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다음 날 아침.
여행의 여독을 풀기 위한 시간은, 1학년 중 특출난 실력을 갖춘 그들에게 하루면 충분했다.
저택을 나가기 전, 엘린은 마리아에게 따로 하얀 투구를 내어 줬다.
용사의 5대 신기중 하나라고, 용사의 후예가 이곳에 오는 조건으로 대여해 주는 것이라고 말하고는 별일이 없으면 사용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하얀 투구는 그 이름 그대로 투구 전체가 하얗게 칠해져 보기에도 눈에 띄었기에 그녀도 수긍했다.
악마 계약자에 대한 세세한 정보와 지원 물품을 받은 알렌은 마리아와 함께 도시를 나섰다.
루피너스 가문에서는 도시를 나서는 그들에게 한 명을 길잡이로 내어 줬다.
‘실제 길잡이 역할보다는… 감시 혹은 보호의 의미가 있겠지.’
이 일을 루피너스 가문에서 직접 해결하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되니 그냥 실전을 겪을 기회를 줬다는 게 맞을 것이다.
거기에 엘리자의 의도가 섞여 들어 자신을 불러들였고.
“아하하하, 며칠간 잘해 봅시다.”
길잡이로 따라온 사람은 루피너스 가문의 기사단에 속해 있는 기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리암입니다. 현재 기사단의 선임 기사 중 하나입니다.”
순박한 얼굴에 덩치가 큰 중년의 남성은 원래 그런 성격인지 만났을 때도 얼굴에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알렌 라인하르트입니다.
“마리아 카리타스.”
그는 마리아의 짧은 말에도 불만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알렌한테도 말을 놓으라며 종용했다.
“원래 나이를 먹으면 젊어지고 싶은 법 아니겠습니까? 하하하하.”
“…저는 괜찮습니다.”
“언제나 괜찮으니 편하게 불러 주십시오.”
붙임성도 좋고 친화력도 높은 성격.
필시 기사단에서도 적을 만들지 않고 두루두루 친하게 지낼 성격이겠지.
다그닥 다그닥-
그들은 루피너스 가문에서 제공한 말을 타며, 악마 계약자의 흔적이 마지막으로 발견됐다는 곳으로 가고 있었다.
적당한 속도로 달리던 중 알렌이 입을 열었다.
“리암 경, 그래서 앞으로 추격해야 할 악마 계약자에 대해 잘 알고 계십니까?”
그의 물음에 리암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 추격에 참여했으니 안다면 아는 편입니다.”
“그렇다면 그에 관해 설명을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 당연히 해 드려야지요.”
리암은 별것도 아니라는 듯 흔쾌히 수긍했다.
알렌은 루피너스 가문에서 받은 정보를 이미 숙지했다. 그러나 현지에서 얻은 생생한 정보 또한 놓칠 수 없었다.
“우선… 저희가 쫓는 악마 계약자는 이름이 엄청나게 알려진 것은 아닙니다. 최근 타락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아니었다면 저희가 처리했지 않겠습니까?
호승심이 돋는 듯 잠시 웃던 그는 알렌이 말없이 기다리자, 얼른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본명은 라이너. 나이는 24살. 저희가 가는 장소도 여기서 이틀 거리에 있는 광산촌입니다.”
협곡의 길 위로 희미하게 아른거리는 마을이 보였다.
알렌은 말을 타며 저곳과 비슷한 마을을 이미 몇 번이고 보았다.
“그곳이 그가 태어난 광산촌일 겁니다. 알다시피 루피너스 가문은 광석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알렌이 저번 축제에서 우연히 구했던 회류석도 이곳의 특산물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그만큼 광산촌도 많이 생겼는데…, 라이너는 그 광산촌의 주민 중 하나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알렌은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불확실함에 의아함을 느꼈다.
“추정, 입니까?”
“그게….”
리암은 잠시 부끄러운 듯 웃음으로 얼버무릴 듯하다가, 알렌의 눈빛에 착잡한 얼굴로 답했다.
“협곡이 넓고 광산이 많은 만큼 저희의 눈을 벗어난 이들도 있습니다. 아마, 그는 불법으로 만들어진 광산촌에서 착취당한 것 같습니다.”
“…흠.”
“저희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그 광산촌의 주민 모두가 악마의 제물로 바쳐진 뒤였습니다. 그 후로 그는 사라진 듯 잠적을 했고 말입니다.”
알렌은 받은 정보와 다르지 않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대로라면 별다를 건 없는데….’
무슨 이유로 엘리자가 그를 이곳으로 불러야만 했던 걸까.
“그리고 음….”
리암은 거기까지 말하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는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혹시 다른 특이한 점이라도…?”
“후. 일단 확정된 건 아닙니다.”
그는 기억을 떠올릴 듯 몇 번 침을 삼키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희는 추적 중 그의 짓으로 보이는 피해자를 몇 명이나 발견했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게 그의 짓인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모두 정신이 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알렌이 특기할 만한 점에 귀를 기울이자, 그는 말한 김에 다 말하겠다는 듯 자세히 설명했다.
“보통 악마 계약자는 악마에게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그를 위해서 인간을 제물로 바치지요. 그 수단은 실로 악랄하여 악마 계약자가 보이는 즉시 사살하는 방침을 따릅니다.”
알렌이 율리우스에게 살해당했던 회귀 전과 같이.
악마 계약자는 마경을 만드는 에스테도르와 같이 발견 시 사살이 기본 지침이었다.
“그런데 저희가 발견한 피해자는 모두 백치가 된 것 같이 정신이 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몸은 어디 한 군데 상처도 없이 멀쩡했지요.”
“그래서 그의 짓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예. 정황상 그의 짓인 건 확실하지만, 보통 악마 계약자와 다른 행동과 아직까지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아 우선순위도 많이 떨어졌지요.”
알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만 나간다…. 영혼만 빼앗은 건가? 악마가 그럴 이유는 없을 텐데.’
확실히 특이한 점이었다.
아직 어머니가 그 악마 계약자를 쫓으라는 이유를 완전히 알지 못했어도, 저 상황만으로 그를 붙잡을 이유는 충분했다.
“그럼 속도를 냅시다. 그놈의 흔적을 다 둘러보려면 일주일은 족히 걸릴 테니 말입니다. 이럇!”
리암이 선두로 말의 속도를 높였다.
알렌도 그의 뒤를 따라 속도를 빨리했다. 마리아도 그들의 속도에 맞춰 고삐를 강하게 쥐었다.
그렇게 이틀이 흘렀다.
생각보다 야영을 많이 겪은 탓일까.
리암이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그들은 큰 문제없이 악마 계약자가 거주했던 광산촌에 도착했다.
후웅-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낡은 건물을 쓸었다.
고작 몇 주 사용하지 않았을 뿐임에도 광산촌의 모습은 몇 년이나 방치되었던 것처럼 음산한 모습을 보였다.
곳곳에 튄 핏자국과 이리저리 무너진 건물들도 그때의 참상을 보여 주는 듯했다.
“그럼, 여기까지 왔는데, 수색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이미 이곳을 루피너스 가문이 수색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다시 이곳에 온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걸 사용할 생각입니다.”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으며, 품에서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작은 조각처럼 보였는데,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어 평범한 물건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성유물입니까?”
“오… 아시는군요. 맞습니다. 다만, 진짜 성유물이라면 제가 사용할 수 있을 리 없지요. 이건 성유물의 조각입니다.”
보기에는 이렇지만, 사악한 흔적에는 반응하니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그는 웃으며 성유물 조각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것이라도 있는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 그리고 엘린 님께서 주신 수색에 도움을 줄 물건을 마리아 님이 가지고 계신다고….”
마리아는 훈련받은 말이라 자신을 거부하지 않는 게 좋은지, 자신이 타고 온 말을 빤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녀는 리암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고, 알렌을 쳐다봤다.
하얀 투구도 성유물에 버금가는 물건이니 대답할지 말지 물으려는 것이리라.
‘잠깐, 그렇다면….’
알렌은 품에 있던 구슬의 존재감을 느꼈다.
하얀 투구와는 다른 용사의 5대 신기중 하나 천상의 눈.
저번 유적 실습 이후로 사용하지 않았으니 악마 계약자 하나를 추적하는 데 무리는 없겠지.
‘하지만 곧바로 찾아낸다면 의심을 산다.’
어머니도 이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겠지.
그러니 성유물 조각을 든 기사를 동행시키고 마리아에게 하얀 투구까지 빌려줬을 것이다.
아니었다면 알렌 홀로 부르거나, 그가 알지 못하는 다른 수단을 썼을 것이다.
알렌은 우선 마리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밝힐 수는 없지만… 엘린 님께서 따로 맡기신 물건은 있습니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그럼 다행이군요. 저는 저쪽을 탐색할 테니, 여러분은 이곳을 탐색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는 가문에서 그들에게 무언가를 따로 내어 줬음에도 별로 개의치 않은 모습을 보여 줬다.
오히려 웃으며 따로 자리를 피해 주기까지.
알렌은 그의 배려에 최소한 리암 경 그가 어머니의 사람이거나 혹은 다른 이, 예를 들어 가주에게 따로 명령을 받았으리라 짐작했다.
아무리 배려해 준다고 해도, 3대 가문의 기사 중 하나가 그렇게 자신을 낮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하하, 그럼 노을이 질 때쯤에 이곳으로 다시 모이겠습니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마을의 반대쪽으로 향했다.
마리아와 둘만 남게 된 알렌은 잠시 고민했다.
‘천상의 눈을 밝히느냐 마느냐.’
마리아는 어머니를 만난 적 없음에도 그와 루피너스 가문의 관계를 짐작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알렌이 천상의 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알렌은 잠시 그녀의 눈을 바라보다, 품에서 구슬을 꺼냈다.
“마리아, 이것이 무엇인지 알겠나?”
“…응.”
그녀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아공간에서 투구 하나를 꺼내 들었다.
별다른 장식이 없지만, 하얀 투구는 그 자체만으로 사악한 힘에 저항하며 정신 공격을 막아낸다.
“이거랑 같은 거.”
마리아는 천상의 눈을 보고도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역시.’
그녀는 알렌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알고 있었나?”
“알고 있었어.”
“언제부터?”
“처음부터.”
“그렇다면….”
알렌은 그녀의 성격을 떠올리며, 괜히 돌려 묻지 않았다. 차라리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왜 말하지 않았지?”
“말해야 해?”
“아니, 용사의 후예라고 불리고 있으니. 용사의 신기도 자신의 것이라 주장할 수도 있지 않나?”
“왜?”
그녀의 눈에는 정말 왜 그래야 하냐는 듯한 의문이 서려 있었다.
그 모습에 알렌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보이는 이상한 집착과 알고 있었으면서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에 자신의 패를 공개했다.
“아니, 내 입장에서 생각했다면 그랬을 수도 있다는 거다.”
“응.”
그녀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렌은 그 짐작이 맞았음에도 별로 기쁘지는 않았다.
결국, 그녀의 반응을 짐작하고 떠본 것에 불과했으니.
귀족은 진심을 잘 내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정석과도 같음에도 그녀의 순수함 앞에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세상에 저런 사람만 있다면 모략이나 심계가 필요 없지 않을까 하고.
‘불가능하기에 이상(理想)이지.’
괜한 생각을 털어 낸 그는, 그녀와 함께 수색을 시작했다.
수색 범위를 돌아다니며 무언가가 나올까 싶었지만, 역시 몇 주나 지난 탓인지 별다른 흔적은 없었다.
하얀 투구 역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늦었나.’
핏자국이 이미 거뭇해져 떨어져 나갈 정도였으니.
그렇게 해서 그들이 맡은 범위의 수색을 끝마쳤을 때, 알렌이 입을 열었다.
“그럼 마리아.”
“왜?”
“잠시만 나를 지켜 줄 수 있겠나?”
그녀는 갑작스러운 부탁에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렌은 품에서 천상의 눈을 붙잡으며 구슬에 의식을 집중시켰다.
그러자 의식이 붕 떠오르는 느낌과 함께 아래에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마리아의 고개가 위쪽을 향하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앞을 바라봤다.
알렌은 그 모습에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용사의 후예라고 불린다지만, 저 능력은… 뭐지?’
그녀가 숨기는 과거와 관련이 있나?
알렌은 잡생각을 떨쳐 냈다.
구슬의 백색 반점은 빠르게 잿빛으로 물들고 있다.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찾아야 할 장소는.’
사람이 아니라 장소를 기점으로.
너무 세세한 조건을 고른다면, 악마 계약자가 알아챌 수도 있었다.
이 구슬의 단점은 넓은 검색 범위를 가지는 대신, 대상이 쉽게 알아 챌 수 있었으니.
‘동부 협곡 지대 안에 존재하는 악마 계약자 라이너가 현재 위치한 곳 근처의 마을.’
가까이 다가간다면 성유물이든 용사의 신기든 반응을 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퍼트리자, 알렌의 머리로 하나의 장소가 떠올랐다.
장소를 알아낸 즉시 천상의 눈의 사용을 멈췄다.
마리아가 되돌아봤다.
“끝났어?”
“그래. 돌아가자.”
“응.”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알아냈다.
이제 리암 경과 함께 단서를 찾아내는 척하며 방향을 조정하면 될 일이다.
알렌이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다 끝내셨습니까-!”
시야의 끝에 리암이 모닥불을 피워 놓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