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 빙의를 싫어함-129화 (129/212)
  • 129화

    엘닉스가 다녀간 다음 날 오후, 알렌은 카트린느와 정기적인 만남을 가졌다.

    “…그래서, 율리우스는 요즘 새로 입학한 신입생들한테 빠져 있다니까요?”

    빠르면 2주에 한 번, 늦으면 한 달에 한 번씩 알렌은 그녀에게 율리우스의 근황을 들었다.

    “라인하르트 가문에서 왔다는 카밀라라고 하는 기사와 제국에서 왔다는 막내 황녀한테 자꾸 접근하는 거 있죠?”

    카트린느는 차가운 얼굴로 비아냥거리며 율리우스의 행동을 비난했다.

    “듣기로 이번 입학시험에서 수석으로 들어왔다고 하는데, 그걸 보고 바로 접근하는 게 말이 돼요?”

    다른 누군가가 듣기에 그녀가 질투하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얼굴에 있는 건 순전히 혐오감 하나뿐이었다.

    알렌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언급한 단어에 집중했다.

    “지금 막내 황녀라고 하셨습니까?”

    “아, 네. 혹시 무언가 걸리는 점이라도 있어요?”

    “…아닙니다.”

    제국의 막내 황녀, 마하 하뷔에론.

    ‘그녀가 입학할 때인가.’

    천고의 재능을 가졌다는 그녀이니 율리우스가 접근하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1년 후에, 그녀 때문에 황태자가 급사한다는 것.

    알렌은 이 일을 막아 내기 위해 2황자 일라이자와 접점을 만들었다.

    ‘차라리 그녀에게 먼저 접근해서 카트린느처럼 회유하는 게 나을 수도 있었을까.’

    하지만 악마에 씐 율리우스를 구한다는 공통된 대의를 가진 카트린느와 다르게 마하 하뷔에론, 그녀가 원하는 건 권력이다.

    알렌이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제국의 황위 계승에 끼어드는 건 위험했다.

    겨우 그녀를 황태녀의 자리에 앉힌다고 해도 그녀가 그걸로 만족할지도 알 수 없었고.

    ‘그녀의 처리는 계획대로 일라이자 황자한테 맡기는 것이 맞겠군.’

    알렌이 결정을 내렸을 때, 카트린느는 잘 관리된 금발을 쓸었다.

    우아한 몸짓에는 그녀가 꾸준히 노력했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런데…, 알렌 공자. 이대로 괜찮은 게 맞나요?”

    카트린느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일과는 조금의 빈틈도 없이 짜여 있다.

    훈련과 관리 그리고 율리우스와의 접점을 통한 일상의 반복.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결과는 그녀에게 초조함을 심어 주기 충분했다.

    “솔직하게 말할게요. 저는 이미 놈의 곁에 수많은 여자 중 하나가 됐을 뿐이고, 이대로는 시간이 흘러 봤자 무엇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이 안 들어요.”

    나중에 중요한 때에 배신한다고 해서,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고요.

    그녀의 불안감이 섞인 물음에 알렌은 잠시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검은 책에, 알렌이 봤던 장면이 있었다.

    『──율리우스는 마탑 도시의 습격을 겪고 결심을 끝마쳤다. 위험하더라도 기연을 얻을 차례라고, 다만 이걸 얻기 위해서는 한 명이 더 필요하다.』

    “위험할 수도 있지만, 성공한다면 율리우스의 수많은 목줄 중 하나를 틀어쥘 수 있습니다.”

    『──이건 서로의 신뢰감이나 믿음이 제일 중요하며, 율리우스 자신보다 이 기연을 같이 얻을 파트너가 더 중요했다.』

    “다만, 이것의 성공 여부는 공녀에게 달려 있습니다.”

    『──자신에게 가진 감정, 그것이 얼마나 크냐에 따라서 얻을 기연의 크기가 달라지니까.』

    “악마가 아닌 진짜 율리우스, 그에 대한 공녀님의 사랑은.”

    알렌은 동공이 물결치는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질문을 던졌다.

    “얼마나 진실하십니까?”

    흐릿한 동공에 반사된 감정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비틀린 사랑.

    그것으로 충분했다.

    * * *

    카트린느와 만남을 마치고 알렌은 걸음을 옮겼다. 학생들에게 각자 임무가 할당되자 아카데미는 언제 소란스러웠냐는 듯 다시 침묵하기 시작했다.

    떠나는 학생과 배웅하는 학생.

    마차의 바퀴 구르는 소리와 말의 역동적인 발소리가 대로를 울렸다. 알렌은 조용히 짐을 챙겨 약속 장소로 천천히 향했다.

    푸른 하늘은 혼란스러워지는 대륙과 상관없이 언제나 같은 모습만을 보였다.

    그런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밖의 도시와는 전혀 다른 높다란 건물의 그늘 속에 파묻혀 느긋이 걷던 알렌에게 배스틀라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도마뱀 놈들한테는 어떻게 할 생각인데요?」

    ‘드라기아스 가문?’

    「네, 결국 어제 애매하게 답을 안 했잖아요. 거절하겠다고 말한 것도 아니고.」

    ‘원래는 거절하는 게 맞겠지. 뻔히 함정인 곳에 들어갈 필요도 없으니.’ 엘닉스 드라기아스.

    그는 학기 초에 접근했다가 알렌이 거절하자 그 이후로 언제 그런 모습을 보였냐는 듯 거리를 벌렸다.

    마치 그때의 일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것처럼 행동해 놓고서, 다시 접근하는 뻔뻔함은 과연 귀족의 표본이라고 할 만했다.

    ‘그런데….’

    율리우스가 말하는 원작, 그리고 자신이 겪었던 회귀 전의 세계에서도 드라기아스 가문이 무언가 직접 움직인 적은 없었다.

    이번에 그들이 알렌을 초대한 행동 자체가 이례적인 변수라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가문의 비밀에도 닿을 수 있을 것 같아 고민이 되는 것 어쩔 수 없군.’

    「함정인 걸 알아도요?」

    ‘그래, 함정인 걸 알아도.’ 영지에 돌아가지 않고, 다른 곳에서 가문의 내부 사정을 들을 기회는 적다.

    그 기회가 될지 모르는 그들의 초대를 거절하는 건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임무를 마친 후에 답변을 준다고 했으니, 그때까지 생각해 봐야겠지.’

    「에휴…, 참 뭐가 그렇게 숨기는 게 많아요? 정말 진절머리 난다니까요?」

    알렌은 쓴웃음을 지으며 동의했다.

    과연 자신들이 귀족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한다는 듯 복잡하게 얽힌 매듭은 직접 풀기에 까다로웠다.

    “알렌.”

    “…마리아?”

    언제나 들어도 무뚝뚝한 목소리. 알렌은 벌써 도착했나 싶어 고개를 돌렸다.

    햇빛 아래 반짝이는 백발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바람에 하늘거렸다. 간편한 장비 위로 아카데미의 표식이 달린 망토가 묘하게 어울려 같이 바람에 살랑였다.

    “왜?”

    그녀는 감정을 알기 힘든 백색 눈동자로 알렌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수한 의문이 서린 몸짓, 그 모습에 알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싶어서.”

    “알렌도 빨리 나왔잖아.”

    “아니…, 됐다.”

    알렌은 괜히 설명하려던 마음을 접고, 준비한 마차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행동에 의아해하던 그녀는 이내 상관없다는 듯 발을 뗐다.

    * * *

    -덜컹덜컹

    마차가 울퉁불퉁한 길을 가로질렀다.

    도시에서 새로 만들어진 신식 마차라서일까, 이 정도의 악조건은 거뜬하다는 듯 마차는 무리 없이 나아갔다.

    ====================

    [임무: 악마 계약자 추적]

    임무 지역: 대륙 동부 협곡 지대의 도시 바이데른.

    임무 개요: 현지의 3대 가문 루피너스 가문의 지원을 받아 악마 계약자 추적 및 사살. 악마 소환 저지 빛 제단 파괴. 악마 관련 서적 제거.

    임무 대상: 알렌 라인하르트, 마리아 카리타스.

    준수 사항: 실제 악마가 소환되었을 시 퇴각하며, 3대 가문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요청하라.

    최종 승인자: 갈슈딘 아카데미 이사장 아나스타샤 프세우도.

    * 본 명령서의 기한은 최대 한 달입니다. 그 안에 처리하지 못했을 경우 임무 실패로 간주합니다.

    ====================

    알렌은 자신과 마리아에게 떨어진 명령서를 다시 읽으며 루피너스 가문에 대해 떠올렸다.

    ‘3대 가문이자 전전대 팔강을 배출한 가문.’

    거기에 용사의 5대 신기 중 하나인 하얀 투구를 보관하고 있다 알려진 곳.

    세간의 명성과 자신의 혈족을 끔찍이 아끼기로 소문난 그들은 왕성한 활동을 벌이는 다른 3대 가문들과 다르게 동부 협곡 지대에 박혀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혹자는 그곳에 고대의 유적이나, 숨겨진 비밀이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는 모를 일이다.

    ‘혹시 모르지. 사실 그들이 협곡 지대에 자리 잡은 이유가 따로 있을지.’

    듣기로는 루피너스 가문은 대몰락 직후에 막 그곳에 자리 잡을 때까지만 해도 강과 숲이 드문드문이나마 남아 있었다고.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이제는 숲 하나 찾기 힘들 정도로 황폐해졌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가난하다는 뜻이 아니었다.

    지금도 그들은 그곳에서 나는 광석과 회류석과 같은 재료들로 유명하다.

    알렌이 궁금한 것은 ‘굳이’ 아카데미의 학생을 불러서 일을 처리할 필요가 있냐는 것이었다.

    ‘아무리 값싼 인력이라고 한들, 학생들을 부를 필요는 없을 텐데.’

    그들의 영역 안에 있는 악마 계약자를 3대 가문이 처리하지 못할 일도 없을 테니, 무언가 다른 뜻이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우리를 미끼로 다른 일을 하려는 건가?’

    지금쯤 이곳에서 벌어진 일들이 무엇이 있을까.

    알렌은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도 그럴듯한 무언가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건 검은 책에서도 마찬가지.

    회귀 전의 율리우스도 실력을 키우고자 기연을 얻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직접 알아볼 수밖에 없나.’

    알렌은 마리아를 힐끔거렸다.

    그녀는 말수가 적어 하루에 십 분 이상 대화를 나누는 일이 드물었다.

    눈을 감았다.

    불그스름하게 물든 협곡의 바위가 멀리서부터 알렌을 반겼다. 이제부터 만날 상대는 3대 가문 중 하나, 적당히 긴장할 필요가 있다.

    * * *

    도시 바이데른의 중앙.

    거대하게 세워진 내성의 최상층에 있는 가주실에는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노인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거대한 근육과 흘러나오는 위압감은, 그가 보통 노인이 아닌 3대 가문의 수장이라는 점을 절로 깨닫게 했다.

    그는 평소 냉정한 표정에 걸맞지 않은 그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 리자의 아들이 이곳에 온다고?”

    딸의 애칭을 입에 담은 노인은,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협곡의 광경은 언제나 볼 때마다 가슴을 들끓게 했지만,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협곡으로 이어진 길의 끝이었다.

    “예, 엘리자 님이 몇 달 전에 찾아오신 이후 이곳에 불러들인 것 같습니다.”

    그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엘리자와 비슷한 생김새의 여성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정실이 아닌 첩의 딸.

    사생아라고 할 수 있는 위치였지만, 루피너스 가문은 그런 이들마저 품을 정도로 혈족을 끔찍이 아꼈다.

    “…그걸 위해 용사의 5대 신기중 하나인 하얀 투구를 같이 오는 아이에게 빌려주기로 약속했고요.”

    “리자의 아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걔를 눈속임으로 같이 불렀다고?”

    “예.”

    “그렇다면 됐다.”

    노인은 가문을 떠난 딸이 함부로 일을 처리했음에도 개의치 않았다.

    그녀가 그렇게 행동했다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으리라.

    가문을 위해 라인하르트 가문으로 시집을 간 딸이다. 딸은 남편을 사랑해서 결혼했다 하지만, 어찌 아비의 마음이 편할 수 있을까.

    “그리고 엘리자 님이 말하기를, 가주님께서 직접 그를 맞이할 필요는 없다고 합니다.”

    “흐음….”

    그가 더 말해 보라는 듯 조용히 말을 경청하자. 그녀는 말을 이어 나갔다.

    “다만, 자신이 이곳의 가문 일원임을 밝히며 자신의 방으로 안내해 달라고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리자가 그것만 말했을 리 없을 텐데?”

    그의 말에 침을 한 번 삼킨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들과의 거래 장면을 우연인 척 보여 줄 수 없겠냐고…, 부탁드렸습니다.”

    “리자가 부탁을?”

    그녀는 가주의 눈치를 봤다. 그만큼 이번 부탁은 가문의 전체 이익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예. 그리고 이건 순전히 가주님의 판단에 맡긴다면서 괜찮아 보인다면 가문의 비역(?域)에 들어갈 기회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그는 침묵했다.

    한동안 생각을 끝마친 그는, 눈을 감고 그녀에게 명령을 내렸다.

    “모두 받아들이도록 하겠다.”

    “알겠습…!”

    “리자의 아들이 하는 일이, 악마 계약자를 추적하는 일이라고 했나?”

    “예.”

    노인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의 처리 과정을 보고 결정하도록 하지. 그럼 나가도록 해라. 나는 잠시… 혼자 있고 싶으니.”

    그가 손을 휘젓자 그녀는 우아하게 고개를 숙이고 발걸음 소리 하나 없이 문을 빠져나갔다.

    노인은 혼자 남은 방 안에서 멍하니 딸의 얼굴을 떠올렸다.

    가문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다며 집을 떠나던 그녀를.

    노인의 얼굴에 회한이 깊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