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율리우스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뭐 하고 있냐고, 왜 마기를 두르고 있냐고.
사실 그런 말을 하기엔, 충격이 너무나 컸다.
율리우스는 원작 주인공 하이젤에 대한 많은 것을 떠올렸다.
하이젤은 전 마왕이다.
하지만, 환생한 후의 그는 인간이기도 했다. 원작에서는 인간의 삶을 받아들이기로 했었다.
그런 하이젤이 다시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정말 절체절명의 상황이 아니라면 꺼내지도 않았을 마기를 사용한다고?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율리우스의 목소리가 절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런 율리우스의 모습에도 하이젤은 별 감흥 없는 얼굴로 되물었다.
“왜?”
그는 무심한 표정에 어울리지 않는 경박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이젤은 늘 그랬다.
심각한 상황에도, 위험한 순간에도, 심지어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그는 도시가 습격당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익숙할 것이다.
저런 혼란은, 전쟁의 비명과 광기 그리고 전투의 소음은 그와 일평생 함께 하던 것일 테니까.
그게 원작 주인공답기도 했고, 독자들이 좋아하던 그의 모습이기도 했다.
하지만.
“왜 마기를 두르고 있지?”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하이젤은 뭘 그런 질문을 하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무슨…!”
그 변명에 무어라 말하고자 입을 열었던 율리우스는 간신히 화를 가라앉혔다.
율리우스는 오랜만에 원작을 곱씹었다.
아니, 원작이라기보다는 하이젤이 겪었을 상황과 감정, 그 모든 것을 최대한 이해하려고 했다.
‘처음에는 하이젤의 주위를 돌리면서 그사이에 원작 주연과 기연을 얻기 위해 마족의 존재를 미리 알렸지.’
그 후에 하이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상상한다.
그의 원작의 행동을 토대로.
‘하이젤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정이 없다.’
마왕으로 오랜 세월을 살았기에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으로 환생했기에 그에 적응하고 인간으로 살아가려 했었지.
그 계기를 겪으며 점차 성장하는 곳이 아카데미다.
‘만약, 하이젤이 인간에게 정을 붙이기 전에 마족의 존재를 알린 것 때문에….’
그가 인간보다 마족에게 더 신경을 쓰게 됐다면.
인간의 삶을 살고, 인간의 마음을 가지며, 인간의 유대감을 느끼는 그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 자신 때문에 틀어졌다면?
점차 실현되는 가정에 율리우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잘못 생각했어.’
하이젤은, 아카데미에서 여러 사건을 겪으며 성장하는 ‘인간’이지.
처음부터 그렇게 고정된 것처럼 행동하는 ‘캐릭터’가 아니….
[도시를 습격한 에스테도르를 막아 내고, 사령왕을 처치하십시오! 제한 시간 : 1 : 44 : 12]
[보상 : 아이에른의 손길(S)]
생각이 깊어지려던 순간, 그것을 끊어 내듯 퀘스트창이 떠올랐다.
그 탓에 율리우스는 방금 생각하려던 것을 잊어버렸다. 아니, 그보다 보상에 눈이 더 갔다.
‘…몇 년 전 조제법이 손실된 엘릭서잖아.’ 저것만 있다면, 죽기 직전의 시체도 아니 죽은 지 5분이 넘어가지 않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
얼마 남지 않은 퀘스트 시간에 정신 차린 그는 뭐 하냐는 듯 빤히 보는 하이젤에게 입을 열었다.
“…하이젤, 그럼 너는 뭘 하고 싶은 건데?”
“무엇을….”
그 말에 잠시 눈을 크게 뜬 하이젤이 생각에 잠겼다.
율리우스는 그 틈을 꿰뚫듯 말을 이어 나갔다.
“너도 인간계에 살아야 하잖아. 지금처럼 습격이 이어진다면, 마법사 전력에 커다란 공백이 생긴다고.”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다.
최대한 이성적인 답을, 하이젤이 감정에 물드는 때는 오직 과거를 기억할 때뿐이다.
그렇다면, 현재가 아닌 미래를 인질 삼아서.
“에스테도르의 목적인 마왕의 강림, 하이젤 너도 알다시피 마왕이 다시 이곳에 쳐들어온다면 너희도 무사하지 않을 거야.”
“흠…, 맞는 말이야.”
한동안 생각하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런데.”
하이젤의 목소리가 울린다.
마기로 뒤덮인 그의 몸에서 마기가 일순간 사라졌다.
율리우스가 안심한 순간, 그의 등골이 오싹해지며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언제까지 그렇게 불쾌한 눈으로 볼 거지?”
율리우스는 남은 마력을 생각지 않고 뇌전을 내뿜었다.
꽈르릉!
율리우스는 뒤로 튕겨 나가는 몸을 억지로 바로 세웠다.
그가 고개를 들자, 하이젤은 언제 웃고 있었냐는 듯 차갑게 그를 내려다봤다.
“…뭐라고?”
“언제까지 그런 눈으로 볼 거냐고 물었다.”
율리우스는 저도 모르게 눈을 매만졌다가, 자신의 눈이 무지갯빛으로 물들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언제 무지개 마안이 발동된 거지?’
눈을 깜빡이자 다시 하이젤의 모습이 보였다.
검은 것과 하얀색이 뒤섞였다가 뒤늦게 강한 붉은색으로 반짝이는 그의 몸이.
하이젤과 눈을 마주치자, 그는 곧바로 무지개 마안을 껐다.
“모르는 모양이야. 뭐, 됐어. 내가 말해 봤자 이미 늦은 것 같으니.”
잠시 율리우스를 불쌍하다는 듯 바라본 그는 몸을 돌렸다.
검은 하수구의 어둠 그 너머로 향하는 그의 몸이 그림자에 파묻히며, 하이젤의 목소리가 통로에 울려 퍼졌다.
“네 말대로 마왕이 나타나면 우리도 손해니, 여기서는 더 이상 나서지 않지.”
“…그 말은?”
하이젤이 뭘 또 묻냐는 듯 귀찮게 답했다.
“말 그대로다. 여기서 혼란을 더 일으키지는 않겠지만, 앞에 나서지도 않을 거야.”
작은 목소리가 그만 물으라는 듯 짜증을 더했다.
잠시 사령왕을 맡아 줄 수 있는지 물으려던 율리우스는, 하이젤의 근처로 다가오는 수많은 기척에 입을 다물었다.
“…하.”
내 탓인가?
아니, 이건 자신의 탓이 아니다.
자문하는 동시에 떠오르는 자답에 율리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기적인 놈.”
많은 전투와 전쟁을 하이젤이 이 상황을 어떻게 판단했는지 깨달았다.
그가 보기에는 마탑 도시의 전력으로 이번 습격을 막아 낼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 계산과 판단의 사이에는 희생될 인명과 줄어든 전력의 수가 포함되어 있지 않겠지.
‘어떻게든 사령왕을 멈추기만 한다면 될 것 같은데….’
남은 언데드들은 마탑 도시의 마법사들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불타는 무지개, 비프로스트를 사용하지 못하게 막는 배신자들도 시간만 있다면 충분히 제압해 낼 수 있겠지.
그러니 사령왕을 잠시 맡아 두기만 한다면, 원작의 비틀림을 최대한 줄일 수 을 것이다.
“…후, 최대한 버티기만 해야지.”
자신의 뇌전에 깃든 정화 속성과 그것을 더 강화하는 유니콘의 뿔.
어쩌면 버티는 것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몸을 일으켰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 * *
도시 전역을 뒤덮을 거대한 마력의 파동이 부딪쳤다.
콰앙-
“파르델,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설마설마했는데 정말로 배신할 줄이야.”
“크흐… 눈치는 전부터 빠르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의외로군.”
거대한 불의 구가 도시에 떨어진다.
바르덴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휘저었다.
그의 의지에 따라 빛 한 줄기가 화염 구를 터트리며 공격을 막아 냈다.
“그 성급한 성정으로 사고를 칠 줄 알았다만, 몇십 년 동안 지내던 도시까지 파괴할 정도였습니까?”
“바르덴, 너는 모르겠지. 너같이 젊은 놈은 모른단 말이다. 위로 올라갈 수 없음을 인식하는 게 얼마나 절망스러운지.”
“고작 그것 때문….”
“고작이 아니다!”
불의 꽃이 도시의 하늘을 수놓았다.
“초월을 목전에 둔 자가 그 경계를 내딛지 못하는 것이 고작이라? 하하, 역시 내가 옳았군.”
아름답게 퍼져 나가는 꽃은 그 겉모습과 다르게 서늘한 죽음을 내포하고 있었다.
또다시 도시에 떨어지는 공격을 막은 바르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편지의 내용이 맞았나.’
익명의 누군가로부터 마탑주들 중 배신자가 있다는 편지를 받았다.
처음에는 서로 간의 균열을 일으키려는 수작이거나 실제 배신자가 있더라도 몇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둠과 물의 마탑까지 배신할 줄이야.”
“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 아니었겠나?”
바르덴의 허탈한 음색에 파르델은 포악한 웃음을 지으며 도시의 다른 방향을 바라봤다.
도시로 들어오던 언데드의 물결을 끊어 내기 위해 나섰던 흙과 철의 마탑주를 어둠과 물의 마탑주가 막아 내고 있었다.
“쯧, 빙결 학파가 독립할 때 조용하다 싶더니만. 어둠은 그리 놀랍지도 않군.”
불, 물, 흙, 철, 바람, 어둠, 빛.
바람의 마탑주 그란델이 원시 회랑에 있으니 그를 제외한다면 여섯 중 반절이 배신한 것이다.
언데드는 철저히 사령 마법의 지배 아래에 있다.
사령왕만 제거한다면 이번 일의 절반은 해결되는 것인데.
그 움직임을 봉쇄해 버리자니 피해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끝까지 싸우자는 겁니까?”
“이미 늦었는데 무엇을 망설인다고. 바르덴 항상 네 실력이 궁금했다. 빛의 마탑주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어.”
공기가 끓어올랐다.
그런 감상이 들 정도로 솟아오른 열기가 세상을 불태울 듯 이글거렸다. 적색의 화염이 맹렬히 퍼져 나가며 거대한 불의 영역을 만들었다.
신역을 펼치려는 그 모습에 바르덴 또한 전신을 빛에 물들였다.
여기까지 왔다면 멈출 수 없다.
천공을 내리쬐는 빛이 한순간에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빛의 연못이 만들어지며 그 가운데 바르덴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빠르게 끝내겠습니다.”
“…아무렴 그래야겠지!”
마탑주 중 전투력 1, 2순위를 다투는 두 명이 전투를 시작했다.
* * *
지하수로를 빠져나오고 율리우스가 가장 먼저 본 광경은 경천동지한 마력의 파동이었다.
도시 전역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마력의 파동은 아마 마탑주들의 전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뜻하겠지.
세상을 다 파괴해 버릴 듯한 기세가 연이어 부딪치자, 율리우스는 자신의 실력에 부족함을 느꼈다.
‘…나도 어느 정도 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마탑주 하나 쓰러트릴 수 없다.
그 사실에 그는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열심히 노력해 왔으나 이 정도밖에 되지 않다니.
‘얼른 그 장소에 가야겠어.’
지금껏 원작에서도 위험한 장소라 언급했기에 자제했지만, 눈앞의 장면을 보니 강해지기 위해서라도 그 장소에 가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전에.
‘사령왕을 막아야 한다.’
원작이 비틀린다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만약 이걸로 마왕이 더욱 빠르게 강림한다면?
끔찍했다.
율리우스는 망가진 은신자의 망토를 걸쳤다.
그의 기척이 희미해지며, 산 자의 생기를 느끼고 달려오던 언데드들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그 순간 땅을 박찼다.
다른 언데드들은 최대한 건드리지 않았다.
전투를 피해 도시를 빠져나가기 직전,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율리우스 님!”
움찔-
벌써 들켰다고? 아니, 내 이름은 어떻게….
은신자의 망토가 정말 망가졌나 싶어 당황하던 그때, 그의 앞으로 나타난 것은 레이나였다.
“…네가 어떻게.”
놀란 얼굴의 율리우스에게 레이나는 평소처럼 미소 지었다.
“공자님의 시녀니까요.”
뭐라 할 말을 잃은 그에게 그녀는 무언가를 건넸다.
그녀의 손에 든 것은 그가 잠시 그녀에게 맡겨 놨던 행운의 토끼 반지였다.
다만, 그녀에게 맡겼을 때 C급에 불과했던 것과 다르게 겉이 검게 변색되었고, 반지의 안으로 읽을 수 없는 글귀가 추가되어 있었다.
[악운의 토끼 반지(A)]
최악보다 차악을.
나쁜 운수에 벗어날 일말의 기회를.
효과를 본 율리우스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이 반지는 유물이 아니다.
아니, 유물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강화하는 건 힘들었다.
“이유는 나중에 설명해 드릴 테니, 가지고 가세요. 이것 때문에 찾아왔으니까요.”
율리우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반지를 끼웠다.
‘이 반지가 있다면 막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겠지.’
레이나가 어떻게 아티펙트를 강화했는지 궁금했지만, 이 모든 일이 끝나고 알아봐야 할 일이었다.
“그럼 나중에 보자.”
“공자님, 조심하세요.”
율리우스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위기를 벗어날 기회가 생겼다.
율리우스를 배웅하던 레이나는 그가 사라지자 완전히 표정이 바뀌었다.
“…늦을 뻔했네요.”
조직에서 다급히 그녀에게 반지를 그에게 전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카샤 님께서 급히 큰 변수가 생겨났다며 반지의 보조가 없으면 안 된다고 하여 생겨난 지시였다.
전투의 소음이 더욱 진해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죽음의 파도가 들이닥치는 언데드의 중앙에서 번개가 몰아치는 것이 보였다.
시작되었다.
그녀는 몸을 돌렸다.
이제 그녀가 할 일은 전투를 마치고 돌아오는 율리우스를 맞이하는 일이다.
평소처럼.
그가 자신에게 더욱 익숙해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