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 빙의를 싫어함-124화 (124/212)

제124화

공간이 울렸다.

아니, 세상이 호응하고 있다고 봐도 좋았다.

마력이 요동치며 신역의 중앙으로 몰려들었고, 팽팽하게 당겨진 실타래는 무언가를 끌고 오는 듯 파르르 떨렸다.

“이게, 이게 무슨….”

그란델은 알렌의 선언에 따라 진동하는 신역을 보며 아연실색한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살아온 기간이 달랐고, 쌓아 온 시간이 달랐다. 입문한 계통이 다르고, 겪어 온 경험이 다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마나의 맹세라고?”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그를 제외한 다른 마탑주라고 해서 의견이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마력을 가진 자는 세계에 자신의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선언이 모두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보이지 않는 증인과 심판자로서 자리할 뿐, 하지만 이런 대규모의 반응이라니.

“그저 생각을 바꿔 봤을 뿐이다.”

알렌은 태연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로 거대한 저울이 나타났다. 중앙의 공간이 진동하며 거대하게 솟아올랐고, 만들어진 심판대 위로 단두대가 자리했다.

“그저 단순한 맹세로 마력을 제약하는데, 더 특별한 준비를 한다면? 그 이상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그 추측대로 이뤄졌고.

알렌의 신역은 객관적으로 본다면 부족함이 많았다.

자신의 마법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고, 마법의 원리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도 못했다.

만약 그란델이 다른 것에 신경을 빼앗기지만 않았더라면 도망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시간이 지난다면.

운명 마법에 대한 이해를 더하고, 더 많은 연구가 선행된다면 알렌은 틀림없이 신역을 만들었을 것이다.

지금의 것과 다른 더 깔끔한 형태의 신역을.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앞으로 상대해야 할 적들과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비밀들.

그 모든 순간을 이겨 내기 위해서는 평범한 것으로는 부족했다.

신역은 변하지 않는다.

한 번 구축되면, 마법사와 평생 함께하며 변하지 않고 따로 강해지지 않는다.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기에.

알렌의 실력이 늘어날수록 신역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많아지겠지만, 특별히 신역이 더 강해지는 것을 뜻하지는 않았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한다면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휘스의 대답과 그란델의 대답 그리고 마나의 맹세로부터 얻은 실마리와 운명 마법의 가능성을 보고 결정을 내렸다.

“내 행동이 세계의 보편적인 선에 해당한다면 강해진다.”

자신이 더 강해질 수 없다면, 상대를 약화시키면 된다고.

“내 동기가 일반적인 인식에서, 정당한 사유라 판단되었을 때 강해진다.”

자신의 힘이 부족하다면, 힘을 빌려 오면 된다고.

“목적의 정당화가 미래의 올바른 결과로 이어진다면 그것이 옳다고 판단한다.”

끼익-

저울이 기울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행동을 축으로 삼고, 앞으로의 행동을 인질 삼는다.”

끼익-

저울이 다시 기울었다.

“그렇기에 나는 정당하다.”

알렌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신역이 완성되었다.

신역(神域)

우르다르브룬느(Urðarbrunnr)

실타래가 모여져서 만들어지는 건, 시간이 고인 운명의 우물.

선악비의정(善惡非義定)

그 위로 알렌의 진언(盡言)에 따라 선과 악, 옳고 그름을 정할 저울이 나타나며.

단두처형(斷頭處刑)

머리를 갈라 처형할 단두대가 자리했다.

그것을 위해 복잡한 조건을 달아 그의 신역을 침식했고, 직접 자신의 제약을 선언함으로써 가능성을 중첩시켰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지.”

“이럴 수가….”

그란델이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뒷걸음쳤다.

“…감히 네 행동을 세계가 보좌해 준다고? 그게 어떻게 말이 되느냐! 결국, 네 행동을 자기 합리화할 뿐이 아니냐! 그런데, 그걸로 힘을 얻어?”

그란델의 눈이 저울과 심판대 그리고 단두대를 향했다.

그는 알렌이 말한 바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어란 말이냐.

정의? 보편적인 정의라고?

“네가 무언데 그걸 정하느냐!”

그란델은 인정할 수 없었다. 몸에서 힘이 조금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말뜻대로라면 자신을 틀렸다는 게 아닌가.

자신의 삶, 목적, 행동이 틀렸다 평가받는 기분은 끔찍했다.

수십 년이 넘는 삶 속에서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조차 없었다.

“네가 그랬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그럼 그 반대도 가능한 것이 아닌가?

조금씩 힘이 빠져 허약하게 변하는 그란델에게 알렌이 차갑게 비웃었다.

“더 할 말이 있나? 변명할 시간을 주지.”

“…….”

그란델은 침묵했다.

노련한 마법사인 그는 쉽게 빈틈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곧 그란델은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이런 미치광이를 봤나.”

그란델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침묵할수록 심장 안쪽에 위치한 고리가 흩어지는 걸 느꼈다.

알렌은 느긋한 웃음을 짓다 그란델이 노려보자, 무엇이 문제냐는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러지?”

“…정신이 나갔나? 자신의 신역에 금제(禁制)를 가한다고?”

침묵한다면 마력이 흩어진다. 마치 마나의 맹세처럼.

그 끔찍한 상황에 그란델이 표정을 일그러뜨리자, 알렌은 다시 물었다.

“이제 대답할 마음이 들었나?”

“그래, 무엇이 궁금하지?”

그는 다 포기한 얼굴로 질문했으나, 알렌은 방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묻지, 지금까지 유망주들을 죽인 이유가 뭐지?”

“당연히 그들이 마법사의 금기(禁忌)를 어겼….”

말을 하던 그란델은 이를 악물었다. 거짓을 입에 담아도 마력이 흩어지는 건 마찬가지였다.

신역의 기능, 그 하나만을 위해 이만한 불이익을 짊어진다고? 다른 가능성을 모조리 내다 버리고?

“죄인, 마지막으로 항변할 기회를 주지.”

그 말에 그란델은 결국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내가! 내가 왜 네 동생의 서클을 깨부쉈는지 아느냐!”

“모른다.”

“그럼 왜! 다른 이들의 목숨을 취했는지 아느냐!”

“그것도 모른다.”

“모두!”

그의 얼굴이 붉게 변하며 처절함과 집착이 묻어 나왔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끼익-

저울이 조금 기울었다.

그 모습에 그란델은 혼신의 힘을 짜냈다. 지금 판을 뒤엎지 못한다면, 자신은 끝없이 약해져 결국 죽을 수밖에 없음이 분명했다.

“너는 모르겠지만, 세상은 이미 몇 번이고 멸망했다!”

다시 저울이 기울었다.

“고대 제국의 이전! 용과 거인의 이전! 그 이전에도 몇 번이고 세상은 멸망했단 말이다!”

끼익-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아느냐? 아니, 모르겠지. 간단하다. 네 동생 같은 천재 때문이지. 그런 천재 하나가 시대의 흐름을 이끈다!”

저울이 수평을 되찾아 갔다.

“그 하나 때문에 시대가 특이점에 도달하면, 세상은 멸망한다. 무엇 때문에? 그건, 그건….”

그가 입을 열려던 때, 알렌의 뒤에서 하얀 책이 열렸다. 아니, 열리려 했다.

허공과 이어져 있던 반투명한 실타래가 책을 휘감았다.

하얀 책은 몇 번이고 몸부림쳤지만 벗어날 수 없었고, 결국 그란델의 말은 이어졌다.

“살아 있는 재앙이 강림하기 때문이지.”

“…살아 있는 재앙?”

“그렇다!”

끼익-

수평을 찾아간 저울이 다른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름은 모른다. 그저 회색의 괴물이라는 것만 알 뿐. 세상에 알려진 유적이 전부라 생각하나? 천만에!”

그는 누가 들을까 두렵다는 듯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7위계 마법사의 저런 모습에 알렌의 눈이 침잠되었다.

“마탑에는 선대에서부터 이어져 온 수많은 자료가 있다 보니, 그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이대로 있으면 세상은 멸망한다고.”

그는 그것을 진실로 믿는 듯 표정에 조금의 거짓도 없었다.

“지금 세상을 봐라! 시대가 바뀌려는 게 너는 눈에 보이지 않느냐? 나는, 나는 그게 너무 두렵단 말이다!”

알렌은 마탑을 왔을 때 탔던 마차를 떠올렸다. 그러다 엘피스의 축제를 떠올렸고, 미래의 정보를 떠올렸다.

“그렇기에 네 동생의 서클을 부셨다. 마나를 작은 입자로 인식하는 재능은…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다.”

이제 저울은 상당 부분 그란델의 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이게 전부다! 죽이지 못할 때는 서클을 부셨고, 내가 움직이지 못할 때면 휘스를 시켰다. 이 모든 것은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말이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그란델은 몸에 끓어오르는 힘을 느꼈다. 그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까지도 그를 제약하던 힘이 지금은 그를 돕고 있었다.

자신감을 점차 되찾는 그가 입을 여는 순간, 알렌이 답했다.

“그게 끝인가?”

“뭐?”

알렌은 무심한 표정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럼 반론을 시작하지.”

첫째, 그의 말에 가장 큰 모순.

“그럼 왜 마도여황을 죽이지 않았나.”

뭐라 반론하려던 그란델이 입을 다물었다.

“세상을 지키기 위해? 하, 웃기는군. 당대 최강의 마법사를 놔두고서 뭐?”

“…언젠가 틈을 노릴 생각이었다.”

그의 추한 변명에 저울이 기울었다.

“언제까지?”

“…그건.”

끼익-

수평으로 변한 저울의 모습에 그란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두 번째, 그 행동이 오직 정의로 행했다 확신할 수 있나?”

“그래! 나는 오직 세상….”

“마탑의 암투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그란델이 멈칫했다

알렌은 피식 미소 지었다.

“그란델, 당신이 마탑주가 되기 위해 했던 업적의 뒤에 행방불명 된 사람이 꽤 있더군. 그들은 무슨 죄인가?”

어차피 세상을 바꿀 만한 재능이 있던 것도 아닐 텐데?

“그건… 그들이 미래에 재능 있는 마법사를 낳을 수…!”

끼익-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

끼익-

자꾸만 기울어 가는 저울에 그란델은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란델 너에게 다시 묻지.”

그란델은 몇 년은 폭삭 늙은 얼굴로 알렌을 노려보았다.

“너는 아직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

그란델은 핏발 어린 눈으로 저울을 바라봤다.

저울은, 알렌 쪽으로 반 이상이 넘어간 채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여기서 대답을 해 봤자 불리해지는 건 자신이었다.

“으아아아아아! 죽어라!”

그의 모든 마력이 모여 만들어 낸 주먹만 한 강한 충격파가 알렌을 향했다.

제일 처음 마법을 습득하게 도와주었던, 자신이 가장 자주 사용했던 충격파의 최종 모습.

알렌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게 당신의 답인가.”

홀로 솟아 있던 심판대가 진동하며 빛을 뿜어냈고, 알렌을 향하는 공격을 막아 냈다.

“죽어, 죽으란 말이다아아아!”

그란델의 실력은 끊임없이 약화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알렌의 힘은 늘어 갔다.

그 모습을 보며 알렌은 많은 것을 곱씹었다.

나는.

“동생을 구하고 싶었다.”

어릴 적 동생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끼익-

나는.

“선한 인물로서 남고 싶었다.”

모든 것이 끝난 후, 동생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끼익-

나는.

“주변 사람을 구하고 싶었다.”

과거의 죄책감을 덜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끼익-

“나는!”

알렌이 손을 들어 올렸다.

자신의 진심을 깨닫는 과정은 모두 다르다.

처음에는 율리우스였고, 후에는 죄책감이었으며, 끝에는 바람이었다.

그 때문에 흔들렸고, 고민했으며, 방관했다.

그러나 이제는.

“망설이지 않으리라.”

양팔 저울이 완전히 기우는 순간,

알렌이 손을 내렸다.

선악심판(善惡審判) 처형(處刑)

공중에 맴돌던 단두대가 거대한 형상을 그렸다. 새하얀 빛의 천벌이 공간을 갈랐다.

싹둑-

죄인의 목이 잘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