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 빙의를 싫어함-121화 (121/212)

제121화

그란델은 빠른 속도로 하늘을 날았다.

그가 향하는 장소는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유적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곳에 분기별로 입장권을 통해 들어오는 것과 다르게 7대 마탑의 마탑주들은 제약이 있으나 자유롭게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다.

물론 언제까지나 있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하루에서 이틀.

그것도 한 달에 한 번만 출입할 수 있을 뿐이지.

하지만 그와 같은 초인은 고작 하루의 시간으로도 일반인이 하는 일의 몇 배에 해당하는 작업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는 저번 달에 발견했던 유적을 마저 공략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유적으로 이동하려던 찰나, 그란델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그 방향에서 하얀색 빛 뭉치가 날아왔다.

“…저건 신호인데.”

저게 발동될 만한 일이 있나?

자신을 제외한 마탑의 일원은 들어오지 않았고, 저걸 가지고 있는 사람의 수 자체도 한정되어 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그가 손을 당기자, 푸른 바람이 빛 뭉치를 당겨 왔다.

“이건….”

그 빛 뭉치의 정체를 알아챈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휘스가?”

그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정리되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했다.

한가하게 유적을 공략할 때가 아니였다.

그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른다. 어떻게 이곳까지 납치된 지도 모르겠고. 그러나 할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람 마탑의 주인.

7위계의 능력자.

그란델.

그가 방향을 돌렸다.

그의 감정을 알아채듯 그의 옷자락이 미친 듯이 팔락거리며 광풍이 몰아쳤다.

* * *

후우우웅-

날카로운 삭풍이 협곡 사이를 매섭게 몰아쳤다.

바람 마법을 사용하는 그란델에게 있어 이 장소는 최고의 장소일 것이다. 주변 지형지물을 이용할 수 있을뿐더러, 마법의 위력도 강화될테니.

알렌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 불리한 상황.

그런데도 그는 이 장소를 골랐다.

바람의 마법을 사용하는 그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는, 이곳만큼 안성맞춤인 장소도 없었기 때문이다.

“…….”

한동안 협곡의 아래를 바라보던 알렌은 많은 생각이 들었다.

회귀를 깨달은 직후, 저택에서 세웠던 계획, 키메라 술사 사건, 신수의 숲의 흑마법사, 벤자민의 대련, 유적의 괴물, 학기 말 대련 등.

과거의 계획과 미래의 계산이 서로 혼란스럽게 얽혀 어그러지고 지고 있었다.

검은 책과 하얀 책의 유용성을 깨달았을 때, 제3세력이 여러 곳에 손을 뻗치는 것을 알았을 때, 하얀 책이 원하는 것이 마왕을 막는 것이라 추측했을 때.

그로 인한 처음 세웠던 계획과 점차 달라지는 미래.

처음 율라우스 만을 구하려던 계획은 이제 세력과 인재가 합쳐져 다른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새로운 목표기도 했으며, 자신이 선택한 미래기도 했다.

‘변하는 건 없다.’

율리우스는 아니, 김우진은 여전히 빙의자고, 제3세력도 물리쳐야 할 상대에 불과하다. 그 사이 마왕이든 흑마법사가 끼어들든 상관없었다.

단 한 번의 기회를 노린다.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고, 새로이 얻은 회귀의 특권이었다.

그 목표에 달려가는 사이, 여러 고민과 그로 인한 행동이 자신을 막았지만, 이제는 그것도 끝이었다.

“너로구나.”

알렌이 고개를 들었다.

날카로운 삭풍이 노인의 주변을 돌았다. 협곡을 맴돌던 바람이 흐름에 이끌렸고, 알렌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내 손자를 건드린 놈이.”

사실 지금도 모르겠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시시각각 달라지는 기준과 겨우 세워진 자신의 선.

그의 간극과 이따금 생겨나는 모순은 범인에 불과한 그를 흔들어 댔다.

아무리 강철 같은 마음을 먹어도. 그는 인간이었다.

불안하고, 불완전한.

“휘스는 어디 있지? 아직 살아 있는 듯 보이는데….”

노인이 눈썹을 찌푸렸다. 알렌의 얼굴이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별일 아니라 생각했는지 금방 고개를 흔들었다. 고작 신역도 구축하지 못한 마법사 따위, 기억할 가치도 없었다.

그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손자의 안위였다.

휘스가 얼마나 쓰레기이건 재능이 있건 없건 상관없다.

그의 악명을 통해서 귀찮은 일을 처리할 수 있었으니, 자신도 그에게 마땅한 안전을 보장해 주어야 했다.

앞으로의 행동을 위해서라도.

“아니, 네 놈을 죽이고 알아보면 되겠지.”

노인이 손을 들어 올렸다.

옅은 녹색의 칼바람이 둥글게 압축되었다. 둥근 구의 주변에서는 용오름 소리가 났고,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강대한 마력을 느낄 수 있었다.

“깔끔하게 보내 주마. 너 따위에게 쓸 시간도 아까우니.”

그란델이 손을 내리쳤다.

작게 압축된 바람의 구가 터져 나가며 수만은 될 법한 칼날이 터져 나왔다.

바람이 끊기고, 공간의 면(面) 자체를 가득 채우는 만면의 칼날.

그 앞에서 알렌은 손을 풀었다.

용의 노심이 끌어낸 실타래가 손 사이에 걸렸다.

풀어헤친 실이 가닥가닥 이어져 수천의 실타래가 이어졌다.

휘스 아로나의 대답은 들었다.

그러니 이제는.

“아니, 그러기에는 조금 이르군.”

그란델의 대답을 들을 차례였다.

알렌이 손을 튕겼다.

운명(運命) 제 1법(法)

노른 우르드(Norn Urðr)

과거규정(過去規定)

생물은 태어날 때부터 모든 운명이 정해진다.

실타래가 커다란 물레로 엮이기 시작했다. 수레바퀴 모양의 물레는 한쪽으로 돌아가며 알렌의 앞을 막아섰다.

그 모습에 그란델은 아무런 감흥 없이 칼날의 수를 늘렸다. 어떻게 방어하려 하든 완전히 짓눌러 버릴 생각이었으리라.

그러나 생각처럼 일이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알렌을 바라보는 그란델의 얼굴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이건 신기하군.”

칼날이 사라졌다.

그란델은 자신이 본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시간 마법인가? 아니, 그것과는 살짝 다른데….”

산들바람이 알렌의 옷깃을 스친다.

그의 통제에 사나운 삭풍처럼 몰아치던 바람 칼날은, 수레바퀴에 닿기 무섭게 산들바람으로 변했다.

“공격을 막아선 게 신기한가?”

알렌의 기꺼운 반응에도 그란델은 가라앉은 눈으로 팔을 휘저었다.

그의 심상에 따라 이끌린 마력이 광폭한 소용돌이로 변해 휘몰아쳤다. 그러나 어떤 공격이든 수레바퀴에 닿자 언제 그랬냐는 듯 산들바람으로 흩어졌다.

알렌은 대응하지 않았다.

남들이 보지 않을 때 몇 번 사용해봤으나, 7위계 마법사 앞에서 사용하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한계는 대략 이 정도인가.’

마법은 한계가 없으나, 마법사에게는 한계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 더 발전한다면 몰라도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지금이 한계였다.

‘마탑주란 이름이 허명은 아니군.’

전력이 아님에도 일반 마법사의 수 배나 강력했다.

한동안 공격을 이어 나가던 그란델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이름이 뭐지?”

“알렌.”

알렌이 성을 숨기자, 그란델의 얼굴이 구겨졌다.

저런 마법을 쓰는 이들이라면 진즉 소문이 났을 테니까. 특히, 모든 공격을 산들바람으로 되돌리는 저 마법은 변화 학파에서 눈독 들일만 했다.

“성이 무엇인지 말하는 게 예의가 아니겠나. 아니면 말하기 부끄러운 곳인가 보지?”

“다짜고짜 공격해 놓고, 이제 와서 대화를 청하나? 마탑주의 체면이 말이 아니군.”

알렌이 대답하지 않고 비웃음을 지어 보였으나, 그란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의 수행은 모욕 정도로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알렌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알고 있다, 알고 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저런 마법을 쓰는 이들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저런 특이한 마법이라면, 잊어버리려야 잊어버릴 수 없을 테니까.

“어디 세력이지? 제국? 아니, 제국은 저럴 역량이 없다. 그렇다면 엘프 쪽 혼혈인가? 그렇지만도 않은데….”

저 특이한 청발.

분명 어딘가 기억에 있었다.

기억에 남았다는 건 비슷한 이들을 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

잠시 인상을 찌푸린 그의 뇌리에 순간적으로 어린아이의 모습이 겹쳐졌다.

“…과연, 라인하르트인가.”

알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란델은 알렌이 라인하르트 가문일 것이라 짐작했다.

동시에 그가 왜 휘스 아로나를 납치해 두고 자신을 이곳에 끌어들였는지도 깨달았다.

“복수가 목적인가?”

알렌은 알 듯 말 듯한 미소로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휘스 아로나의 대답과 자꾸 고민과 후회로 흔들리는 자신을 보며 깨달았다.

“아니, 이건 다짐이지.”

가이온의 한 마디에 휘둘린 것도 지긋지긋했고, 사건마다 판단과 기준에 영향을 받는 것도 지겨웠다.

그러니 이건 다짐이자 선언이었다.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한.”

도대체 언제까지 사소한 것에 흔들리려 하는가.

“…다짐?”

“휘둘리는 것도 지겨워졌거든.”

꼭 선과 악에 머무를 필요는 없다.

옳음과 그름을 따질 이유도 없다.

정당함과 부당함 사이에 헤맬 필요가 없다.

왜, 그 모든 것을 돌보려 하는가.

자신은 동생 하나 구하지 못한 못난 형일진대.

세계를 위함이니 멸망이니 그런 것들 모두 다 상관없었다.

자신 혼자 지키기에도 벅찼다.

그렇기에 고민했고, 결정했다.

그것을 처음 증명하기 위한 상대가 그란델이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이해할 수가 없어.”

그의 대답에 그란델은 알렌을 미치광이 바라보는 표정으로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목적으로 네 동생의 고리를 부쉈는지 아느냐?”

“내가 알 필요가 있나?”

“이리도 어리석구나. 어리석어….”

그란델은 알렌에 대해 알아보려던 것을 그만두었다.

상대의 신분은 정해져 있다. 그가 이런 마법을 사용한다는 소문은 들은 적 없었으니, 개인적인 복수일 확률이 높았다.

몇 달 전, 프린달에게서 알렌에 대한 정보를 얻었으니 확실했다.

손녀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프린달은 쓰기에 적당한 말이었다.

‘이제 슬슬 성장세도 가팔라졌으니 다 같이 처리해야겠군.’

알렌도 마찬가지.

저 마법을 사용하기 시작한 건 최근일 터, 그렇다면 알렌도 그란델이 처리해야 할 대상이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마탑주인 나를 건드리다니, 젊은 피는 이렇게 무지하구나.”

“글쎄, 늙어서 미몽에 사로잡혀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나.”

“이대로 항복하고, 휘스를 내어 준다면 봐주마. 어떻게 하겠느냐.”

“늙은 여우는 믿는 게 아니라 그랬지.”

그란델은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알렌의 목적이 확고하다면, 그 이상 설득할 필요 없었다.

그의 주변을 돌던 바람의 흐름이 가속한다. 순식간에 하늘과 땅을 이을 듯 거대해진 회오리가 솟아오르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수백의 칼바람이 협곡의 벽면을 깎아지르며 위태로운 비명을 질렀다.

협곡의 날카로운 삭풍에 부서진 돌조각들이 위협적으로 공간을 울렸다.

알렌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한 손의 수인을 그렸다. 용의 노심이 미친 듯이 돌아가며 실타래를 뽑아냈고, 물레가 윰직이며 뽑아낸 실타래를 엮기 시작했다.

물레가 돌아간다.

얽히고설킨 실타래는 하나의 거대한 그물로 엮인다.

운명(運命) 제 2법(法)

노른 베르단디(Norn Verðandi)

현재역변(過去易變)

생물의 삶은 쉽게 바뀌며 달라진다.

그물에 뒤덮인 회오리와 맞닿을 리 없는 돌조각의 운명이, 강제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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