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쿠구구구궁-
“화신의 몸을 얻었다면 소모된 힘 따위는 아깝지 않지.”
악마가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리며, 새롭게 얻은 몸을 움직여 봤다.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신체는 가히 본체에 비해도 손색이 없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더 나을 정도.
한동안 웃던 그는 날개를 펼쳐 보이더니 약간 아쉽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흠, 부상을 입어 약체화된 게 흠이라면 흠인가….”
그러나 그것 때문에 화신이 잠들지 않았다면 자신이 몸을 차지할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악마 아니, 이제는 비도프니르라고 불러야 할 존재가 알렌과 마리아를 응시했다. 드높은 화신의 존재감이 두 명을 짓눌렀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것과 다르게 그들의 표정은 덤덤했다.
마치, 이와 같은 상대를 한 번 만난 적 있다는 듯.
실제로 알렌과 마리아는 악마의 변화를 보고도 긴장하지 않았다. 이미 화신과는 맞붙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적 실습 때, 던전 밑바닥에서 탈출한 화신을 상대한 것은 알렌과 마리아 그리고 율리우스였다.
이미 비슷한 존재를 죽여 본 그들은 화신의 존재에 큰 부담감을 느끼지 않았다.
“알렌.”
마리아는 알렌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표정에 인간미가 점점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주위로 하얀 광채가 맴돌고, 머리 위로는 빛의 왕관이 씌워진다. 어느새 여섯 장의 날개를 펼친 그녀는 하늘로 떠오르고 있었다.
“내가 맞춰 주지.”
“응, 부탁해.”
알렌이 검을 집어넣자, 마리아의 날개가 접혔다.
그리고 일순간, 파앙-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가속했다. 악마는 자신 있게 몰아쳐 오는 마리아의 모습에 날개를 홰쳤다.
그러자 그의 황금색 깃털이 붉게 달아오르며 빛줄기를 내뿜었다.
마리아의 몸이 더욱 빠르게 가속하며 몸을 살짝 회전했다.
핑-
빛줄기가 마치 그녀를 피해 가는 것처럼 그녀의 몸을 스쳤다. 악마는 얼른 후속타에 대비했다. 그러나 그가 무슨 짓을 하기 전에 마리아의 검이 먼저 닿았다.
거대한 화신의 몸을 가를 듯 베어지는 검.
마리아의 검이 비도프니르의 가슴에 닿았다. 그러나 검이 닿자마자 비도프니르의 몸이 잔상처럼 흐트러졌다.
꽈릉-
거대한 천둥소리와 화신의 몸이 뒤로 이동했다. 괴물은 그녀가 쫓아오기 전에 천둥을 날렸다.
전격의 줄기가 그녀를 향해 날아오던 때, 그녀의 앞으로 그물이 날아와 천둥을 집어삼켰다. 악마의 시선이 알렌을 향했다.
꽈르릉!
알렌은 날지 못할 거라는 생각과 달리 공중에 떠 있는 괴물을 보았다.
‘흠, 수탉이라도 화신쯤 되면 날 수는 있나.’
겉모습도 수탉이라기보다는, 불사조를 떠올리게 만드는 외견. 알렌의 손이 수인을 맺으며 옆으로 회전했다.
그물에 닿은 뇌전은 이리저리 흩어지더니 마리아를 스쳐 주위 공간을 불태웠다.
그 간극의 틈에 마리아가 끼어들었다.
그녀가 발끝을 툭 하고 두드렸다. 그녀의 주위로 열 개의 검이 솟아올랐다.
다섯 번째 세피라 : 게부라 (Fifth Sephirah : Geburah) 의장 소환.
힘은 무력을 의미하고, 무력은 검에서 나온다.
마리아의 검이 그녀의 정밀한 계산에 따라 괴물의 사각을 노렸다. 악마는 급히 커다란 불의 파도를 일으켰다.
전방을 통째로 불태우는 불의 파도 앞에서, 마리아의 선택은 간단했다.
일방적인 돌진.
그 올곧은 모습, 분명 무모한 것 같았다. 그러나 넘실거리는 파도가 마리아를 집어삼키기 전, 빛의 알갱이가 그녀를 감쌌다.
“또…!”
괴물의 얼굴은 보기 좋을 정도로 구겨졌다.
불의 파도는 그녀를 집어삼켰지만, 그녀의 몸은 무사했다. 그 모습에 악마가 참다못해 소리 질렀다.
“너희들은 뭐냐!”
날개에서 뇌전과 빛이 섞여 마리아를 노렸지만, 쏘는 족족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급히 공격을 피하면 그곳에 갈 줄 알았다는 듯 빛의 검이 날아오며, 운이 좋게 적중하기라도 하면 빛의 알갱이가 막아내며 공격을 무시한다.
“왜 너희 같은 존재가 나타난 것이냐!”
그는 이번 일을 위해 많은 힘을 소모했다.
악마 계약자에게 권능을 나눠 주며, 강제로 현실에 개입해 몸을 움직였고, 바깥의 제단을 통해 일대의 몬스터들을 광폭화 시켰다.
그것만 해도 엄청난 힘의 손실이 있었지만, 감수할 만한 가치는 있었다.
잠든 화신의 몸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 모든 것을 상회할 이득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화신을 상대할 수 있는 강자가 갑자기 나타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 숫자가 합쳐서 두 자릿수밖에 안 되는데?
“거래는 어떤가.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면, 원하는 걸 이뤄주겠다!”
마리아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무기질적으로 공격을 이어나갔다.
악마는 이리저리 공격을 피하며 소리쳤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공격이 그의 몸을 스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결정을 내렸다.
손해를 더 감수하기로.
“어쩔 수 없구나.”
꽈릉-
악마는 본신의 힘을 끌어왔다. 이미 진신마저 몇십 년은 조용히 보양해야 할 처지였지만,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하면 손해만 보고 끝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불완전한 현자의 돌을 이용해 강제로 몸을 차지했는데, 여기서 끝낼 순 없었다.
그가 부리를 벌렸다.
지지지직-
그의 입에서 이상한 음파가 울렸다.
정신의 악마인 그의 특기는 고작 몬스터를 조종하는 게 아니었다. 정신을 흔드는 것이었다. 심약한 사람이라면 기억마저 뒤바꿀 수 있었다.
마리아의 덜컥- 몸이 멈췄다.
“…….”
의외의 상황. 잠시 멈칫하기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이 정도로 영향을 받는다면….
우스운 일이지.
비도프니르는 욕심에 휘둘리지 않고 몸을 날렸다. 악마는 인간처럼 작은 욕심에 휘둘릴 만큼 나약하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마리아에게 접근해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그녀보다 알렌을 더 경계했다. 공격을 무효로 돌리며, 비트는 힘.
그가 남아 있는 한 다른 수작을 부릴 틈은 없었다.
비도프니르의 몸이 잔상처럼 늘어지며 공동의 출입구 중 하나로 달렸다.
「알렌! 괜찮아요?」
알렌은 의식을 뒤흔드는 힘에 잠시 공격을 멈췄다.
별의 세례를 받은 이후 늘어난 정신력 때문에 의식이 흔들린 건 말 그대로 한순간이었다. 그러나 악마를 쫓아가려던 것도 잠시, 알렌은 고민했다.
‘마리아의 상태가 이상하다.’
자신이 한순간에 벗어난 것과 다르게 그녀는 멈춘 상태 그대로 깨어나지 않았다.
이성은 악마를 쫓아가는 것과 마리아의 가치 중 전자에 더 무게를 뒀으나, 후자도 쉽게 포기할 수 없다고 소리쳤다.
알렌은 빠르게 판단을 마치고 검을 던졌다.
“베스틀라!”
「알았어요!」
그녀가 악마에게 향했다. 알렌은 마리아에게 향했다.
지하의 소란을 루피너스 가문이 놓칠 리가 없다. 분명히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지.
알렌은 아직 몬스터 대군이 나타났다는 정보를 알지 못했다.
‘동료 먼저.’
그러나 알았어도 마리아를 우선시했을 것이다.
아직 영지에 있을 적이었다면 무작정 악마를 쫓았겠지만, 알렌도 여러 경험을 겪고 상황을 보는 시야를 넓혔다.
그의 선택에 비프도니르는 기쁨을 느끼고 속도를 더 올렸다.
‘이대로 빠져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 후에 강자들의 시선을 피해서 숨어있다가 나타난다면, 자신의 활동을 누구도 막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을 하며 입구에 가까워졌고.
“찾았다.”
은빛의 궤적에 그대로 들이박았다.
쾅!
악마의 몸이 날아왔던 것보다 더 빠르게 뒤로 날아갔다.
* * *
악마를 향해 날아가던 베스틀라가 몸을 멈췄다.
알렌도 갑작스레 등장한 이에게 시선을 던졌다. 악마가 땅에 몸을 몇 번이나 구르더니 나무뿌리에 부딪혔다.
쾅-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기사는 주위를 획획 둘러보다가, 알렌의 앞으로 다가왔다.
“…청발에 선이 얇은 얼굴. 음… 이리스, 너도 맞는 것 같지?”
히이이잉-
“나도 그렇게 생각해.”
몇 번 머리를 끄덕인 그녀는 단번에 알렌의 앞으로 뛰어내렸다. 악마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은 그녀는 경계하는 알렌에게 다가가더니 대뜸 그를 끌어안았다.
“안녕! 엘리자를 닮아서 너도 예쁘게 생겼구나!”
알렌은 급히 몸을 뒤로 피했지만, 그녀는 그 행동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알렌은 그녀와 포옹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몇 걸음 물러서더니 다시 그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음, 괜히 부탁받았다 싶었는데. 이정도 아들이면 걱정될 만하지.”
“…누구십니까.”
알렌이 엘리자를 아는 듯한 반응에 입을 열자, 그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베르세르크 기사단의 상급기사, 아네르 아인세이트… 지만, 그냥 평범하게 이모님이라고 불러도 된단다.”
마지막에 그녀가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알렌은 그녀의 반응에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어머니와 꽤 잘 어울린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신분도 마찬가지.’
당황했다지만 순간적으로 그의 움직임을 피해 포옹한 움직임을 보면, 저 말에 거짓은 없을 것이다.
은빛 갑옷과 일각수는 꽤 유명한 그들의 차림새였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딱딱하기는.”
그녀는 그의 반응에 고개를 젓고는 뒤로 물러난 알렌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를 도와달라 부탁받았거든.”
“어머니에게서 말입니까?”
“그럼 누가 있겠니?”
알렌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어머니가 이렇게 인맥이 넓었나? 아니, 원래 루피너스 가문이었다면 불가능한 건 아닌데….
그녀는 그의 어깨를 탁탁 치며, 시원하게 몸을 돌렸다.
“그냥 간단하게 생각해. 너를 좀 도와달라고 부탁이 왔고, 나는 들어준 거야. 흔적을 보면….”
아네르의 눈이 바닥에 아로새겨진 전투의 흔적을 읽었다.
“…딱히 필요 없을 것 같긴 하다만은.”
알렌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악마에게 시선을 돌렸다.
악마의 움직임이 없었다. 분명 그녀에게 치여 날아갔다고 해도, 그를 해치울 정도는 아닐 텐데….
그의 예상대로 악마는 금방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나무뿌리에 몸을 부딪친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이건….’
갑작스럽게 힘이 들어가지 않는 신체. 그가 신체의 통제를 잃었다고 생각한 동시에 나무뿌리가 그의, 아니 비도프니르의 신체를 휘감았다.
그와 동시에 그는 몸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기 시작했음을 느꼈다.
정확히는 현실에 현현한 힘 그 자체가, 빨려 들어간다.
‘위험하다.’
그는 자신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음을, 수십 년의 손해를 입었다는 걸 인정했다. 뼈아픈 손해였지만, 그는 빠르게 수습해야 했다.
그러나.
‘……!’
몸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현자의 돌 덕분에 쉽게 차지한 화신의 몸은, 도리어 그를 가두는 족쇄가 되어 그를 옥좼다.
악마는 꼼짝없이 힘을 빨리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아아-”
악마의 비명이 길게 울려 퍼졌다.
그 비명이 멈춘 순간, 공동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공동을 짓눌렀다.
알렌은 마리아를 뒤에 두고, 아네르의 옆에 섰다. 그녀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을 파악한 듯 뿌리에 묶인 화신을 응시했다.
「알렌, 아무래도….」
‘그래, 진짜가 깨어나려는 것 같군.’ 비도프니르는, 악마가 말한 것처럼 깊은 부상을 회복하기 위해 잠든 것에 불과했다.
악마는 그 틈을 노려 불완전한 현자의 돌을 이용해 그 육체를 장악하려 한 것일 뿐. 하지만, 악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힘을 빼앗겼다.
‘만약, 그로 인해 부상을 다 회복했다면….’
알렌이 눈을 가늘게 뜨고, 베스틀라를 붙잡았다. 마리아의 상태가 안 좋지만, 아네르의 신분이 진짜라면 도움이 될 것이다.
비도프니르의 눈꺼풀이 떨렸다.
조금씩 움찔거리던 눈이 뜨여지며, 실눈 사이로 황금빛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던 순간.
“그들은 적이 아닙니다.”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 아직 깨어날 때가 아닙니다.”
늙수그레하나 아직 힘이 가득한 목소리가.
목소리를 들은 탓인지 비프도니르의 눈이 다시 파르르 떨리며 감겼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있군.”
알렌과 아네르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러 출입구 중 한 곳에서 건장한 체격의 노인이 걸어 나왔다.
“아네르 경도 그렇고…, 리자의 아들인 너도.”
그가 알렌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기억 못 할 테니 다시 소개하지, 알프레도 루피너스. 이 가문의 주인이다.”
루피너스 가문의 가주, 알프레도 루피너스.
3대 가문의 주인이 시간에 맞춘 듯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