슈딘 대사막의 위에 있는 수인 연합 너머, 대륙의 최북단이 그들의 영역이었으니까.

    그들은 대륙 끝에서 튀어나오는 온갖 기괴한 괴물과 죽은 망자들을 막아내며 묵묵히 의무를 다했다.

    마치 겨울을 나고 봄을 기다리듯.

    그러나 삼대 가문답게 무력 하나만큼은 어디에도 밀리지 않았다.

    핌불베트르 출신 전사라 하면 일단 일 인분은 충분히 한다고 판단할 정도.

    그 정도로 그들에 대한 신뢰나 믿음은 둘째치고 개인에 대한 실력도 월등했다.

    ‘혹독한 얼음의 땅에서 괴물과 뒹구는 게 일상이니 당연할지도 모르지.’

    마지막은 드라기아스 가문이었다.

    다른 삼대 가문보다 왕성한 활동을 하며, 주위로 영향력을 높이는 곳.

    위치도 알드니아 제국의 옆 거대한 중앙 평야를 점거하고 있어, 많은 이들이 엘프에게 식량을 의존하는 상황에도 드라기아스 가문만큼은 식량 문제에서 자유로웠다.

    그런 드라기아스 가문의 영지에서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축제가 있다.

    드라기아스 추수제.

    라인하르트 영지에서 했던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규모의 축제였다.

    거대한 규모의 축제인 만큼 이 시기에는 검문도 한층 가벼워지고, 많은 이들이 중앙 평야의 중심도시 벨딘에 초대되었다.

    그건 갈슈딘 아카데미도 예외는 아니었다.

    며칠 걸리는 동부 협곡이나 몇 달은 가야 하는 북평 설원과 다르게 중앙 평야는 일주일도 채 걸리지 않았으니까.

    학생들을 뽑아 추수제에 보내는 건 학생들의 의욕을 북돋울 수도 있어 일거양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해서 뽑힌 스물의 학생들.

    “이번에는 어디서 온다고 했지?”

    “제국 쪽에서 수석 집행관이 오고, 수인 연합에서는 열두 족장 중 하나가 온다는데.”

    “전보다는 적은데….”

    “시기가 시기니까. 드라기아스가 아니었으면 추수제를 열지도 못했을걸.”

    학생들은 곁을 스치는 광경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서로 대화하기 바빴다.

    주변을 획획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처음에는 신기했을지 모르나,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몇 번이나 봤던 지겨운 광경에 불과했다.

    지겨운 모래 같으니.

    그러나 추수제에 대한 기대만큼은 누구보다도 열정적이었다.

    누군가 열심히 일할 때 쉬는 것만큼 달콤한 것이 없었으니.

    “알렌, 어디부터 갈 거예요?”

    그건 레이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직접 조사한 내용을 나열했다.

    “추수제가 시작하기 전에 전야제는 꼭 볼 거죠? 아, 그전에 벨딘 한 바퀴 돌아보고요.”

    드라기아스에 가는 목적은 즐기려는 게 아닌데…. 알렌은 그런 생각을 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아, 맞다. 이번에 저희 숙부님도 축제에 오시는데 알고 있어요?”

    알렌은 멈칫했다. 숙부라고? 그의 머릿속에서 그라나프 가문의 관계도가 떠올랐다.

    ‘벨프 그라나프.’

    현재 그라나프 가문의 가주 엘리엇 그라나프의 친동생이자, 가문 외부에서 상단을 비롯한 실권을 쥐며 얼굴마담 역할을 하고 있는 자.

    현재 가주와 두터운 우애를 자랑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드라기아스 가문이 많은 초대장을 뿌렸으니 영지의 상황이 괜찮으면 참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 가문에는 뭐 연락 없어요? 누가 온다든가.”

    “우리 가문은….”

    알렌은 복잡하게 얽힌 영지 상황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없군.”

    “안타깝네요.”

    그녀가 아쉬운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왜?”

    “본 지 오래됐으니 한 번 인사드리고 좋잖아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알렌은 그녀가 말을 일부 감췄다는 것을 알았지만 개의치는 않았다.

    “그런데 왜 그러지?”

    “숙부님이 한 번 만나러 오라고 권하셨거든요.”

    “갑자기?”

    “네, 불편하면 거절해도 되기는 한데….”

    레이첼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알렌이 한 번 그를 만나봤으면 하는 얼굴이었다.

    「알렌, 설마 약혼자가 저렇게 말하는데 안 갈 거예요?」

    허리춤에서 입을 다물고 있던 베스틀라도 쫑알거렸다.

    알렌은 곰곰이 생각해보다 안될 것도 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를 권했으니 거절할 수야 없지. 그런데 언제 만날 생각이지?”

    “될 수 있으면 빨리요. 재미없는 일은 빨리 끝내는 게 좋잖아요?”

    그녀가 알렌의 팔을 잡아당겼다.

    “당신이 허락해줬으니 저도 당신이 흥미로워할 만한 이야기를 들려줄게요.”

    레이첼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거 알아요? 드라기아스 가문의 대공자도, 십 년 전까지는 망나니였대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달라졌다나 봐요?

    * * *

    “확실히 형님, 아니 놈이 알렌 라인하르트를 노리고 있는 것이 맞습니까?”

    어두운 방 안.

    창문 밖에서는 한창 축제 준비로 바쁜 가운데 방 안은 두꺼운 가림막이 창문을 빈틈없이 메웠다.

    그 방의 중앙에는 여러 명이 앉아 있었는데, 다들 누가 들을까 노심초사하는 기색이 강했다.

    “예, 아마도 맞을 겁니다.”

    “막내 공자님이 몇 번이고 첫째 공자님 파벌과 통신하는 걸 확인했습니다. 몇 번 도청에도 성공했지만, 다시 조사를 명하신다면….”

    “아니, 괜찮습니다.”

    그들 중앙에 있던 청년, 엘로스 드라기아스는 깊게 가라앉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전 여러분들을 믿고 있습니다.”

    그들이 조용히 청년의 말을 경청했다.

    “여기 중 한 명이 배신한다면 저희는 다 죽을 테니까요. 아니 어쩌면 놈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건….”

    “부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청년은 총기가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이곳에 있는 이유가 가문에 대한 충성심 때문인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저 놈이 아닌 제 쪽에 줄을 대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가능성 낮은 쪽에 도박을 걸어 보려는 걸지도 모르겠군요.”

    그는 다른 이들이 변명을 내뱉기 전에 먼저 답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

    뭐라 말하려던 이들이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그들도 귀족이었다. 권세를 탐하는 자들.

    대놓고 그렇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엘로스의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 반박하기에도 난처했다.

    이 자리에 그렇다고 소리치는 것이 더 이상한 모습일 테니.

    “이번 일이 성공한다면 저의 측근으로서 권력층에 들어가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저도, 여러분의 진솔한 마음을 잊지 않겠지요.”

    어쨌거나 그들은 이번 일에 사활을 걸었다.

    그 목적이 어떻든, 어떤 욕심으로 이 자리에 나왔든 그건 달라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엘로스의 목적도 그들 사이에 내분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이번 일의 성패로 얻을 이익을 다시 한번 인식시키는 데 있었다.

    “놈이 라인하르트 대공자를 노리는 이유는 모르겠군요. 하지만, 형님이 원한다는 것만 알면 상관없습니다.”

    그는 말을 끊더니 손을 조작했다. 그의 의지에 따라 방의 소음을 차단하던 마법이 풀렸다.

    엘로스가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벨프.”

    “부르셨습니까, 공자님.”

    철컥-

    그의 말과 함께 방에 들어온 것은 짧게 자른 상아색 머리카락에 적당한 덩치를 가진 중년 남자였다.

    벨프 그라나프.

    레이첼의 숙부인, 그는 이번 추수제에 가문의 대리인이 아닌 상인의 입장으로 참석했다.

    벨프가 긴장한 얼굴로 철저히 예의에 맞춰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지금 가문의 대리인이 아닌 상인이었다.

    “전에 말했던 건 어떻게 됐나?”

    “…이번 추수제에 그가 온다고 하니 공자님과 자리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대가는 3년 치 식량 거래권을 주지. 다만, 값은 제대로 치러야 할 것이네.”

    “그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서쪽은 식량을 조정하는 엘프의 영향력이 큰 곳이다.

    그러니 엘프의 태도에 따라 라인하르트 가문의 몰락이 빨라질 수밖에 없다.

    벨프가 거래를 통해 식량 거래권을 받아낸 이유도 그에 있었다.

    영지에서 엘프의 영향력을 몰아내기 위해.

    완전히 지울 수는 없더라도, 몇 년간 드라기아스 가문과 거래를 한다면 엘프 쪽의 의견에 완전히 휘둘리는 모습은 보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엘로스도 낮은 가격에 식량을 처분하는 것이 아닌, 단순한 거래권으로 일을 해결할 수 있어 이득이었다.

    그가 벨프의 처지를 이해한다는 듯 웃으며 격려했다.

    “앞으로 영지의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라겠네.”

    “감사드립니다.”

    벨프는 거래가 끝나자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쓸데없이 다른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봤자 위험에만 처할 뿐이다.

    그의 깔끔한 태도에 엘로스도 만족한 듯 웃으며 눈으로 그를 배웅했다.

    철컥-

    다시 문이 닫혔다.

    이제 기다릴 일만 남았다.

    * * *

    갈슈딘 대사막을 빠져나온 일행은 며칠 지나지 않아서 중앙 평야에 도착했다.

    “오…. 저게 황금 평야인가. 실제로 보니 더한데.”

    “과연, 엘프의 영향력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가문답군.”

    “이 정도나 되니….”

    그들의 눈은 웅장한 성벽의 모습보다 그 앞의 황금빛 평야에 향했다.

    시야 전체를 꽉 채우는 황금빛 곡식은 바람이 불 때마다 사삭이는 소리를 내며 절로 풍요로운 마음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도 벨딘을 향하는 대로에 넘쳐났다.

    한낱 용병에서부터, 각지에서 몰려든 이종족과 가문 그리고 마법사의 행렬.

    그리고 그 평야의 겉에는 드라기아스의 병력이 주둔했다.

    곡식을 지키는 벨딘의 병사들과 기사, 마법사들이 서로 엇갈아가며 순찰을 돌았고, 다른 여행객들은 감히 곡식을 서리할 생각을 갖지 못했다.

    어느덧 다다른 성문에는 기다란 줄이 늘어져,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러나 아카데미 학생은 특별히 초대받았기에 빠르게 성문으로 들어갔다.

    병사들은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예약된 숙소를 안내한 뒤 돌아갔고, 학생들은 하나둘 마차에서 내렸다.

    그들을 통솔하기 위해 온 교수도 열흘 동안 즐기라는 말 한마디를 하고는 숙소로 돌아갔다.

    그도 오랜만에 맞이한 휴가를 즐길 생각에 신나 보였다.

    얼마나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마차에 타고 있던 이들이 거의 남지 않았을 때쯤 레이첼이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뭐해요, 알렌. 빨리 만나러 가요.”

    그녀는 인파에 길을 잃을까 걱정되는 듯 그의 손을 꽉 쥐고 어느 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지각색의 인종과 종족 그리고 여러 언어가 섞여 시장통을 이루는 가운데, 베스틀라가 침음을 흘렸다.

    「흐음, 흐으음….」

    ‘왜 그러지?’

    「음… 아직 느낌뿐이니까 됐어요. 확실해지면 말해드릴게요.」

    알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짐작되는 건 있었다. 드라기아스 가문에 끌리는 용혈. 그 탓이겠지.

    그가 그렇게 레이첼을 따라 도착한 곳은 한 상단의 건물이었다.

    고급스러운 외관과 깨끗한 외벽은, 이곳이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레이첼은 상단의 이름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았다.

    “여기에요.”

    벨다니아 상단.

    그녀의 가문이 운영하는 상단이었다.

    알렌은 그녀와 함께 상단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들의 차림새를 알아본 상단원은 미리 이야기되어 있었다는 듯 그들을 접견실로 안내했다.

    “여기서 기다리고 계시면, 벨프 님께 알리겠습니다.”

    “네, 잘 부탁해요.”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철컥-

    문이 닫힌 후, 그녀는 알렌과 함께 잠시간의 휴식을 취했다.

    여행의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왔으니, 그녀도 내심 미안한 마음이 있던 터라 알렌이 조용히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렇게 십여 분이 더 지났을 때.

    저벅저벅-

    접견실의 문이 열렸다.

    “숙부님! 오랜만에 봬…요?”

    인사를 건네던 레이첼의 몸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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