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김우진은 원작에 대해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
아니, 그냥 많은 것이라고 해서는 틀린 말일지도 몰랐다.
한 글자도 빠짐없이 원작의 내용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으니.
그가 아무리 애독자라고 해도 완전기억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닌 이상 이미 몇 년이나 지난 내용을 완전히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아직도 생생히 원작의 내용을 떠올릴 수 있었다.
‘빙의 때문인가.’
아마 빙의되면서 얻은 특전이거나 혹은 정신적으로 무슨 일이 발생해서 생겨나지 않았을까 하고 그는 추측했다.
되돌아가서, 그는 지금까지 원작을 통해 무수한 이득을 봤다.
악역이 될 조연을 끌어들이고, 숨겨진 영약을 찾고, 원작에 나왔던 유적을 발굴하며 자본을 만들었다.
남들이 보기에 몇 년 동안 그것밖에 못 했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원작 내용이 바뀌면 안 되지.’
그는 최대한 꿀을 빨고 싶었지, 고생하고 싶진 않았다.
원래 목적이 무엇인가.
원작 주인공인 하이젤의 뒤에서 그가 안정적으로 세계를 구하기까지 최대한 많은 전력을 보존하는 것이다.
그사이 겸사겸사 재산도 불리고 몸도 지킬 겸 무력을 키운다.
그것이 나쁜가?
‘나쁜 건 원작처럼 개소리나 하는 하이젤이고.’
시발.
율리우스는 욕지거리가 나오는 걸 참으며 손에 힘을 줬다.
뇌전이 하나의 공으로 뭉치더니 줄기줄기 뇌전을 내뿜으며 날아갔다.
“죽어라아아아!”
“복수다! 복수!”
그에게 달려들던 리자드맨들이 순식간에 뇌전에 지져지며 쓰러졌다. 검기를 날리자 피할 새도 없이 그들의 몸이 동강 났다.
주변을 둘러보자, 더는 리자드맨 부락에 남은 이들이 없었다.
“후….”
“이제 끝났어요?”
갸오-
고개를 돌리자 카트린느가 동동이를 들고 다가왔다. 율리우스는 기감을 넓혀 주위를 확인하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제 들어가는 장소만 찾으면 될 거야. 그리고 그건… 읏차, 동동이가 할 일이지. 이제.”
율리우스는 동동이를 받아서 품에 넣었다.
“동동아, 지금까지 찾은 물건이 있지? 이번에도 비슷한 걸 찾자.”
갸오? 갸오-!
동동이가 한쪽을 가리켰다. 율리우스는 만족한 얼굴로 동동이가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카트린느는 잠시 멈춰 주위를 살폈다.
‘…이번이 세번째인가.’
그녀는 알렌의 조언을 들은 직후 율리우스에게 임무를 같이 하자고 청했다.
율리우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그 후에 그는 무슨 방법을 썼는지 그녀와 같은 임무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도착한 남부.
율리우스는 임무를 빠르게 끝내더니 찾을 게 있다며 남부를 들쑤셨다.
그 가운데 걸리적거리는 건 모두 죽였다. 리자드맨이든, 하피든, 나가를 비롯한 종족이든.
인간과 아인은 다르기에 그녀도 그들을 죽이는 것에 별 저항감은 없었다.
그러나 전투를 하다 죽이는 것도 아니고 필요 이상으로 벌이는 학살에는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언젠가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그건 율리우스가 감당해야 할 것이기에.
율리우스는 동동이와 함께 부락을 뒤지더니 무언가를 챙겼다.
“그건 뭐예요?”
“이거? 준비물로 필요한 건데… 일단 조금 있다 설명할게. 지금은 말해도 모를 거야.”
남부에는 수많은 이교가 존재하는 만큼 전설이나 신화적인 이야기도 많다.
그 이야기의 대부분은 그냥 흔히 듣는 허무맹랑한 전설이지만, 그중에도 진짜는 있었다. 이번에 율리우스가 얻으려는 기연이 그와 관련되어 있다.
‘불사왕 전설.’
이번에 율리우스가 남부에 온 진짜 목적이었다.
원작에서는 마테우스와 하이젤의 도움으로 나중에 나오는 조연이 얻는 데 성공한다.
전설은 으레 전설답게 불분명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먼 옛날, 불사왕이라 불리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창칼에 찔려도 죽지 않았고, 그 덕에 강력한 힘으로 어지러운 남부를 지배했다.
그러나 그는 남부를 통일하는 순간, 그때까지 자신을 지지해준 여인을 배신했다.
여러 종족으로 이루어진 남부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여러 종족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는 지금까지 그를 불사왕으로 만들어 주던 힘을 잃었다.
그의 힘이 사라지자 다시 다른 종족들은 분쟁을 시작했고, 처음처럼 그들을 지배하려던 불사왕은 칼에 찔려 죽었다.
그 후에 각 종족들은 불사왕의 심장을 잘라 부족끼리 나눠 가졌고, 남부는 다시는 통일되지 못했다.
어찌 보면 교훈적인 내용이었다.
은혜를 잊지 말고, 선 자리가 달라져도 태도를 달리하지 말라.
체계적인 교육이 없는 남부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날 것이다.
‘문제는 전설이 진짜란 거지.’
그 때문에 율리우스가 이렇게 남부를 뒤지는 것이었다.
‘불사왕의 심장을 얻기 위해서는 각 종족으로 흩어진 심장 조각을 찾아야 하고.’
그 뒤에는 불사왕의 무덤으로 가서 시련을 받아야 한다.
시련은 처음부터 위험했다.
불사왕의 심장을 모으면, 그걸 자신의 심장으로 힘을 이식할 수 있다.
그 과정은 진짜로 죽을 수도 있었기에 위험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까다로운 조건이 있었다.
전설의 내용 때문인지, 시련에는 여자 한 명이 더 필요했다.
그 여자는 율리우스가 시련을 받는 동안 함정 위에 선다.
만약 율리우스가 실패한다면 그녀는 죽는다. 그러나 성공하더라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면 죽는 건 마찬가지.
시간이 늦기 전에 힘을 다 받아들이는 것.
성공만 한다면 율리우스는 전설처럼 창칼에 찔려도 회복할 수 있을 것이고, 카트린느도 시련의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대상의 조건도 아무나가 아닌 자신을 믿는 사람 한정이라니.’
그런 한정된 조건에 들어맞는 사람을 찾기란 어려웠다.
카트린느는 다행히 그 조건에 들어맞는 여성이었다.
그건 그녀가 지금까지 보여준 태도에서 비롯된 믿음이었다.
약혼을 파투내고 나서도, 자신이 돌아봐 주길 바라는 그 마음 하나만으로 노력을 해서 실력을 키우며 신드리 남매까지 그녀의 휘하에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를 선택했다.
‘만약의 상황도 있고.’
레이나나 다른 이들도 있지만, 정말 시간이 오래 걸려서 죽는다면 미래에 엄청난 손해였다.
[늪지대의 비밀을 밝혀라! 그곳의 숨은 괴물을 찾아 죽이십시오. 제한시간 : 2 : 11 : 02]
[보상 : 무작위 C급 특성 뽑기권 2장]
[드레이크가 나타났다? 잠에서 깨어난 드레이크를 죽이십시오. 0/1 제한시간 : 44 : 52 : 33]
[보상 : 확정 B급 스킬 뽑기권 1장]
[최대한 많은 종족을 죽여 경험을 쌓자! 최대한 다양한 종족 살해. 제한시간 : 120 : 46 : 55]
[보상 : 결과에 따라 보상이 다릅니다]
‘그래도 퀘스트는 놓칠 수 없지.’ 카트린느는 율리우스가 무언갈 찾은 후에 허공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는 것을 보았다. 율리우스는 일정한 간격으로 저런 행동을 했다.
“…율리우스?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린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발걸음을 옮겼다.
“이쪽으로 가자. 얼마 안 남았거든.”
“아, 네. 가요.”
율리우스는 시간을 가늠해보며 움직였다. 잘하면 오늘 안에 재료를 다 모을 수도 있다.
‘하이젤은 귀찮게 협상을 한답시고 시간을 끌었지만….’
그건 너무 귀찮았다.
부족마다 조건을 듣고 거래를 마치면서 모으다니, 어느 세월에 그런단 말인가.
어차피 이곳에 올 일도 없으니 빠르게 정리하고 아카데미에 돌아가는 게 더 이득이었다.
저벅저벅-
발걸음이 멀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카트린느와 율리우스가 떠나간 뒤, 삼십 분쯤이 흘렀을 때 그곳으로 몇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완전히 떠난 것 맞나?”
“빨리 확인하자고.”
그들은 익숙하게 주위의 시체를 정리했다.
상당히 정성스럽게 정리하는 손길은 그들이 이들을 단순히 몬스터가 아닌 하나의 사람으로 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걸로 몇 번째지?”
어린 리자드맨을 옮기던 남자의 말에, 곁에 있던 동료가 입을 열었다.
“아마, 일곱. 아니 부족 단위가 아니라 소규모 집단까지 합치면 열을 더 넘겠지.”
“…이걸 참아야 하나?”
까무잡잡한 피부에 검은 눈, 전형적인 남부인의 특징이었다.
“참을 수밖에 없지.”
무덤덤한 동료의 말에 그는 욱했지만, 동료의 일그러진 표정에 한숨을 내쉬었다.
“아칸더스 님이 어떤 광경을 봐도 참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도…, 고향이 어지럽혀지는 건 참기 힘들군.”
“우리 같은 이들이 많다는 사실에 위안으로 삼아야지.”
스콜.
율리우스에게 복수심을 가진 자들.
그들은 아칸더스의 권유에 따라 스콜에 속하게 되었다.
어느 날 율리우스의 영향으로 많은 것을 잃게 된 자들은 아칸더스 덕분에 새로운 기회를 얻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자들은 스콜에 있는 자 중 고향이 남부인 자들이었다.
마치, 복수심을 되새김질하라는 것처럼.
아칸더스의 의도일지 우연일지 모를 이유로 그들은 잠잠해졌던 복수심이 되살아나는 걸 느꼈다.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우리뿐만도 아니고.”
뱀신, 갈루아.
인간의 도시가 적은 남부에서는 남부만의 규칙이 통용되었다.
뱀신 갈루아는 그런 이곳에서 가장 강대한 영향력을 가진 이였다.
팔강의 일인인 그녀는 대부족의 장에게 이번 일에 움직이지 말라 명했다.
대신, 개인으로 나서는 건 막지 않겠다고.
율리우스가 남부를 어지럽히고 있음에도 주위가 잠잠한 건 그 때문이었다.
“…큰 부족에서 전사 몇 명이 나설 계획이라 하니 뭐라도 있지 않겠나?”
그의 희망 섞인 말에 다른 이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율리우스가 얼마나 강한지, 어떤 일을 벌였는지 스콜에 속하게 되면서 철저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마 율리우스에게 도전하는 전사들은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들이 복잡한 마음으로 부락을 다 정리했을 때쯤, 구석까지 살펴보던 이가 외쳤다.
“여기에 살아있는 이가 있다!”
그들은 하던 일을 끝마치고 달려갔다.
그곳에는 화상으로 인해 진물과 피로 엉망이었지만, 끈질기게 삶을 붙잡은 리자드맨 하나가 있었다.
“…이 상태로 살아남았다고?”
“우리가 조금만 늦었으면 죽었겠구먼.”
“일단 살리자고.”
한 명이 품에서 포션을 꺼냈다.
엘릭서 같은 엄청난 물품은 아니었지만, 응급치료하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그렇게 그가 포션을 먹이려는 순간, 그가 눈을 떴다.
“…너, 너희는.”
그의 흐릿한 눈이 그들을 살폈다. 그는 자신의 자세와 이들이 치료 도구를 꺼내는 모습을 보고 상황을 파악했다.
“우선 치료부터 하고 말하지.”
“일단 이것부터 먹고….”
“자, 잠깐, 다른 이들은, 나 말고 다른 이들은….”
그들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그들의 표정을 확인한 리자드맨 전사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아.”
그는 그 이후로 입을 열지 않았다. 망연한 눈으로 그들이 몸을 치료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온몸이 붕대로 휘감기고, 부러진 각목으로 팔을 고정했다.
그러나 완전히 치료하기에는 부족했다. 리자드맨은 치료가 다 끝났을 무렵 입을 열었다.
“도와줘서 고맙다. 이 은혜는 언젠가 갚으마.”
“복수를 하러 가는 건가?”
그 말에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답했다.
“당연히.”
“그렇다면….”
그들이,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모든 것을 잃은 자들이 입을 열었다.
“우리와 함께하지 않겠나?”
그날, 스콜의 일원이 하나 더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