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죽어라!”
해진 옷의 사내가 검을 들고 알렌에게 달려왔다.
알렌은 그 모습을 보며 손을 튕겼다. 한순간에 나타난 수십 가닥의 실타래는 날붙이로 엮여 공간을 꿰뚫었다.
도적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캉!
운이라도 좋았는지 날붙이가 검을 막으며 튕겨 나갔다. 그 모습에 도적도 얼떨떨했는지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달려들려 했지만….
푸슉-
“억….”
요행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시차를 두고 날아온 날붙이는 그의 머리를 단숨에 꿰뚫었다.
그렇게 마지막 도적을 처리하자, 리암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뒤로는 사지 중 한 군데가 사라져 꿈틀거리는 수십의 도적이 깔려 있었다. 심문하기 위해서 죽이지 않은 거겠지.
알렌이 한 치의 동요도 없이 도적을 처리하자 그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이거 너무 고생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하하.”
허탕을 쳤던 처음과 다르게 추적은 조금씩 진척을 보였다.
이틀이 지났을 때는 악마 계약자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고, 나흘이 지났을 땐 놈이 어디로 향하는지까지 추측할 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성유물의 조각이 반응하는 방향으로 가자 도적들이 숨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알렌이 그들을 악마 계약자가 있는 장소로 인도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심문하기 전에 잠시.”
리암은 성유물의 조각을 꺼냈다.
우웅-
성유물 조각이 반짝거리며 무언가에 반응했다.
사악한 힘에 저항하듯 강해지던 진동은 구석에 있는 작은 제단을 발견했을 때 절정에 달했다.
광산촌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흔적을 따라 이동하기만 해도 알렌이 가려던 방향과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알렌이 무슨 행동을 할 필요도 없이, 그들은 알렌이 봤던 마을의 근처까지 순조롭게 이동했다.
“…이거 처음부터 성유물을 사용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리암은 아쉬움이 섞인 얼굴로 중얼거렸다.
요즘 에스테도르의 준동으로 흑마법사와 관련된 사고가 부쩍 증가했다. 거기다 음지로 떠도는 마족의 존재까지. 악마 계약자의 일은 우선순위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해도, 성유물을 이용했다면 진작 잡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가문의 입장에서는 다른 위험분자를 처리하기 위해 효율적인 선택을 한 거지만, 그 상황에서도 피해자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
리암은 그 사실이 안타까운지 표정을 흐렸다.
“이제라도 잡을 수 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요.”
알렌의 말에 정신을 차린 그는 작게 만들어진 제단을 박살 냈다.
콰앙!
이곳까지 오면서 제단을 몇 개나 박살 냈는지 모른다.
리암은 악마 계약자의 계획을 방해하고 있음에도 찜찜하다는 얼굴을 감출 수 없었다.
“이건 또 무슨 의미인지, 참.”
제단은 악마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까지 오면서 발견한 제단 어느 곳에도 제물이라곤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제물을 바치는 게 아니라면 계약한 악마와 더욱 긴밀히 연결돼야 할 이유가 있다는 건데….
리암은 지금까지의 경험을 곰곰이 떠올려 보더니 판단을 끝마쳤다.
“아무래도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것 같습니다.”
그가 무슨 계략을 꾸미고 있든 그것이 바이데른에 좋은 것은 아닐 것이다.
알렌은 고개를 끄덕이다, 마리아를 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시체를 향하는가 싶더니 지그시 땅을 바라봤다.
붉은 피가 암석을 더욱 붉게 칠하고 있음에도, 그녀의 몸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뭔가 걸리는 게 있나?”
그녀의 능력을 본 알렉이 조금의 희망을 담아 물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모르겠어.”
마리아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녀의 주름진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잠시 살아 있던 도적들을 분류하던 리암은, 알렌과 마리아에게 입을 열었다.
“심문은 제가 할 테니 조금 쉬고 계십시오.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닐 겁니다.”
그의 배려를 그들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렇게 리암이 몇 명의 도적을 끌고 가는 도중, 베스틀라가 입을 열었다.
「알렌, 그 구슬 한 번 더 쓸 거예요?」
‘아니…,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괜히 경각심을 줄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이미 악마 계약자가 자신이 추적당하고 있는 걸 눈치 챘다고 해도 위치를 완전히 발각당한 것과 모르는 것은 차이가 크다.
차라리 발각돼도 상관없을 지점까지 간 게 아닌 이상 여기서 놓칠 수는 없다.
-끄아아아악!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비명이 들려왔다.
간헐적으로 들리던 비명이 완전히 끊어졌을 때쯤, 리암이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거 저희가 잘못 생각한 것 같군요. 사람들 사이에 숨어서 제물을 노리려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가을에 가까워진 탓일까, 서늘한 바람이 몸을 쓸었다.
“놈은 현재.”
버려진 폐광에 숨어 있습니다.
* * *
파삭- 파삭-
규칙적인 소리가 폐광의 깊은 구석을 울렸다.
소리의 주인은 코볼트였다.
하나가 아닌 수십의 코볼트. 그들은 멍한 눈빛으로 곡괭이를 휘둘렀다.
파삭-
수십 마리의 괭이질에 아무리 단단한 벽이라도 버틸 수 없는지 빠른 속도로 길이 뚫렸다.
그렇게 파낸 돌조각들은 고블린이 옮겨 광차 위로 담았다.
돌조각이 가득 광차에 실리면 근육질 오크 두 마리가 광차를 이끌고 돌을 버리러 간다.
그렇게 수십, 수백의 몬스터가 버려진 탄광의 지하를 드나들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의식이라고는 조금도 않았고 그저 멍하니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라이너는 흥분감에 몸을 떨었다.
‘정말, 정말 대단한 권능이다.’
그는 희열에 잠긴 눈으로 자신의 지배하에 놓인 괴물들을 바라봤다.
광산촌에서 착취에 시달리다 죽을 운명이었던 그는, 깊은 지하 구석에서 제단 하나를 발견했다.
평소라면 절대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그는 홀린 듯 제단에 피를 바쳤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악마와 계약을 한 상태였다.
그 후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자신을 괴롭히던 놈들 모두를 제물로 바쳤다. 그 와중에 자신을 돌보던 이들까지 죽여 버렸지만…, 사실 상관없지 않을까 싶었다.
‘이 정도 능력을 받았는데.’
그 정도 대가라면 싸게 가져간 거겠지.
악마와 계약하기 전의 그라면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눈치챘겠지만, 그는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그 모습을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
그의 곁으로 추레한 차림의 남자가 다가섰다.
“라이너 님,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아, 그런가?”
그는 두려운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는 도적을 따라 작은 제단 앞으로 돌아왔다.
엄숙한 표정을 지은 그는 단검으로 손바닥을 길게 그었다.
주륵-
피가 작은 제단의 표면에 떨어지자, 제단이 옅게 진동하더니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잘하고 있겠지?
그는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머리를 땅에 박았다.
쾅-
이마에 피가 흘러내렸지만, 그의 모습에는 조금의 불만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예! 말씀하신 대로 몬스터를 모아 지하를 파내고 있습니다!”
-내가 말했던 방향과 한 치의 오차도 없고?
“처음에는 헤맸지만, 이제는 안정기에 접어든 상태입니다.”
-잘했다. 라이너. 이번 일이 성공한다면, 너는 내 사도의 자리를 받게 될 것이다.
악마의 목소리는 음울했지만, 앞으로의 상황에 대한 기대감이 넘실거렸다.
“반드시,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피가 제단에 모두 스며들자, 악마의 목소리는 멀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곧 사라졌다.
악마가 강림한다면, 이 지상에 저 초월자를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의 사도로서 보살핌을 받을 것이고….
“그, 라이너 님….”
자신의 생각을 방해하는 목소리에 그가 인상을 찌푸리자, 도적이 겁먹은 얼굴로 급히 외쳤다.
“루피너스! 루피너스 가문이 드디어 저희를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에 그는 화색이 밝아진 얼굴로 외쳤다.
“드디어? 그래, 몇 명이지? 루피너스의 직계는 있나? 아니, 누가 나섰지?”
그의 폭풍 같은 물음에 도적은 그의 기분이 나빠지기 전에 급히 입을 열었다.
“멀리서 몇 명 보내서 확인하니, 세 명이라고 합니다. 선임 기사 하나에 아카데미 학생 두 명으로 보인다고….”
그의 대답에 라이너는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사렸나?’
괜히 사람들을 제물로 바치다 루피너스 가문에 처리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악마 역시 그걸 바라는 것 같지 않았고.
그렇기에 사람에게 능력을 시험하다 몇 명을 백치로 만든 것 빼고는 별다른 흔적을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완전히 숨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분이 계획의 완성을 위해서 루피너스 가문의 혈통이 필요하다 했지.”
기왕이면 방계 중 하나가 토벌을 지휘했으면 좋으련만.
그는 품 안에서 악마가 내어 준 특별한 돌을 만지작거렸다. 이걸 사용하기 위해서는 루피너스 가문의 혈통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경각심을 줘야겠어.’
이들을 죽인다면 다음에는 방계 혈통의 가문원이 제대로 된 전력을 직접 이끌고 올 것이다.
“아카데미 학생이 두 명이라고 했나?”
“예, 예!”
“놈들을 죽이든 떨어트리든 선임 기사가 쫓아갈 수 없게 만들어라. 기사는 가문에 돌아갈 수 있도록 건들지 말고.”
“아, 알겠습니다!”
그는 미덥지 못한 놈의 모습에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반드시 기사가 학생들을 포기하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루피너스 놈들은 질기다고 하니까!”
그도 이 지역 출신이었기에 루피너스 가문의 소문 정도는 알았다.
루피너스 가문은 혈족과 가문원을 끔찍이 아낀다. 그건 가문의 성향으로 정착되어 기사까지도 끈질긴 성격을 가진다고.
그가 한 번 더 경고를 입에 담자, 도적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대들었다가 정신이 나간 자신의 동료처럼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라.”
도적은 살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더니 급히 갱도를 달렸다.
타다다닥-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길게 울려 퍼지며 잔상처럼 남았다.
라이너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몬스터들에게 향했다.
악마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길을 뚫을 필요가 있었다.
* * *
벌써 몇 명의 도적들을 죽였을까.
처음 죽인 도적들에 이어 다른 도적 떼로.
그렇게 꼬리를 물듯 몇 개의 은신처를 파괴하며 나아가자, 도적들도 일행의 움직임을 눈치챈 것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숫자가 줄어들더니, 마지막으로 잡은 도적의 숫자는 다섯이 채 되지 않았다.
리암은 이곳의 지리를 알고 있는 듯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이 앞은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도적들은 별 볼 일 없지만… 아무래도 악마 계약자와 연결되어 있는 듯하니 무엇이 준비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알겠습니다.”
협곡의 틈, 평범한 이들은 알지 못할 좁은 길을 통과하니 수십 명은 족히 넘는 도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알렌 일행을 발견한 즉시 큰 소리로 외쳤다.
“준비한 대로 죽여라!”
“동료들의 복수를 하자!”
“어차피 적은 세 명에 불과하다!”
수십 명의 도적이 잡스러운 무기를 들고 달려드는 찰나, 리암은 평소 전투했던 대로 대지를 박찼다.
쾅!
사람의 몸이 강철의 갑옷에 부서지며 그대로 날아갔다.
그런데 평소와는 달리 놈들은 겁에 질린 얼굴을 하면서도 끝없이 그에게 달라붙었다.
그가 검을 세차게 휘두르자, 도적들의 몸이 저항 없이 썰려 나갔다.
그럼에도 도적들은 그에게 간절한 얼굴로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리암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놈들은 다른 놈들과 다르군.’
궁지에 몰려서 그런가? 조금이라도 겁을 먹고 도망치던 다른 도적들과 다르게 목숨이라도 걸린 것처럼 그에게 덤벼들었다.
리암은 의아한 얼굴을 하면서도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좀 더 깊숙이 놈들의 속으로 들어갔다.
“죽어라! 죽어!”
한편, 리암과 달리 움직이지 않고 마법을 날리던 알렌은 인상을 찌푸렸다.
‘뭐 하는 짓이지?’
도적들이 적다.
리암에게는 부모의 원수를 맞이하는 듯 도적 대다수가 달려들었지만, 알렌과 마리아 쪽으로 향하는 도적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것도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듯 가까이서 덤벼들기보다는 활이나 창을 던지며 견제하기 바빴다.
‘무슨 이유가 있을 텐데….’
알렌은 서서히 차오르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아무리 감지력을 넓게 퍼트려도 이 근처에 저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리암과 합류하는 게 먼저라 판단한 그가 마리아를 쳐다봤다.
“마리아, 지금 리암 경에게 합류하는….”
쿵-
바닥이 흔들렸다.
알렌의 표정이 변했다. 그가 무언가를 하기 전, 바닥이 심하게 흔들리더니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알렌!」
마리아가 알렌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 모습을 본 리암이 급히 움직이려고 했지만, 살아남은 모든 도적이 그의 몸을 붙잡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젠장, 놔라!”
그는 급히 움직였다. 그러나 끈질긴 도적들의 저항에 결국 놓치고 말았고.
콰아아아앙-!
눈앞에 쌓인 거대한 돌무더기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표정이 멍하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