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3대 가문은 대몰락 직후부터 존속해 온 가문이다.
굉장히 유명한 만큼 많은 소문이 돌았다.
그들의 기원에는 끈질기게 세력을 유지했던 신전의 잔존 세력이 엮여있다.
그들은 고대 제국 시절에도 큰 영향력을 끼치던 유명 가문의 후계자로, 지금도 보기 힘든 신수의 피가 섞여 있다는 말도 있었고, 온갖 종류의 괴담과 같은 소문이 안개처럼 그들을 맴돌았다.
알렌이 루피너스 가문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도 마찬가지였다.
용사의 신기인 하얀 투구를 보유하고 있다.
동부 협곡에 눌러앉아 수많은 부를 창출하고 있다.
다른 귀족과 다르게 혈족들을 끔찍이 아끼며 대우한다.
‘그런데 어머니가 그런 루피너스 가문이라.’
저벅저벅-
알렌은 사람 하나 없이 조용한 복도를 혼자서 걸었다.
많은 이들이 밖에서 전투의 뒤처리를ㅡ하기 위해 나가 있어 저택에는 많은 기척을 느끼기 어려웠다.
알렌은 악마를 해치운 후,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가주의 안내에 따라 저택에 몰래 들어왔다.
그는 해가 질 때쯤 혼자 가주실로 찾아오라는 언질을 주고는 아네르와 함께 사라졌다. 알렌은 마리아의 상태를 살펴보다 시간이 되자 방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알렌이 저택의 최상층에 도착할 때쯤, 목소리가 들렸다.
“…유감을 표합니다. 악마가 그릴 날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셨을 텐데….”
가주실 안에서 들리는 소리.
알렌은 자신보다 먼저 온 손님이 있다는 사실에 발걸음을 멈췄다.
‘너무 일렀나.’
이렇게 다른 이의 대화를 엿들을 수는 없다. 알렌은 창문으로 보이는 해의 밝기를 가늠하며, 다시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가 돌아가려는 순간.
“그래도, 다행히 라인하르트 가문에서 시간을 맞췄지 않습니까.”
탁-
다리가 멈췄다.
이성으로는 3대 가문의 가주실에 들어간 이가 보통 신분이 아닐 거라 경고하고 있었다. 대화를 엿듣다 들킨다면 적지 않은 곤욕을 치를 거라고.
‘하지만….’
어머니가 라인하르트 가문에 시집온 이유. 드라기아스 가문의 수상한 태도. 그것에 관련된 비밀이 저곳에 있다.
“아무리 몰락했다고 해도 라인하르트 가문. 오래전 찬란했던 과거는 묻혔다고 해도, 그들의 저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들려오는 가주의 말에 알렌은 결정을 내렸다.
듣는다.
이유는 간단했다.
‘가주가 이 시간에 저 손님의 방문을.’
정말 몰랐을까?
알렌이 몸의 기척을 죽였다.
감응력으로 귀의 청각을 극대화했고, 다가오는 다른 이의 기척도 신경 썼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저 그들을 부흥시킨 무기가 제 목을 겨눌 줄 상상도 못 했지 않겠습니까?”
“쓸데없는 소리. 어서 가져온 것을 내려놔라.”
“예, 여기 발원지(發源地)의 샘물입니다.”
부흥? 발원지의 물? 알렌은 저들의 대화를 기억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양이군.”
나중에 다시 찾아볼 필요가 있었다.
그런 그의 마음과 다르게 대화는 익숙하다는 듯 자연스레 이어졌다.
“무려 3대 가문의 직계가 시집을 갔는데, 수작을 부릴 리가 없지요.”
“전령.”
알프레도가 불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을 넘지 말게. 전령의 역할은 물건과 함께 말을 전하는 게 끝이 아닌가?”
“…예, 죄송합니다.”
“그렇다고 자네들을 홀대하겠다는 건 아니네. 거래 관계는 무엇을 내놓냐에 따라 항상 달라지는 법이니.”
그가 부드럽게 말을 바꿔,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야기를 꺼내 보게. 또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대가로 치르려 하는지.”
그 말에 상대는 목을 가다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목하는 아카데미생 몇 명을 이곳에 오도록 해주십시오. 거기까지만 해주신다면 나머지는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의 말을 듣던 알프레도가 혼잣말을 흘리듯 물었다.
“3대 가문의 일을 처리했다는 명성을 줄 셈인가?”
“…….”
“아니면 이 근처에 어디 숨겨진 보물이라도 찾았고?”
“…….”
“그것도 아니라면 루피너스도 파악하지 못했던 강자가 이 근처에 있나?”
“…….”
그 말에 전령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알프레도는 익살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리 얼굴을 굳힐 필요 없네. 서로의 관계에 깊이 관여하지 않는다. 그것이 자네들이 원하는 것이잖나.”
아까 전령의 말을 명백히 비꼬자, 전령은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가주님.”
“알겠네, 알겠어. 자네들의 요청은 들어주지.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무례는 이번뿐일세.”
문 너머로도 그의 기백이 느껴졌다.
한동안 지속되던 침묵이 끝난 것은 다시 알프레도의 말이 이어질 때였다.
“전령은 다른 이로 바꿨으면 좋겠군. 카샤에게 직접 전하지 않겠지만, 알아서 하리라 믿네.”
“…불편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일에 대한 보상은 천천히 생각해두지.”
“예. 원하는 것이 있다면 저번처럼 불러 주시면 됩니다.”
알렌은 대화가 끝나가는 듯하자 몸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도 없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전령의 기척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문이 활짝 열리며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래, 다 들었으니 묻겠네.”
노인은 실눈 사이로 철저히 감정을 숨긴 자신의 손자를 보았다.
“어떻게 생각하나. 알렌 라인하르트.”
리자의 아들아.
* * *
저벅저벅-
“많은 이들이 왜 루피너스가 동부 협곡에 자리하냐고 궁금해하지. 옛날이었다면 몰라도 척박한 토지와 바닥에 가까운 식량 자생력 그리고 적은 인구까지.”
알렌은 앞장서서 그를 안내하는 노인의 뒷모습을 보았다.
최근까지도 단련을 멈추지 않는 듯한 신체.
걷는 걸음은 절도가 있었고, 울퉁불퉁한 동굴의 바닥 따위는 걸림돌조차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있을 곳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오래 머무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거든.”
“그럼 왜 아직까지 있는 겁니까.”
“뭐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알렌은 악마가 원하던 잠든 화신과 그 중앙에 자리했던 거대한 나무를 떠올렸다. 그러나 입은 다른 것을 내뱉었다.
“광산 탓입니까?”
“그것도 있지. 하지만 멀리서 관리하지 못할 것도 없어.”
“그럼 선조의 뜻을 이어 나가기 위함입니까.”
“자네는 그런 것을 좋아하나?”
알렌은 그 물음에 생각할 것도 없이 답했다.
“그런 가문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리석은 놈들이지.”
“많은 가문이 어리석은 놈이 됐군요.”
“하하, 맹랑한 놈.”
알프레도는 알렌의 무례한 발언에 반응하지 않았다. 전령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 그 반응에 알렌은 정말 자신이 그의 손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혈통을 끔찍이 아낀다.’
그건 널리 알려진 루피너스의 대표적인 특징이었으니.
“선조의 위업을 망치는 것이 아닌 이상, 가문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면 후손은 그 무엇을 해도 된다.”
“가문을 위해서라면, 그 어느 것도?”
“그래, 무덤을 파헤치는 것만 아니면 해야지.”
저벅저벅-
“오히려 척박한 땅에서 비옥한 곳으로 가문을 이전한다면, 선조가 되돌아오더라도 찬성할 거다.”
그것이 귀족이고, 가문이며 공동체니까.
하나의 울타리에 속한 이들은 그 울타리 안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럼, 동부 협곡에 있는 이유가 뭡니까.”
“정말 모르겠나?”
알렌은 답하지 않았다.
알프레도 역시 그의 답을 기다리지 않으며, 발걸음을 멈췄다.
“미마메이드(Mimameiðr), 이곳의 이름이다. 우리는 미미의 나무라 부르지.”
알렌은 고개를 들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치렀던 전투의 흔적.
바닥에 자리한 수많은 나무뿌리와 중앙의 거대한 한 그루의 나무.
그리고 그 위에서 공동 전체를 밝힐 빛을 뿜어낸 수탉, 잠든 화신 비도프니르까지.
“루피너스 가문의 비역이며, 우리가 동부 협곡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지.”
그가 걸음을 옮겼다.
“아마 다른 3대 가문에도 비슷한 곳이 있을 게다. 아니, 오래 묵은 가문이라면 비슷한 무언가가 있겠지.”
“라인하르트 가문에는.”
알렌은 며칠 전 꿨던 꿈을 떠올렸다.
고요한 지하, 바닥이 보이도록 맑은 샘, 안개가 모여 만들어진 뱀들.
“…그런 곳이 있습니까?”
“내가 옛날이야기를 하나 해 주지.”
그는 알렌의 대답에 엉뚱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나 알렌은 따로 덧붙이지 않았다. 그가 쓸데없는 말을 하리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몰락 이후, 루피너스 가문의 선조는 귀족이 아니었네. 그저, 평범한 촌장의 아들이었지.”
그는 가문의 비밀이라는 이야기를 꺼내는 데도 주저함이 없었다.
“그런 선조가 어떻게 이 가문을 세웠는지 아나?”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이곳 덕분이겠지.
“이곳을 발견했던 행운 탓이었지. 대몰락 이후, 그저 외부의 혼란에 지하로 몸을 숨기려던 선조가 이곳 덕분에 가문을 세울 수 있었네.”
구불거리는 나무뿌리가 지나온 세월을 증명하는 듯했다.
“그럼 선조가 이곳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알겠나?”
알렌은 생각할 것도 없이 답했다.
“힘, 아닙니까.”
“그래, 그것밖에 없지.”
전란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힘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었으니.
“저 미미의 나무와 계약을 맺는 것. 그로 인해 선조는 순식간에 빛과 번개 그리고 화염을 다루는 힘을 얻었지.”
물론 현재 세 가지의 힘을 모두 다루는 이들은 없네. 가끔 한두 가지만 타고 나는 이들이 태어날 뿐.
“그것으로 많은 고난과 시련을 물리치고, 당당히 이곳에 자리 잡았지. 그런데… 한 가지 부작용이 있었네. 무엇일 것 같나?”
알렌은 문득 떠오르는 소문에 홀린 듯이 입을 열었다.
“…혈족을 아낀다?”
“그건 별문제가 아니지.”
알렌의 말에 고개를 저은 그는, 눈앞의 나무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선조가 나무와 계약을 맺은 탓인지, 우리는 직계와 방계를 가리지 않고 하나로 이어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지.”
마치 나무뿌리처럼.
“그 탓에 가족이 다치면, 제가 다친 것처럼 굴게 되는 거고.”
하지만 그게 문제인가? 오히려, 배신의 위험성을 줄여 귀족에게는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연결을 끊는 방법도 있네. 태어나고 십 년이 넘게 루피너스를 떠나는 것.”
그는 알렌에게 시선을 주었다. 알렌은 저 말이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 깨달았다. 정확히는 자신과 같이 다른 가문에 시집간 자녀의 자식들을.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네.”
루피너스(Lupinus)
본디 탐욕과 약탈이라는 뜻의 꽃말 때문인가, 주위의 토질을 황폐화시키는 꽃의 이름을 딴 탓인가.
“협곡이 말라붙기 시작한 거지.”
그의 시선은 뿌리를 지나 줄기 그리고 잎을 거쳐 그 꼭대기의 신수에게 닿았다.
“우리는 이유를 찾았네. 처음부터 조금 메말랐다고 해도, 협곡이 처음부터 이렇게 메마른 건 아니었거든.”
신수는 황금색 깃털 위로 밝은 빛을 내뿜었다.
“처음엔 날씨 탓인가, 아니면 환경 탓인가 조사를 진행했고…, 끝에는 문제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는 걸 알았지.”
악마를 흡수하던 화신의 모습과 의식을 가진 듯 꿈틀거리던 나무뿌리.
알렌은 입을 열었다.
“나무 탓입니까?”
“그와 연결된 화신의 탓이었지.”
수십 년간 조사한 끝에 나온 진상은 간단했다.
선조가 나무와 계약한 덕분에 힘을 얻었으나, 그 대가로 그들은 다쳐서 잠이든 화신의 몸을 회복시켜야 하는 의무를 가지게 되었다.
협곡이 황폐해진 것도 미미의 나무가 협곡의 생명력을 빨아들인 탓.
“루피너스는 화신을 회복시키기 위해 온갖 일을 시도했지. 시중의 엘릭서와 진귀한 약을 비롯한 모든 것을.”
그는 간단하게 말했지만, 알렌이 생각하기에 그들이 말하는 모든 것은 정말 모든 것일 확률이 높았다.
3대 가문이자 거대한 부를 가진 그들에게 구하지 못할 건은 없었을 테니.
“하지만 실패했다.”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땅의 지력을 빨아먹는 화신에게 일반적인 약은 소용이 없었지. 그렇게… 몇 대가 고생했는지 모르겠군.”
방법을 찾고, 다시 방법을 찾고.
땅이 완전히 메마른다면 나무가 죽을 테고, 나무가 죽는다면 그와 연결된 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계약이 끝날 수도 있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죽을 수도 있는 일.
“그렇게 협곡의 모습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변하고… 최악을 대비해 외부의 활동도 줄일 무렵. 한 천재가.”
그는 그리운 얼굴로 읊조렸다.
“몇백 년 전의 고서에서 가능성을 찾아냈네.”
가문 역사상 존재했던 누구보다 뛰어난 천재.
그녀의 이름은 알렌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엘리자 루피너스. 그 아이가 찾은 방법이 무엇이었을 것 같나?”
그가 품에서 병을 꺼내 들었다.
맑고 맑아서,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것 같은 액체가 자리한 병.
알렌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단서가 합쳐지는 가운데, 알프레도가 노래하듯 느긋하게 흥얼거렸다.
“세상에는 모든 물이 떨어져 발원한다는 샘이 있다네.”
발원지의 샘물이 뿌리로 흘러들었다.
“그 샘은 진실한 마음을 가진 이만이 가질 수 있고-.”
뿌리가 탐욕스럽게 샘물을 집어삼키며, 옅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시체를 멘 조소하는 자가 지키던 샘이었다네.”
한 방울의 샘물까지 빨아들인 나무의 꼭대기에 자리한 가지가 화신을 둘러쌌다.
“시간이 지나 조소하는 자가 땅굴로 숨어들고, 하얀 뱀들만이 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알프레도는 알렌의 눈을 바라보며 마지막 구절을 내뱉었다.
“떠나간 참나무 가시는 언제 다시 되돌아올까 기다린다네.”
엘리자, 자신의 딸이 찾았던 희망.
라인하르트(Reinhardt)
진실한 마음을 가진 자의 가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