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쾅! 쾅!
“크허어어엉!”
라이너는 뒤쪽에서 들리는 폭음과 진동을 무시했다.
‘멍청한 도적놈들.’
저들이 왜 살아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미 계획은 반쯤 틀어졌다는 것. 그는 배우지는 못했지만, 상황을 분별하는 능력쯤은 있었다.
그러니 함정을 파며 때를 기다렸지.
하지만 이미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들이 이곳에 왔다는 건 루피너스 가문이 이곳을 눈치챘다는 건가? 아니면, 그들을 돕는 조력자가 있다는 것?
마리아의 실력을 보면, 함정 자체를 파훼할 정도의 실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사태에 되지도 않는 해결책을 생각하기보다, 악마에게 기대는 것이 더 현실적이었다.
주르륵-
평소보다 깊게 찌른 상처에서 흐른 붉은 피가 제단을 적셨다.
그와 동시에 악마가 현현하며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악마는 상황을 파악했다.
“악마시…!”
-피를 바쳐라!
그는 시간을 끌지 않고 팔을 그었다.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오며 그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끄으….”
제단 전체가 붉게 물든 걸로 모자라 흘러내릴 정도로 피가 쏟아졌다. 그러나 제단은 부족하다는 듯 끊임없이 피를 빨아들였다.
폭음은 점차 가까워졌다.
쾅!
“크허어엉…!”
라이너는 불길한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급변한 상황에 그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웨어 비스트 중 하나는 머리가 박살 나 땅에 널브러져 있었고, 다른 하나는 팔 한 짝이 날아가 기회만을 노리며 주변을 맴돌았다.
제일 처음 나섰던 라이칸만이 최대한 대등하게 버티는 형색이었으나, 그도 곧 얼마 가지 않을 것 같았다.
라이너는 급히 외쳤다.
“악마시어, 이제 대책을….”
푸슉-
“대책, 대책을…?”
그는 가슴을 뚫고 나온 검은 손이 무엇인지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체할 틈도 없이 밀려들어 온 고통에 그는 현실을 깨달았다. 아니, 알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왜 저를….”
악마는 계약한 것을 어떻게든 지키는 종족이다.
분명 자신은 그가 시키는 일을 다 완수했으니, 이렇게 헌신짝처럼 내다 버릴 수 없었다.
그의 말에 악마는 무엇을 말하냐면서 손을 비틀었다.
“나는 너에게 능력을 주었고, 아직 대가를 받지 못했다.”
장기가 가닥가닥 끊어지며 라이너의 몸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라이너는 그 가운데서도 어떻게든 입을 열었다.
“…부, 분명히 저는 명령에 따라 일을 했습니다.”
“내가 그것이 대가라는 말을 했던가?”
그러니 계약은 확인을 잘해야지.
그게 끝이었다. 라이너는 더 버티지 못한 채, 허무하게 생을 마감했다.
악마는 라이너를 지켜보지도 않고 손을 더 튕겼다.
“크허어어어어엉!”
점차 지쳐 가던 라이칸스로프의 근육이 부풀어 올랐고, 눈은 광기에 물든 듯 붉게 변했다. 그건 한쪽 팔을 잃은 라이언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돌볼 새도 없이 돌격했다.
크게 울부짖으며 마리아에게 덤벼드는 모습은, 영락없는 광폭화의 증상이었다.
마리아는 예상외의 상황에도 말없이 계산을 끝마쳤다.
다가오는 그들에 맞서 그녀는 새로운 무기를 꺼내 들었다.
열 번째 세피라 : 말쿠트 (Tenth Sephirah : Malkhut) 의장 소환.
그녀의 아래로 새하얀 빛의 왕좌가 솟아올랐다. 그녀가 거기 앉자, 힘이 순식간에 폭증하며 그녀의 온몸이 빛무리에 휩싸였다.
악마는 그 모습에 혀를 차더니 얼른 라이너의 품에서 새하얀 보석을 챙겼다.
그는 빠르게 공간을 빠져나가, 아직 혼란스러운 통로를 향해 나아갔다.
마리아는 그를 향해 빛무리를 쏘아 냈다.
“크아아아아!”
그러나 남은 라이언이 온몸을 다해 막아 내자, 그녀가 다시 힘을 쓰기도 전에 악마가 빠져나가고 말았다.
* * *
“지금이다!”
“죽어어어!”
알렌은 동시에 덤벼 오는 도적의 공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강대한 거인의 힘과 베스틀라의 예기, 그 모든 게 합쳐져 상대의 검이 그대로 박살 나며 상체까지 갈라졌다.
도망간 도적에게 마법을 날리며 몬스터를 처리하기도 잠시, 마리아가 들어갔던 공간에서 폭음이 들렸다.
쾅!
벽 한쪽이 무너질 만한 폭음.
이 정도의 소란이 일어난다면, 밖에서도 이곳의 이상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알렌.”
마리아는 상체가 반쯤 사라진 라이칸스로프의 시신을 내던지며 그에게 다가왔다.
평소보다 감정이 더 옅어 보이는 그녀는, 주위의 시체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악마 못 봤어?”
“악마?”
알렌은 곧바로 감지력을 펼쳤다. 그러나, 그가 그럴 필요도 없이 바닥이 흔들렸다.
쿠르릉-
진동의 진원지를 보자, 거대한 시체 더미들이 모여 하나의 인영으로 모이더니 육중한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콰앙!
알렌은 무너질 듯 진동하는 갱도의 상황 속에서도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악마가 현실에 직접 개입한다고?”
악마는 거래 관계를 중시한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손해를 싫어했다.
그들이 현세에 현현하는 것은 그들의 진체 역시 이곳에 드러내는 것을 의미했다.
악마를 상대할 자는 적다지만, 팔강 정도라면 한층 약화된 악마를 죽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거래를 통해 힘을 늘리며, 일정 이상의 현실에 개입하지 않았다.
알렌도 처음에 자신을 회귀시킨 것이 악마의 짓이라 판단했지만, 예상 범위를 초월한 힘에 의심을 거두었다.
아무리 그들이라고 해도 그에게 준 정도의 힘을 다루지 못할 테니.
‘그런데, 악마가 스스로 움직일 정도라고?’
그런 일은 역사상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다른 이들이 알렌의 변명을 믿는 이유도 악마가 몸을 빼앗았다는 사례가 워낙 희귀하기 때문이었다.
악마는 마리아와 알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신경 쓰지 않고 벽을 후려쳤다.
콰앙! 콰앙!
그때마다 돌조각이 흩날렸고, 얼기설기 엮은 시체들이 터져 나갔다.
알렌은 마리아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가 직접 움직일 정도라면 절대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알렌의 노심이 순간적으로 텅 비었다.
마나가 한곳으로 쭉 빠져나가며, 베스틀라가 하얀빛으로 둘러싸였다.
료스솔.
빛의 태양이 여러 시체로 뭉친 악마의 등에 틀어박혔다.
파아앙!
그 폭음의 사이로 마리아가 천장에 닿을 듯 붙어 떨어져 내렸다. 그녀의 검이 시체 더미를 반으로 쑤욱 가르고 지나갔다.
그러나 마리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알렌이 급하게 송곳을 날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개의 송곳으로 엮인 실타래가 분해되기 시작하는 시체 더미를 꿰뚫었다.
시체 더미가 완전히 사라지자 그 뒤로 부서지는 벽 중간에 아주 얇은 틈 하나로 검은 덩어리가 쑤욱 들어갔다.
“크하하하하! 찾았다!”
그와 동시에 터져 나오는 악마의 환희 어린 광소.
“마리아.”
“응.”
그녀가 뒤로 물러났다. 알렌이 강하게 발을 고정하고 검의 크기를 키웠다.
베스틀라가 대검 정도의 크기로 커지며, 무게도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알렌은 검을 휘둘렀다.
콰앙!
알렌의 힘은 갱도의 벽을 착실히 부숴 나갔다.
알렌은 검을 휘두르면서도 악마가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루피너스의 비밀 장소가 정말 여기인가?’
그곳에 무엇이 있길래 이만한 힘과 손해를 감수하면서 향하는가.
그 의문은 곧바로 해결될 것이다.
잘게 금이 간 벽, 알렌의 팔이 꿈틀거리며 검이 붉게 물들었다.
마나그람.
분노로 담글질 되는 일격이 실금이 무성한 갱도의 벽을 후려쳤다.
쾅!
후두둑 떨어지는 돌가루를 무시하며 앞으로 나아가자, 알렌의 얼굴에 환한 빛이 비쳤다.
“…여기가 놈이 그렇게 찾던 공간인가.”
알렌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전방을 바라봤다.
바이데른이 통째로 들어갈 만한 넓은 공간, 그 공간의 바닥에는 구불거리는 뿌리가 넓은 바닥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시선을 중앙으로 옮기자 그 뿌리에 뒤지지 않을 거대한 나무가 자리했다.
악마는 그 나무의 꼭대기에 있었다.
이 공간 전체를 밝은 빛으로 뒤덮는 물체의 옆에.
아니, 저건….
“…닭인가?”
악마는 황금빛 깃털을 가진 수탉을 보더니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찾았다. 찾았어! 하하하하하! 비도프니르(Viðopnir), 역시 여기에 있었구나! 멍청한 인간들, 이게 무엇인지 알고.”
악마는 그렇게 몇 번이나 웃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하얀 보석을 집어삼키고 수탉 안으로 스며들었다.
“잠든 화신을 이용하지도 않고, 깨어날 수 있게 돕는다고? 하하하하!”
악마의 기쁜 목소리가 들리며 공간이 울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그의 말에 알렌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잠든 화신.”
알렌의 눈이 뒤의 하얀 책을 향했다.
또다.
유적에서 만났던 베드르폴니르는 사살하라 했었지만, 잠든 화신이라 불리는 비도프니르 앞에서 책은 조용했다.
조용히 잠들어 있던 금빛 수탉의 눈이 뜨였다.
“――――――!”
수천 년간 잠들어 있었던 잠든 화신의 몸을, 악마가 통째로 빼앗았다.
* * *
알렌이 루피너스 가문의 비역으로 들어가기 전, 리암은 가까운 폐광의 입구 앞에서 일단의 병력과 대기하고 있었다.
리암과 같은 선임기사 열.
그를 보좌한 수습기사 스물.
6위계 마법사 둘과 그들을 지휘할 방계 혈족 출신 지휘관.
가히 작은 영지는 이들만으로 항복시킬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전력.
그들은 가주의 명령에 따라 폐광에 진입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알렌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망설임 없이 들이닥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대기하기도 잠시, 악마가 등장한 그 시각.
두두두두두-
동부 협곡 전체가 울릴 정도로 많은 발소리가 들렸다.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급히 고개를 돌리자, 그들 눈에 보인 것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괴물의 파도.
마치, 동부 협곡에 숨어 있던 괴물이란 괴물은 모두 나온 것처럼 가히 가늠할 수 없는 수의 괴물이 행렬을 이루었다.
붉게 물든 눈과 중간에 누가 하나 죽더라도 계속해서 앞을 향하는 광기.
“…미친.”
방계 출신의 지휘관.
막스 루피너스는 그들이 향하는 목적지의 방향을 생각해 보고 급히 일어났다.
“당장 도시로 돌아간다! 도시가 위험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대부분의 이들이 급히 철수 준비를 하는 가운데, 리암이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리암 경, 지금 학생들을 돌볼 때가 아니야. 우리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그게 아닙니다!”
리암도 공사를 구분할 줄 알았다.
단지, 그는 이 일의 원인을 짐작했을 뿐이다.
제물이 없음에도 곳곳에 널려 있던 작은 제단들.
처음에는 보이는 족족 부쉈고, 나중에는 지하에서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조차 계획의 일환이었다.
“이 일은 제가 제대로 보고를 하지 못한 탓입니다! 그러니, 성유물과 함께 제단을 부술 인원을 지원해 주십시오!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그의 주장을 들어 본 막스 루피너스는 빠른 판단을 내렸다.
리암의 말이 맞는지도 알 수 없고, 제단을 부순다 해서 일이 해결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능성이 있다면 시도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알렉스! 에쉰! 그리고 수습기사 다섯까지. 리암을 도와 제단을 부순다!”
“알겠습니다!”
남은 이들이 철수한 가운데, 리암을 포함한 몇 명만이 반대쪽으로 달려갔다.
알렌의 자비 아닌 자비로 갱도를 빠져나가던 베롬과 반은 동굴을 빠져나오자마자 다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빨리 안내해, 뭘 그렇게 느릿느릿하게 걸어?”
은빛 철갑을 두른 일각수의 기사.
베르세르크 기사단의 상급기사, 아네르 아인세이트와 운이 나쁘게 마주쳤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도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갑옷에 묻은 핏자국에 그는 고이 도망갈 생각을 접었다.
‘분명히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핏자국이다.’
자신들 전에 다른 이들도 있었다는 의미.
그들도 그녀의 모습을 보고 도망치든 기습을 하든 했을 것이고, 저 핏자국의 주인 중 하나가 됐을 것이다.
반은 겨우 알렌에게서 도망쳐 왔는데, 다시 들어가야만 하는 신세에 한탄했다.
멍청한 베롬은 은빛 투구 사이로 보이는 얼굴을 흘깃거리고 있지만, 그는 아름답다고 해도 도저히 괴물과 같은 이들을 좋아할 수 없었다.
“청발의 귀족 남자 하나를 만났다고 했지?”
“예, 그, 그렇소… 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상관없으니 안내해.”
“예, 예!”
그녀는 밑에 있는 것이 엘리자의 아들, 알렌이라고 확신했다.
처음의 도적을 만난 후, 조금의 난폭한 협상 끝에 다른 도적을 만나 다시 다른 도적에게 안내받았다.
그렇게 수차례의 안내 끝에 그녀는 알렌과 만난 이들을 찾았다.
‘역시 이 방법이 좋은걸.’
푸르릉-
갱도가 좁다고 불평하는 이리스를 달래며 어느 정도 갔을까, 갑작스럽게 갱도 전체가 울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궁-
그녀의 미세한 감각은 이 진동이 바깥이 아니라 지하 안쪽에서 들리는 것이라 확신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이리스 위로 빠르게 올라탔다.
“가자! 이리스!”
히이이잉-
은빛의 일각수가 좁은 갱도를 미친 듯이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 뒤, 베롬과 반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멍하게 중얼거렸다.
“우리는… 어쩌냐.”
“글쎄….”
반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하늘이 우리가 도망치는 걸 원하지 않나 봐.”
그냥 얌전히 잡혀서 죄수가 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들은 조용히 갱도 옆에 몸을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