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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가 빙의를 싫어함-107화 (107/212)

제107화

한때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처음 회귀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린벨에 대한 악몽과 잊지 못할 기억들이 밤새 자신을 괴롭히던 때.

스스로 저지른 죄악에 대한 악몽이 먹물처럼 정신을 물들이던 시간에.

감정이 사라지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된다면 과거에 매몰되지 않고 해야 할 일만을 하며 나아갈 수 있을 거라고.

쓸데없는 동정심이나 기타 감정에 정신력을 낭비하지 않을 거라고.

‘나’라는 인간이 이상에 가까운 철인처럼 하나의 길을 쭉 달릴 수 있을 거라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멍청했지.’

감정이 없다면 인형이나 다름없다.

욕구가 없다면, 움직일 동기가 없어지고, 움직일 동기가 없어진다면, 율리우스를 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건 알렌인가, 알렌이 아닌가.

설령 나약한 인간에서 벗어난 철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다고 한들, 기쁨을 느낄 수 있을까?

다시 알렌이 바랐던, 그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알렌은 철인이 될 수 없기에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가끔 후회가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범인은 늘 실수하고, 늘 후회를 반복하니까.

그러나 자신은 동화 속 영웅도, 이상 속 철인이 아니었기에 담아 둘 수밖에 없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지만 않으면 될 뿐이니까.

“이렇게 싸우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하하하!”

머리에 열이 차오른다. 전투를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지?

다섯? 열? 아니 하루는 지났나?

“어디에 정신을 파는 거냐!”

거대한 대검이 떨어져 내린다. 알렌은 베스틀라의 크기를 키웠다. 기둥만 한 검이 가이온의 공격을 막아 냈다. 거대한 검의 무게에 더해 가이온의 일격에 알렌의 무릎이 굽혀졌다.

“다시 한번 받아라.”

가이온이 다시 한번 대검을 휘두른다. 알렌은 급히 베스틀라를 작게 되돌렸다.

쾅-

가이온의 대검이 바닥을 박살 내며 파편을 흩뿌렸다. 알렌은 온몸을 때리는 파편을 무시하고 몸을 강하게 틀었다. 귀가 잘리며 피를 흩뿌렸다.

“이제는 얼추 피하는구나!”

알렌은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귀가 바닥에 떨어지며 피를 뿌리는데, 뭐? 얼추 피한다고?

“어딜 봐서 피했다는 겁니까!”

알렌의 몸이 앞쪽으로 기우는가 싶더니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한 바퀴를 회전한 칼날이 등을 노리던 대검과 맞부딪쳤다.

“아직 힘이 남아도는군.”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분노가 사라진 상태였다. 이 상황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 같은 모습. 그 모습에 알렌의 팔에 핏줄이 돋았다.

강하게 받아친 검을 가이온이 여유롭게 회수했다.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일을 이렇게….”

“아직도 모르겠나?”

가이온이 알렌의 말을 끊었다. 알렌이 그의 말에 담긴 진의를 파악하려 했다. 무차별적인 공격에 뜻이 있었다고?

“무엇을 말입니까.”

“아직 멀었군.”

알렌이 인상을 찌푸리자, 가이온은 한마디를 중얼거리더니 다시 쇄도했다. 이번에는 검붉은 오러가 맺힌 공격이 공간을 분쇄하며 다가왔다.

쾅!

순식간에 알렌을 강타한 오러가 몸을 상처투성이로 만들었다.

거인의 거친 피부 따위는 그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없었다.

뼈까지 끊고 나온 대검이 알렌의 반신을 으깼다.

알렌은 베스틀라의 크기를 키웠다.

그의 몸이 밀려 나가며 검째로 바닥에 갈렸다.

“어서 일어나라, 알렌. 내 입을 막고 싶다 하지 않았느냐?”

몸이 다시 회복된다.

끊어진 뼈가 붙으며, 망가진 반신이 회복되었다.

알렌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몇 번이고.

* * *

무인도에 머문 지 엿새가 흘렀다.

율리우스가 아벨린을 만나고 사흘의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지나갔다.

먼저 식량이 급격히 부족해지며 갈수록 전투가 심화되었다. 이제 식량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습격하던 학생들은 모두 탈락했고, 어느 정도 실력자밖에 남지 않았다.

이때, 율리우스도 기회를 잡아 많은 이들을 탈락시킬 수 있었고 이대로 간다면 순위권에 드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보충반에서 빼 올 주·조연들은 이미 다 뺐으니, 더 있을 필요는 없다.’

이제 마지막 학기 말의 대결만 잘 끝낸다면 무사히 A반에 안착할 수 있으리라.

율리우스는 무인도의 가장 큰 히든 피스이자, 가장 큰 점수를 얻을 수 있는 보스를 잡고 얻을 수 있는 일각수의 뿔이 필요했다.

‘그것만 있으면 내 번개에 신성 속성도 추가할 수 있다.’

이미 번개에는 정화 속성이 있지만, 신성 속성까지 추가한다면 신성력이 사라진 이래 악마와 마왕에 가장 큰 천적이 될 것이다.

‘…진실의 파편에서 봤던 내용이 진짜인지 대비할 필요도 있고.’

율리우스는 잠시 복잡한 얼굴로 원작을 떠올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 사태가 진짜일 때를 대비해 두기만 하면 된다.

진짜라면…, 각오를 해야겠지만, 거짓이라면 그냥 전력을 끌어 올릴 뿐이니까.

그렇게 섬의 중앙으로 가던 중 도망치던 야나를 구하거나, 깊은 구덩이에 빠져 사흘을 굶고 있었던 벨제크를 찾아내기도 했다.

나타샤와 헬레나와 만나기도 했지만, 그들은 각자 자신들이 이끄는 파벌과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보만 교환했다.

그들은 섬을 탐험하는 곳보다 서서히 영역을 넓혀 가며 몬스터를 잡으며 점수를 벌고 있는 것 같았다.

부상을 입고 있던 카트린느를 탈락하기 직전 만난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

율리우스는 막 마녀의 쉼터를 두고 다투던 학생들과의 전투를 끝내고 오두막을 뒤지기 시작했다.

‘여기 아래에 있었을 텐데…. 이미 가져갔나? 시기가 아슬아슬한데….’

그러나 희망을 품고 다시 오두막을 탐색했고, 포기하려던 그때.

-덜커덕

서랍장의 가장 아래, 빈 것 같았던 서랍장이 열리며 나비 모양의 머리 장식이 나왔다.

“찾았다.”

원작의 B반인가 C반의 학생이 찾았던 히든 피스.

일주일이나 지났으니 없어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다행히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율리우스가 오두막에서 기분 좋은 얼굴로 나오자, 카트린느가 단아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율리우스, 무슨 일 있어요?”

“아, 이것 봐 봐. 저기 안에서 찾았거든.”

율리우스는 그녀에게 나비 모양의 머리 장식을 보여 주다가 잠시 고민했다.

‘필요 없는데 줄까?’

수중 신발은 아벨린한테 줬고, 중간에 찾은 땅의 보주는 아냐한테 줬다.

나비 머리 장식의 효과라고 해 봐야 머리를 맑게 해 주고 정신력의 강화 효과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마법사에게 주는 것이 더 좋을 터.

마침, 그녀한테 선물을 준 적도 없으니….

“그거 줄까?”

“와, 정말요?”

“어차피 마법사만 쓸 수 있거든. 우리 중에 마법사라고 해 봐야 너하고 아냐 밖에 없….”

와락-

카트린느는 그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율리우스를 끌어안았다. 그녀에게서는 옅은 꽃향기가 났다. 무슨 냄새인지는 몰라도.

“고마워요, 율리우스. 당신이 저와 약혼을 파기했을 때는 정말 슬펐지만….”

그 후에 믿을 수 없는 소식도 들었지만.

“전 여전히 당신을 포기할 수 없어요. 고마워요.”

난 당신을 포기할 수 없어요. 율리우스.

그녀의 소리에 율리우스는 승천하려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하며 뒤돌았다. 잘못하다가 다른 이들이 이 모습을 보면 감당할 수 없었으니까.

“크흠, 그, 고마우면 됐어. 그, 그럼 나는 벨제크가 잘 있나 좀 볼게!”

율리우스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카트린느는 웃고 있었다.

평소처럼 환하게.

* * *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나흘? 닷새? 그 기간 동안 알렌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알렌의 신체는 그 정도의 허기 정도는 버틸 수 있다는 듯 굳건히 그의 의지에 따랐다. 원래라면 신체 대신 정신이 위험했을 상황이었지만….

‘아직은, 괜찮군.’

정신의 피로가 조금 남아 있었지만…, 그래. 버틸 수 있느냐 없느냐고 묻는다면, 버틸 수 있었다.

모두 저번에 별의 세례 덕분이었다.

본의 아니게 육체와 정신의 한계 모두 시험하게 되었다.

후웅-

대검이 검붉은 오러를 머금고 떨어져 내렸다. 알렌은 이제는 기계적으로 공격의 범위를 계산했다. 짐승왕의 공격을 완전히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알렌이 익숙해질 때마다 단계적으로 위력을 끌어 올리는 모습을 보면 알지 않은가.

‘흘려 낼 수 있을 만큼 흘려 내고, 왼쪽 어깨는 내준다.’

베스틀라를 비스듬히 땅에 받치며 크기를 키웠다. 알렌과 피격 직전, 한 박자 빠르게 부딪친 대검의 타점을 흩트렸다.

그 즉시 검의 크기를 죽이며 느려진 대검을 받아 냈다.

쾅!

강한 힘이 베스틀라를 밀어내며 알렌의 어깨를 꿰뚫었다.

그 상태로 알렌이 검을 내질렀고, 검 끝은 가이온의 목을 스쳐 허공을 지나갔다.

가이온이 다시 알렌의 눈을 마주 보며 물었다.

“아직도 모르겠냐?”

“뭘 말입니까.”

가이온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알렌이 닷새가 지났음에도 여전한 것에 어이가 없었다.

3일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봤는데, 알렌은 너무 질겼다.

마치 한 번 이것과 비슷한 일을 해 본 적이 있다는 듯.

“너는 너무 생각이 많다. 내가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나?”

“…처음부터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아직도 멀었군.”

가이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신체 능력을 한 단계 더 높였다. 며칠간 전투를 벌이며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알렌의 귀로 무엇이 잘리는 소리가 들렸다.

팔이 허전했다.

“다시 간다.”

알렌이 이를 악물었다.

‘언제까지 가능한가.’

언제까지라도 가능해야 될 것이다.

적어도, 짐승왕의 뜻을 알아내기 전까지는.

알렌이 검을 들었다.

* * *

“후우…, 다들 수고했어.”

율리우스는 가볍게 운동을 끝낸 것 같은 느낌에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근처의 땅은 온통 검게 그슬린 자국이 넘쳐 났고, 말발굽 자국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그 말발굽 자국의 끝에는 보통 말보다 몇 배는 커다란 횐 말이 목이 잘려 움찔거렸다.

무인도의 중심에 있던 보스, 유니콘이었다.

‘본래 이렇게 쉽게 잡히는 몬스터가 아니긴 한데….’

율리우스의 눈이 주위 여성들에게 향했다.

아냐, 카트린느, 아벨린, 나타샤, 헬레나, 아이린, 레이나….

화려한 여성진 라인업.

‘나 같아도 궁금해서 한 번은 와 보겠다.’

원작에서 하이젤이 이 보스를 잡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던가.

그렇게 강하지 않은 주제에 속도는 얼마나 빠른지. 근처 남성이 수 킬로미터 내로 접근하면 알아채고 도망가는 게 말이 되나?

그러나 율리우스는 남성보다 여성의 비율이 훨씬 높았기에 긴가민가하고 접근하는 유니콘을 유인해 사살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럼 뿔은 약속대로 내가 가져간다?”

“마음대로 하세요.”

“그렇게 하거라.”

율리우스의 말에 대답한 것은 나타샤와 헬레나였다.

그녀들은 아흐레까지는 파벌을 이끌며 행동했지만, 두 파벌 간의 사소한 갈등으로 인해 전투가 일어났고 결국 공멸했다.

두 명도 끝까지 싸우던 걸 율리우스가 발견하고 데려온 참.

무인도 중앙의 보스를 죽인다는 말에 그들은 유니콘 뿔을 양보하는 대신, 전투에 도움을 주기로 약속하고 중재할 수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래요? 아직 실기 시험이 끝나기까지 하루 남았는데. 계속 몬스터 잡을 생각이에요?”

“글쎄….”

카트린느의 의견은 특별한 게 없었지만, 정석적이었다.

그가 만약 평범한 학생 중 하나였다면 그래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율리우스는 자신이 독보적인 점수를 기록했으리라 확신했다.

13일간 발견한 히든 피스 18개.

도움이 되는 이런저런 영약 5개.

유니콘 뿔 같은 전투 후의 부산물 4개.

여기서 가치가 낮은 것은 제외했다. 만나면 만나는 대로 죽였기에 점수가 얼마나 쌓였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더해서 학생들 간의 다툼에 끼어들어 탈락시키기도 하고, 땅굴이나 지하에 숨겨 둔 보상을 찾아내기도 했다.

거기에 다른 학생을 구출하며 이끌기까지.

그야말로 생존과 조난 그리고 난전이라는 주제에 걸맞은 활동을 했으니 누구도 그를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본래 지금쯤 유니콘을 잡았을 하이젤은 어디 갔을까.’

마리아랑 은근히 자주 부딪쳤으니까 지금쯤 바다 아래에 있는 히든 보스를 잡으러 갔나?

율리우스도 거기까지는 차마 갈 엄두가 나지 않은 곳이지만 그 두 명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

“하…. 그럼 이제 쉴까? 남은 시간도 있고, 점수도 얻었겠다.”

캠핑을 해도 괜찮겠지.

아니면 남은 히든 피스를 회수하러 가도 되고.

율리우스는 괜히 학창 시절에도 못 느꼈던 두근거림을 느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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