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알렌은 상대의 얼굴을 보았다.
율리우스 라인하르트.
수십, 수백 번은 떠올린 이름이자 꿈에서도 봤었던 얼굴이었다.
율리우스는 이제 제법 어린 티를 벗어 냈는지, 회귀하고 보였던 통통한 소년의 모습은 없었다.
탄탄한 몸과 라인하르트 특유의 청발, 그리고 겉에 보이는 기세까지.
저 모습을 누가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망나니라 불리던 사람이라 보겠는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겠지.
“형님, 이렇게 대련을 하는 게 얼마 만입니까.”
“그래. 마지막으로 한 게… 저택에서였나?”
“예, 그때는 제가 졌었지요.”
알렌과 율리우스가 살갑게 대화를 나누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들은 이상적인 형제의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율리우스는 뇌신의 각인에서 강력한 뇌전을 터트리며,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는 제가 이길 겁니다.”
알렌은 율리우스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도 별다른 위협감을 느끼지 못했다.
짐승왕과 수십 일 동안 이어진 대련, 거기에 그늘진 여왕의 기세까지 받아 본 알렌에게 지금의 율리우스는 가소로웠다.
“그래, 할 수 있다면 해 보려무나.”
알렌은 마법을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검으로 확실하게.
어떻게 할 것도 없이.
‘그렇다고 상대가 안 될 정도의 격차를 보여 주면 안 되겠지.’
압도적인 모습과 승리를 노려볼 만한 실력.
그 사이.
그걸 노려볼 생각이었다.
율리우스의 자세가 낮아졌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다면 감전될 만한 뇌전이 뿜어져 나왔다.
그의 몸에서 뇌전의 구가 만들어지며 알렌을 향해 날아들었다.
꽈릉!
알렌은 뇌전의 구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몸을 비틀었다. 요란스럽게 시선을 끌던 뇌전 뒤로 검은 인영이 튀어나왔다.
검은 알렌의 어깨를 스치지도 못해 바닥으로 향한다.
율리우스는 그 공격마저 눈속임이라는 듯 다른 손에 뇌전의 창이 울었다.
쿠루릉-
[A급 특성 ? 아스트라페(αστραπ?)]
율리우스의 얼굴에 기쁨이 스쳐 지나가며, 맞을 수밖에 없다는 확신이 새겨졌다. 확실히 저 공격은 율리우스를 상대해 보지 않았다면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더 봐줄 필요가 있나?’
뇌신의 창이 공기를 날름거리며 알렌을 찔러 왔다. 뇌전의 창이 알렌과 닿기 직전, 율리우스의 시야에서 알렌이 사라졌다.
쾅!
율리우스의 몸이 경기장 테두리를 아슬아슬하게 걸쳐 섰다.
‘막았나.’
의외였다. 율리우스는 검이 닿기 직전, 알렌이 검격을 날리는 방향에 스톰브링거를 끼워 넣는 데 성공했다.
어차피 진심으로 죽일 생각이 없어 검면으로 후려쳤기에 다칠 일은 없을 텐데. 알렌은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형님 방금은 무슨….”
그의 얼굴에 경악이 서리며 굳어졌다.
쉽게 상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금이 갔나 보지? 알렌은 율리우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쉽게 예상했다.
‘이 힘을 어디서 얻었을지, 원작의 내용을 찾아본다든지, 이런 것들 아니겠나.’
검은 책으로 율리우스의 사고 발현 과정을 몇 십 번이고 지켜본 알렌으로서는 쉽게 예상이 갔다. 그렇기에 희망찬 내용을 입에 담았다.
“짐승왕에게 새로 배운 기술이다. 어떠냐, 놀랐느냐?”
율리우스는 알렌의 공격이 ‘항시’적인 힘이 아닌 특별한 기술이라는 생각에 얼굴이 풀어졌다.
‘그럼 그렇지.’
알렌은 베스틀라를 잡아들고 평소에는 이 정도 속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듯 속도를 줄였다.
“하하하… 엄청 놀랐습니다. 벌써 그 정도까지 배우시다니.”
“나한테 의외로 전사의 재능이 있었을지 모르겠구나.”
알렌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율리우스는 긴장을 가라앉혔다. 상대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아니라 ‘한 방’이 위협적인 상대다.
“그럼 다시 가겠습니다.”
율리우스의 검 끝이 알렌을 찔러 들어왔다. 알렌은 비틀어 피하는가 싶더니 몸을 눕혔다. 뒤집힌 몸, 눕힌 몸 위로 뇌전의 그물이 알렌의 옷깃을 스쳐 지나갔다.
율리우스의 신형이 늘어지는가 싶더니 푸른 빛으로 반짝였다.
꽈르릉!
율리우스가 들어온다. 속도로 장기전을 고려하는 듯 눈 깜짝할 새에 다른 곳으로 움직임을 가속했다.
‘한 방’밖에 없는 알렌이라면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는 율리우스에게 애먹었겠지.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율리우스가 잠시 뒤로 물러난 틈을 타, 알렌이 상체와 함께 팔을 돌렸다. 원심력을 담은 ‘한 방’이 경기장의 바닥을 내리쳤다.
쾅!
솟아나는 먼지구름, 돌가루와 여러 기척이 뒤섞이는 가운데, 알렌이 검을 휘둘렀다.
목표는 당연히.
“…갑자기 어디에서….”
율리우스의 검이었다.
쾅!
율리우스가 뒤로 밀려나며 몇 바퀴나 바닥에서 굴렀다. 그는 이번에도 자신이 운 좋게 공격을 막은 줄 알겠지.
“율리우스, 괜찮느냐. 내가 너무 심했느냐?”
알렌의 걱정스러운 어조에 율리우스는 이를 악물었다.
“괜찮습니다. 형님의 실력이 저번보다 더 늘어나셨군요.”
“다, 짐승왕의 덕이지 않겠느냐?.”
율리우스는 알렌의 저런 모습에 그의 실력이 향상된 원인이 알렌의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검은색의 재능이니 팔강의 눈에 들어 훈련을 받아 이 정도로 강해질 수 있을 거라고.
‘그렇지만 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알렌은 모르고 있는 모양이지만, 율리우스가 봤을 때 알렌은 한 방을 제외했을 때의 자세가 조금 엉성했다.
검을 오랫동안 사용하지는 않았으니 나오는 틈이겠지.
‘그걸 노린다면….’
승리할 수 있다.
율리우스의 몸에 뇌전이 둘러지며 최대의 출력을 내뿜었다. 그의 발이 사라졌다. 순간적으로 번개에 준할 속도, 그의 검이 알렌에게 닿기 전, 귀신같이 알렌의 그 ‘한 방’이 율리우스의 검에 닿았다.
쾅!
그의 몸이 밀려났다.
이번에는 알렌이 율리우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 * *
초반, 비등한 것처럼 보였던 경기는 시간을 더해갈수록 승자가 누군지 분명하게 알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알렌의 검이 휘둘러진다. 율리우스가 ‘아슬아슬’하게 검의 궤도를 막아 냈다.
쾅!
다시 그가 물러나고 힘을 쥐어짜 알렌의 빈틈을 찌른다. 알렌은 그 빈틈에 일부러 팔을 내어 주었다. 따끔거리는 정도의 통증.
그걸 기회라고 봤는지 다시 율리우스가 덮쳐 왔다.
알렌의 발이 옆으로 물러나며 그의 옆으로 검이 아쉽게 스쳐 지나갔다. 그런 율리우스를 향해 다시 알렌의 ‘한 방’이 떨어졌다.
쾅!
악착같이 버티던 율리우스의 몸이 날아갔다.
그의 상태는 보기와 다르게 좋지 않았다. 검으로 매번 공격을 막았기에 직접적인 부상은 없었지만, 손목에 가중되는 부담과 마력을 자꾸 쥐어짜 냈기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몇 번이나 막은 손목이 눈에 띄게 부어오를 정도였으니, 드러나지 않은 부상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할 수 없었다.
거기에 율리우스는 알렌의 기술을 경계하느라 심력이 낭비될 수밖에 없었다.
‘그림자 같은 기술과 빛의 기술.’
분명, 유적 실습 당시 알렌이 사용하는 것을 봤기에 알 수 있었다.
현재 알렌은 왜 그런지 몰라도 저 두 개의 기술을 봉인한 상태, 그러나 언제 그 공격이 다시 날아올지 모르는 만큼 그는 대비해 둬야 했다.
그렇다고 알렌의 상황이 좋다는 것은 아니었다.
‘겉’에 보이는 알렌의 온몸은 검은 거슬림으로 가득했고, 푸른 청발이 일부분 솟아 있어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심지어 율리우스와 달리 옷 일부분도 군데군데 찢겨 훨씬 위태로워 보였다.
그러나 실제 알렌이 받은 피해는 고작 머리카락 몇 가닥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율리우스에게 피해를 강요했을 뿐.
‘이제 슬슬 끝낼 때가 됐는데….’
알렌은 아직까지 고민 중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길까, 질까, 무승부로 만들까.
어느 쪽이든 장단점이 있었다.
승리한다면, 전승의 기록을 가지게 되고 2학년에 성적을 망치더라도 어느 정도 버텨 낼 수 있을 것이다.
진다면 율리우스와의 형제애를 더 높여 주며, 자신의 전력에 대한 오판을 심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무승부는 어느 쪽이든 고르기 모호할 때, 둘 다 장외 패가 됨으로써 선택할 생각이었다.
“율리우스, 이제 슬슬 끝내는 게 어떠냐. 제한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아, 그러고 보니….”
잠시 경기장 근처를 바라보니 남은 시간이 1분이 채 되지 않았다.
율리우스는 승부수를 띄울 작정인 듯 전에 보았던 거대한 인공 정령을 소환해 냈다. 이번에는 제법 조종에 익숙해진 듯 순식간에 거대한 전격의 망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승리, 패배, 무승부.
알렌이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그래, 할 거면 확실하게 보여 줘야지.”
눈앞에서 전격의 망치가 날아왔다, 알렌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검을 내질렀다. 순간적으로 노심의 마력이 통째로 검으로 빠져나가며 거대한 빛의 태양이 날아갔다.
쾅!
그리고 그사이를 알렌이 파고들었다.
빛이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그림자가 어둡다는 것.
알렌의 몸이 그림자에 휩싸여 율리우스의 검에 다시 한번 ‘한 방’을 날렸다.
쾅!
율리우스의 검이 위로 솟구친다. 알렌의 눈이 순간적으로 날카로워지며 검이 떨어져 내렸다.
베스틀라가 금방이라도 그의 목에 파고들기 직전-
삐────
호구라기 소리가 퍼졌다.
알렌의 검 끝은 율리우스의 목을 단 한 치 남기고 멈춰 있었다.
“…형님.”
멍한 표정을 짓는 율리우스에게 알렌이 마치 장난에 성공한 형처럼 웃었다.
“이 이상을 하면, 장난이 아니게 되지 않느냐.”
여기까지였다.
알렌은 며칠간 명상을 하며 짐승왕의 말을 나름대로 받아들였다.
‘상황에 따라 대처한다면 결국 휘둘릴 뿐이다.’
알렌이 희생자를 보며, 다른 이들을 보며 기준을 자꾸 달리했듯이 결국 알렌, 자신의 기준이 없다면 같은 일의 반복이 될 뿐이었다.
그렇기에, 여기까지였다.
자신이 세운 선의 마지막은.
조원들을 죽이고, 노아와 같은 피해자를 만든 율리우스에게 철퇴를 내릴 수 있는 선.
반대로 말하자면 지금까지 모순적이었던 자신과 기준을 모두 수용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람은 완벽할 수 없다.
알렌은 철인도 아니었고, 영웅도 아니었다.
그러니 다시는 전과 같은 일을 겪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자신만의 선이 있으니.
* * *
율리우스는 멍한 얼굴로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 보니 아카데미의 밖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가슴에 이리저리 뭉쳤는데,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느낌. 그러나 그 뭉친 감정들이 전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상했다.
구름처럼 꾸물거리고, 가슴을 찌르지는 않지만, 생기를 빨아 먹히는 느낌.
‘분노? 아니야. 이건 그래, 따지자면….’
열등감.
자신은 소설에 빙의됐는데.
알렌은 그런 것도 아닌 고작 엑스트라 주제에 자신을 이겼다.
심지어 자신처럼 퀘스트로 스킬을 뽑는 것도 아니었고, 기연으로 실력을 키우는 것도 아니었다.
스스로 재능의 색이 변할 만한 특별함과 팔강에 눈에 들만한 재능.
그래, 율리우스가 현실감 없이 돌아다니는 이유는 별것이 아니었다.
그저 평소에 지리라고 생각도 못 했던 이에게 패배했기에 믿기지 않은 것이다.
율리우스는 그걸 깨닫자, 가슴속에서 조그마한 것이 타올랐다.
‘분명히 후계자의 자리도 그가 받겠지.’
하지만….
정말 내가 후계자가 될 수 없나?
그의 머릿속에는 고작 몇 시간 전 나타샤가 진지한 얼굴로 떠들어 대던 것이 떠올랐다.
‘그래, 일부러 망나니임을 숨겼다고 했지.’
형에게서 살아남기 위해서. 기억을 잃고, 망나니인 척 연기하고.
-정말 불가능할까?
율리우스는 누가 묻지도 않았음에도 어느새 가주의 자리에 대한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아직 자각하기도 힘든 작은 불꽃이었지만….
언제든 장작만 넣는다면 타오를 수도 있는 그런 불꽃이었다.
율리우스가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조금씩 자각하던 그때, 대로에서 아는 얼굴이 보였다.
“세라!”
“율리우스 님!”
그의 앞으로 도도도- 뛰어온 것은 2학년 선배인 세라였다. 그가 그녀를 주었다 보니 어느새 호칭이 반대되었지만, 둘 다 신경 쓰지 않았다.
“따돌림은 아직도 당해? 괜찮아?”
“네…. 다행히 괜찮아요. 그… 세 명 모두 퇴학을 못 견뎠는지 극단적인 선택을 했더라고요.”
그녀가 무섭다는 얼굴을 하자, 율리우스는 괜히 학창 생활이 생각나 위로했다.
“잘됐네. 그 새끼들의 인과응보지, 네 탓이 아니잖아.”
“그래도… 저 때문에 그렇게 된 게 아닌가 싶어서요….”
율리우스의 무지개 마안이 반짝이며 그녀의 재능을 확인했다.
주황색이 조금 섞인 노란색.
주황색이면 여정에 따라올 수준이고, 노란색은 여정에 따라오기 힘들다.
그러나 그녀를 도운 이유는, 괴롭힘 당하는 그녀의 모습이 옛날 생각을 떠오르게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율리우스는 그녀를 볼 때마다 공감과 분노, 안타까움이 같은 게 느껴졌다.
사실 여정에 따라오지 못할 수준임에도 돕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재능은… 저번에 레이나가 먹었던 거랑 비슷한 걸 먹이면 돼.’
그게 아니더라도 높은 수준의 강자에게 견식을 넓히게 되면 잠재력이 폭발해 재능이 상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우연히 만났는데 저희 점심이나 같이 드실래요?”
“음…, 그래. 같이 가자.”
율리우스는 어느새 자신을 감싸던 부정적인 감정이 옅어진 걸 느꼈다.
축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