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이제 끝인가?”
복도의 그늘진 그림자에서 두 명이 걸어 나왔다. 검은 두 인영의 정체는 알렌과 프란시스카였다.
“네, 며칠 동안 충분히 공들였으니 이제 괜찮을 거예요.”
프란시스카는 차분한 걸음으로 나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저택의 곳곳에서 여러 가지 생물이 기어 나왔다.
구불거리는 촉수, 날개 달린 눈알, 표정 없는 그림자, 소리 지르는 하얀 가면까지.
당장 밖에 데리고 나간다면 그녀가 악마 계약자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기괴한 외형이었다.
‘저게 바로 그녀의 마법인가….’
상암 마법이라 했던가.
운명 마법과 같이 그녀가 직접 창시한 계통.
인간 본연의 심연과 관련되어 있다는 그녀만의 마법.
저 모습을 보니 왜 그녀가 전생에 마녀라 불렸는지 이해가 가능했다.
“자, 다시 들어가렴.”
그녀가 손을 휘젓자, 기괴한 외형의 괴물들은 검은 안개로 분해되어 사라졌다.
알렌은 일을 처리하기 전 먼저 감사 인사를 했다.
“며칠 동안 움직이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아니에요, 즐거웠는걸요?”
그녀는 정말 즐거웠다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고생은 저뿐만이 아니라, 도와준 다른 이들 덕분이죠.”
“그들에게도 답례해야겠군요.”
“그건 공자님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어요.”
그녀는 싱글벙글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알렌은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 건지 알았다.
‘슬슬 결정해야겠지.’
사실, 프란시스카에게서 그란델과 휘스 아로나의 정보를 얻었을 때부터 반쯤은 결정했었다.
그란델을 죽이자고.
그러나 알렌은 좀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아니 그보다는….’
자신이 옳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그 때문에 그녀에게 받은 자료를 확인한 직후, 휘스 아로나의 악행에 분노를 품은 이들의 힘을 빌려 순조롭게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휘스 아로나에게 당한 이들의 신분은 다양했다.
그중에는 별 볼일 없이 평민에서 재능을 인정받아 마법사가 되려는 이들도 있었던 반면, 전통적인 마법 명가도 몇이나 있었다.
그들은 그란델보다는 약하다고 해도 절대 그 위세가 약하지 않았다.
단지 마탑주를 상대할 수 없기에 분을 삭이고 있었던 것일 뿐.
알렌은 며칠간 움직이며 그들과 접촉했고, 그들에게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된다고 설득하고 나서야 도움을 받게 되었다.
그 덕에 휘스 아로나 곁의 인물들을 순조롭게 배제할 수 있었다.
그 후에는 직접 나서서라도 도움을 주고 싶다는 이들을 움직여 휘스 아로나를 압박했고, 그를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그 틈을 프란시스카의 상암 마법을 통해 더욱 뒤흔들었다.
그렇게 나온 결과가 이것이었다.
완전한 휘스 아로나의 신변.
며칠에 가까운 공작으로 인해 그들을 방해할 이들은 아무도 없었고, 때마침 그란델의 관심도 도시의 바깥에 있었다.
지금만큼 절호의 기회가 없었다.
“공자님 빨리 행동해야 해요. 한 시간 후면, 사용인이 음식을 가지고 도착할 시간이니까요.”
알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쓰러진 휘스 아로나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뒤집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되지? 그의 정신 방벽이 완전히 허물어지기는 했는데….”
“제가 할게요.”
그녀는 잠시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더니 손을 휘저었다.
그녀의 수인에 따라 얇은 실지렁이가 그의 입 속을 파고들었다. 잠시 후 휘스 아로나의 눈이 부르르 떨리더니, 멍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무의식 상태인가.”
“네, 맞아요. 정신에 관여하는 건 저도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없으니, 빨리 질문하는 게 좋을 거예요.”
알렌은 그와 그란델에 대한 모든 정보를 떠올렸다.
그란델의 행동과 휘스 아로나의 악행.
그로 인한 피해와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만들어진 결과.
물어볼 것은 정말로 많았다.
그란델이 휘스 아로나를 움직여 얻으려는 것.
그의 진짜 진의와 소문과 관련된 진실.
하지만….
‘첫 번째 질문만은.’
자신의 고민에 마침표를 찍는 게 먼저였다.
“휘스 아로나, 너에게 묻겠다.”
멍한 눈빛의 그가 알렌을 올려다봤다.
“너는 정말로.”
진실로 대답하라, 네 본심을.
“네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나?”
그가 대답했다.
“――――.”
알렌이 웃음을 터트렸다.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 확실하게 정했다.
다음은 그란델의 대답을 들을 차례였다.
* * *
마탑 도시 페르타에서 북서쪽으로 몇 십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
남쪽으로는 엘프의 숲이 있었으나 워낙 산세가 험하고 깊은 곳으로 향할수록 나타나는 괴물 탓에 인적 하나 없는 곳이었다.
그곳에 수천은 될 법한 군세가 장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수천의 해골 병사.
수백의 벤시.
수십의 데스나이트.
수 명의 리치.
평범한 도시 하나를 공략하기에는 과한 전력이었으나, 페르타를 무너뜨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 그들의 중앙, 골탑을 쌓아 만들어진 왕좌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비쩍 마른 얼굴에 새하얀 피부.
사령왕 카이슨.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대륙의 남부를 휘젓고 다니던 악명 높은 사령 술사였다.
곁에 해골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그 남자는, 왕좌에 앉아 있던 것이 무색하게 수정구 하나에 고개를 숙였다.
“말씀하시옵소서, 주인이시여.”
“내가 마도 여황을 잡아 두겠다. 그 안에 페르타를 함락하고, 함락하지 못했을 때는 철저하게 마법사의 수를 줄여라.”
“반드시 놈들을 무너뜨리겠나이다!”
“명심하도록, 반드시 마법사의 수를 줄여야 한다. 너의 성과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그의 말에 카이슨은 숭배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박았다.
쾅- 쾅-
“반드시, 반드시 실망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 행동은 수정구의 목소리가 끊기고 나서도 오 분이나 지속되었고, 얼굴 전체가 붉게 물들고 나서야 그는 행동을 멈추었다.
그는 그 말라비틀어진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성량을 내질렀다.
“기만의 가호를 펼쳐라! 놈들은 습격당하는 것도 모른 채 불타오를 것이다!”
군세가 소리 없이 포효했다.
벤시가 날아올랐고, 데스나이트가 발을 굴렀다.
리치가 손짓하자, 다섯 개의 깃발이 펄럭이며 그 안에 새겨진 가호가 발동했다.
“이 모든 것을 마왕을 위하여!”
또, 우리의 구원자를 위하여.
그가 낮게 읊조렸다.
죽음의 물결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마탑 교류회가 시작된 지 열흘이 흘렀을 때의 일이었다.
* * *
“자! 제대로 정렬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들어갈 장소는 지극히 위험한 장소입니다.”
교류회는 어제부로 무사히 끝마쳤다.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겨루었던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열정적으로 의견을 교환했고, 서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은 채 헤어졌다.
이제부터 남은 일정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원시 회랑.
마탑 도시가 마법사들의 세력으로 발돋움 할 수 있게 만든 원인.
이번 교류회의 인원을 몇 배는 늘리게 만든 원인이자, 그란델이 누군가를 처리하는데 애용하는 공간.
페르타에서는 이곳의 출입증을 빌미로 마법사들을 단합시켰다.
흔히 원시 회랑이 열렸다는 말은, 분기마다 열리는 입구의 입장 시간이 다 되었다는 의미였다.
‘그 말은 반대로 말하자면 간단하다.’
시간에 맞춰 출입증만 있다면 누구든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이번 분기의 원시 회랑에는 아카데미 학생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탑의 제자와 입장권을 배분받은 학파의 수련자 그리고 경매를 통해 입장권을 손에 넣은 마법 명가의 자제들까지.
들어가는 인원은 다양했다.
그 안에, 누군가 섞여 들어가도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프란시스카 양이 계획했던 대로 일을 처리했으면 좋겠군.’
알렌은 프란시스카를 떠올리다, 중앙에 서 있는 노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바람의 마탑주 그란델.
그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은 이번 원시 회랑에 참가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이번 만큼은 젊은 마법사들을 주축으로 원시 회랑을 열겠다고 한 것이었으나, 알렌은 내부의 사정을 알았다.
도시에서 은밀히 일어나는 실종 사건.
‘하이젤이 이번 일에 관여하던가.’
마탑의 마법사들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인력을 투입했고, 그 사건의 뒤에는 릴리트가 관련되어 있었다.
그 모든 것은 도시를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에스테도르의 계책.
‘율리우스도 밖에 있으니, 이번 도시 습격은 그들이 알아서 막아 낼 테지.’
자신은 단 하나에만 집중하면 되었다.
알렌은 평소보다 강하게 조인 옷을 적당하게 풀며, 준비물을 확인했다.
‘근력 강화 물약, 정신력 집중 물약, 오감 활성화 물약, 회복력 상승 물약, 항마력 강화 물약, 실전된 교단의 성수….’
물약은 마르골의 도움으로 빠르게 구할 수 있었다.
유물은 따로 준비하지 않았다. 7위계 마법사와의 전투에서 도움이 되려면 적어도 가문의 가보급 유물이 필요했다.
그것도 일회용으로 사용하기 위한.
한 번의 전투로 그 정도 가치의 유물을 사용하는 것은 낭비였고, 또한 짧은 시간 내로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른 마법 명가들이 지원해 줄 의향이 있어 보였지만.’
그건 결국 다 나중에 돌아올 빚이었다.
특히 알렌 자신이 그란델을 죽였다는 증거가 될 만한 일은 만들지 않는 것이 좋았다.
자신의 목줄을 죌 만한 약점을 남의 손에 쥐여 줄 생각도 없었고.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인원이 모여들었다.
중년의 마법사 몇 명이 그란델의 곁에서 목소리를 증폭시켰다.
“자, 이제 잠시 후면 비프로스트를 이용해서 이동하겠습니다. 보통 공간 이동과는 다르니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이미 충분한 주의를 받은 그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빛이 몸에 닿기를 기다렸고.
도시의 하늘을 빛내던 비프로스트에서 일곱 가지 빛이 그들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깜박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다른 공간으로 이동한 후였다.
그들이 도착한 장소는 외딴 숲이었다.
초록색의 잎이 울창하게 솟아오른 맑은 공기가 가득한 장소.
푸른 자연과 멀리 보이는 산의 모습은 이곳이 사람의 인적이 잘 닿지 않는 장소라는 것을 여실히 느끼게 했다.
“와… 미친 마나 농도 봐. 실화야?”
“…여기서 수련하면 밖의 수십 배겠는데.”
“이러니까 마탑이 마법사들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지.”
마탑의 마법사들도 직접 들어온 적은 처음인 듯 신기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고, 아카데미 학생들은 평민, 귀족 가리지 않고 놀란 눈치였다.
그러나 알렌이 느낀 감상은 저들과 조금 달랐다.
‘순간적으로 공간이 중첩되었다.’
원래의 공간 이동이 공간이 물결치는 전조가 일어난 것과 다르게, 비프로스트를 이용한 이동은 그가 알던 것과 달랐다.
소수의 공간 마법을 사용하는 이들도 흥미로운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이건 이동이라기보다는, 공간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는 말이 더 어울리겠군.’
그들의 위치는 변하지 않았다.
적어도, 공간의 경도 상으로는 같은 위치에 있을 것이다.
비프로스트를 이용한 순간 그들은 같은 위치에, 다른 공간이 중첩되면서 이동한 것이라 느낀 것이다.
‘이건 절대 자연적으로 만들어질 수가 없다.’
모두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한 듯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둘러보던 그때, 하늘 위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전에 알렸으니 알겠지.”
하늘 위로 거대한 얼굴 모양의 구름이 입을 열었다.
입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마탑주 그란델이었다.
“앞으로 나흘 후 원시 회랑은 닫힐 것이다. 그동안 마음대로 하거라. 수련을 하든, 이곳을 조사해 보든, 유적을 탐험하든 상관없다. 단….”
그는 한층 심유한 눈으로 경고를 입에 담았다.
“이곳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은 자신의 책임이니, 그걸 명심토록!”
그란델의 말이 끝나자 얼굴 구름은 순식간에 흩어져 하늘로 되돌아갔다.
“그럼…, 어떻게 할래. 계획대로 탐색?”
“가문에서 구해 온 지도가 있으니까, 잠시만….”
“나는 근처에서 수련이나 해야겠어. 위험한 건 딱 질색이거든.”
그란델이 사라지자 학생들은 곧바로 사전에 계획한 대로 움직였다.
준비한 지도를 들고 동료들과 사라지거나, 위험을 감수하기 싫다는 듯 적당한 곳에 수련하거나, 특별한 소환수를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며 주변을 탐색하거나.
가지각색의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그들 사이로 알렌도 미리 계획했던 장소로 이동했다.
최대한 인적이 드문 장소.
협곡과 칼바람이 가득해 일반적인 학생들이라면 절대 오지 않을 장소였다.
그 협곡의 정상에, 누군가 묶여 있었다.
커다란 몸집과 며칠 굶은 듯 핼쑥한 안색.
휘스 아로나. 그는 알렌이 다가오자 발버둥 쳤다.
“읍읍…!”
며칠간 그들과 지내며 익숙해졌을 만도 한데, 그는 여전히 알렌을 두려워했다.
“프란시스카 양이 제대로 준비해 놨군. 그러니….”
지체할 필요는 없겠지.
알렌이 베스틀라를 뽑아 들었다.
날카로운 검날이 두꺼운 피륙을 파고들었다.
푸슉-
붉은 피가 솟구치며, 휘스 아로나의 몸에서 하얀빛이 솟구쳤다.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다.”
미끼가 준비됐으니, 이제 용을 사냥할 준비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