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세상은 한 가지를 선택한다면, 한 가지를 버릴 수밖에 없다.
모두를 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일 때는 투정이라도 부려볼 수 있다.
다 가지고 싶으니, 다 가질 수 없냐고.
하지만 점점 자랄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알게 되는 것이다.
전부를 가질 수는 없다고.
그렇기 때문에 우선순위를 정하게 된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을지.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버릴 수밖에 없다.
그게 세상의 이치였다.
무언가를 사기 위해서는, 재화를 소모할 수밖에 없고.
보물을 얻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니 알렌은 자신이 선택할 때, 최소한의 손해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미래의 지식을 그대로 이용하고자, 키메라로 인한 피해를 감수했다.
2황자와 접점을 만들고자, 벤자민과 율리우스의 대련을 방관했다.
율리우스의 관계를 깨트리지 않기 위해, 같은 조원들의 죽음을 외면했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율리우스랑 무엇이 다른가.’
또, 이 질문이었다.
알렌에게 있어 언제나 원점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물음이었다.
저렇게 행동한 그가 결국, 율리우스랑 무엇이 다른가?
알렌은 여기서 무엇을 바꿔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런 방법밖에 몰랐으니까.
그렇게 교육받아 왔고, 그렇게 행동하도록 강요받았다.
지금에 와서 다른 방법으로 가는 방법 따위,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겉으로는, 진정한 귀족을 목표로 하는 것처럼 주민들을 위하겠지.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하며, 항상 고귀하고 명예로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런데, 그게 뭐?’
이런다고 해서 율리우스랑 근본적으로 다를 게 있나?
자신의 이득을 위해 상대가 칼을 찔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선심 쓰듯 다가가 포션을 주는 것이 정말 옳다고?
모순적이다.
지독히도 모순적이었다.
자신은.
율리우스를 극도로 혐오하면서도 그와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하면서도, 뭐?
‘율리우스를 되찾겠다?’
희생자 하나에 마음 쏟는 주제에.
율리우스는 칼로 찌르고 갈 뿐이고, 자신은 방관하고 있다 치료까지 해 주니 율리우스랑 다르다는 생각은 너무, 너무도 추악하지 않은가.
처음에는 그들의 희생을 잊지 않으려 했다.
그 후에는 손이 닿는 곳까지는 도우려고 했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방관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면에 그들의 희생을 당연히 전제하고 있었다.
율리우스를 치기 위해서는 율리우스에게 원한을 가진 자들이 필요했으니까.
그러니 며칠간 보인 자신의 행동은 우습기 짝이 없었다.
막상 그렇게 정했으면 그대로 밀고 가면 될 텐데, 정 하나 깊게 줬다고 흔들리기나 하다니.
정작 그러면서 행동은 바뀌지도 않는다.
그래서 가지 않았다.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 평소대로의 알렌으로서, 정해진 계획에 따라 행동하던 그로 돌아가기 위해.
율리우스를 건드릴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밖에 없다.
분노에 몸을 맡겨 지금 그를 건드리면 무언가 바뀌는 게 있나?
‘없다.’
그저 1회차의 일을 재현할 뿐이었다.
자신은 실패하고, 동생은 돌아오지 않겠지.
그러니 그 기회를 잘 이용해야 하니 원래 세웠던 계획대로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그렇게 해서 실력을 키우고, 영혼을 되찾을 방법을 찾은 후, 율리우스의 틈을 노려 기습한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최선의 계획이었고, 이미 그 계획을 순조롭게 이어 나가고 있으니 자신만 정신을 차리면 된다.
생각을 거기까지 마쳤을 때.
“어르신이,”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거리를 뛰어넘으며 길게 늘어졌고.
“네 장난에 맞춰 주려고 온 줄 아느냐?”
쾅-
한순간 의식이 끊어졌다 다시 이어졌다. 머리가 뒤로 날아가며 벽과 거세게 부딪쳤다. 알렌은 뒤늦게 자신이 공격당했음을 인지했다.
“커억….”
“네놈이 하자고 한 것이다.”
다시 주먹이 날아온다. 알렌은 고개를 비틀었다. 그러나 그 행동만으로 짐승왕의 주먹을 피할 수는 없었다.
쾅-
“네가!”
쾅-
“내가 제자로 받아들인 네가!”
쾅-
“특훈을 하겠다고 말한 거란 말이다!”
쾅-
“이따위 장난질이 아니라!”
쾅-
순식간에 몇 번이나 가격당한 머리가 오레이하르콘 합금으로 만들어진 벽에 얼굴 자국을 만들었다. 멍하게 울리는 머리 위로 그가 멱살을 틀어쥐었다.
“제대로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면 왜 어르신의 시간을 빼앗았느냐.”
알렌을 덮는 그림자 위로 거대한 압력이 쏟아졌다.
“…….”
알렌은 말을 하지 못했다.
거인의 신체가 머리가 박살 나는 것을 막았다고 해도, 충격까지는 없애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빙글거리는 세상의 모습은 구역질이 날 만큼 어지러웠다.
“쯧, 보나 마나 그 생각 많은 성격 때문에 일을 그르친 것이겠지.”
그러나 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너를 얼마 보지 않았지만, 확신하는 건 하나 있다. 넌 그 성격을 고치지 않는다면, 언젠가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알렌을 내던졌다.
쿵-
“에잉…, 쯧. 실력을 키우고 싶다기에 귀찮음을 무릅쓰고 왔더니.”
실망감이 담긴 눈으로 알렌을 한 번 보던 그가 몸을 돌렸다.
터벅터벅-
발소리가 멀어진다.
“무슨….”
알렌이 이를 악물었다. 억눌린 목소리에는 짙은 분노가 담겨져 있었다.
“무슨 일인지….”
“허? 뭐라고?”
가이온이 걸음을 멈췄다.
꿈틀-
알렌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평소라면 그냥 내보냈을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상대는 팔강의 짐승왕이며, 알렌의 스승이고, 이번 일은 분명한 알렌의 잘못이 맞았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도 모르잖습니까!”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왜 확신하십니까.”
알렌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머리는 욱신거렸고, 눈가에는 피가 터졌다가 회복됐는지 시야가 붉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른다고? 하.”
짐승왕은 어이가 없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은 명백한 분노를 머금고 있었다.
“다시 말해 보거라. 뭐라고? 어르신이 뭘 어째?”
“알지도 못하면서, 뭘 아는 듯 지껄이냐는 말입니다.”
“뭐? 크하하하하하하!”
그의 웃음이 점점 진해지며 광폭하게 변해 갔다. 짐승왕이 진정으로 분노한다. 그 모습에 알렌도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의 행태가 웃겨서 그랬다.
율리우스에게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해 이곳에 있는 주제에 팔강을 도발하는 자신이 웃겨서.
“하하하, 그래. 짐승의 방식이 먼저인데 어르신이 요즘 물렀지.”
“왜, 자기 말을 증명할 수는 없으니 주먹이 먼저 나가는 겁니까?”
알렉의 이죽거림에 짐승왕의 얼굴이 굳었다.
율리우스가 아카데미에 없는 탓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의 말이 의외로 정곡을 찌른 것 때문일지도 몰랐고.
하지만, 상관없었다.
지금의 자신은 이 오갈 데 없는 감정을 풀 곳이 필요했다.
그게 설령 팔강이라고 한들.
“그럼 말해 보십시오, 제 말이 무엇….”
쾅-
알렌의 시야가 일그러졌다. 단숨에 몸이 벽면에 처박혔다. 이번에는 대비했기에 팔을 갖다 대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덜렁거리는 팔의 모습은 무슨 일이 생겼는지 능히 짐작하게 했다.
“그걸 말하기 전에 우선 예의를 주입시켜야겠구나.”
“큽….”
짐승왕의 웃음이 진해졌다.
그의 몸이 전보다 더 빨라졌다. 알렌이 상체를 숙이며 발을 차올렸다. 아니, 차올리려고 했다.
“서열정리는 부족의 전통이니…, 그래 끝까지 가 보자꾸나.”
알렌의 몸이 기역 자로 꺾이며 하늘을 날았다.
스승과 제자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무인도에 도착한 지 벌써 사흘이 흘렀다.
그 사이 율리우스는 섬의 중심으로 나아가며 벌써 몇 개나 되는 히든 피스를 얻은 상태였다.
잠자는 동안 대신 보초를 서 주는 인형, 맑은 물을 생성하는 항아리, 하루 한 번 근처에 있는 생존자의 위치를 알려주는 나침반까지.
물론 이것들은 실기 시험 때만 사용되는 히든 피스고 진짜 히든 피스는 하루 정도 더 들어가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레이나, 식사는 멀었어?”
“음…, 조금만 더 있으면 될 것 같아요.”
율리우스는 코끝에 느껴지는 스프의 냄새를 맡으며 나침반을 발동시켰다. 나침반의 하나밖에 없는 바늘이 빠르게 돌아가며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동쪽? 여기면 절벽 지대 쪽이구나.”
강한 흉수들만 득실득실한 절벽 지대에 떨어지다니, 누군지는 몰라도 불행한 것 같았다.
거리는 어느 정도 가깝겠지. 나침반의 바늘은 가장 가까운 곳의 생존자를 찾으니까.
만약을 대비해서 율리우스가 대기하고 있던 그때, 수풀을 스치는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레이나 내가 처리할게!”
율리우스는 그렇게 말하며 스톰브링거를 뽑았다.
이미 몇 번이고 이곳에서 사용해 본 감각이었지만, 새로 얻은 스톰브링거는 원본의 모조품이라고 해도 명검의 반열에 들 정도로 좋은 검이었다.
“그럼 나서 볼… 어?”
검을 들고 나서려던 율리우스의 몸이 멈춰 섰다. 수풀에서 튀어나온 것은 익히 아는 인물이었다.
그도 그럴 게, 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같이 있었던 여자였으니까.
“음식 냄새!”
갈색 단발은 산발로 변해 여기저기 뻗쳐 있었고, 며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는지 볼이 훌쩍해져 있었다.
“아벨린…?”
“음식 좀 나눠 주시면 안 될까요…? 율리우스?”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잠시 그를 보던 아벨린은 금방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더니 구세주를 만난 것 같은 얼굴로 율리우스를 껴안았다.
“율리우스…. 나 배고파, 제발 밥 좀 줘…!”
“알았어, 알았으니까 비켜 봐!”
며칠간 씻지도 못했는지 정수리에서 올라온 냄새에 율리우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냄새 난다고!”
“뭐?”
배가 고픈 와중에도 그 말만은 알아들었는지, 그녀의 행동이 멈췄다. 그리고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지며 급히 율리우스의 곁에서 떨어졌다.
“이, 이 나쁜 놈. 개놈아, 어떻게 여자한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어.”
“아니… 그, 미안하긴 한데 진짜 참을 수가 없어서….”
아벨린이 다시 입을 열려던 그때, 그녀의 코앞으로 향긋한 냄새가 덮쳐 왔다.
“우선 이것부터 먹고 이야기하시지요. 식사 후에 씻을 곳으로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레이나! 넌 이제부터 내 은인이야!”
“모두 율리우스 공자님의 덕입니다.”
그녀는 그릇을 통째로 마시듯이 들이켰다. 입천장에 데일 법했지만, 그녀는 허기를 채우는 게 먼저인지 신경 쓰지도 않는 기색이었다.
율리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처음 얻어야 할 건 삭풍의 가호인데….’
스톰브레이커랑 상성이 맞으니 자신이 쓰는 게 나을 것이다. 다음에 얻는 수중 신발은 아벨린한테 주는 게 나을 것이고.
그녀는 신수 해룡의 주인이니까.
계획을 세운 율리우스도 아벨린을 따라 스프를 먹었다.
역시 레이나가 만든 음식이어서일까.
맛있었다.
* * *
가이온의 팔이 알렌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당신도 모르지 않습니까!”
“뭘 모른다는 말이냐!”
그리고, 시야가 추락했다.
쾅-
알렌은 자신의 머리가 바닥에 박히는 와중에 그의 팔을 강하게 부여잡았다. 처음에는 몰랐으나, 이제는 알았다.
악력은 자신이 더 강하다는 사실을.
“내가 뭘 느꼈는지! 어떤 선택을 해야 했는지! 뭘 포기해야 하는지!”
꽉 쥔 팔을 잡아당겼다. 가이온이 공격을 회피하기 위해 고개를 비튼다. 그러나 알렌은 그의 머리를 맞출 수 있으리라 믿지 않았다.
쿠웅-
주먹이 가이온의 가슴에 꽂혔다. 가이온의 몸은 무슨 돌덩이로 되어 있는지 알렌의 주먹에도 강한 반탄력이 느껴졌다.
“크읍… 힘 하나는 장난 아니구나. 저번에 괜히 강한 척을 했어.”
알렌도 원래 그렇게 하려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버려야 했다.
알렌이 얻으려는 건 율리우스였고, 그를 얻기 위해 버린 건 남은 모두였다.
“나라고 괜찮은 줄 아십니까! 아무 감정이 없는 것 같냐는 말입니다!”
강제로 당겨진 가이온의 얼굴에 알렌이 턱주가리를 날렸다.
후웅!
아. 주먹이 턱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빗나갔다. 가이온의 머리가 알렌의 안면을 들이박았다.
쿵!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
단 한 번에 코뼈가 박살났다. 알렌이 가이온의 팔을 놓으려 했지만, 이제 그가 알렌을 놓아주지 않았다.
“네 사정 따위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은 마음도 없다!”
다시 머리가 알렌의 안면을 두드렸다.
쾅!
“웁… 푸!”
박살 난 이빨의 파편이 흩어졌다. 알렌은 핏물을 머금어 그의 안면에 뱉어 냈다. 흠칫한 가이온이 공격을 멈춘 틈을 타, 알렌이 팔을 뽑아내 물러섰다.
가이온은 그런 알렌을 쫓아가지 않았다.
“저는 철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알렌은 그렇게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하며 뼛조각들을 털어 냈다. 알렌의 상처는 빠르게 치유되기 시작했다.
“괴물 같은 몸이군. 힘에, 반응속도에, 체력까지…. 정말 마법사가 맞냐? 그러니 마음껏 팰 수 있는 거지만….”
그는 알렌에게 맞은 곳이 살짝 부은 것을 발견하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알렌을 바라봤다.
잠깐 사이에 알렌은 모든 상처를 회복한 상태였다. 알렌은 거친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 모르면 닥치고 계십시오.”
“하,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어르신은 네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려는 것뿐이다.”
그 말에 알렌이 입을 악물었다.
“그리고 말도 웃기는구나. 뭐? 닥치고 있어? 감히 어르신에게?”
그의 팔찌가 빛나더니 거대한 대검으로 변했고, 가이온은 이를 땅에 깊게 박아 넣었다.
쿠웅-
“네가 포기할 때까지 나는 그만둘 생각이 없다. 그리고, 왜 그렇게 집착하느냐. 혹시, 찔린 구석이라도 있느냐?”
가이온은 수제 도발까지 해 가며 알렌을 비웃었다.
“네가 그러는 것도 평소 가슴에 쌓아 두니까 그런 거다. 생각이 많으니 계속 참다가 터지는 거지.”
알렌은 베스틀라가 있는 방향으로 손을 향했다. 베스틀라는 그의 신호에 따라 그의 손에 착지했다.
“입을 막고 싶으면, 직접 막아 보거라. 물론….”
알렌의 눈이 깊게 가라앉음과 동시에 그에게 돌진했다. 가이온은 대검을 뽑아 들며 크게 웃어젖혔다.
“네가 그럴 만한 실력이 있다면 말이다. 하하하하하하!”
쾅!
베스틀라가 거대하게 변해 가이온을 내려찍었다.
2차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