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뚝뚝-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유독 깊게 울린다.
하얀 안개가 한 치 앞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어둑한 지하의 고요함과 규칙적인 물방울 소리가 뒤섞인 장소.
그곳에서 알렌은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었다.
새근새근-
누군가의 품이 퍽 안심이 되는지 그는 안락함과 깊은 편안함에 고르게 숨을 내쉬었다.
흐릿해지는 의식 사이로 들리는 조심스러운 걸음 소리와 곁에서 꾸물거리는 온기.
무슨 상황인지도 알 수 없는 찰나, 멋대로 입이 열렸다.
“…빠.”
아이가 칭얼거리는 듯한 소리.
그 말에 조용히 걸음을 옮기던 남자가 시선을 내렸다.
푸른 머리카락과 그가 알던 것보다 젊은 얼굴.
그는 아이가 잠에 깬 듯하자, 다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알렌, 귀족가의 장남은 항상 의젓해야 한다.”
그러나 입에서 나온 말은 표정과 달리 엄했다.
“율리우스를 보거라. 너보다 먼저 깨어났음에도 조용하지 않느….”
“꺄아!”
율리우스가 이름을 불린 것에 반응하듯 웃음을 터트렸다.
가이엘은 그 모습에 입을 다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크흠, 아직 아이니 어쩔 수 없지.”
저벅저벅-
그는 지금이라면 절대 보이지 못할 얼굴로 아이들을 바라봤다.
그 눈에는 미안함과 죄책감 그리고 책임감과 기대감이 한곳에 서려 복잡하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꺄하!”
“꺄아아!”
그러나 아이들은 그런 그의 마음도 모른 채 그의 옷깃을 붙잡으며 서로 장난치기 바빴다.
머지않아 그가 멈춘 곳은 어느 샘의 앞이었다.
아주 맑은 듯 샘의 안쪽까지 다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바닥을 볼 수는 없는 샘.
그는 샘 앞에서 천천히 무릎 꿇었다.
가이엘은 한탄과 슬픔 그리고 한 가닥의 기대를 담아 속삭였다.
“이런 선택을 해서…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반드시 약속하겠다.”
주위의 안개가 그의 곁을 맴돌며 수많은 뱀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너희들만큼은 가문의 업을 짊어지지 않게 하마. 그러니.”
그가 손을 내리자 아이들은 천천히 샘물로 가까워졌다.
“빠아?”
“꺄?”
아이들의 순진한 표정에 가이엘은 표정을 일그러트리더니, 망설이듯 손이 느려졌다가….
“지금의 나를 용서해 다오.”
단호한 얼굴로 변해 손에 힘을 줬다.
풍덩-
순식간에 시야가 굴절되며 바닥을 향했다.
“…는 선조의 위업을 저버릴 수 없다.”
요동치는 샘의 위로 목소리가 물속까지 울렁였다.
“……명 문제는 반드시 내가 방법을 찾으마.”
숨이 턱 막혀 오며 의식이 검게 물들었고, 숨이 넘어가던 최후에―
“…………서는 뭐든지 하겠다. 그러니.”
한 마디가 귓가에 박혀 들었다.
“미안하다. 아들아.”
* * *
알렌이 눈을 떴다.
‘방금 그 꿈은….’
언제의 일인지도 모를 과거의 일. 알렌은 꿈의 내용이 신경 쓰였지만, 우선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먼저였다.
몸에 느껴지는 고통이 없는 것으로 보아, 부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다.
감각이 깨어나며, 바쁘게 주위를 훑었다. 깊은 어둠은 그에게 큰 장애가 되지 못했다.
감응력에 따라 시야가 증폭되며 어둠을 조금씩 꿰뚫어 보기 시작했다.
무너진 바위, 짙게 퍼진 흙내, 찢어진 생도복 그리고 마리아의 얼굴…?
“깨어났어?”
마리아가 얼굴을 불쑥 들이밀자, 알렌은 자신이 무슨 자세로 있는지 파악했다.
뒤통수에 느껴진 탄탄한 감촉.
“…아까부터 돌봐 준 건가?”
알렌은 상체를 일으키며 감사를 표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더니 담백하게 입을 열었다.
“악몽은.”
“악몽?”
“악몽 꾼 거 아니야?”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알렌은 잠시 목 뒤에 느껴지는 식은땀에 멈칫했다. 멍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악몽… 인가?”
알렌은 꿈의 내용을 더듬었다.
처음 보는 장소와 곧이어 보였던 푸른 샘.
제가 경험한 지도 몰랐던 기억과 젊어 보이던 가이엘의 얼굴.
가이엘은 권력을 위해 동생을 버렸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군.”
“그래?”
“그래.”
아직 제대로 밝혀진 건 하나도 없었다.
자신도 모르는 라인하르트 가문의 비밀과 몰락해 가는 가문으로 시집온 엘리자의 목적.
수상한 드라기아스 가문의 행동까지.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수렴되고 있었다.
알렌은 괜한 깊은 생각에 빠지지 않았다. 지금 현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할지도 몰랐으니.
알렌은 손으로 허리춤을 더듬다, 베스틀라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마리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마리아, 혹시 떨어지면서 내 검은 어디….”
「저 여기 있어요!」
알렌이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베스틀라가 빠르게 그에게 날아왔다.
마리아의 표정을 보니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
모습을 드러내는 게 불가피했기에 알렌은 그녀에게 별말을 하지 않았다.
“주위는 어떻지? 떨어진 이후에 기억이 없는데….”
「당신, 정말 운이 좋았다니까요?」
그녀는 알렌이 떨어진 직후 쓰러진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을 때, 마리아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번에는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 근처에 갱도의 벽이 무너져서 거기로 급히 들어왔죠.」
당신 몸은 마리아가 챙겨 줬고요.
다행히 갱도 전체가 무너질 정도는 아니라서 알렌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무언가 발견한 건 있나?”
「저희가 떨어진 곳은… 보시다시피 막혔어요.」
그녀는 검 끝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알렌이 고개를 돌려 그들이 들어왔다는 틈을 확인했다.
‘…올라가는 것은 무리겠군.’
돌무더기로 막힌 곳을 억지로 뚫는다면 갱도 전체가 무너질지도 몰랐다.
“그럼 다른 곳은?”
「통로의 양쪽 중 뒤쪽은 폐광인지 막혀 있고, 앞쪽은 너무 길어서 안 가 봤어요.」
“그런가….”
그렇다면 갈 수 있는 곳은 하나밖에 없다.
알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통로가 한 곳밖에 없다면 생각할 것도 없었다. 베스틀라와 이야기를 끝낸 알렌이 마리아를 보았다,
“마리아, 통로가 한 곳밖에 없으니 그곳으로….”
“나도 들었어.”
“뭐?”
그녀는 알렌의 믿을 수 없다는 눈빛에 뚱한 얼굴로 답했다.
“나도 들었어, 알렌.”
“…어떻게?”
베스틀라는 거인이 아니면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했다. 알렌이 베스틀라를 쳐다보자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저도 몰라요.」
그녀의 작은 목소리에 마리아는 미간을 좁히더니, 베스틀라를 쳐다봤다.
베스틀라는 곧장 알렌의 뒤로 도망쳤다.
“작게 말하면 안 들려. 그러니 그냥 말해.”
“알았다. 유의하지.”
알렌이 의문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 대답에 만족한 듯 앞서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마리아 카리타스.
그녀에 대해 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다.
알렌이 생각에 잠긴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 * *
“지금 뭐라고 했지?”
묵직한 저음이 크지 않은 집무실의 아래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 목소리를 정면에서 듣던 리암의 몸이 움찔거렸다.
“리자의 아들이 함정에 걸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더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루피너스 가문의 주인, 알프레도 루피너스는 그가 가져온 소식에 눈썹을 꿈틀거리며 그를 내려다봤다.
그 시선에 마력 같은 유무형의 힘이 실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수십 년을 3대 가문의 정점으로 지내 온 그 세월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존재감을 발했다.
“내가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나, 리암 경. 리자의 아들이니 편의를 봐주라고.”
“예.”
“어릴 때부터 가문에서 키워, 반쯤 혈족이라 볼 수 있는 자네였기에 그만큼 믿었는데…. 매우 실망스럽군.”
움찔-
리암은 변명하지 않았다. 잘못을 저지른 건 저지른 것이다. 그에 대한 추한 변명이나 부정은 그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었다.
“…시체라도 반드시 가지고 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살아 있다고는 조금도 생각할 수 없나?”
“예.”
리암은 마지막으로 본 광경을 떠올렸다.
바닥에 균열이 가는 동시에 지하 속으로 떨어지던 그를, 그 위로 돌조각들이 떨어져 거대한 돌무덤을 만들어 냈다.
자신도 살 수 있으리라 장담할 수 없는데, 아무리 그들이 특출나다고 해도 고작 학생들이 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남은 도적들은 모두 생포해서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을 심문했으니, 대략적인 위치를 추정….”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철컥-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며 들어온 것은 엘린이었다.
그녀는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던 리암을 힐끔 바라보더니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아직 죽지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잠깐 그게 무슨….”
“계속 말해 봐라.”
리암은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봤지만, 알프레도는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여기서 말해도 괜찮겠습니까?”
“리암 경은 혈족이나 마찬가지다. 한 번의 실수는 넘어갈 수 있지. 물론 그 실수가 끔찍한 결과를 부르기 전이라면, 루피너스는 혈족을 우선시하네.”
“…가주님.”
담담한 그의 말에 리암은 뭉클한 마음에 조용히 고개를 내렸다.
“예, 그렇다면… 비역을 확인해 본 결과, 아직 알렌 님과 이어진 뿌리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부분의 이상은 없고?”
“조금의 흠집이나 자국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상황에서도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과연, 리자의 아들이라 말할 정도는 되는구나. 알프레도는 기대와 흡족함을 담아 입을 열었다.
“아직 아무런 문제가 없다지만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니 언제든 나설 수 있게 준비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리암 경, 리자의 아들에게 한 번 더 문제가 생겨서는 안 될 것이네.”
“반드시 결과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럼, 나가 보게. 그 아이가 위험하다고 생각되지 않으면 천천히 지켜보지.”
리암은 한 번 더 고개를 숙이더니, 힘찬 걸음으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철컥-
엘린은 그가 나서는 걸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주님, 아무리 리암 경이 충성스럽다지만….”
“엘린, 지금 방계 중 미혼이 누가 있던가.”
그녀는 그 말에 자신이 알프레도를 너무 쉽게 봤음을 깨닫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당장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그래…. 충성은 쉽게 살 수 없지만, 가족은 쉽게 만들 수 있지. 그걸 기억하도록 하거라.”
“예, 이번 일이 끝나면 바로 만남을 주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도 집무실을 나갔다.
혼자 남은 노인은 자신의 발밑을, 그보다 더 아래에 있을 가문의 비역을 떠올렸다.
“그를 들여보내 달라고 했지.”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겠군.
그는 엘리자가 했던 부탁을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에게 있어, 기다림은 익숙한 것이었다.
* * *
붉은 암석으로 가득 찬 동부 협곡의 외곽.
루피너스 가문의 손길이 잘 닿지 않는 이곳에 하얀 갑옷을 입은 기사 하나가 은빛의 철갑을 입은 독각수(獨角獸)를 타고 힘차게 달렸다.
그러다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벽 앞에 도착하자, 그들도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하아….”
독각수에서 뛰어내린 그녀는 진절머리 난다는 얼굴로 주위를 돌아봤다.
“도대체 바이데른은 어디 있는 거야….”
호리호리한 체형에 어울리는 얇은 목소리.
베르세르크 기사단의 상급 기사, 아네르 아인세이트.
친우인 엘리자의 부탁을 받아 이곳까지 달려온 그녀는 중간에 길을 잃고 말았다.
“그냥 다른 단원한테 천마(天馬)를 빌려 왔어야 했나.”
베르세르크 기사단은 입단한 단원에게 말을 한 필씩 내어 준다.
남성 단원은 하늘을 나는 페가수스를.
여성 단원은 지상을 가로지르는 유니콘을.
남성의 경우에는 아무리 애를 써도 유니콘을 탈 수 없으나, 여성 단원은 친분에 따라 페가수스를 빌리는 것이 가능했다.
그녀와 같은 상급 기사에게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이대로 늦으면 엘리자가 또 뭐라 할 텐데.”
같은 아카데미 동창.
별것 아닌 관계일지도 모르지만, 그녀에게 엘리자의 부탁은 둘도 없는 친구의 부탁이었다.
그렇게 그녀가 어느 방향으로 갈지 다시 생각하던 중, 저 끝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저건….”
도적이다.
도적은 이곳의 지리를 잘 알 것이다.
잘 모른다 하더라도 도적 떼한테 안내를 맡기면 뭐라도 건지는 것이 있겠지.
“가자, 이리스.”
판단을 끝마친 그녀는 말의 애칭을 부르며 올라탔다. 일각수는 자신의 주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힘차게 달렸다.
멀리서 그녀를 발견했는지, 도적이 도망치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속도를 올렸다.
대륙 최고의 명문 기사단이자 인류의 창, 더글라스 아벨이 이끄는 기사단의 상급 기사가 알렌을 돕기 위해 동부 협곡에 도착했다.
그저 친우의 부탁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