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아침이 되자 알렌은 아칸더스와 소네드를 불러 다시 만남을 가졌다.
“하루의 시간으로는 너무 모자랐나? 내가 너무 부담을 준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군.”
그들은 밤사이 생각을 모두 정리한 듯, 잠시의 휴식 없이 알렌과 마주 보았다.
“아닙니다. 이런 문제를 너무 끄는 것도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가 아닙니까?”
아칸더스의 얼굴은 기미 하나 없이 멀쩡하였지만, 소네드의 얼굴에는 검은 기미가 껴 있어서 오랫동안 고민한 흔적이 엿보였다.
“다들 피곤할 테니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따르겠습니다.”
아칸더스의 말이었다. 그는 알렌이 말을 끝내기 무섭게 입을 열었다. 알렌은 그의 반응을 얼추 예상했으면서도, 확인차 다시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공자님과 목적이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초록 눈동자는 망설임 없이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죄송하지만, 율리우스 공자님이 악마에게 몸을 빼앗긴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데려간 놈들이 그와 관련되어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요.”
잘못한다면 알렌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는 발언이었지만, 알렌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다운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공자님이 율리우스 공자님의 몸을 되돌리려고 한다면, 결국 아버지를 데려간 그 조직…, 임시로 제3세력이라 칭하겠습니다. 그들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는 냉혹한 얼굴로 담담히 사실을 나열했다.
“남작령도 아닌 백작령 크기의 영토에 지속적인 자금 조달, 중부 정보 조직과도 연계되어 있으며, 남작령의 영주인… 아버지마저 영지를 버릴 정도의 충성심.”
심지어 공간 이동 아티펙트를 물 쓰듯이 사용하며, 세력의 크기마저 짐작할 수 없다.
“그런 이들이 율리우스 공자님의 몸을 차지한 악마를 몰아내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겠습니까?”
“그러니 나를 계속 따르겠다? 그들과 부딪치다 보면 페른 영주를 찾을 수도 있을 테니?”
“예.”
“좋다.”
알렌은 만족스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아칸더스는 능력 있는 사내다. 그의 능력을 온전히 사용하기 위해서는 억압할 목줄이 아닌, 길들일 먹이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소네드, 자네는 어떤가.”
“저는….”
따를 것인가, 따르지 않을 것인가.
애초부터 하나의 선택지밖에 없는 부조리함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상인은 신뢰를 제일 중요시하지요. 따르겠습니다. 다만….”
그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 고민을 하더니, 이내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공자님께서 약조 하나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드리는 부탁을 한 번 고려해 주시는 것으로. 물론 거창한 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그래. 약조하지.”
알렌은 소네드가 처음부터 목적을 가지고 알렌에게 합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미 충분히 자리를 잡은 중견 상단의 상단주가 위험을 무릅쓰고 알렌의 편에 완전히 합류한다?
‘그럴 리가 없지.’
상인은 신뢰를 중요시한다.
허나, 그 말의 앞에는 충분한 이득이 보장될 시라는 말이 전제되어야 했다.
아직 율리우스가 후계자의 자리에 관심을 두지 않아 후계 분쟁의 갈등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상인이 어느 한쪽의 편을 드는 것은 위험했다.
“소네드, 자네의 부탁이 내 목적과 어긋나지 않는 한 어떤 부탁이든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네.”
“공자님께 폐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소네드의 목소리는 단호해졌다. 알렌의 약속을 믿는 얼굴이었다. 물론, 알렌도 그냥 그들을 믿는 게 아니었다.
안전장치는 필요한 법.
[린벨, 이넬리아.]
알렌이 눈짓하자 그녀들이 차를 준비한 후 조용히 그의 뒤에 시립했다.
‘은혜를 베풀고, 같은 목적을 가졌다고 해서 완전히 믿는다?’
알렌은 그 정도로 세상일이 좋게 돌아간다고 믿지 않았다.
은혜와 같은 목적을 가졌기 때문에 따른다는 말은 은혜를 갚고 그와 목적이 갈라지거나, 다른 이와 목적이 맞는다면 떠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알렌은 만일의 상황이라도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있어 이번 생은, 다시 한번 주어진 기회이기에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린벨과 이넬리아 같이 알렌에게 ‘완전히’ 속한 인물이 아닌 이상 사람을 완벽하게 믿기란 힘든 법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들이 알렌의 다른 부하들을 살필 것이다.
처음의 다짐대로 행동한다면 알렌도 언제까지고 그들을 믿겠지만, 만약 어떤 계기 혹은 배신으로 인해 나가려고 한다면.
“그럼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을 알려 주지. 카릭에게는 따로 자리를 가질 테니 비밀로 했으면 좋겠네.”
어쩔 수 없이 잘라 내야 할 것이다. 그로 인해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당연하지요.”
“일의 방향만 전하겠습니다.”
소네드와 아칸더스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카릭은 몇 개월을 함께한 동료였지만, 신뢰할 수 있을지는 다른 문제였다.
이 정보가 밖으로 샐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네드, 자네는 이곳에 상단 지부를 하나 만들게. 기본 자금은 내가 대줄 테니 빠르게 진행했으면 좋겠군. 그리고 이곳에 약초를 비롯한 치료 물품의 가격이 높으니 이곳으로 운송해 온다면 되겠군.”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곳의 제법 이름난 대장장이와 연결이 되어 있으니 충분한 양을 납품받을 수 있게 하겠네. 그렇게 해서 이곳과 영지 간의 유통망을 만든 후에….”
알렌은 아칸더스와 눈을 마주쳤다. 아칸더스는 알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는 듯 빠르게 말했다.
“제가 율리우스 공자님께 당한 이들을 모으면 되겠군요. 영지에서처럼.”
“그래.”
상단은 눈속임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실제로 사막인 이곳에서 물약을 비롯한 약초의 가격은 높았고, 신드리 남매가 만든 무기는 어느 지역에서든 환영받을 테니.
“상단의 움직임에 섞어 그들을 영지로 보냅니까? 아니면 이곳에서 활동하게 만듭니까?”
“우선 영지에서 교육한 후, 이곳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하지.”
“활동한다면 어디까지 허용하시겠습니까. 예를 들어 용병대를 조직하거나 하는….”
“그건 자네 재량에 맡기지.”
“알겠습니다.”
아칸더스의 눈이 깊어졌다. 알렌이 말한 정보를 바탕으로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하는 것이리라.
“자네가 해야 할 일은 간단하네. 기본적으로 구조, 포섭, 잠입이지만… 후에는 잠입과 선동, 그리고 요인 보호와 같은 일을 하게 되겠지. 그러니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행동하도록 하게.”
아칸더스는 이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율리우스를 궁지로 모는 것에 성공했으니까.
저 모든 것에 대해 완벽히 훈련시킬 수는 없겠지만, 기본을 다지는 것에 그를 따라올 사람은 없었다.
아칸더스는 계산을 끝마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알아야 하는 것들이 더 있습니까?”
알렌은 잠시 고민을 해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없지는 않지만…, 아직 거기까지 이야기하기에는 이른 것 같군.”
아칸더스의 눈이 반짝였다. 알렌의 은근한 암시에 그는, 그들 말고도 다른 조력자가 더 있다는 뜻으로 알아차렸다.
‘신드리 남매와는 거래를 조정해야 할 테니 조금 있다 대면을 시켜 주고, 카트린느나 일리아나는 몇 년 후에 합류할 예정이니 미리 자리를 한 번 마련해 줘야겠군.’
그와 동시에 알렌의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해 끌어들일 것이다. 그들도 몇 년을 보면서 완전히 정보를 공개할지 결정해야겠지.
하지만 알렌은 그것을 제외한 순환교와 그늘진 여왕과의 관계는 드러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우선 순환교의 외부 인식이 좋은 편이 아니었기에 공개적으로 쓰기에 좋지 않았고 알렌이 세상에 만들려는 모습과 맞지 않았다.
‘그리고 그늘진 여왕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음지의 세력을 정리하는 일을 맡으려면 알렌의 세력이 조금 더 커야 했다.
적어도 하나의 가문은 상대할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지.
그녀도 그걸 알고 있을 테니 짧으면 1년 길면 3년 정도는 기다려 줄 터.
“그럼 슬슬 이야기도 끝나고 시간도 적당하니, 식사나 하고 헤어지는 것이 어떻겠나.”
“하하, 저도 마침 허기가 지던 참이니 찬성입니다.”
소네드는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방에 틀어박혀 계획을 짜고 싶지만…, 여기서 빠질 수는 없겠지요.”
“당연하지요, 아칸더스. 여기서 혼자만 가지 않을 생각이었습니까?”
“그러니까 같이 가겠다고 하지 않았소, 소네드. 자꾸 그렇게 먹으니 배가 나오는 것이오.”
“아니, 그건 너무 심한 말이 아닙니까!”
알렌은 제법 친해진 듯 농담까지 오가는 두 사람을 보다,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시에 불어치는 훈풍에 열기가 더해지고, 거리 곳곳에 심어진 나무에 울창한 녹색 잎이 우거졌다.
회귀를 한 지 어느덧 열 달이 되어가는 날의 오후.
이름만 있었던 조직인 스콜(Sk?ll)이 정식으로 출범했다.
작년보다 더운, 여름이었다.
* * *
아칸더스 일행이 오고 난 이후에도 아카데미의 생활은 변함없이 흘러갔다.
사고 이후 실전 훈련의 수업은 위축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만큼 실내에서의 훈련과 교육이 더욱 철저하게 변했다.
그리고 유적 실습 사건의 뒷정리가 완전히 끝날 무렵, 눈에 띄게 활약한 알렌과 율리우스 그리고 마리아는 상과 함께 많은 공적치를 받게 되었다.
율리우스는 그걸 받고 알렌과 인사할 새도 없이 급히 아카데미의 보고로 향했다.
아마, 유명한 전설 속 마검인 스톰브링거의 모조품을 가지러 가는 거겠지.
원본의 능력과 다르게 모조품은 폭풍을 부르는 검인 만큼, 율리우스에게 어울리는 물건이기도 했다.
알렌이 먼저 차지해 봤자 쓰지도 못하고, 사이좋은 형제를 연기하고자 검을 그에게 줘야 했기에 포기한 물건이었다.
마리아는 자신이 받은 보상은 상관없다는 듯 알렌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말없이 알렌을 이끌고 사람이 없는 장소로 이동했다. 알렌은 의아해하면서도 그녀를 따랐다.
인적이 드물어지며 사람들의 목소리가 잦아들 무렵, 그녀가 알렌을 마주 보았다.
“알렌.”
그녀와는 유적 실습 이후 만남이 없었다.
검은 책에 나왔던 원작의 주연이자 회귀 전 돌연 목숨을 끊은 여인.
처음에는 일말의 동정심과 함께 율리우스가 포섭하기 전에 끌어들여야 한다는 생각에 접근했다.
그 후에는 그녀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과 하이젤을 견제하기 위해 만남을 이어 왔고.
그러나 검은 책에 대한 의존을 깨닫고 나서, 회귀 전의 기억을 바탕으로 움직였기에 실질적으로 마주하는 건 한 달만이었다.
“할 말이 있나?”
“왜 안 나와?”
그녀는 다짜고짜 그렇게 말했다.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지만…, 알렌은 단번에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았다.
“실습 후에 서로 할 일이 많지 않았나.”
“그래도 약속이었어.”
그녀의 표정에는 미약하지만, 불만이 어려 있었다. 알렌은 변명을 그만두고 사과했다.
“미안하군, 그렇게 신경 쓸 줄 몰랐다.”
“받아 줄게.”
“그럼 그걸로 끝인가?”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알렌을 응시했다. 순백의 눈이 그의 움직임을 붙잡았다.
“할 말이 더 없다면….”
“중부.”
알렌이 말을 멈췄다. 중부? 갑자기 중부를 왜….
‘설마.’
알렌이 떠오른 기억에 몸을 멈칫했다. 그녀는 알렌과 여전히 눈을 마주 봤다. 그녀의 표정에서는 감정을 읽어 낼 수 없었다.
“나는 중부에서 왔어.”
한 달도 전, 그녀의 정보를 알아내려 했던 일이 있었다. 결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었는데, 왜.
“…그래서 그게 어떻다는 거지?”
“저번의 답.”
마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녀의 눈은 시종일관 알렌을 담고 있어 알렌 그 자신조차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번에는 사생활에 민감하다고 하지 않았나? 갑자기 그러는 이유가….”
또각-
그녀의 구두 소리가 멈췄다. 그녀와 알렌의 거리는 주먹 하나 들어가지 못할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정보, 더 알려 줄게.”
“…….”
“그러니까 나와.”
그녀에게서 화려하지는 않지만, 은은한 달맞이꽃 향기가 났다.
“부탁이야.”
마리아의 표정에서 읽히는 감정은 하나밖에 느낄 수 없었다.
순수할 정도로 지독한 열망.
알렌이 이것을 원하기 때문에 자신이 주는 것이라는 듯.
그녀에게서 그 이상의 무언가를 찾기 힘들었다.
알렌은 침묵했다.
그녀의 태도에 당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생각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이러는 의도는…, 아니 우선 답을 먼저.’
침묵의 뜻을 부정으로 알아들은 걸까. 그녀의 눈에 실망감이 깃들기 시작했을 때, 알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알았다.”
그녀는 알렌의 진심인지 확인하겠다는 듯 잠시 눈을 바라보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로 물러섰다.
“이제 만족하나?”
“응.”
“…그럼 자리를 옮기지. 여기서 계속 대화할 필요도 없고.”
율리우스 뒤에 있는 자들의 세력이 보통이 아닌 것을 확인했기에, 하이젤이나 마리아를 신경 쓰기 힘들어 포기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렇게 행동한다면….
-이번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까.
알렌은 걸음을 옮기다 말고 잠시 우뚝 멈췄다.
그 모습에 앞서 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알렌,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알렌은 떠올랐던 생각을 급히 부정했다.
“표정, 이상해.”
알렌은 그녀의 말에 확인이라도 하듯, 두 손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얼굴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굳어 딱딱한 표정이었다.
알렌은 두 손으로 표정을 억지로 풀고는 표정을 꾸몄다.
“무슨 일 있어?”
“잠시… 생각 난 게 있어서 그렇다. 별 건 아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알렌은 무거운 발을 억지로 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아니…, 전과 같은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자신이 조심히 행동할 테니까.
너무 깊어지지도 않을 것이고, 적당히 감정을 조절할 것이다.
그게 옳은 선택이니까.
끼익- 끼익-
인적이 드문 곳이라서 그런 걸까, 녹슨 쇠가 움직이는 불쾌한 소리가 귀를 찔렀다.
알렌은 소리를 무시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끼익-
장소에서 멀어져도 소리는 여전히 귓가를 박혀 들었다.
어딘가 불편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