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알렌은 상처를 추스르며 회귀 전의 기억을 가다듬었다.
지금과 같이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은 드물었다. 원시 회랑을 빠져나가면 이제 바뀐 전황에 따라 바쁘게 움직여야 할 터.
‘모든 일의 시발점이 되었던 그란델은 결국 그 대가를 치렀다.’
프란시스카 양의 복수도 끝마쳤으며, 율리우스를 함정에 빠트린 이유도 알았다.
그럼 이제 생각해야 할 건.
‘멸망은, 회색 책과 연관이 있나?’
알렌은 자신의 앞으로 쇠사슬이 감긴 한 권의 책을 불러들였다.
검은 책이나 하얀 책과 달리 ‘환생자’라는 제목 하나만 적힌 회색 책.
연금학파의 마르골에게 소문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전혀 다른 별개의 것인 줄 알았다.
그란델이 직접 언급한 멸망과 회색 괴물 그리고 유적 실습 때 보았던 글귀까지.
‘연관성이 없을 리가 있나.’
하지만 특이점과 멸망 그리고 회색 책을 이을 만한 정보가 부족하다.
검은 책과 하얀 책 역시 마찬가지.
유적 실습 때 봤던 글귀 이후로 다른 단서를 찾지 못했다.
‘…아직 그림의 윤곽조차 파악하기 힘들군.’
알렌은 그것들에 관한 생각을 뒤로 하고 자신이 회귀하기 직전의 상황을 떠올리다 위화감에 한 가지 거슬리는 점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에….’
과거로 돌아오기 직전, 그의 곁에 사제와 성기사들은 무엇이었지?
사제와 성기사는 신이 사라진 이후에도 드물지만 찾을 수 있었다.
다만, 신성력 없이 신실한 믿음으로만 전도를 이어 가는 자들이라고 봐야 했다.
하지만 대몰락 이후 신전이 몰락했기에 그 수가 매우 적었다.
그때 찾아온 이들이 순환교의 세력이었다고 해도, 신성력을 사용하는 사제와 성기사는 존재할 수 없을 텐데.
‘그때 율리우스와 같이 있던 이들은 누구인가.’
알렌도 율리우스에게 악령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사제를 부른 적이 있었다.
회귀 후에도 마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근처에 있던 사제를 불러 일을 돕게 하기도 했고.
하지만 그건 보수를 주고 일을 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마지막처럼 악마를 찾았다며 다급히 몰려오지 않는다는 거다.
‘…혼란해지는 그 사이에 새로운 교단 같은 게 생겼다고?’
알렌은 나중에 순환교를 통해 이 일을 조사하자고 다짐하며, 명상을 이어 나갔다.
아직 부상은 다 치료되지 않았다.
* * *
쿠구궁-
하늘이 흔들린다.
조용한 곳에서 부상을 회복하던 알렌은 진동에 눈을 떴다.
그 진동에 따라 원시 회랑에 들어온 자들의 머리 위로 하얀빛의 기둥이 떠올랐다.
원시 회랑이 끝나는 것을 보며 알렌은 몸을 일으켰다.
‘습격은 어떻게 됐을까.’
알렌이 알고 있는 것에 따르면 결국 마지막에 빛의 마탑주 바른덴이 비프로스트를 발동해 습격자들을 쓸어버린다.
마법사 전력은 미래에도 중요한 전력이니 피해가 되도록 적으면 좋겠는데….
알렌이 그런 생각을 하며 얼마나 기다렸을까, 진동이 점점 심해지며 절정에 다다라 빛이 번쩍하는 순간.
깜박-
시야가 뒤바뀌며 페르타의 중앙 광장으로 학생들의 몸이 이동되었다.
“드디어 돌아왔… 어?”
“도, 도시가….”
“이게 무슨….”
짧은 시간이었지만 얻을 수 있었던 많은 수확에 기뻐하던 그들은, 도시의 풍경에 그만 말을 잃고 말았다.
사방에 시체 썩은 내가 감돌았고, 핏자국과 검은 연기 그리고 부서진 건물의 잔해는 이곳에 격전이 펼쳐졌음을 짐작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주춤거리기도 잠시, 그들의 머리 위로 빛이 번쩍였다.
“바르덴 님!”
갑작스럽게 나타난 인영의 얼굴을 알아본 마탑의 제자 한 명이 외치자 바르덴은 피곤한 얼굴로 그들에게 말했다.
“지금은 뒤처리로 바쁘니, 조금 있다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스카이나!”
“바쁜데 왜 부를까?”
바르덴이 소리치자 나타난 것은 변화 학파의 수장 스카이나였다. 그녀는 가까운 곳에 있었는지 그들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어차피 남은 건 자잘한 뒷정리뿐이니 어린 학생들을 부탁하겠습니다.”
“이미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나에게 시키는 의도가 뭐려나?”
“배신자 때문에 시국이 뒤숭숭한 걸 아시지 않습니까.”
“…알았다고.”
그녀는 귀찮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학생들에게 손을 까딱였다.
바르덴은 한참 일이 바쁜 듯 그녀에게 학생들을 맡기자마자 곧바로 사라졌다.
“자, 따라오렴? 여기 있으면 누가 다시 습격해 올지 모르니까?”
알렌은 그녀를 따라가면서 도시의 상황을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더 심하다.
「이건 그냥 도시가 반파된 수준 아니에요?」
기껏해야 도시의 중심부가 아닌 외곽의 일부와 더 들어온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저지될 거라 생각했는데….
도시의 중심부까지 전투의 여파가 미칠 만큼 생각보다 도시의 상흔이 심상치 않았다.
알렌은 직감했다.
‘무언가 달라진 게 있다.’
본래 알렌이 아는, 이뤄지리라 생각했던 미래와 달라진 점이 생겼다.
그 탓에 그가 알던 것보다 더한 피해가 생겨났다. 다행히 어찌 수습된 것 같았지만, 마법사 전력이 줄어들었다는 점이 뼈아팠다.
‘자세한 건….’
알렌은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단아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속삭임이 알렌에게 닿았다.
‘믿고 있었답니다.’
프란시스카가 그에게 다가왔다.
* * *
“…사상자 12명. 다행히 마법 학부 학생들은 원시 회랑에 있었기 때문에 피해가 적었습니다.”
“그런가….”
말베른 교수는 얼굴에 수심을 띄웠다.
학생들은 1년에 몇 명이고 죽어 간다.
불의의 사고로, 대련의 실수로, 누군가의 습격으로, 실습 도중 변수로.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학생들의 죽음이 익숙하다는 건 아니었다. 말베른은 노인이 되기까지 수많은 죽음을 보았지만 언제나 익숙해질 수 없었다.
익숙해질 수도 없었고.
다 피지 못한 꽃이 저무는 모습은 언제나 노인의 가슴에 무게를 더했다.
그럴 때마다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저희는 낫지만 마탑 측은… 현재 초상집 분위기입니다.”
“그쪽은 배신자 처리도 해야 될 테니 말이 많겠지.”
말베른은 남은 학생들을 점검하는 조교들을 보다가 마탑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바르덴 마탑주도 머리가 아프겠어.”
마탑주가 배신했다면 마탑 전체가 배신한 것으로 봐야 하는가?
칠대 마탑 중 세 곳이 배신한 것이면 고인 권력이 썩어 문드러진 것이 아닌가.
그에 대한 보상과 도시의 복구 처리 그리고 마족의 공개 여부까지.
“거기다 바람의 마탑주 그란델의 암살 의혹까지 겹쳐서 당분간 외부 활동은 힘들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안타깝구만, 안타까워.”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런 짓까지 벌였으니 더 이상 숨길 생각도 없다는 게 아니겠나.”
“예, 규모는 작지만, 이곳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도 공격했다니 이제 움직이겠다는 걸 대놓고 선포한 것이죠.”
이제 대륙은 전란에 휘말릴 것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아카데미도 바꿔야 할 터.
지금까지는 아카데미는 마왕 출현에 미리 대비하고자 재능 있는 학생들을 훈련 시켰다.
그러나 오랜 시간의 평화에 점점 풀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변에서는 사교장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냐며 말도 많았는데….
‘어쩌면 잘되었을지도 모르지.”
아카데미는 변화할 거다.
좀 더 실전 중심으로.
더 격한 전장과 경험을 쌓으면 강해지겠지.
그 탓에 더욱더 많은 학생이 죽을 수도 있겠지만…, 말베른은 그것이 앞으로의 전란에 대비하지 못해 죽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생각했다.
그의 한숨 섞인 시선이 점검을 마친 학생들을 향했다.
* * *
[…율리우스 공자가 사령왕을 막아 세웠어요.]
알렌은 프란시스카 양에게 들었던 내용을 다시 되뇌며 율리우스를 응시했다.
[그가 사령왕을 막아 세운 덕분에 언데드 군세가 주춤했고, 그 사이 바르덴 님이 파르델 님을 쓰러트리고 다른 이들을 도와 비프로스트를 발동시켰죠.]
율리우스는 하이젤을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에 민감한 하이젤이라면 율리우스의 시선쯤은 진작 눈치채고도 남았을 텐데 그는 율리우스를 무시했다.
냉막한 분위기가 두 명을 휘감았다.
그런 율리우스의 모습에 그의 곁에 있던 이들도 입을 다물었고, 하이젤은 무슨 생각인지 모를 눈으로 마탑을 바라봤다.
‘하이젤이 나서지 않았다, 라.’
알렌은 하이젤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다.
학기 초만 해도 선문답과 더불어 알 수 없는 태도에 그에게 신경을 할애했지만, 반응하지 않는 회색 책과 더불어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지자 접점이 없어졌다.
축제 때 그와 마리아의 추격극을 보며 원작에 떠올렸어도 마찬가지.
앞으로의 계획을 어찌할까 고민했지, 그를 어떻게 처리할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이젤은 마족에 대한 접점이 있으며, 율리우스와 다른 노선을 걷게 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에 이번 회차에서 하이젤이 바뀌었다면….’
만약을 대비해 둘 필요는 있다.
알렌은 그와 저녁에 매일 약속을 가지던 백발의 소녀를 떠올렸다.
‘마왕을 상대하는 카드로 용사인가.’
그녀가 자살했던 회귀 전과 그녀의 태도 때문에 관계를 이어 왔지만, 하이젤이 달라졌다면 더욱 관계를 긴밀히 할 필요가 있다.
그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말베른 교수가 외쳤다.
“이제 아카데미로 돌아갑니다. 모두 마차에 탑승해 주십시오!”
마탑에 대한 일은 모두 끝마쳤다.
‘의외인 건 프란시스카 양의 선택인가.’
그녀는 지겨운 마탑을 떠나 아카데미로 편입할 예정이라고 했다.
입학보다 더 어려운 게 편입이었기에 걱정될 만도 했지만, 알렌은 그녀의 재능이라면 능히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이제 아카데미로 돌아갈 시간이다.
* * *
마탑도시 페르타에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 사이 아카데미에서는 휴교령까지 내리며 급히 회의를 진행했다.
앞으로 아카데미의 방향성에 대한 것 지금 사태에 맞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혹은 잠시간 대륙의 정세를 살펴보는 것이겠지.
알렌은 그 모든 것에 상관없이 베스틀라와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음…, 알렌 내가 인간이 거인의 몸을 가지게 된 후에 어떻게 성장하는지는 모르거든요?」
정확히는 알렌 자신의 몸에 대한 조사였다.
그 때문에 가이온과 훈련을 진행할 수도 없어 베스틀라와 함께 훈련실을 빌렸다.
그녀는 촐랑대듯 날아다니며 그의 몸 곳곳을 확인했다.
「그런데 당신이 이 몸을 가진지 1년은 넘어가기도 했고, 이제 슬슬 변화가 보일 때도 됐단 말이에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거인의 발달 과정을 설명했다.
「거인은 살면서 총 세 번의 변화를 거쳐요.」
처음은 그냥 성장기.
「인간처럼 살아가면서 많은 경험을 쌓고, 시간이 지나면 그때 본 유골만큼의 크기까지 자라요.」
“그럼 내가 성장기라는 건가?”
알렌이 그때의 거대한 크기를 떠올리며 묻자, 그녀의 검날이 확신하지 못하는 것처럼 흔들렸다.
「…맞기는 한데 애매해요. 당신이 거인으로 변할 때 흡수했던 황색 안개. 그게 거인들의 골수거든요.」
그래서 다 자라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저도 모르겠어요. 그녀는 거인의 골수가 어린 거인의 성장을 앞당겨 준다고 말했다.
두 번째는 변태기.
「산의 거인이니 호수의 거인이니 심지어 악마의 거인까지 이름이 많잖아요? 그거랑 같아요.」
거인이 죽으면 산으로 변하고, 언덕으로 변하는 것처럼.
거인은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자신의 근원으로 삼을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거인이 움직이는 데 필요한 엄청난 힘을 감당하기 힘들다고.
「식량이 부족하지 않으니 매일 먹는 거로 보충해도 되지만… 그러면 온종일 먹고만 있어야 하거든요. 하지만 당신은….」
그녀는 확신하지 못하는 말투로 답했다.
「이미 ‘인간’이라는 종족 자체를 근원으로 삼고 있어요. 그 때문에 적게 먹어도 괜찮고, 작은 크기로 있을 수 있는 건 같아요.」
알렌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거인이란 종족에 대해 확실히 알지 못하지만, 그녀가 그렇다면 그것이 맞을 것이다.
인간의 거인이라….
별로 좋은 어감이 아닌 것 같다 생각했을 때, 베스틀라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성장이 정체된 것일 수도 있어요. 산의 거인이 산을 닮듯이 인간의 거인이라면 인간의 특징을 닮거든요.」
“그렇다는 말은….”
「경험하고 습득하는 것. 즉, 당신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적을 상대하며, 전투 경험을 쌓아야 해요.」
결국, 앞으로 할 일과 다르지도 않은가.
알렌은 고개를 저으며 검을 잡았다.
그녀와 약속을 했으니, 슬슬 요툰스베르드의 다음 단계를 익힐 필요가 있다.
그가 그렇게 검을 휘두르기 전, 알렌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성장기가 첫 번째 그리고 변태기가 두 번째면… 마지막 세 번째는 뭐지?”
「그건….」
그녀는 망설이는 듯 확실치 않다는 듯한 어조로 답했다.
「우화기.」
일개 거인에게서 벗어나 더 위대한 존재가 되는 것.
아직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그러나 이루어졌어야 했었던 미지의 단계였다.
멸망 때문에 이룰 수 없게 된.
「세 번째 단계의 이름은 우화기에요.」
그녀가 낮게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