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마탑 도시가 습격당한 사건은 단순히 에스테도르의 돌발적인 일로 끝맺지 못했다.
그들은 그 이후로도 대륙 전역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 사건을 일으켰고, 마을 전체가 몰살당하거나 제물로 바쳐지는 일은 며칠 간격으로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흔해졌다.
그러나 그 사건의 크기가 대륙 전체를 혼란에 빠트렸다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대몰락 이후 일개 작은 귀족 가문에서도 후계자를 뽑을 때 무력이 필수적인 조건으로 책정될 정도로 무력의 가치가 높아졌다.
귀족 가문을 비롯한 일정 수준의 무력을 가진 세력의 관점에서 갑작스럽게 늘어난 사건은 그들을 귀찮게 만들 수는 있었겠지만 위협을 주지는 못했다.
죽어 나가는 것은 산이나 계곡 깊숙이 마을을 만들어 살아가는 이들뿐.
다만, 다른 세력들에게 이번 사건으로 경각심을 심어 주는 데는 성공했다.
갑작스럽게 존재를 알린 마족과 그들을 소환하는 듯한 에스테도르의 만행.
그 두 가지는 다시 한번 마왕이 이 세상에 강림할 수도 있음을 암시했다.
그에 따라서 아카데미의 방침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는 초대 마왕 이후 다른 마왕이 나올 때를 대비해 재능 있는 이들을 모집해 실력을 키웠다.
그러나 이번 사건 전까지 세상은 평화에 잠겨있었고, 아카데미의 목적성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흐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왕이 다시 나타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 하나만으로 아카데미의 태도가 바뀌기에는 충분했다.
어찌 되었든 그들의 목적은 새로 나타날 용사와 그를 도울 실력자들의 양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바뀌게 된 것은 바로 이것.
“…갑작스럽게 실전 수업을 1학년까지 확대하라니.”
며칠 전 회의의 결과라며 내려온 지시에 행정실에서 새로 입학한 1학년의 유적 실습 장소를 분류하던 이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마탑 도시에 그런 기습이 발생할 줄 누가 알았다고.”
“제가 뭐라 합니까? 그냥, 시간이 촉박하니 그런 거지요.”
아카데미에서는 3학년 1학기부터 학기의 반을 실전 수업으로 채운다.
2년의 이론 교육으로 배울 수 있는 건 모두 배웠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3학년 학생들은 실력에 따라 대륙 전역으로 흩어져 주변 세력의 도움을 받아 각종 문제를 해결한다.
각 지역의 세력들은 작은 지원만으로 일을 해결할 수 있기에 이득이고, 아카데미는 학생들의 실전 경험이 쌓이기에 이득이다.
죽어 나가는 건 학생들이었지만, 그들도 얻는 게 없다 할 수 없었다.
각 지역의 세력과 연줄을 만들 수도 있고, 졸업 후 어디로 향할지 가늠해 볼 수도 있었다.
“그건 맞는 말이에요. 우리가 그 뭐시냐, 기계도 아니고 어떻게 수백 개의 지원 요청을 일주일 만에 분리하냐고요….”
“그렇다고 대충한다면 죽는 건 우리가 아니라 학생들이니.”
“다해 가니 조금만 더 힘냅시다!”
그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아카데미의 요청에 응해 지원 요청을 보내온 세력들의 면면도 만만치 않았다.
“발자크 왕국, 리브레 왕국, 3대 가문에… 아니 제국은 또 왜….”
“값싸게 쓸 수 있는 인력 탓이지 않습니까.”
“고위직에 졸업생들도 많으니 학생들의 가치는 물론, 어떤 용도로 쓸지까지 정해 놨겠지요.”
시간이 지나 현재 이름이 알려진 세력의 고위층 중에 아카데미의 졸업생이 한 명이라도 없는 곳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에스테도르 때문에 사고로 인력이 부족해진 가운데,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쓰기 좋은 지원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들이 보내온 정보도 겨우 분류가 끝났으니, 이제 학생들의 수준에 따라 장소만 나누면 되겠지요?”
“예, 그렇게 합시다.”
그들은 신중하게 일을 진행했다.
먼젓번에 있었던 유적 실습의 일이나 마탑 교류회의 사고처럼 이번 일마저 중간에 문제가 생기게 둘 수 없었다.
그것이 그들의 책임이 아니라고 한들, 책임감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문서 작업 하나에 수십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으니.
“그럼 다음으로 루피너스 가문의 요청은….”
“악마 계약자가 악마를 소환하는 것 같으니, 그를 처리한 이들을 보내 달라.”
“…이건 1학년 학생이 맡을 수준은 아닌 것 같은데 말입니다.”
적어도 4학년, 완전히 실력이 안정기에 접어든 졸업 준비생 정도가 아니라면 악마를 쫓는 일에 보내기에는 위험할 터.
“그렇다면 4학년을….”
“아니, 여기 조건을 보면 공간계 마법사나 빛의 마력을 가진 이를 보내오면 용사의 5대 신기중 하나인 하얀 투구를 빌려준다고 합니다.”
“하지만 졸업 준비생 중에 그런 조건을 가진 이는 없을 텐데요?”
“시선을 더 낮추면 되지 않습니까.”
그 말에 그들은 한 명을 떠올렸다.
1학년이라기에 지나치게 강한 실력.
현재 졸업생들과 비교해도 그녀가 우위라는 평가가 과반수며, 진위는 불분명하나 용사의 후예라고 공공연히 불리는 상대.
마리아 카리타스.
“하지만 그녀는 이사장님이 특별히 관리하시는데….”
“아까 확인해 보니 상관없다고 답변이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정 불안하면 한 명을 더 동행시키면 되지 않습니까.”
“누구를 말입니까.”
“차석, 공간계 마법사.”
“아!”
유적 실습에서 마법뿐만이 아니라 육체마저도 동시에 수련했다고 알려진 유망주.
아니, 그 마리아 카리타스보다 위의 차석으로 들어온 것을 보면 그녀에게도 밀리지 않을 천재였다.
“…그럼 그 두 명으로 결정하겠습니다.”
“3대 가문 중 하나인 루피너스 가문이라면, 만약의 상황을 대비할 인력도 있을 테니 안심할 수 있겠지요. 알겠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는 드라기아스 가문에서 보내온….”
그들은 동시에 생각하고, 의논하며, 결정했다.
평생을 아카데미에서 일한 후 죽은 이들은, 죽어서도 그 땅에 썩지 않고 아카데미를 위해 일한다.
이사장의 힘에 의해서.
아카데미의 심부, 깊숙한 곳에서 이루어진 일상적인 대화였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 * *
[1학년 학생들도 한 학기의 반을 현장 실습으로 대체한다.]
일주일의 휴교 이후 공표된 발표에 아카데미는 뜨겁게 들끓었다.
-마왕이 다시 나타날 거라는 이야기도 있으니 당연한가?
-지금부터 인맥을 쌓아 둘 수 있으니 나쁘지는 않군.
-이 혼란스러운 틈을 이용한다면….
의외로 당연한 판단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다수였고, 차라리 지금부터 전공을 쌓으며 선을 만들 수 있다고 현실적인 판단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오늘부터 학생들에게 할당된 임무가 순차적으로 전달된다는 소식이 들리는 가운데, 알렌은 기숙사 안에 있었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몇 장의 서류를 읽었다.
사락-
종이가 넘어간다.
사락- 사락-
종이가 넘어갈수록 점점 느려지던 손길은, 이내 마지막 장에 다가갈 무렵에는 십 분을 넘게 소모할 정도였다.
“후….”
알렌은 읽고 있던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드라기아스.’
추수제의 수상하기 짝이 없던 지하수로 습격의 흑막.
그들이 왜 다른 이를 내세워서 그런 일을 행했는지 알 수 없다. 3대 가문의 실력자가 아닌 그런 도적들을 고용한 이유도 알 수 없고.
그러나 그의 앞에 놓인 정보는 드라기아스가 그 습격에 관여했다고 적혀 있었다.
프시케에서 일부러 틀린 정보를 건네줬을 수도 있지만, 알렌은 그 가능성을 낮게 판단했다.
정보 길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용이다.
제3세력 휘하에 있을 거라 예상되는 그들이 주변의 권력에 굴복할 리도 없으니, 그들의 정보는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행동한 동기는 이해할 수 없었다.
‘프시케에서도 그 목적을 알 수 없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무엇 때문인가.
라인하르트 가문의 보고 때문에?
3대 가문이 몰락해 가는 백작가의 보고를 털 이유가 있을까?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가문의 비밀과 관련되어 있나?
알렌의 손이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이놈의 가문은 뭐가 나와도 끊임없이 나오는군.”
어머니, 엘리자가 숨기고 있는 것도 그렇고 암왕 중 하나로 추정되는 총집사에 이상하게 권력에 집착하는 아버지 가이엘.
가문에 대한 우선순위가 뒤처져 있어 신경 쓰지 않았으나, 언젠가는 풀어 봐야 할 문제였다.
그렇게 얼마나 생각을 정리했을까.
알렌의 앞으로 그가 해결해야 할 임무가 적힌 종이가 이동되었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무슨 일이지?”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이라….
이 시간에?
창문을 힐끔거리니 아직 마리아와 만날 시간이 되려면 멀었다.
레이첼과는 저녁에 약속이 있으니 지금 찾아올 사람은 없을 터. 알렌이 의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들어오시라고 해라.”
알렌이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넬리아가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정말 뜻밖의 손님이었다.
그가 들어오기 무섭게 알렌은 그에게서 희미한 이끌림을 느낄 수 있었다.
“엘닉스, 공자?”
“알렌 공자님. 강의에서 얼굴을 보고 따로 보는 건 처음인 것 같군요.”
그는 창백한 낯에 어울리지 않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알렌은 경계심을 가지면서도 얼굴에 같이 미소를 띠었다.
“반갑습니다. 엘닉스 공자, 먼저 앉으시겠습니까?”
“환영에 감사드립니다.”
알렌은 그가 자신의 자리에 앉을 동안 고민을 이어 나갔다.
‘무슨 일로 찾아왔을까.’
프시케에서 조사했다는 사실을 들켰나?
아니, 그 사실을 알았다면 ‘귀족’ 다운 방식으로 처리했겠지. 절대 이렇게 웃으며 얼굴을 마주 보지 않았을 것이다.
이넬리아는 차를 준비하러 사라졌고,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알렌이었다.
“제가 마탑 교류회 이후로 심신의 안정을 회복해야 하는지라…, 빠르게 본론에 들어가 주실 수 있겠습니까?”
[빨리 끝내라.]
알렌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을 하자, 엘닉스는 미안함을 가득 담아 답했다.
“당연하지요. 이번 마탑 교류회가 끔찍했다는 건 저도 알고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것 같은데, 양해를 구하고 싶군요.”
[그럴 수 없다.]
“그럼 저녁까지 부탁드립니다. 제 약혼자와 약속이 있는지라.”
[선약이 있다면, 어떻게 할 거냐.]
“그 전에 이야기가 마무리될 것 같아 정말 다행입니다.”
[상관없다.]
엘닉스는 거대 가문의 자제답게 시종일관 얼굴에 웃음을 띠며 부드럽게 돌려 말했고, 알렌은 한술 더 떠서 대놓고 심신이 아프다며 압박했다.
그런 그들의 짧은 신경전이 끝난 것은 이넬리아가 차를 가져왔을 때였다.
달칵-
“엘프에게서 얻어온 찻잎인데, 엘닉스 공자가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차는 끓인 사람의 정성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지라.”
그렇게 그들은 한동안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현재 대륙의 정세, 아카데미의 성적, 교우 관계에서부터 가문의 사업에 관한 것까지.
그렇게 십 분이 더 흘렀을 무렵, 알렌은 자세를 곧게 폈다.
언제까지 잡담으로 시간을 보낼 수 없다.
그렇게 판단한 알렌은 그가 찻잔을 내려놓은 순간, 입을 열었다.
“그래서.”
신역을 가진 마법사의 위압감이 짧게나마 엘닉스를 스쳤다.
“이제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 순간은 일 초도 되지 않아 착각이라 불릴 만했으나, 엘닉스는 자신을 압박하기 위해 알렌이 일부러 그랬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엘닉스 드라기아스는 3대 가문의 자제였다.
이 정도 위압감쯤은 가문에 있었을 때 몇 번이고 견뎌 낸 것이었다.
‘첫째 형님의 위압감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번 일은 반드시 성공시켜야 할 일이었다.
그의 ‘형님’이 특별히 명한 일이었으니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그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차를 한 모금 더 마시더니, 더욱 창백해진 낯으로 입을 열었다.
“공자께서 몸이 안 좋으신 것 같으니… 저도 그럼 본론을 입에 담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툭 내뱉었다.
“저희 드라기아스 가문에서 알렌 공자를 정식으로 초대하려고 하는데….”
그의 시선이 알렌의 얼굴을 거쳐 아래로 내려갔다.
알렌의 심장 어림에서 멈춘 시선이 불쾌하게 다가왔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약혼자와 함께 오셔도 무방합니다.
그는 보는 사람에 따라 음침하게 느껴질 수 있는 미소를 지으며 초대장을 건넸다.
명백히 함정으로 가득 찬 권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