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여름이 다가오며 1학기의 끝으로 나아가는 가운데, 아카데미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방학을 맞이하기 전, 마지막 고비인 중간고사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의 시험 중 각각 학기 말에 치르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는 특별했다.
일 년 중 단 두 번, 등수를 바꿀 기회였으니까.
하급반 학생은 더 위 등급의 반으로 올라설 수 있고, 상급반 학생은 성적을 내지 못한다면 강등당할 수 있다.
앞으로 반년 동안 정해질 자신의 등급을 결정짓는 시험.
그렇기 때문에 시험 기간이 앞으로 다가올수록 아카데미의 분위기는 전투를 앞둔 듯 긴장감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그건 어느 학년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신입생의 경우에는 그것이 더 심했다.
“저번에는 제대로 안 해서 낮은 점수를 받은 거지, 내가 못 한 게 아니야.”
“등수나 반에 대해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가볍게 했지만…, 이번에는 다르겠지.”
처음 받은 등급의 반에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급반 학생들까지는 자신의 등급에 수긍했지만, 하급반과 중급반의 학생들은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자신들의 수준이 그곳에 있음을.
단지, 제대로 준비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낮은 반에 온 것뿐이라며 이번 시험에 증명하기를 원했다.
그렇게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분위기가 지속되던 중, 드디어 중간고사의 첫걸음인 필기시험이 끝이 났다.
그러나 아카데미의 분위기는 여전히 긴장감이 가라앉지 않았다.
중간고사의 점수를 차지하는 비율은 이렇다.
필기시험 3할.
실기 시험 5할.
학기 말의 대련 2할.
그런데 두 번째 시험이자, 전체 점수의 5할이나 차지하는 실기 시험의 종류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눈이 벌게져 학교의 공지만을 기다리고 있을 무렵, 드디어 아카데미의 실습 시험의 장소가 공개되었다.
고급반, 보통 A반이라 부르는 반의 담임 말베른 교수는 메마른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번 실기를 치를 장소는 남부 해안가에 있는 무인도로 결정되었습니다. 시험의 주제는 생존과 조난 그리고 난전이며, 2주 동안 진행될 예정입니다. 아공간은 사용하지 못하며, 식량은 3㎏ 이상 챙길 수 없으니 이점을 염두에 두기를 바라며….”
실기 시험을 3일 앞두고 공개된 내용에 신입생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카를! 뭘 챙겨야 하나요! 아니, 지금 당장 준비를 해야…!”
“생존에 필요한 걸 챙겨야 한다고? 미친, 선배들이 이야기 한 목록에 없었는데….”
“나는 남부 출신이라 오히려 쉬우려나? 아니, 거기에 뭐가 있는지 모른다면….”
급히 상업 지구로 향하는 이들은 그나마 나았다. 그러나 선배들의 말만 믿고 실기 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이들은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그와 비슷한 환경에서 살아온 이들은 미소 지었으나, 그건 소수에 불과했다.
아카데미가 시끄럽게 변하는 가운데, 알렌은 홀로 유유히 움직였다.
「당신은 왜 혼자 여유롭게 있어요? 준비 안 할 거예요?」
“나와 상관없는 일이거든.”
「미리 준비했어요? 응? 준비하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알렌은 그녀의 의아한 물음에 짧게 답했다.
“나는 참가하지 않을 생각이다.”
「왜요? 성적, 중요한 거 아니에요? 에이, 준비 못 해서 포기하는 거죠? 그러지 말라니까요? 나중에 후회할걸요?」
“그건 본인의 경험담인가?”
「공무원에게 공부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알렌은 베스틀라의 우스갯소리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실기 시험의 준비는 진즉 해 두었다. 단지….”
율리우스와 잠시 떨어질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지.
알렌은 혀끝까지 튀어나오려던 답을 집어삼켰다.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도망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검은 책을 펼쳤다.
그곳에는 별다른 사건 없이 유적 실습을 끝마친 과거의 율리우스가 보였다.
『──율리우스는 실기 시험이 어디서 벌어지는지 알고 있었다. 무인도 서바이벌. 원작에서 나왔기에 그는 미리 대비를 해 뒀….』
지금은 1회차 때와 다르게 사고가 일어났기에 실습 장소가 달라질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같다.
실기 시험 무대는 남해에 있는 무인도며, 그는 일찌감치 그곳에 갈 준비를 해 두었다.
그러나 일 전의 사건 이후 알렌은 심적 부담이 커졌고, 잠시 감정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정말 그 이유뿐인가? 그렇게 묻는다면 이 말밖에 없었다.
‘모른다.’
아니, 사실 알렌도 자신의 감정을 잘 알 수 없었다.
“실력을 더 드러내기 위해서는 계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니까.”
그렇기에 변명했다.
평소와 같이 계산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갑자기 왜요? 대개 혼잡한 상황이 아니면 검 쓰는 것도 자제했으면서.」
“주제…, 그래 주제를 알았기 때문이지.”
알렌은 자신의 실력이라면 적어도 팔강의 발끝 정도는 닿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결과는?’
팔강은 격이 달랐다. 힘겹게 얻은 용의 노심도, 대다수는 압살할 만한 거인의 신체도, 그들에게는 한 가지 특성일 뿐이었지, 위협이 될 수는 없었다.
마력이 많으면 뭐 하나? 마법을 쓸 시간조차 없는데.
감지 범위 안의 예측된 움직임조차 속이는 기술의 원리는 알렌이 들어 본 적조차 없었다.
그는, 팔강을 너무 얕잡아 보고 있었다.
“내 실력이 동년배 사이에서, 아니 웬만한 이들에게는 독보적인 수준일지 몰라도, 진짜 강자들에게는 별것 아니지 않나. 그렇다면 전부 숨길 필요가 없다는 거다.”
지금까지 거인의 신체를 숨기려고 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율리우스가 알렌의 실력에 경계심을 느낄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실력은 어떤가.
고대의 괴물과 싸울 때의 마리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율리우스는 예상했더라도, 마리아의 실력은 예상외였다. 그렇다면 하이젤도 마냥 만만히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게 실기 시험에 참가하지 않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어요?」
“팔강의 제자, 그 자리에 학생 대부분은 환상을 품고 있기 때문이지.”
예측할 수 있는 강함과 예측할 수 없는 강함은 다르다 알렌의 성장 속도는 빠른 편이지만 예측할 수 있는 강함의 범위에 있었다.
“그렇다면 그걸 이용하겠다는 거다. 팔강의 제자는 시험에 빠질 수 있는 특혜가 있으니.”
그들이 무인도에서 실기 평가를 끝내고 돌아온다면, 알렌은 전과 달리 육체적 능력을 숨기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들은 내가 단기간에 성장했더라도 의심하지 않겠지. 왜냐면 팔강의 제자가 되었으니, 무언가 방법이 있다고 스스로 납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귀족이 도둑질하더라도 아무도 믿지 않듯, 그들은 내심 바라는 환상에 알렌을 끼워 맞출 것이다.
알렌은 할 일은 그저 본래 실력을 보여 줄 뿐.
「…참 당신다운 발상이네요.」
그녀는 알렌의 방식에 매우 익숙해진 듯 한숨만 내쉬었다.
‘하지만…, 정말 실력을 더 키울 필요가 있기도 하지.’
격차를 더 벌려, 실력을 더 끌어올려야 했다. 이번에 짐승왕과 그늘진 여왕에게 농락을 당하며 그것을 느꼈다.
짐승왕에게 2주간의 특훈을 받는다면, 쓸 만한 수준까지 실력이 향상되지 않겠나.
알렌은 그런 희망을 품으며 어두운 지하실의 계단을 밟았다.
저벅저벅-
아카데미로 오는 팔강을 위해 준비된 훈련장.
일반적으로는 구하지도 못하는 오레이칼코스 합금으로 지어진 벽과 천장이 시야 전체를 황금빛으로 반짝였고, 지하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넓이의 훈련장이 그를 맞이했다.
그 훈련장의 중심에, 한 남자가 눈을 떴다.
“제자야, 왜 이리 늦었느냐. 어르신이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느냐?”
짐승왕이었다.
* * *
화창한 하늘이 지상을 굽어살폈다.
사막에서 비가 내리는 날은 극히 드물다. 그러나 학생들은 저 쨍쨍한 태양이 자신들의 여정을 배웅해 주는 것이라 여겼다.
그 정도로 하늘은 맑고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했다.
“율리우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나타샤의 목소리가 율리우스의 정신을 일깨웠다.
“아니…, 형님이 시험에 빠진다고 하니 조금 믿기지 않아서.”
“하긴, 저도 아직도 그가 짐승왕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음….”
그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긴 한데.
“그것도 그렇지.”
율리우스는 알렌이 짐승왕의 제자가 된 것보다 시험에 빠진다는 소식이 더욱 믿기지 않았다.
다른 활동이라면 몰라도,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는 학생 전체가 강제로 참가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팔강의 제자로서 특혜로 빠진다는 소식에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원작에서 그런 설정이 있었지.’
정작 자크니르든 가이온이든 아무도 제자로 두지 않아 작중에서 한 번도 사용된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제자가 된 것도 좀 놀랍기는 한데….’
그렇게 신기한 건 아니었다. 기연과 빙의된 몸의 재능으로 성장하는 그를 알렌이 꾸역꾸역 따라올 때부터 그의 재능을 깨달았다.
‘만난 사람 중에 유일하게 스스로 재능이 변한 사람이기도 하고.’
율리우스는 알렌의 재능이 검은색으로 변했던 그 날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율리우스는 사람의 재능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알렌처럼 검은색 재능으로 변한 이는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이 율리우스가 알렌이 원작의 주연이 아님에도 챙기는 이유기도 했다.
‘새로 생긴 가족인 점도 있으려나.’
이번 무인도에 따라왔다면 그곳에 있는 기연 한두 개를 챙겨 줄 의향이 있었지만….
“못 간다면 어쩔 수 없지.”
“율리우스? 누가 못 가면 어쩔 수 없다고요?”
고개를 돌리자, 아이린이 웃으며 다가왔다.
“한참 그의 형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알렌 님이요?”
나타샤는 그녀가 끼어드는 게 지겹다는 듯 한숨을 내쉬면서도 아이린의 물음에 답해 주었다.
“그가 이번에 빠지게 되었으니 말이죠.”
“대단하기는 하네요. 그 나이에 벌….”
“율리우스! 이 나쁜 놈아!”
“깜작이야!”
아이린은 자신의 말이 끊긴 것에 대해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봤다. 그곳에는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여자가 율리우스의 뒤에 붙어 있었다.
노출이 많은 헐벗은 몸으로 율리우스에게 붙어 있는 여자.
아벨린.
“같이 가자고 정문에서 보자며!”
“아니, 동동이가 배가 고프다는데….”
율리우스는 궁색한 변명을 내보이며 팔꿈치로 가방을 찔렀다. 그러나, 동동이는 이미 눈치가 생겼는지 이미 아냐에게 도망친 상태였다.
“동동아, 왜 또 왔어? 응? 공자님이 또 혼나고 있어?”
율리우스가 배신감 넘치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려 했지만, 아벨린이 험악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기에 등을 돌릴 수도 없는 상황.
“또, 또 동동이 핑계나 대고.”
“그… 미안?”
그 모습을 질투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아이린은 무심코 평소 생각하던 명칭을 입 밖에 내었다.
“창….”
“말버릇이 너무 험하군.”
“…꺄악!”
아이린은 귀에 느껴지는 숨결에 진저리치며 뒤로 물러났다.
“공주님!”
“헬레나라고 부르래도?”
“제가 그건 하지 말라고 부탁하지 않았습니까!”
“신하의 말버릇을 챙기는 것도 주군의 역할이지 않으냐.”
헬레나는 뭐가 문제냐는 듯 코웃음 치며 도도하게 고개를 틀었다. 그런 그녀에게 아이린은 분하게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건 그녀 덕분이니까.
적어도, 아카데미에서 그녀를 거슬러서는 안 되었다.
“그래도….”
그저 울적함과 분노, 초조감, 원망 등의 감정을 담아 작게 한마디 하는 게 전부였다.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해도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헬레나가 그렇게 말했음에도 아이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헬레나가 한 마디 더하려는 그때, 적절하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지금부터 미리 힘 뺄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옛 약혼녀.”
“카트린느!”
헬레나는 또 끼어드냐는 듯 뚱한 얼굴로 물러섰지만, 아이린은 유일한 지원군이라도 만난 듯 기쁜 얼굴로 그녀의 뒤로 숨었다.
“군신 관계인데 적당히 사이가 좋으면 얼마나 좋아요?”
“나는 항상 진심이었다.”
“그게 문제라고요.”
“아아, 시끄럽다. 나는 갈 테니 더 이상 그만 말하거라.”
헬레나는 그녀가 잔소리를 시작할까 봐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그 정신 산만한 광경을 보고 있던 마테우스는 질린 얼굴로 옆에서 같이 그 광경을 보던 남자에게 입을 열었다.
“…참 정신 산만한 광경이지 않습니까, 벨제크 씨.”
“나는 그저 부럽기만 하군….”
마테우스가 황당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벨제크의 험상궂은 얼굴에 짙은 부러움이 담겨 있었다.
“저렇게 여자가 많이 붙다니… 역시 답은 얼굴인가? 내 얼굴은 너무 부족하군.”
“…벨제크 씨 어머니가 듣는다면 슬퍼할 만한 발언인데요?”
“내 어머니는 나를 버렸다.”
“……어, 그게….”
그를 위로하고자 그의 어머니를 욕해도 되는가? 잠시 고민해 보던 마테우스는 화장실을 핑계로 급히 그의 곁에서 도망쳤다.
그렇게 벨제크가 홀로 남겨졌을 때, 울적한 눈의 남자가 율리우스 일행을 보는 것이 보였다.
“…공자님.”
벨제크가 슬쩍 눈짓해서 보니, 영지에서부터 율리우스를 보필했다는 바이론이었다.
여자를 무서워한다던.
“크흑… 주군을 내버려 둘 수밖에 없다니.”
그는 차마 그들의 곁에 다가가지 못하겠다는 듯 멀찍이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래도 내가 바이론 보다는 낫겠지.’
벨제크는 내심 그렇게 생각하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마침, 곁에 다가온 여인들과 이야기를 다 끝낸 율리우스가 벨제크와 바이론을 보았다.
“아, 쟤들은 왜 자꾸 떨어져 있냐. 여기 안 오고.”
“스스로 자기 객관화가 잘된 게 아닐까?”
“아니 그건 너무… 심한 말인데.”
율리우스는 그렇게 말했음에도 아벨린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의 눈에는 벨제크와 바이론, 둘 다 똑같았기 때문이다.
“대규모 공간이동 마법진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남부에서도 준비가 끝났다고 하니 각 학생은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드디어 준비가 끝났구나….”
율리우스는 진지한 눈으로 학생들에게 소리치는 교수를 보며, 무인도 에피소드를 떠올렸다.
‘우선 얻어야 하는 건…, 섬 중앙으로 가서 제일 중요한 건 내가 먹고.’
그 후에 곳곳에 있는 히든 피스들을 수거하면서 점수를 얻으면 되겠지.
원작의 기억은 뚜렷하게 기억에 남아 잊어버리지 않으니 이때만큼 편리한 게 없었다.
“자, 출발합니다!”
넓은 범위의 공간이 물결치며 그들을 길게 늘어진 타원형에 가두었다.
무인도로 향하는 대규모 공간 이동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