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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가 빙의를 싫어함-108화 (108/212)

제108화

한참의 시간이 더 지나갔다.

어느 순간부터, 알렌은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아흐레였던가? 아니면 열흘? 잘 모르겠다. 알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저 검을 쥐고 상대를 응시했다.

알렌의 정신은 생각보다 또렷했다. 아니면 내성이 생긴 걸지도 모르겠다. 이번 한 번 비슷한 일을 해 본 적이 있지 않나. 버티는 것은, 버티는 것쯤은 그가 제일 자신 있는 분야였다.

버티고, 버텨서, 일발 역전의 한 번을 기다리는 것.

그게 지금껏 한 일이었으니까.

“왜, 더 안 하시렵니까.”

목에 먼지가 꼈나? 물 한 모금 안 마신 탓인지, 목구멍을 통과해 나오는 소리가 굵직했다.

“…너는.”

다시 움직이려나?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한다. 이미 수백 번, 수천 번 반복해서 봤으니 이제는 예측할 수 있다. 있어야 했다.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군.”

가이온의 어조에서 느껴진 건 의외의 감정이었다.

찬탄.

“애송아, 네 그 고집스러운 정신력은 인정해야겠다는 것을.”

수면과 식욕 모두를 억제한 채, 휴식 하나 없이 열흘간 전투를 이어 갈 수 있다고?

가이온은 광기에 가까운 그 정신머리 하나만큼은, 인정했다.

“칭찬입니까?”

“칭찬? 크흐, 칭찬은 칭찬이지.”

이제껏 알렌을 몰아붙였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가이온의 목소리에 알렌은 경계심을 끌어 올렸다.

“네 고집이 어르신의 예상을 뛰어넘었다는 의미니까.”

베스틀라를 잡는다. 언제든지 반응을 할 수 있도록.

몸의 상태는 좋은가? 좋지 않다. 그러나 신이 빚은 것 같은 육체는 최소한의 휴식으로도 상태를 회복했다.

그러니 전투를 이어 나갈 수 있다.

“본래는 항복할 때까지 실력이나 봐줄 생각이었다. 그 후에 그 신념에 가까운 고집을 뜯어고치려 했지. 그런데….”

목덜미의 가는 솜털이 그가 말을 이어 나갈수록 곤두섰다.

순간적으로 손이 떨렸다. 알렌의 동공에 다른 사물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바닥이 사라지고, 벽이 없어진다. 천장이 사라지고, 주위 공간이 지워졌다.

최종적으로 남은 것은 하나였다.

짐승왕 가이온.

그 혼자만이 알렌의 동공에 자리했다. 짐승이 흉악한 미소를 지었다.

“모르겠다. 네 상태를 보니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단 말이다. 이주? 한 달? 어쩌면 그 이상도 우습게 버틸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가이온의 주위로 공간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건 말 그대로의 광경이었다. 그의 존재감에, 주위의 공간이 일렁이며 굴절되었다.

소름이 돋았다.

지금의 가이온은 지난 열흘간 상대했던 그와 비교할 수 없었다.

그게 실력 전부를 내보인 게 아니었다고? 그가 봐주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만큼의 힘을 남겨 두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제대로 박살 내주마.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

하루는 갈까? 버텨도 이틀이 최대겠지.

“그 전에 다시 묻자, 내가 왜 이러는지 알겠냐?”

알렌은 이를 악물고 검을 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제 실력을 봐주기 위해서입니까?”

가이온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웃었다.

“이번에도 틀렸다.”

쾅-

알렌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 * *

“야, 바이론! 제대로 잡아!”

“주군, 네 알겠습니다!”

바이론은 달려가는 세 머리 토끼를 붙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율리우스 일행은 몇 개로 나뉘어 추가적인 보상과 히든 피스를 얻기 위해 흩어진 상태였다.

제비뽑기의 결과로 율리우스는 오랜만에 바이론이랑 단둘이서 행동하게 되었다.

“어때, 뭐 뱉은 거 없어?”

“확인해 보겠습니다.”

바이론은 가지고 다니던 단검으로 세 머리 토끼의 배를 갈랐다. 배 안에는 작은 상자가 들어 있었다.

“제가 열어 보겠습니다. 뒤로 물러서십시오, 주군!”

바이론은 오랜만에 율리우스와 같이 다니게 되자 신난 기색이었다.

페른 영지에서 그의 모습을 보게 된 후, 그는 율리우스를 주군으로 섬기게 되었다.

비록 마력을 사용하고, 프라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기사였지만 그는 율리우스를 따르며 더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은 상태였다.

“안 그래도 되는데….”

율리우스는 저 상자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았다.

[행운의 토끼 반지(C)]

하루에 한 번! 기분 좋은 행운을!

길을 가다가 돈을 줍거나, 실수로 복권을 샀더니 4등이 당첨되거나 같은 사소한 행운을 하루에 한 번씩 일으키는 반지.

개인적으로 율리우스는 행운 같은 불확실한 변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만큼, 저런 행운 관련 능력치를 올려 주는 물건은 최대한 많이 얻어야 했다.

바이론이 상자를 열었다.

순간적으로 환한 빛이 나며 눈앞이 빛났다.

“제가 막겠습니다! 물러서십시오!”

그는 그렇게 외치며 상자를 자신의 배 아래에 놔두고 엎드렸다.

율리우스는 그 우스운 장면을 멍하게 바라봤다. 아니, 수류탄도 아니잖아….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듬직한 기사인 줄 알았는데.

‘원작에서도 유명했고.’

무려 마나 기사의 몸으로 인류의 창 더글라스 아벨이 이끄는 베르세르크 기사단에 입단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런데 여자들에게 약하고, 과잉 충성으로 저러는 모습을 보니,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바이론 됐으니까 상자나 줘.”

“아, 옙! 알겠습니다.”

율리우스는 그가 내미는 상자를 받고 안에 있는 반지를 꺼냈다.

세 마리의 토끼 머리 장식이 되어 있는 반지.

개인적으로 이런 기괴한 디자인을 상상한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케르베로스도 아니고 토끼 머리 셋이라니.

“빨리 다른 곳으로 가자, 실기 시험 끝나기 전까지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해.”

“따르겠습니다.”

바이론의 충성은 부담스럽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만큼 자신을 믿는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렇게 총 14일이 걸린 실기 시험의 끝이 다가왔다.

* * *

알렌은 정신이 몽롱했다.

아니, 정신뿐만이 아니었다.

몸과 정신 그 모든 곳이 만신창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같은 꼴은 거인의 유적지에서 용의 노심을 만들기 위해 고행했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알렌이 힘없이 무릎 꿇었다.

손에 든 검은 힘이 풀려 놓쳤다. 베스틀라는 이미 무릎 근처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

온몸의 근육에 돌던 활력은 어디로 사라진 듯 찾을 수 없었고, 거칠게 뛰던 노심도 언제 그랬냐는 듯 허약했다.

정신력은 아마, 처음으로 마법이 아닌 다른 행동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움직임의 예측.

팔강의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쫓기 위해 감지력을 뻗었지만, 결국 단 한 번도 예측할 수 없었다.

오히려 감지 범위를 속이는 그 기술의 요체를 확인했다.

‘감지력은 감지 범위 상대의 근육의 움직임을 정보로 보낸다. 그러니 감지력이 몸에 닿는 그때 근육에 순간적인 힘을 줘 잘못된 정보를 보낸다.’

그야말로 미치광이 같은 기술.

저번에 그가 가만히 서 있었음에도 알렌이 달려온다고 예측한 이유는 그가 그 서 있는 순간마저도 달릴 때 쓰는 근육에 힘을 가한 것이다.

가이온이 보였다. 팔강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 짐승왕. 살아 있는 신화.

그에게서 답을 얻을 수 없다.

‘그렇다면.’

몽롱해진 정신은 꿈결 같은 현실 속에서 눈앞의 것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런 존재를 거쳐, 다시 자신에게로, 그리고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밖에서, 가이온에게서 해답을 찾을 수 없으니 답은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다.

‘자신은 왜, 이런 꼴이 되었나.’

처음에는 그저 감정을 정리하기만 할 생각이었다.

율리우스와의 관계를 저버릴 수는 없다. 그러니 자신이 참으면 모든 게 겉으로 보이는 갈등은 생기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왜.’

율리우스가 사라지고, 감정을 정리하려던 때.

너희들이 나타났지?

마크, 루이, 노아.

그래, 알렌이 이렇게 가이온과 다투게 된 계기에는 그들이 있었다.

알렌은 그들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을 만나게 되고, 사정을 알게 됨으로써 알렌은 자기 자신의 모순을 직시하게 되었다.

자신이 구하지 않음으로써 죽은 그들을 보며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고.

도움을 주지 않았기에 자신을 원망하는 노아를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를 기억한다고 했다. 기억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와 직접 대면하기 전까지 나는 그가 악마의 제물로 죽었다는 것을 몰랐다.’

그야말로 우스웠다.

자신의 다짐도 우스웠고.

그러면서도 율리우스에게 복수심을 가진 자들을 모은다는 것도 우스웠다.

결국, 자신의 모순을 찌른 가이온에게 화풀이를 한 것밖에 되지 않았다.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은 순식간에 죽었을 것임에도.

그렇게 생각의 정리를 끝마칠 무렵, 가이온이 입을 열었다.

“내가 왜 그랬는지 알겠느냐?”

“…그냥, 입니까?”

알렌의 대답에 가이온은 만족스럽다는 듯 흉악한 미소를 짓더니 답했다.

“그래, 아무런 이유가 없다.”

겨우 정답에 다다른 그의 앞에 가이온이 철퍽 주저앉았다.

“너는 너무 생각이 많다. 그냥 행동하면 될 것을, 그 행동 하나를 하는데 너무 많은 것을 고려하지.”

“그게 귀족입니다.”

항상 고뇌하고, 선택에 대한 결과를 예상하며, 행동 하나 말 하나에 의미를 담는 것.

지금까지 그렇게 배워 왔고, 그렇게 실천하며 살아 온 삶이었다.

“아니, 그건 그냥 겁쟁이일 뿐이다. 미래의 일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범위 안에서만 일을 처리할 뿐이지.”

알렌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럼 생각 없이 행동하라는 말입니까? 그렇게 해서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지….”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

그럼 뭐가 중요하다는 건가. 최소한의 행동으로 최대한의 이득을 얻고, 잠깐의 인내로 달콤한 과실을 얻는 게 무엇이 나쁜가.

“그럼, 이번에 그렇게 생각을 많이 해서 뭘 얻었느냐.”

그 말에 알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모습에 가이온이 가볍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 일어난 자살 사건, 그것 때문에 네가 이렇게 된 거겠지.”

그 말에 알렌은 정곡이 찔린 듯 멈칫했다.

“네가 집중하지 못한 게 그 시기니 그것밖에 없어서 그렇다. 난 네가 그놈들과 무슨 관계인지 신경 쓰지 않는다. 알고 싶지도 않고, 단지 네 행동이 마음 들지 않을 뿐이지.”

가이온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왜, 고민하는 거냐?”

“…무엇을 말입니까.”

“뭐 그런 이유가 아니냐. 막을 수 있었는데, 막지 못했다느니, 그들이 죽은 건 내 책임이라느니.”

알렌은 정확히 분석한 그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국, 생각만 하다가 아무것도 못 하지 않았냐.”

가이온은 한마디도 못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살아가는 건 의외로 단순하다.”

“그게 무슨…”

“내가 처음에 너를 공격한 이유가 뭔지 아느냐?”

“아무 이유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알렌의 대답에 가이온은 짓궂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처음엔 화가 났다. 감히 애송이 주제에 어르신에게 화풀이를 하니 화가 안 날 수 있겠느냐. 하지만….”

그는 웃음을 터트리며 곧바로 자신의 말을 부정했다.

“그것도 3일이라도 갔나? 어르신이 애송이한테 진심으로 분노할 것 같으냐? 그저 오랜만에 몸풀기 정도 되는 상대라서 싸우고 싶었던 거다.”

알렌은 태연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때로는 생각이 아닌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는 것도 필요하다.”

“…그게 무슨 결과를 불러올지 몰라도 그렇습니까?”

“그럼 준비가 부족했단 뜻이지. 너는 그 정도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허술하게 계획했나?”

아니었다. 알렌이 지금까지 쌓아 온 건 그 정도로 허술하지 않았다.

“그럼 그걸로 된 거지 뭘 그렇게 따지느냐. 세상에 완벽한 것이 어디 있다고.”

“결국, 그 말은 상황마다 임기응변으로 행동하라는 것 말이랑 뭐가 다른 겁니까….”

“그게 또 그런가? 크하하하.”

알렌은 웃는 그를 바라보다 맥락 없이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럼 하면 되지 않느냐.”

“하지만, 그러면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흘러가게 둬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지.”

그는 그렇게 웃으며 알렌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네 선택이다. 네 마음대로 해라.”

알렌은 일어나려는 그에게 짧게 물었다.

“왜 그런 삶을 사는 겁니까.”

알렌의 물음에 그의 답은 간단했다.

“환하게 뜨거웠다가 지려 한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널찍한 등이 알렌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불꽃처럼.”

가이온은 알렌을 한차례 돌아보며 씨익 웃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게 초원의 삶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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