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상대의 숨결이 목 뒤를 스쳤다. 알렌은 그럼에도 상대의 존재를 느낄 수 없었다. 아득할 정도의 격차. 알렌은 그런 상대를 이미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상대의 정체를 알게 되니 더욱 생각이 차분해졌다.
그렇게 행동하니 의아한 것은 오히려 그녀였다.
“응? 아가, 왜 멈추니? 겁먹었어?”
“저항이 무의미하다면 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늘진 여왕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그냥 죽을 뿐일 텐데?”
그 목소리는 장난스러웠다. 그러나 솜털을 간질이는 살기는 언제라도 그를 노릴 듯 목을 조여 왔다.
“그늘진 여왕께서 원하신다면 안 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차석이라는 말이 괜한 게 아니구나?”
그러한 그녀의 협박에도 알렌이 동요 없이 답하자, 목을 옭아매던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 무난히 협조해 준다면 나도 험악하게 갈 필요 없어서 좋잖니.”
목 뒤의 숨결도 어느 순간 사라졌다. 알렌이 어색하게 굳은 목을 돌리며, 한구석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는 그녀가 있었다.
흑색에 가까운 짙은 자주색 머리카락과 단출한 검은 의복을 입은 묘령의 여자.
언제 그곳에 이동했는가, 아니면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나. 알렌의 실력으로 어느 쪽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사실, 지금도 방 전체에 감지력을 집중시켰지만 눈앞에 있음에도 그녀의 존재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알렌이 무엇을 하는지 다 봤음에도 위협조차 안 된다는 듯 느긋하게 물었다.
“다 살펴봤니? 그럼 이제 내가 물어봐도 될까?”
그녀는 눈웃음치며 천천히 방의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걸음에 따라 어두운 영역이 늘어났다.
“…예, 그러십시오.”
알렌은 속으로 무수한 가정을 떠올렸다.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는 뭐지? 돈이나 물건? 아니, 그런 것이 필요했다면 달라고 했을 거다. 그러면 정보? 그녀가 원할 만한 정보가 있나?
‘그것보다, 다 들었나?’
알렌이 얼마나 보안을 철저히 하든 팔강의 실력 앞에는 없는 것만 못했다.
우선 그녀의 말을 따르며 슬며시 떠보는 게 낫겠지.
“생각이 너무 많은 것도 별로 좋지 못한데… 뭐, 그 이야기를 하러 온 것도 아니니까.”
그녀의 걸음이 멈춘 곳은 방의 각진 모서리였다. 짙은 그림자와 어둠으로 조금도 꿰뚫어 볼 수 없는 곳.
그녀는 그곳에 손을 쑤욱- 집어넣었다. 그녀의 손은 벽에 닿았을 것이 분명함에도 팔은 멈추지 않았다.
“알렌 라인하르트. 아가는 라인하르트 가문의 일원이지?”
“예. 맞습니다.”
“거기다 첫째기도 하고, 정실에게서 태어났으니까 웬만한 건 다 알겠다. 그렇지?”
“…예.”
알렌의 대답에 그녀는 만족했다는 듯 웃으며 팔을 잡아당겼다.
“그럼, 물어볼게. 라인하르트 가문에, 왜.”
쿠당탕-
검은 인영이 획하고 바닥에 던져지며 알렌의 앞까지 굴러왔다.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것은 알렌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암왕의 흔적이 있는지 알 수 있을까?”
아칸더스 일행을 따라온 가문의 예비 집사. 그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기절해 있었다.
“그 아이는 말할 수 없게 조치가 된 모양이었거든.”
그녀의 웃음이 서늘하게 변했다.
“응? 아가, 말해 주겠니?”
* * *
팔강은 언제나 도전받는다.
처음 팔강이란 존재의 전신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 본다면 그건 당연했다.
마왕과 맞서 싸우던 용사의 여덟 동료.
전 대륙에서 제일 강하다던 여덟 명의 동료가 팔강의 전신이었으니 팔강은 언제나 도전받고, 시험받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다면 팔강은 언제 어느 때나 도전을 받아들여야 하나?
조금의 시간도 없이?
그건 아니었다.
팔강들도 사람이었다. 피로를 느끼고, 숨 쉬며 살아가는 존재.
비록 인간을 반쯤 벗어나 그 한계가 보통 사람과 비교하면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지만, 그들도 살아 있는 생명체였다.
하지만 팔강이 팔강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도전을 거부해서도 안 되는 상황.
그렇기에 그들은 각자 도전자들에게 도전할 수 있는 기간을 정해 두었다.
일 년에 단 한 번, 어느 때라도 팔강에게 도전할 수 있는 날을.
그 기간에는 무엇을 동원해도 좋았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도전하든, 독, 유물, 마법 그리고 함정을 비롯한 어떠한 무기를 사용하든 허락된다.
심지어 도전자들끼리 담합을 하고 차륜전을 펼쳐도 좋았고, 자신 있다면 홀로 도전해도 상관없었다.
물론, 그 기간을 지키지 않아도 상관없다.
하지만…, 팔강이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도전할 수 있을까?
가령, 제국 최강 피에르 베르나프의 경우.
그의 제일 큰 업무는 황제를 호위하는 것이며 황제의 명령에 따라 제국의 각종 재해를 해결하는 데 있다.
그런 그를 평범한 이들이 만날 수라도 있나?
위치를 알고 있다고 해서 그들이 황궁의 삼엄한 경계와 경비를 모조리 뚫고 황제가 기거하는 곳의 정면까지 쳐들어갈 용기가 있다고?
그렇다고 다른 이들이 만만한 건 아니었다.
인류의 창으로 불리는 베르세르크 기사단의 단장 더글라스 아벨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악한 것들을 무찌른다.
마탑 도시를 뒤에서 주무른다는 마도여황 베네사 사브리나는 소문만 무성할 뿐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다.
엘프의 이단 요귀 살바토르는 몇십 년 전부터 자신을 스스로 대수해의 깊은 지하에 봉인했다.
그들을 찾아가는 것 또한 만만치 않은 일이었고, 그렇게 힘이 빠진 상태에서 만전의 팔강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기에 팔강에 도전하고자 하는 이들은 그날을 노릴 수밖에 없었다.
제국에서는 이를 이용하고 국력을 과시하고자 아예 거대한 축제로 만들기도 했고.
전 팔강, 그늘진 여왕 역시 삼 년 전까지는 팔강에 자리해 있었기에 그녀에게 도전할 수 있는 날이 있었다.
일 년 중, 시월 마지막 주의 칠 일.
음지를 지배하는 여왕을 유일하게 고꾸라뜨릴 수 있는 날.
아는 사람들을 이를 암월제(暗月祭)라 칭하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그녀의 제자이자 비공식적으로 사냥개로 불리는 암왕(暗王)들마저도 서슴없이 그녀의 등을 찌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날.
그녀는 배신자를 용서하지 않기 때문에 도전자 모두를 죽였다.
그건 그녀를 지금껏 따랐던 암왕들 역시 비껴가지 못한 일이었지만…, 예외는 언제나 있었다.
“자, 왜 암왕의 흔적이 저 아이의 몸에 있는지 알려 주겠니?”
처음부터 그녀에게 벗어날 준비를 하던 이들. 그들은 그녀가 함정에 빠진 틈을 타 도망쳤다.
그 도망쳤던 암왕 중 하나의 움직임이 예비 집사의 몸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녀가 직접 암왕들을 가르쳤기에 예비 집사의 움직임만을 보고 알아채는 것이 가능했다.
“아가, 왜 말이 없니?”
“…….”
알렌은 대답하지 못했다. 말해 주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정말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암왕의 흔적이 있다고? 가문에서 보내온 예비 집사의 몸에?’
그녀는 알렌의 굳은 표정을 보고 오해를 했는지, 천천히 재촉하며 다가왔다. 어둠이 깊어진다. 발밑을 물들이는 그림자는 알렌을 휩쓸 것처럼 퍼져 나갔다.
“어떤 암왕과 관련이 있을까 …라비? 나비드? 뮬란?”
알렌은 그녀의 오해가 더 깊어지기 전에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모른다고?”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는가 싶더니 눈앞에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목소리는 귓가에서 들렸다.
“아가, 나는 거짓말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다.”
날카로운 예기가 목 끝에 닿았다.
음지의 진득한 살기가 그를 휘감았다. 알렌은 그녀 쪽으로는 조금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침착하게 답했다.
“…하지만, 짐작 가는 게 없지는 않습니다.”
“말해 보렴.”
그녀의 목소리는 알렌의 답에도 변함없었다. 부드럽고, 웃음기 여린 목소리. 그녀는 일말의 감정까지도 조절할 수 있었다.
알렌은 뜸 들일 필요 없이 곧바로 답했다.
“총집사 가델.”
“가델? 가델, 가델…. 아.”
저택에 있을 당시, 알렌은 그에게서 아무런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발걸음과 호흡도 평범했고, 마력도 없는 일반인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게 더 수상했다.
‘웬만한 가문쯤 된다면, 가문의 소속원들도 수련하게 된다.’
정확히는, 가문에서 그들에게 일종의 하사 형식으로 내어 준다고 할 수 있었다.
가문에서 작은 비전 하나를 내려 줌으로써 수행원들은 강한 충성심을 가지게 되고, 그걸 증명하고자 열심히 수련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알렌은 가델에게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조금의 마력도, 무술을 배우며 생겨나는 버릇조차 없다.
‘어머니를 따라서 가문으로 왔을 때부터 가문에서 일했다고 전해지는 게 가델이다.’
그런 그가 총집사로 일하며 많은 것을 얻었을 텐데, 몸 상태가 일반인 같이 보일 리가 없지 않은가.
너무나도 철저했기에, 알렌은 반대로 그의 이상을 이제야 깨달았다.
알렌은 이러한 의심을 가감 없이 그녀에게 설명했다.
나중에 확고한 답으로 그녀가 가델을 찾아갔을 때, 만약 그가 암왕이 아니라면 그 분노가 자신에게 되돌아올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리고 이자 역시 총집사 가델 밑에서 배우는 예비 집사 중 하나이니…, 그러니 암왕으로 제일 유력한 자는 그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알렌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후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게 알고 있는 걸 말해 주면 얼마나 좋니?”
그녀의 모습은 어느새 다시 알렌의 앞에 있었다.
방 안의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진흙탕에 빠질 것 같이 보이던 바닥도, 벽과 천장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들던 어둠도.
“이제 대답도 들었고, 아가도 피곤할 테니 나는 그만 갈게?”
그녀는 언제라도 사라질 것처럼 몸을 돌렸다. 아니, 이미 반쯤은 그녀의 몸이 어둠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평소대로의 알렌이라면 그녀를 붙잡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는 사전에 계획한 것과 통제할 수 있는 변수 내에서 일을 처리하려고 한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도 가능성이 있는지 계산하며 움직이는게 그였다.
그런데 팔강?
이번 그늘진 여왕을 만난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히 벌어진 사건이다.
그러니 알렌은, 이대로 그녀를 보내는 게 옳은 선택이었을─.
촤르르르-
『알렌은 이대로 그녀를 보내는 것이 맞냐는 의문이 들었다.』
─것이다.
『그녀의 몸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정말 보내야 된다고? 정보 길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늘진 여왕을 고용할 수 있다면 얼마가 들든지 상관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왜 가만히 있는 거지?』
하얀 책이 펼쳐졌다.
알렌은 평소의 자신이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임에도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조금.”
그의 행동에 그늘진 여왕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봤다.
“응?”
“조금 더 머무시는 게 더 어떻습니까.”
“아가는 내가 무섭지 않나 보구나?”
“실례지만 지금 상태가 그리 좋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녀는 시종일관 알렌과 대화로 해결했다. 그 모습이 그녀의 원래 성정일 수 있지만, 그녀의 본래 정체는 음지의 지배자다.
『그런 그녀가 압도적인 힘이 아닌 대화로 일을 진행했다고? 예비 집사를 저렇게 기절시켜 놓고서?』
저 모습 자체가 그늘진 여왕이 부상을 입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사사했다.
『소란이 일어난다면 자신이 불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조심하는 것이다.』
“흐응-”
그녀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마치 가소로운 것을 보는 듯한 얼굴. 누가 누구를 걱정한다고?
“아가는 내가 만만하니? 이렇게 대화로 하고, 그러니 자신감이 막 생기고 응?”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늘진 여왕의 몸이 다시 그림자로 녹아들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혼을 내주고 싶은데…, 기분도 좋겠다. 오늘은 그냥 넘어갈게. 그러니 앞으로는 말은 조심하고.”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무엇을 하려는지는 알고?”
“홀로 거대한 음지를 다시 찾아오기에는 시간도 걸리고 힘드니, 쓸 만한 사냥개를 구하려는 게 아니십니까.”
그림자로 녹아들던 몸이 멈췄다.
그녀는 전과 다르게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차갑게 그를 바라봤다.
“아가, 조금 전에 입을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니?”
“부상에 도움이 되는 것들도 모두 구해 드리겠습니다.”
“말이 안 통하는, 아이구나.”
그녀의 표정이 무표정해졌다.
알렌의 머리에서 경종이 울렸다. 그녀가 손을 휘두르자 어둠 속에서 칼날이 솟구쳤다.
“한 번으로 봐줄게. 일어나면 반성해야 한다?”
베스틀라도 없고, 마법을 쓰기에도 늦었다.
그렇더라도.
“제 이야기를!”
그녀를 반드시 붙잡아야 했다.
“제 이야기를, 들었지 않습니까….”
후웅-
칼날은 머리카락 하나 통과할 거리만 놔두고 멈춰 있었다. 아직 닿지 않았음에도 날카로운 예기에 피부가 따끔거렸다.
“제 이야기를 몰래 훔쳐 들었으니, 이야기 값으로 쳐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녀는 미동 없이 알렌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느릿하게, 질문을 던졌다.
“이야기 값으로?”
“예, 이야기 값으로.”
『알렌은 지금에서야, 율리우스를 돕는 세력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보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의 영지에도 참견할 수 있고.
순환교을 분할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몇 개일지 모를 정보 조직까지 운영하고 있다.
『그 외에도 공간 이동을 사용할 수 있으며, 라인하르트 가문에 자금을 전달하고, 영지의 영주조차 그들을 따른다.』
미래에는 팔강에 비견되는 강자들조차 율리우스를 돕게 되겠지.
『운이 따르는 것처럼.』
알렌이 회귀 전의 기억과 합쳐 그들을 파악하게 될수록 조급함이 차올랐다.
『정말 가능한가? 성공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하며, 일정 부분 희생해야 할 부분마저 용납했다.
『그런데도 정말로 진짜 율리우스를 되찾을 수 있을지 의구심이 차올랐다.』
되찾는 걸 포기하고 죽이더라도 의외의 상황이 되지 않을까?
『우연히 공격이 빗나가거나, 지나가던 이가 돕거나, 지면이 갑자기 무너져서 공격이 실패하거나.』
알렌은 그런 상황이 되어 복수와 율리우스를 되찾는 것 모두를 실패할까 두려웠다.
『한 번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다음은 없을 테니까.』
그러니 더 많은 패가 필요했다.
『상대가 자신을 짓누르더라도, 일말의 역적을 노릴 수 있는 그런 패가.』
미래도 좋고, 한 번의 기회를 노리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도 현재의 기반을 잘 다져 줘야 가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의 도움이 필요했다.
『현재 조직의 주먹구구식 체계를 바로 세우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전력을 늘리기 위해서.』
“……흐음, 그래. 이야기 값이라면… 들어줘야지.”
한동안 침묵하던 그녀의 대답은 다행히 긍정이었다.
“그럼 나는 여기 머물 테니, 이곳으로 내가 말한 이름의 약을 보내면 돼. 아가, 아니 너는 참 위험하게 사는구나.”
“…들으셨다면 아시겠지만, 어쩔 수 없으니 말입니다.”
알렌이 쓴웃음을 짓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침대로 향했다.
“그렇다고 내가 도와줄 거라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단다. 이건 거래니까 말이야.”
“예, 분명한 거래지요. 하지만 충분합니다.”
알렌은 그녀가 다시 음지의 여왕으로 설 수 있게 그녀가 일일이 나설 필요 없는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고, 그녀는 알렌의 부탁을 몇 번 들어준다.
그들의 행동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저도 그늘진 여왕을 함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나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지금은 이 정도의 관계로도 충분했다.
오히려 자신답지 않게 계산보다 감정적인 부분이 앞서 행동했음에도 괜찮은 결과에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방금까지 대들어 놓고 그런 말이나 하고 말이야, 참.”
그녀는 눈을 흘기더니 완전히 어둠을 흩뜨렸다.
밝게 차오른 달빛이 창문 밖에서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알렌을 향해 등을 돌리더니, 창밖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나가 주겠니? 아니면 더 할 말이 있다든가… 그래, 예를 들어 나와 같이 방에 있고 싶다든가 말이야?”
끝에서 간드러지게 웃는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듬뿍 담겨 있어 그를 곤란하게 만들 의도가 충만했다.
알렌은 방금 전의 모습과 다르게 완전히 감정을 조절하는 모습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넬리아와 같은 종족도 아닌데 이 정도라니.’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알렌은 바닥에 쓰러진 예비 집사를 어깨에 메고 방을 나섰다.
그가 나가기 직전 스치듯 확인한 하얀 책은, 언제나처럼 유유히 공중을 떠다닐 뿐이었다.
언제 펼쳐진 적이 있었냐는 듯.
“그늘진 여왕의 휴식을 방해할 생각은 없으니…,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그녀는 알렌이 나가는 순간까지 작게 손을 흔들었다.
철컥-
방문이 닫기고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그녀는 방금의 일을 떠올리며 작게 속삭였다.
“…이야기 값이 너무 비싼걸.”
아니면, 너무 값을 후하게 쳐줬던가.
그녀가 알렌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간단했다.
가델 대신 저 알렌이라는 꼬마도 뒤처리를 맡기에는 충분한 실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내가 왜 자크니르를 공격했을까.’
어떤 감정이든 조절할 수 있어야 하며, 오랜 인내를 가지고 틈을 노려야 되는 게 암살자다.
그녀는 그런 암살자의 여왕이자 음지의 지배자였다.
그런 자신이 앞뒤 재지 않고 복수심에 미쳐 자크니르를 습격했다고?
‘차라리 도시로 몰래 숨어들어 엄습하는 게 더 좋은 계획이야.’
그것도 아니라면 음지의 세력을 조금씩 넓혀 원래 세력을 회복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세력전을 벌일 수도 있었다.
자크니르의 전 가문 따위와 손을 잡을 게 아니라.
그게 훨씬 자신다웠다. 고작 삼 년의 굴욕을 겪었다고 해서 그런 조잡한 계획을 세우는 건 평소의 그늘진 여왕답지 못한 일이었다.
그녀만큼 자기 객관화를 잘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이상함을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만한 소란을 떨어 놓고서 짐승왕이 나타나자마자 발을 뺀 걸지도 모른다.
‘…무언가 있기는 할 텐데.’
그게 무엇 때문일까.
그를 알고자, 그의 곁에 머물며 조사해 보기로 한 것이다.
상처를 치료할 필요도 있었지만…, 잠시 생각을 정리해 볼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이 더 컸다.
그녀도 알렌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율리우스를 돕는 그 세력이 매우 이상해 보였으니까.
“흐응, 괜찮은 게 나왔으면 좋겠네.”
만약 그때의 그녀를 조종한 것이 그들이라면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으리라.
그녀는 눈을 감았다.
깊은 밤이 흘러가는 가운데, 커다란 달만이 존재감을 뿌리며 지상을 밝게 비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