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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가 빙의를 싫어함-125화 (125/212)
  • 제125화

    데구르르-

    절망의 찬 표정. 그란델은 마지막까지도 자신이 옳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저 힘의 차이에 대한 억울함만을 나타냈을 뿐.

    거대한 단두대는 처형을 끝내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작게 돌아왔다.

    쿠구구구궁-

    원시 회랑의 협곡지대 전체를 감싸 안았던 그란델의 신역 상취재풍천이 끝에서부터 붕괴하고 있었다.

    그 안의 알렌의 신역 우르다르부룬느, 운명의 우물도 마찬가지였다.

    바람이 머물던 신역을 통째로 집어삼켰던 운명의 우물은 그란델이 목숨을 잃자 산산이 분해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욱씬-

    “……!”

    알렌은 뒤늦게 자신에게 찾아오는 대가를 인식했다.

    노심의 마력이 사라진다. 몸을 강대하게 만들던 생명력도 줄어들며, 신체가 쪼그라드는 강한 압박을 받았다.

    알렌은 가빠지는 숨을 천천히 내쉬며 베스틀라를 땅에 박아 넣었다.

    「당신 괜찮아요!? 식은땀이 너무 흐르는데….」

    “괜찮…!”

    욱씬-

    마치 생명력 자체를 쥐어짜내고, 존재 자체를 일그러뜨리는 감각에 알렌은 신음했다.

    「알렌, 알렌!」

    알렌의 몸을 잘 알고 있는 그녀에게, 지금 그의 몸 상태는 이상했다.

    거인의 몸,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몸이라고 하나 그 강고함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또 방금의 전투에서 알렌이 목숨을 위협받을 만한 부상을 입지 않았기에 더 그랬다.

    “우웁……!”

    검에 몸을 기댄 알렌은 커다란 피를 토해내더니,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조금 낫군.”

    협곡의 풍경은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여기저기에 생겨난 구멍과 커다랗게 갈라진 틈으로 인해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음을 방증했고, 여기저기 무너진 곳이 많아 전투의 흔적을 숨기기도 힘들었다.

    후우웅-

    인위적인 바람이 아닌 자연스럽게 불어오는 바람.

    그 차가운 바람에 땀이 식혀지자 알렌은 눈을 감았다.

    ‘너무 무모했나.’

    알렌은 천천히 자신의 행동을 반추했다.

    전략은 완벽하지는 않았어도, 충분했다.

    바람 마법은 약하다.

    불, 물, 흙, 나무, 철, 바람, 어둠, 빛.

    나무 계통 마법은 전투에 치우쳐지지 않아 사실상 제외한다면, 바람의 마탑은 일곱 개의 마탑 중 최약체라고 불러도 좋았다.

    그렇기에 그란델에게 실험해볼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반대로 생각해본다면 그란델 조차 그 약한 바람 마법 계통으로 7위계에 오른 자다.’

    그가 익힌 마법이 약하다고 해서, 그가 약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란델은 바람 마법이 것을 이룩할 수 있는지 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알렌에게 거대한 폭풍이나 바위를 쪼개는 칼날 바람 같은 마법이 통하지 않았기에 안정적으로 그란델을 상대할 수 있었을 뿐.

    그러지 못했더라면 알렌은 베스틀라에게 부탁해 비장의 수단까지 동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란델과의 전투 덕분에 신역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감이 잡혔다.

    ‘다음부터 직접 말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그저 자신의 행동이 옳다면 강화될 것이고, 옳지 않은 행동이라면 약화될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건 운명 신역의 특수성 탓이 컸다.

    알렌의 운명 신역 우르다르부룬느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이 고인 곳이다.

    그 탓에 마나의 맹세로 제약하는 것을 극한까지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점은….’

    과거와 현재, 미래.

    인간이 넘봐서는 안 되는 구역을 이용하며, 마음대로 제약을 걸어댄 탓일까, 알렌의 몸에 심한 압박이 가해졌다.

    강대한 거인의 몸으로도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만약 신역 사용 직후 누군가 기습하기라도 한다면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알렌은 자신의 마법에 대한 완전한 이해와 그 마법의 가능성을 장악하여 신역을 구축한 것이 아니다 보니 홀로 신역 펼쳐낼 수 없었다.

    무조건 다른 이의 신역 위에서 펼쳐야 했다.

    ‘지금도 반쪽짜리인가.’

    다른 마법사의 신역을 펼치는 순간 그걸 침식해 역으로 잡아먹는 것.

    그것이 알렌이 앞으로 신역을 펼치는 마법사와 그 비슷한 것을 펼치는 괴물들을 죽일 방법이었다.

    하지만, 가이온 같은 팔강이나 유적 실습에 겪었던 베드르폴니르 같은 괴물이 습격해 온다면….

    “…갈 길이 멀군.”

    알렌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자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검도 게을리 할 수 없겠지.

    “베스틀라,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갑자기 뭐에요. 아픈 건 괜찮아요?」

    알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떨렸지만, 일어서는 것에는 문제없었다. 협곡 끝까지 감지력을 펼치니 커다란 소리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알렌은 다른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 떠나려다, 잠시 협곡의 다른 방향을 살폈다.

    정확히는 휘스 아로나를 숨겨둔 장소를.

    “…뭐, 프란시스카 양이 이미 데려갔으려나.”

    그게 약속이었으니.

    알렌은 땅을 박찼다. 이미 밖에서는 한참 도시 습격이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원시 회랑이 끝날 때까지만 숨는다면 이 소란을 조사할 틈도 없을 것이다.

    ‘그란델의 죽음은 분명 큰 사건이지만….’

    만약 마탑주가 죽은 게 한두 명이 아니였다면?

    「이제 검술 수련이나 해요. 요즘 맞고 다니는 거 보면 내가 못 봐주겠다니까요?」

    알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림자로 몸을 숨겼다.

    몸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알렌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 뒤로 그란델의 머리가 바람에 굴러다녔다.

    그 강대했던 위세에 어울리지 않는, 허무한 죽음이었다.

    * * *

    흐흠- 흠- 흐음-

    프란시스카는 콧노래가 나오는 걸 참지 않으며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기분을 동조한 듯 하얀 촉수가 팔딱거렸고, 몇 번이나 사용한 망치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며 서늘함을 풍겼다.

    “웁웁!!”

    물론 그 앞에 있는 상대는 절대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기 싫었다.

    “웁웁!!”

    “어머, 기다리지 않아도 괜찮답니다.”

    이제 곧 당신 차례니.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망치를 내리쳤다. 여린 여인의 손에서 나왔다고 할 수 없는 힘이었다.

    콰직-

    “……!!”

    다시 피가 튀었다.

    휘스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할아버지는 왜 오지 않는 거지? 그는 당장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분명 그의 신변에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세상에는 망나니가 너무 많아요. 정말.”

    그란델의 위세를 믿고 다섯 살 아이의 열의 서클을 부순 막슨.

    던전에 같이 가는 수법으로 열셋의 유망주를 죽인 바인.

    휘스의 눈에 들고자 같은 동기의 목숨을 바친 리온.

    그녀가 잡은 건 이 정도에 불과했지만, 남은 이들도 다른 이들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시발, 네크로맨서가 습격했다아아-!

    -빨리, 빨리 움직여! 마탑주 님은 어디 있나!

    -왜! 비프로스트가 작동하지 않는 거야! 왜!

    그녀는 알렌이 그란델과 전투를 시작하는 즉시 그를 데리고 도시로 빠져나왔다.

    만약 그녀가 평소라면 성인만 한 자루를 들고 다녔다면 의심을 받았겠지만, 밖의 혼란으로 인해 그녀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그 틈을 타 위스의 패거리를 세 명 더 처리했고, 이제 모든 일의 원인마저 처리할 차례.

    “정말, 길고 길었네요.”

    그녀의 목소리에 아련한 감정이 실렸다.

    부모를 그란델에게 잃고.

    뭔지 모를 예언을 쫓아 몇 년을 기다리고.

    그때를 위해 실력을 키우고.

    알렌을 보고 확신하지 못할 예언을 믿으며.

    결국, 여기까지 왔다.

    “이 간단한 걸 이루기 위해 얼마나 기다려야 했는지….”

    프란시스카는 예언이 결국 돌고 돌아 이루어졌음을 실감했다. 아마, 그란델도 알렌의 손에 처리되었으리라.

    그녀는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

    “잘 가요. 휘스 아로나.”

    자신이 마무리 지을 차례였다.

    어두운 밀실 사이에서 핏빛의 눈동자가 물기에 번들거렸다.

    무거운 망치가 천천히 올라갔다.

    “저승에서 그란델을 만나면 꼭 안부 전해주시고요.”

    그 말에 휘스가 그란델이 어떻게 되었는지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웁웁웁웁…!!”

    그러나 되돌릴 수 없었다. 그가 저지른 수십 년간의 악행은, 기적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녀가 방긋 웃었다.

    프란시스카의 안부를 마지막 안부를 마지막으로, 둔기가 허공을 갈랐다.

    “다음에는 착하게 살아요.”

    망치가 떨어졌다.

    콰직-

    악의 굴레가 하나 더 끊어졌다.

    그 뒤로 억눌린 울음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 * *

    “하이젤! 네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알아!”

    율리우스는 이를 악물고 뛰었다.

    처음에 실종사건이 벌어졌을 때는 원작의 사건이 그대로 재현된 줄 알았다.

    그러나, 율리우스가 한 가지 착각한 점이 있다면 원작의 하이젤은 마탑 습격 이전까지 마족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있었지만….

    “죽어라, 어린 검사야!”

    지금은 자신 덕분에 달라졌다는 것.

    스륵-

    율리우스가 허리를 굽히며 몸을 비틀었다. 날카롭게 솟은 가시가 어깨를 스쳐 지나가며 율리우스의 팔이 움직였다.

    꽈릉!

    터져간 번갯불이 어두운 지하수도를 밝히며 마족 하나를 더 불태웠다.

    “릴리트 님을 쫓는 이들이 저기 있다!”

    “얼른 막아라! 우리들의 희망이다!”

    율리우스는 출렁대는 표류물처럼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우선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있다면 결국 마족들에게 포위당할 뿐이었다.

    ‘하이젤이 그녀와 합류할 줄이야.’

    원작의 하이젤은 여기서 처음으로 마족의 존재를 인식한다.

    마탑 도시의 실종사건에 우연히 관여하게 된 그는, 교류회 기간 동안 마족의 꼬리를 쫓아 끝에는 릴리트와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를 저지하고, 오히려 끌어들여 마탑 도시의 습격을 막아낸다.

    그런 이야기였다.

    그렇게 진행되었어야 할 이야기였다.

    그런데 왜.

    -파르델 님! 파르델 님은 어디 있느냐! 왜 마탑주 님이 사라졌….

    -빛의 마탑주 바르덴 님과 지금 전투 중이다. 당장 바르덴 님을 도와서….

    -아니, 먼저 도시의 언데드들을 막아내는 게 먼저…!

    -하지만 비프로스트를 작동시키기 위해서라면….

    도시의 습격은 이미 벌어졌다. 성벽이 없던 페르나는 갑작스러운 기습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 탓에 많은 이들이 초반에 죽고 말았다.

    원래는 그렇게 릴리트를 끌어들인 하이젤이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불의 마탑주 파르델을 비롯한 배신자들을 빛의 마탑주에게 알린다.

    그 덕에 빠르게 비프로스트를 다시 작동시키고, 그 사이 하이젤이 직접 사령왕을 죽였어야 했다.

    ‘내가 미리 가로채서 빛의 마탑주에게는 알렸지만….’

    정작 빛의 마탑주가 파르델을 쓰러트릴 동안 언데드의 군세를 일시적으로 막아낼 하이젤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탓에 피해가 더욱 가속화되는 상황이었다.

    율리우스는 자신이 사령왕을 상대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결국, 하이젤도 끝에는 마기의 봉인을 풀어 겨우 사령왕을 죽이는데, 자신이 상대할 수 있을 리가.

    “하이젤! 당장 나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꽈르릉!

    율리우스는 마구잡이로 뇌전을 뿌려대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마족들이 그의 위치를 알게 되겠지만, 율리우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그가 멀리 있지 않다고.

    마족과 게이트의 존재를 알린 존재에 대해 하이젤이 신경 쓰지 않을 리 없었다.

    “시발, 나오라고 이 새끼야! 내가 진짜 다 죽여야 나올 거냐!”

    율리우스는 조급했다.

    지금의 습격을 막지 못한다면, 원작 전체가 어그러질 수도 있다.

    마왕을 막아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율리우스 자신도 마지막에 마왕을 상대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하이젤!”

    하이젤은 인류의 편에 서야 했다.

    아직 그는 대체할 수 없는 전력이었고, 팔강들이 일의 심각성을 인지한다면 그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다.

    “빨리 나오란…!”

    “정말 시끄럽네, 율리우스.”

    율리우스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그가 있었다.

    어딘가 나른하면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

    일견 경박함을 보이지만, 실상은 얼마의 인간이 죽어 나가든 아무런 흔들림도 없는 괴물이.

    “하이젤.”

    “네가 이렇게 행동하라고 나를 떠민 것이 아니었나? 그런데 왜….”

    저벅-

    “이제 와서 난리를 치는 거지?”

    무표정한 얼굴의 하이젤이 그를 마주 보았다.

    그의 모습이 드러나자 율리우스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래서 말해봐라, 무슨 일 때문이지?”

    그가, 인간의 삶을 살기를 선택해야 했던 하이젤이.

    “…너.”

    다시 몸에 마기를 두르고 있었다.

    하이젤이 어둡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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