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알렌과 마리아는 뚫려 있던 갱도 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갱도는 이미 쓰이지 않은 지 오래된 듯 천장을 받치는 기둥에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고, 바닥 곳곳에 버려진 채굴 장비가 널려 있었다.
-키아아아악!
-케에에에엑!
알렌은 덤벼 오는 박쥐를 깔끔하게 베어 내며 손을 튕겼다.
팡!
공간을 울리는 충격파에 코볼트의 머리가 터져 나가자, 다가오던 코볼트들이 멈칫했다.
마리아는 알렌이 코볼트에 집중하는 사이 몸에서 하얀빛을 터트리며 검을 휘둘렀다.
하얀색의 검기가 하늘을 가로지르며 수십 마리의 박쥐 떼를 몰살시켰다.
남은 코볼트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목숨을 잃자, 알렌은 베스틀라를 거둬들였다.
「알렌,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흠….”
숨어 있었던 코볼트와 거대 박쥐가 수시로 나타나고, 조잡한 함정이 신경 쓰일 정도는 됐으나 위협할 수준은 되지 못했다.
그보다 다른 것이 더 문제였다.
「아까는 오른쪽이었으니, 이제는 왼쪽?」
알렌은 눈앞에 자리한 갈림길을 보며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리암 경이 놈들은 버려진 폐광에 숨어 있다고 했지.’
왜 악마 계약자 놈들이 길이 막힌 지하에 숨어 있나 싶었는데, 괜히 그들이 이런 곳을 택한 게 아니었다.
알렌이 감지력으로 이곳을 확인해 본 결과, 폐광의 길은 지나치게 복잡하게 꼬여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속 나타나는 여러 곳으로 갈라지는 통로는 물론이요, 한 번 잘못 방향을 잡으면 원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내 감지력으로도 다 탐색할 수 없을 정도라면….’
도대체 얼마나 넓은 곳인가.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갱도는 복잡했다.
악마 계약자가 숨어들기에 적합할 만큼.
알렌이 그렇게 다시 감지력을 뻗어 보며 최대한 정확한 길을 골라내기 위해 애쓸 때, 마리아가 슬며시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갈림길을 빤히 바라보는가 싶더니 툭 내뱉었다.
“왼쪽.”
“왼쪽?”
“응.”
그녀는 알렌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끝이 지하를 가리켰다.
“왼쪽으로 가면 지하로 내려갈 수 있어.”
“밑에 뭐가 있는지는 알고?”
“위에 있을 때는 애매했는데, 아마….”
그녀는 언제나처럼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악마 계약자?”
* * *
저벅저벅-
지하에서는 유난히 발소리가 크게 울려 퍼진다.
광차를 밀며 파낸 돌을 옮기던 도적 중 하나, 베롬이 작게 투덜거렸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건데, 평생 악마 하수인이나 할 거야?”
그의 목소리에는 짜증과 분노 그리고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툭-
그런 그의 말을 들은 반은 괜히 누가 들을까 팔꿈치로 그를 치며 입을 열었다.
“쉿, 조용히 해. 다른 새끼들이 보면 끝난다.”
“들으면 어쩔 건데, 우리가 이러려고 밑에 들어온 거야? 아니잖아.”
“나중에 말하자고.”
“아니, 시발 들어 봐!”
그는 자신도 크게 말한 게 겁나는지 슬쩍 주위를 바라봤다가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같이 노예로 부려지던 게 억울하지 않냐면서 데리고 온 게 언젠데, 이딴 취급이냐고. 요즘 죽은 놈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봤지?”
계속 이어지는 그의 말에 반은 한숨을 내쉬며, 그를 노려봤다.
“그럼 어쩔 건데.”
“뭐?”
“그럼 어쩔 거냐고. 도망가게? 어떻게?”
“그건….”
베롬이 우물쭈물하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차라리 조금만 버텨. 믿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루피너스 가문의 비밀 장소로 데려다준다고 했잖….”
“그 이야기, 자세히 듣고 싶은데.”
그가 거기까지 말한 순간, 차분한 목소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누….”
“나에게도 들려주겠나?”
옅은 바람이 그들의 얼굴을 쓸었다. 베롬은 다급히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그 행동보다 알렌의 행동이 더 발랐다.
퍽-
“끅….”
뒷목을 정확히 가격당한 베롬은 시야가 검게 변하는 걸 느끼며 그대로 쓰러졌다.
“…….”
알렌은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노려보는 반을 바라봤다. 그에 대한 적의를 감출 수 없으면서도, 쓰러진 친구의 안위를 걱정하는 표정.
‘도적 주제에, 의리는 있다는 건가?’
알렌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신경 쓰지 않고 베스틀라를 겨눴다.
칼끝에 닿은 목에서 핏방울이 떨어지자, 드디어 그의 얼굴에도 공포심이 서렸다.
“방금 이야기를 다시 듣고 싶은데, 알려 줄 수 있나?”
반은 그와 마리아를 번갈아 보더니 이를 악물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소. 이야기를 들은 후에 나와 반을 보내 주시오.”
“그렇게 하지.”
“들어주지 않는다면… 뭐라고?”
알렌은 피식 웃으며 그를 내려다봤다.
“둘 다 살려 줄 테니, 어서 입이나 열도록.”
* * *
마리아는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멀어지는 베롬과 반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들이 시야의 끝에서 사라질 때까지 알렌이 움직이지 않자, 의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진짜 보내 줄 거야?”
“그래.”
알렌이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이 답하자, 그녀는 다시 물었다.
“왜?”
“어차피 저들은 살 수 없을 테니.”
마리아가 설명이 부족한 듯 뚱한 표정을 지었다. 알렌은 베스틀라의 검날을 세심히 닦으며 입을 열었다.
“마리아, 우리가 이곳에 떨어진 지 얼마나 됐지?”
“반나절은… 지난 것 같아.”
“반나절이나 지난 거다.”
루피너스 가문은 3대 가문 중 하나다. 그들의 영역 안에서, 가문의 기사를 붙여 주고도 사고를 당한 상황인데 가만히 있다고?
“그들이 이곳을 파악하지 못했을 리 없겠지. 아직 이곳에 오지 못한 이유는 복잡한 갱도의 길 때문이거나….”
아직 알렌과 마리아가 임무를 계속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거나.
알렌은 아직 추측에 불과한 생각을 삼켰다. 루피너스 가문의 의중을 확실히 알지 못하는 이상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니 저들은 이곳을 빠져나가더라도 곱게 살지는 못하겠지.”
“만약, 빠져나가지 못하고 악마 계약자한테 들키면?”
“그래도 상관없다.”
알렌은 도적이 말했던 악마 계약자의 목적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갱도의 길을 파내서, 루피너스 가문의 비밀 지역에 가면 모두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했소.’
그것이 도적들이 처음에 합류한 이유라고.
지금은 그의 능력 탓에 강제로 따를 뿐이라고 했지만 말이다.
“저들이 시선을 끌어 혼란스러워진 상황에 우리가 난입하기 좋을 테니.”
저들은 자신들이 한 짓의 죗값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럼, 어서 내려가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이유도 없으니.”
“응.”
그들은 빠른 속도로 지하를 독파했다. 마리아 덕분에 길을 잃을 염려도 없었고, 간간이 만나는 도적은 그들을 보자마자 부리나케 도망쳐 쫓아가기만 하면 됐다.
“습겨어억! 습격이다아아아!”
“뭐? 뭐라고?”
몬스터들의 틈에 섞여 일하던 도적들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그들은 급히 몸을 움직여 도망쳤다. 그러나, 몬스터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그들의 습격을 알아차린 기색조차 없었다.
“알렌, 내가 악마 계약자를 찾을게.”
알렌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몸의 빛무리를 일으키더니 하얀 날개를 펼쳐 그들 사이를 꿰뚫었다.
「큰 거 날리고 시작할 거죠?」
‘그래.’ 알렌의 노심에서 실타래가 풀려 나왔다.
얼기설기 엉킨 실타래는 거창으로 변하더니 알렌의 손짓에 따라 날아갔다.
푸우욱-
멍하니 벽을 캐내던 코볼트의 몸이 거창에 몸을 꿰뚫렸다.
거창은 그대로 코볼트 아홉 마리의 몸을 더 꿰뚫고는 벽에 박혀 들었다.
쾅!
알렌은 몇 자루의 창을 더 날린 후, 베스틀라를 잡았다. 그녀의 들뜬 감정이 느껴짐과 동시에 알렌의 뒤로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이계, 이르파스카더스.
알렌이 도망치는 도적의 목을 베었다. 머리가 빙글 솟아오름과 동시에 그림자도 알렌의 움직임을 따라 했다.
“도, 도망쳐!”
“빨리, 빨리 라이너 님께…!”
검은 피부의 그림자가 알렌의 움직임에 맞춰 의식 없이 움직이는 인형을 도륙했다.
소리 없이 생명이 꺼지기 시작했다.
* * *
갱도 안쪽 구석의 작은 제단.
라이너는 피를 바치고 정기적인 대화를 시작하는 중이었다.
-작업은 어느 정도 마무리됐지?
“이제 이틀 정도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루피너스 가문의 혈통은 찾았나?
“그건… 조금만 기다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미끼를 던졌….”
그런데 대화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을 시점, 도적 하나가 몇 번이나 넘어졌는지 상처투성이로 뛰어왔다.
“라이너 님!”
그 모습에 라이너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 작업만 끝마치면 모두 제물로 바쳐야겠군.’
사람한테도 정신 지배가 통했더라면 저런 꼴을 보지 않아도 됐을 텐데.
“무슨 일이냐, 내가 이 시간만큼은 방해하지 말라 했을 텐데!”
도적은 자신의 처우가 결정되었단 점도 모른 체, 매달리는 듯한 심정으로 그에게 외쳤다.
“습격입니다! 습격!”
“드디어…! 악마시어, 얼른 준비를 끝마칠 테니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 잠시 후에 다 끝나면 다시 보도록 하지.
악마는 일이 제대로 진행되는 모습에 소리 없이 모습을 감췄다.
악마가 사라지자, 그는 얼른 도적에게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는 상대의 전력을 파악해야 했다.
“상대의 전력은 어떻지? 인원은? 아니, 기사는 포함되어 있나?”
“그, 그게….”
쾅! 콰광!
그는 악마와 라이너의 대화를 보고 입을 열기 힘들었지만, 들려오는 파괴 소리에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서 말해! 누가 왔지?”
“…아카데미 학생들입니다.”
“그래, 일단 기사는 준비해 둔… 뭐?”
그가 다시 묻기도 전에 도적의 머리가 날아갔다. 그 모습을 멍한 모습으로 지켜보던 라이너는, 백색의 빛이 날아들자 그때가 돼서야 정신을 차렸다.
“이런 미친!”
수욱-
간발의 차이로 머리를 스치는 검에 그는 등골이 오싹하게 변했다. 얼른 시선을 들자, 백광을 휘감은 마리아가 그를 내려다봤다.
그녀는 무언가 계산하는 듯한 얼굴로 주위를 살피더니, 무미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생명의 나무 (The Tree of Sephiroth)
뱀의 길 (Way of the Serpent)
“3합 후 개체 소멸이 가능하다고 판단.”
본능이 경종을 울린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했다. 지금 당장 전력을 꺼내지 않으면.
“악마 계약자, 라이너.”
자신이 죽는다고.
“라이카아아안――――!”
쾅!
라이너의 고함에 마리아 옆 벽면이 부서지며 무엇인가가 그녀를 날려 보냈다.
“크허어어엉!”
마리아가 고개를 들자 기다란 갈기의 늑대 머리 괴물이 흉포한 야성을 그렸다.
인간과 늑대를 반반 섞은 듯한 외모의 괴물이 광폭해진 눈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라이너는 아까운 마음에 이를 갈았다.
“루피너스를 상대할 비장의 수가….”
그의 능력은 괴물의 정신 지배.
인간 같은 경우는 몇 번이나 실험했지만 백치로 만들기만 할 뿐 정신을 지배할 수 없었다.
그러나 라이칸스로프라면?
수인도 인간도 되지 못한 달의 일족이라면 어떨까.
다행히 실험은 성공적이었고,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세 마리의 웨어비스트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걸 통해 최대한 루피너스의 방심을 끌어내어 방계를 사로잡을 생각이었는데….
“크아아앙!”
라이칸스로프의 팔이 꿈틀거리며 거세게 내려쳤다. 마리아는 공격이 날아올 줄 알았다는 듯, 한 끗 차이로 피하더니 손목을 빙 돌려 놈의 목을 찔렀다.
라이칸스로프는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피해 냈지만, 목에 얕은 실선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압도할 줄 알았던 그의 기대와 다르게 조금씩 밀리는 상황에 그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라이언! 호그! 너희들도 저년을 막아!”
쾅! 쾅!
마리아의 발밑이 터져 나가며 거대한 덩치의 멧돼지 머리가 그녀의 발을 붙잡았다. 그녀가 벗어나려는 찰나, 반대쪽 벽면이 박살나며 황금색 갈기가 폭발적으로 뻗어 왔다.
마리아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그들의 공격에 대처했다.
잡히지 않은 발을 땅에 두드렸다.
일곱 번째 세피라 : 네차흐 (Seventh Sephirah : Netzach) 에메랄드 장미가 피어나며 그들의 정신을 순간적으로 멍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고개를 흔들고는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그들을 단숨에 뚫기는 어려운 상황.
마리아는 괴물들의 뒤를 바라봤다.
무엇이 급한지 작은 제단 앞으로 손을 긋는 라이너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무결하고도 무정하며 완벽한 정신이 이를 놓치면 안 된다고 속삭였다.
마리아가 판단을 내렸다.
숨겨진 세피라 : 다아트(Daath)
“아바타(Avatar) 역천사 산달폰(Sandalphon)”
테트라그람마톤 엘로아 베 다트(Tetragrammaton Eloah Va Daath) 인간에게 숨겨진 신이 명백히 그 모습을 드러내리라.
좌우의 세 개씩 커다란 날개가 드러나며, 그녀의 모습이 변했다.
대몰락과 함께 사라졌던 천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