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어렵게 짜 맞춘 퍼즐을 흩트리는 건, 맞출 때와 비교도 안 되게 간단하다.
그저 뒤엎는 것.
그 하나의 행동만으로도 모든 노력은 물거품으로 변한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도 마찬가지였다.
알렌을 도륙 낼 듯 다가오던 바람의 방향이 꺾였다. 그물에 닿았던 돌풍은 그대로 돌아가 회오리에 섞인 돌조각과 부딪쳤다.
쾅!
돌가루가 흩날렸다.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마법에 그란델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물 범위 안의 돌풍은 그것만으로 모자라다는 듯 방향을 바꿔 협곡지대의 벽면에 구멍을 뚫었다.
알렌은 회오리와 암벽을 잇는 얇은 실의 모습을 보며 냉정하게 판단했다.
‘십 초, 아니 오 초 정도 버티나?’
과거규정이 과거의 원래 운명 그대로 되돌린다면, 지금 사용한 현재역변은 이어지지 않은 운명을 강제로 엮는다.
그 시간은 몇 초라 할 만큼 짧았으나, 상대의 마법을 무효화시키기에는 충분했다.
하늘과 땅을 이을까 싶던 회오리가, 그 효용성 한 번 보이지 못한 채 사라지자 그란델은 제대로 상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이제는 알렌의 차례였다.
실타래를 감싸던 손을 뒤집었다. 녹청색의 칼날이 허공을 꿰뚫는다.
그와 동시에 알렌이 발을 박찼다.
쾅!
어느새 베스틀라가 그의 손에 쥐여져 있었다.
녹청색의 칼날은 그란델에게 향했으나, 그의 재빠른 행동에 협곡지대의 벽면에 박혀 들었다.
그란델은 잡고 있던 지팡이로 바닥을 쳤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주먹 모양의 구름이 떨어져 내렸다.
이계, 이르파스카더스. 알렌의 피부가 검게 물들며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파앙!
주먹은 땅에 닿는 즉시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어딜 도망가느냐!”
그러나 구름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었다.
쿠구구구구!!
협곡지대를 박살 낼 듯 수십 개의 주먹이 그대로 알렌을 향해 내리찍었다.
알렌의 손짓에 물레가 회전하며 공격이 무효화 되었고, 그물이 생성되며 박살나며 산란하는 파편들을 감싸 안았다.
그의 머리 위로 폭풍의 창이 떨어졌다.
콰아아앙!
오랜 시간을 바람에 버티던 협곡의 탑 하나가 무너져 내렸다. 그럼에도 그란델의 손속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진작 이곳의 수색은 끝냈었기 때문이다.
높은 돌탑의 꼭대기에서 끊임없이 폭풍의 창이 쏘아졌다.
알렌은 정면을 향해오던 폭풍의 창에 검을 내질렀다.
일계, 마나그람.
붉게 물들던 검이 그대로 창을 반으로 갈랐다. 그러나 주위로 쏟아지는 충격에 알렌의 몸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를 틈타 그란델이 수인을 맺었다.
짧고 굵게, 이미 수인의 간략화를 습득한 그에게 위력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겨울의 정령.”
그가 수인을 끝마친 즉시 정령 하나가 북풍을 몰고 알렌에게 돌진했다.
정령은 바람과 서리가 섞인 칼날 같은 작은 화살들을 몰며 알렌에게 달려들었다.
사아아아-
날카롭게 얼어붙은 바람은 그를 갈아버릴 듯 기세가 흉흉했다. 그 엄청난 온도변화에 공기의 대류 현상이 일어났다.
알렌의 주위를 완전히 박살내겠다는 의지를 가진 광역 공격.
정령까지 동원한 공격에 알렌은 물레를 미친 듯이 돌려 앞을 막아 세웠다.
그리고 틈이 날 때마다 녹청색의 창을 날려 보냈다. 그러나 그 공격들은 무의미하게 바람에 휩쓸려 주위 벽면에 틀어박혔다.
알렌은 뒤를 노리는 공격을 그물로 막아내며 정령을 살폈다.
하얀 사슴 형태와 차가운 북풍, 전형적인 겨울 정령의 모습이다.
‘정령까지 사용한다?’
기본적으로 두 개 이상의 위계를 파고드는 건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마탑주까지 올라간 그란델이니, 마법 하나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터. 그러나 그가 정령 계약에 성공했다는 것은 그가 정령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바람은 약하다.
거대한 재해를 일으킬 수 있지만, 불이나 번개 같은 파괴력을 내기엔 힘들다.
정령은 그것을 보조하는 데 충분한 도움을 줄 수 있을 터.
게다가.
‘정령은 죽이기 힘들다.’
완전히 소멸시키는 건 많은 준비가 필요했고, 당장 할 수도 없었다.
단지 역소환, 지금의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기만 하면 충분하다.
알렌의 마법이 순간적으로 끊겼다.
전방을 막아내던 물레가 희미해지고, 그의 주변을 맴돌던 그물이 사라지는 가운데, 정령이 그 차디찬 숨결을 뱉으며 다가왔다.
사아아아-
“…후.”
노심의 마력이 일순간 검에 모였다.
한 번 멈췄던 노심은 다시금 세차게 마력을 공급했으나,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옷이 잘게 찢겨 형태도 알아볼 수 없게 변했다.
차디찬 정령이 죽음을 두르고 그에게 다가서는 순간.
삼계, 료스솔.
빛으로 이루어진 태양이 검 끝에서 빛났다. 거대한 빛이 서리를 깨부수며 정령의 몸을 뒤덮었다.
콰아아앙!
“……!!”
정령이 역소환 되자, 그 여파로 그란델의 안색이 거뭇하게 변했다.
알렌은 여전히 날붙이를 그에게 던졌다. 다른 마법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의 마법은 정신에 영향을 일으키는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대등하거나 낮은 실력이라면 모를까 그보다 명백히 상위의 실력을 갖춘 그란델에게 의미 없는 마나발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란델의 안색이 시종일관 가라앉아 있자, 알렌이 피식 웃었다.
그 모습에 그란델이 굳은 얼굴로 손바닥을 내리쳤다.
알렌은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위기감에 속도를 올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란델의 수인이 알렌의 반응 속도를 넘어섰다.
부서진 바위들이 날아온다.
알렌은 수인을 맺을 틈도 없어 손가락을 튕겼다.
팡!
충격파가 터지며 날아오던 바위들을 밀어낸다.
그 모습에 그란델은 순간 눈썹을 움찔했지만, 이내 다시금 진중한 얼굴로 수인을 이어나갔다.
이번 공격은 그로서도 집중해야 할 만한 수였다.
겨우 바위의 잔해를 걷어내던 알렌이 본 것은, 그란델의 웃는 얼굴이었다.
뜨거운 열기가 얼굴을 스쳤다.
들이쉬는 공기에 폐까지 익을 것 같은 온도.
후우욱-
알렌이 하늘을 올려다보자, 주위가 몇 십 도는 올라간 원인이 그를 반겼다.
하늘의 공기가 일그러지며, 하늘 저편에 있던 바람이 불어온다.
중간열풍 태양십자
천중화
쿠우우웅-
강제로 끌어당긴 하늘의 바람은 십자의 형태로 돌며 그의 위쪽에서 거대한 열기를 내뿜었다.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열풍에 협곡에 피어났던 식물들이 시들었고, 돌바닥을 뜨겁게 달구었다.
7위계 마법사가 일으킨 인위적인 재앙(災殃) 속에서 그란델이 오연하게 알렌을 응시했다.
“이 정도면 오래 버텼다.”
그가 열풍의 속도를 높였다.
“그만, 끝내도록 하지.”
알렌은 이제 끝났다는 듯한 오만한 얼굴의 그란델을 보며 조소를 흘렸다.
“내가 여기까지 그냥 왔다고 생각하나?”
“뭐?”
알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용의 노심을 자극한다. 끝도 없이 뿜어지는 마력은 수천 갈래의 실타래를 넘어, 공간을 가득 채울 듯 넘실거렸다.
실타래는 물레를 거쳐 그물을 지나, 새로운 형태로 빚어진다.
과거와도 다르고, 현재와도 다른 운명의 형태.
운명(運命) 제 3법(法)
노른 스쿨드(Norn Skuld)
미래부지(未來不知)
미래는 알 수 없다.
실타래가 천천히 분해되어 나타나는 건 빛과 같은 형태.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고.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다.
과거가 정해져 있고, 현재가 변하지만, 미래는 알 수 없다.
미래란 그런 것이니.
실타래를 벗어난 작은 빛의 알갱이가 자신을 뒤덮었다. 그와 동시에 협곡 전체를 뜨겁게 달구던 열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소리는 없었다.
“…….”
그러나 결과까지 그렇다는 건 아니었다.
그란델은 드디어 평정이 깨져 경악 어린 얼굴로 알렌을 바라보았다.
열풍이 사라진다.
식물을 한순간에 시들게 했던 열기도, 거대한 폭발에 일어나야 할 후폭풍도 없었다.
그저 열풍이 빛의 알갱이에 닿는 순간 없어졌다.
그것이 그란델이 이해한 전부였다.
“……과연, 나에게 대항할 수단은 있다는 건가?”
그러나 그 감정도 빠르게 잦아들었다.
아니, 억지로 잠재웠다는 말이 옳았다. 전투를 하는데 쓸데없는 감정은 판단력만 흔들 뿐이니.
“그것도 없이 왔겠나?”
알렌은 태연자약한 얼굴로 말했으나, 내심 심장이 조여드는 감각에 고통을 느꼈다.
익숙한 형태의 고통이었다.
마력 고갈의 전조.
제 3법 미래부지는 료스솔보다 더 많은 마력을 잡아먹었다. 용의 노심이 대화를 하는 지금까지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당연한 건가.’
미래부지는, 운명에 간섭하는 힘이다.
과거규정을 통해 그란델의 마법을 되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본래부터 존재했던 하늘의 열풍은 어떻게 되돌리는가.
그곳의 공기는 몇 시간, 며칠 전으로 되돌린다 해서 없앨 수 있을 만한 열기가 아니었다. 이미 과거부터 존재했을 테니.
그렇기에 제 3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규정이 본래의 형태로 되돌리고, 현재역변이 본래와 다른 운명으로 강제로 이어버린다면, 미래부지는 원래 받아 들였을 운명을 비튼다.
그를 통해 열풍은, 어쩌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미래로 비틀었다.
그게 어떤 원리인지 알렌도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역천에 가까웠다.
그 반작용도 만만치 않을 만큼.
‘한순간밖에 사용할 수 없다.’
만약 그란델의 마법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버텼거나, 상대가 그보다 강한 팔강이었다면 알렌은 곧바로 짓이겨졌을 것이다.
“명색이 7대 마탑의 주인을 상대하는데, 이 정도의 수는 있어야지.”
알렌은 간신히 다시 뛰기 시작하는 노심의 마력을 끌어내며 다시 녹청색의 날붙이들을 날렸다.
그란델은 그 공격을 도발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손을 크게 휘저었다.
쾅!
몇 번이나 튕겨 나간 날붙이는 협곡의 바닥과 벽면에 박혀 들었다.
“…후,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있군. 이 나이를 먹고 무시를 당하다니.”
기류가, 흐름이 달라진다.
휘이이이-
협곡의 뚫린 벽면을 지나가며 기이한 바람 소리가 알렌의 귓가를 찔렀다.
그란델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지금까지 얕본 것을 사죄하도록 하겠네, 후배.”
알렌의 대한 명칭을 달리 부르며, 그란델은 싸늘하게 웃었다.
“상대가 어리다고 해서 방심하면 안 되는 법이거늘….”
그는 고개를 흔들며 몸을 지지하던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 행동에 힘입어 하늘의 구름에서부터 거대한 폭풍이 그의 위로 내려앉았다.
쿠우우웅!
“상대가 마법사라면 마땅한 진심을 보이는 것이 합당할 터.”
그가 입고 있던 로브가 미친 듯이 팔락거렸고, 노인의 몸에서 믿을 수 없는 기세가 터져 나왔다.
바람이 머무른다.
그의 주위로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순수한 바람이 모였다.
7위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고리가 진동하며 마력을 뿜어냈고, 그의 감지력에 닿은 외부마력이 호응하며 폭풍을 키웠다.
거대하게 변한 폭풍의 위로 구멍 뚫린 하늘에서는 햇빛이 그의 머리를 내비쳤다.
“제대로 된 인사를 하도록 하지. 7위계의 마법사이자 바람의 마탑주로 불리는 그란델일세. 마도여황에게 배움을 받고자 원래 이름은 버렸지.”
존재감이 더욱 확장된다.
더욱더 크게.
머물지 않는 바람이 부름을 받고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어느새 그는 유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선 고마움을 표현하도록 하겠네. 자네 덕분에 자네 같은 경우가 더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네.”
그는 담담히 알렌에게 읊조리고 있었지만, 그의 손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수인을 맺었다.
쿠르릉!
고개를 돌리니 하늘의 저편에서 검은 구름이 몰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후배가 가르침을 줬으니, 선배도 마땅히 보답해야 하는 법.”
“…….”
녹빛의 안광에 소용돌이가 담겼다. 바람을 타고 그의 목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알렌이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선고하겠네.”
7위계의 자격을 손에 쥔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알렌, 알렌 라인하르트. 내 상대로 인정하겠네. 그러니.”
바람은 알렌과 그란델, 아니 그것을 넘어 협곡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벽이 되어 감쌌다.
왜소한 노인의 몸이 부풀어 오르더니, 곧 근육으로 가득 찬 중년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신역(神域)
십이중북서(十二中北西)
상취재풍천(常吹在風天)
바람이 불었다.
“장난은 끝났다. 어린 마법사야. 살고 싶다면 전력을 다해라, 아니, 네 모든 것을 보여야 할 거다.”
바람의 신이 나직이 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