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 빙의를 싫어함-100화 (100/212)

제100화

아칸더스와 소네드가 드디어 엘피스에 도착했다.

알렌은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다음 날 아침, 곧바로 그들과 만날 수 있었다.

아카데미 내부로 외부인을 함부로 들일 수 없다는 교칙이 있기에, 알렌은 서쪽의 여관 중 괜찮은 곳의 최상층의 방들을 층째로 빌렸다.

“공자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공자님의 위명이 이 근방에 자자하더군요.”

소네드는 여전히 푸근한 얼굴로 옅은 미소를 드러낸 채 그와 해후를 나누었다.

“나도 다시 만나서 매우 반갑군. 슬슬 자네들이 올라왔으면 했을 시점이라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군.”

“하하, 그렇습니까?”

“그래, 이 일은 조금 있다 이야기하도록 하고… 자네 아들은 어떤가? 저주는 다 나았을 텐데.”

소네드는 알렌이 중요한 이야기를 뒤로 미루고 싶어 하자, 부드럽게 그와 근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건강을 되찾고 나서는 제 밑에서 상단 일을 배우고 있습니다. 지금쯤은 일어났을지 모르겠습니다.”

“그쪽은 새벽일 텐데 벌써?”

“지금이니 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다. 조금 있으면 카릭의 일을 도와 상단 일을 배울 시간이 될 겁니다.”

“아, 참 그래. 원래 도시에 오기로 한 것은 카릭이 아니었나.”

알렌의 물음에 소네드는 원숙한 상인의 얼굴로 당당히 입을 열었다.

“처음이니 당연히 제가 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별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모를까, 첫 상행은 젊음의 과감함이 아닌 중년의 신중함이 필요한 법입니다.”

마치, 자고 일어난 뒤의 머리카락이 더 빠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저처럼 말입니다. 소네드는 그렇게 말하며 쾌활하게 웃었다.

전보다 표정이 더 좋아진 게 상당의 사정이 괜찮은 것 같았다.

「무려 당신과 같은 권력자가 봐주는 데 당연한 거 아니에요? 흐흥, 추천장 하나를 그렇게 생색낼 때는 언제고요.」

알렌은 그녀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답할 필요가 없는 물음에는 답하지 않으면 될 뿐이다.

“자네는 잘 지내는 것 같고… 그럼 아칸더스, 자네는 어떤가.”

“제가 말할 것이야 있겠습니까. 술에 절어 살 때보다는 더 낫지요. 비록… 아버지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지만 말입니다.”

아칸더스는 전보다 겉으로 보이는 날카로움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알렌은 그 날카로움을 뱃속에 숨겼다는 사실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가? 그 이야기도 조금 있다 하도록 하지. 추측이지만 단서를 발견한 것 같기도 하니 말이네.”

[누군가 듣고 있다.]

아칸더스의 머리로 알렌의 목소리가 울렸다. 알렌의 실타래가 조용히 빠져나와 발밑을 점유하며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습니까?”

아칸더스는 일말의 표정 없이 알렌의 의도에 따라 말을 맞추었다.

“그래, 그런 재미 없는 이야기는 괜히 피곤해질 뿐이지 않나.”

“맞는 말씀입니다.”

소네드까지 분위기를 파악하고 능청스럽게 맞장구치자 알렌은 린벨과 이넬리아에게 각각 명령을 내렸다.

“이넬리아, 혹시 정령 차를 만들어 줄 수 있나? 저번에 맡았던 그 향기가 잊히지 않는군.”

[정령으로 목소리가 빠져나가지 않게 소리를 차단해라.]

“그리고 린벨, 너는 혹시 주방으로 내려가서 괜찮은 다과를 받아 오도록 하고… 만약 없다면 근방의 다과점을 확인해도 좋다.”

[이곳 주위로 수상한 자가 없는지 확인하고, 최대한 엿듣는 이가 없도록 둘러보도록 하거라.]

이넬리아의 표정은 스스로 꾸며 내는 것에 가까웠기에 언제 그런 명령을 들었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금방 준비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네, 공자님. 최대한 괜찮은 다과를 구해 오겠습니다.”

그러나, 린벨마저도 평소의 모습이 거짓말이라는 듯 순식간에 차분해지는 모습에 알렌이라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린벨과 이넬리아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럼 우리는 이야기나 더 하지. 그래, 아칸더스 자네가 귀한 술을 구했다고 들었는데….”

“예, 소네드 님도 그때 계셨으니 확실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는 엘프에게서 얻은 약주로….”

“아! 그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도 설마 약초를 섞어 그런 술을 만들었을 거라고는….”

알렌의 실타래가 바닥을 채우는 것으로 모자라 벽을 타고 방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넬리아가 돌아와 차를 내오고, 십 분이 넘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어느새 몇 달 동안 스콜을 꾸리며 겪었던 고단함을 토로하기 시작했을 때.

“그래서 공자님, 서로 무기나 잡겠다고 뻗대는 놈들을 설득하느라 얼마나 힘이 들….”

덜컥-

린벨이 돌아왔다.

그 순간 실타래가 들어온 문을 둘러쌌고, 방 전체가 알렌의 실타래로 뒤덮였다.

“방을 도청하는 이들은 없었나? 주위에도 마찬가지고?”

“네, 아래층과 밖의 벽면. 그리고 주위 100m 내의 사람들을 전부 확인했는데, 없었어요.”

소리가 멎었다. 언제 시끄러웠냐는 듯 방 안은 정적으로 물들었다.

잠시 고개를 돌려 이넬리아를 바라본 알렌은 그녀도 고개를 끄덕이자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말해도 된다.”

“공자님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알렌에게 아무런 말 없이 그저 분위기만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맞추었던 소네드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가 도청당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노려지기라도….”

“우선, 몇 가지 먼저 물어봐도 되겠나?”

알렌이 진지한 얼굴로 묻자, 소네드는 불평 한마디를 입에 담지 않고 물러섰다.

“하십시오.”

“내가 수소문해 달라고 했던 붉은 표지의 마법서는 찾았나?”

“…찾지 못했습니다.”

“영지에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마차의 행렬이나, 표식 없이 움직이는 인물들은?”

“공자님의 말씀대로 최대한 인맥을 동원해 확인했지만…, 대부분 부랑민이나 도적 떼였지. 상단 같은 곳은 없었습니다.”

알렌은 잠시 기다리라 하고는, 생각에 잠긴 아칸더스에게도 물었다.

“아칸더스, 너는 백작령 주도에 있는 저택에 몰래 들어가는 이들을 본 적이 있나?”

“예, 몇 번 부하들이 발견했었습니다.”

“그들이 저택에 나온 후 어디로 갔는지는 추적해 봤고?”

“예, 하지만… 어느 순간 감쪽같이 사라져 허탕을 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나머지는 그냥 주민이었고 말입니다.”

알렌은 저택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어느 순간 아버지의 곁에 나타난 이들과 자신이 본 적 없던 하인과 하녀들.

그리고 예산이 부족할 것이 분명함에도 많은 군비를 소모하면서 유지되는 행정.

어디를 가든 마치 소설처럼 생겨나는 사건들과 그걸 적절히 해결하는 율리우스.

그리고, 일개 지부장 주제에 공간 이동 아티펙트를 다루며 순환교에 사도까지 꽂아 넣을 수 있는 이들.

블레임은 알렌이 많은 정보를 얻지 못했으리라 판단하고 그냥 넘어갔지만….

‘꼬리를 잡았다.’

그게 놈의 실수였다.

회귀 전부터 실체조차 파악하지 못한 단체.

아버지의 곁에서 율리우스를 돕는 은밀한 세력.

그놈들의 실마리를 이곳에서 잡아냈다.

“그래서 공자님, 이제 생각을 끝마치셨다면 설명을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도 마찬가지의 의견입니다.”

알렌은 조금의 재촉 없이 자신이 생각을 정리하기까지 기다리던 그들을 바라보며 웃음을 흘렸다.

“그래, 당연히 해 줘야겠지. 이제 알아야 할 때도 됐지.”

그들은 알렌이 없는 몇 개월간 그를 배신하지 않고 착실하게 보고를 끝마치며 세력을 부풀렸다.

그 정도라면 적어도 서로 간 최소한의 신뢰는 쌓았다고 해도 무방했다.

‘아니, 이 정도 비밀도 못 지키고 끝날 거라면 이번에도 실패할 뿐이다.’

알렌은 진심으로 그렇게 느꼈다.

이것 하나 말해 주지 못해 전전긍긍할 뿐이라면 복수 따윈 다 집어치우고 율리우스 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나 먹는 것이 더 낫다.

“혹시 내 명령에 의구심을 느낀 적이 없었나?”

알렌의 물음에 소네드는 잠시 고민했지만, 아칸더스는 아니었다.

“예, 있었습니다. 단지, 양측의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꺼낼 이야기는 아니라고 판단했지요.”

아무리 동생과의 후계 다툼이라고 한들, 그간 보인 알렌과 율리우스의 관계는 양호했다.

양호한 것뿐일까, 아카데미 근처에서 그들의 형제 사이가 매우 좋다고 소문이 자자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알렌이 율리우스에게 원한이 있는 이들을 긁어모으고, 마치 가족을 경계하는 것처럼 저택을 감시한다?

“솔직하게 이용만 당하는 게 아닐까 노심초사한 마음이었습니다.”

아칸더스는 알렌이 말을 꺼낸 이유가 진심을 내보이기 위함이라 판단하고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 아칸더스의 태도에 소네드는 한숨을 내쉬며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솔직히 마법 서적은 그렇다고 쳐도, 소문에 민감한 상인들도 들어본 적도 없는 암거래가 있다고 하니 의구심은 들었습니다.”

다른 이들이 다 진심을 내보이는데, 혼자 내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후계자의 자리는 확정일 텐데, 굳이 개인 세력을 만들기 위함이라 한들 그들이 아니라 저희를 모은 이유도 짐작하기 어려웠고 말입니다.”

알렌은 그들의 말을 들으며 내심 경계심을 더 끌어 올렸다.

회귀했다고 앞서 있으리라는 착각은 완전히 버려야 했다.

‘사도가 되었다는 장소도 하루가 되지 않아 알려졌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내 행적은 모두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까발려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알렌은 도시를 은밀하게 빠져나왔으니, 그들이 알렌의 행적을 알아낸 것은 순환교도들의 행적을 쫓은 것이 분명했다.

그 말은 순환교 안에 내통자가 있거나, 항상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알아차렸을 확률이 높았다.

‘다행히 모든 것을 들킨 것은 아니라지만….’

이 정도의 정보라도 율리우스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를 의심할 것이 뻔했다.

‘…이럴 때 휘하의 정보 조직이 없는 게 아쉽군.’

그들의 정확한 크기를 짐작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그 정도만 알더라도 훨씬 대처 방안을 짜기가 한층 쉬웠을 텐데.

알렌은 블레임에게 수확제의 진범을 의뢰하게 되었을 때부터 느꼈던 필요성을 더 절실히 느꼈다.

이넬리아가 홀로 열 명, 그 이상의 일을 처리하고 있기도 했고, 아칸더스 휘하의 부하들을 키우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알았다.

그러나 그사이의 기간 동안 손 놓고 당해 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얼마를 들이든, 그늘진 여왕을 고용하고 싶군.’

이미 그녀는 어딘가로 도망쳤을 테니 불가능하지만 말이었다.

“다 설명을 하기 전에, 먼저 해 줘야 할 이야기가 있네.”

알렌이, 내가 왜 이러한 행동을 하게 된 근본적인 까닭을.

“어디서부터 이야기하면 좋을까…, 그래. 그게 좋겠군. 율리우스가 아직 망나니가 되기 전이 좋겠어.”

이넬리아와 린벨은 이미 이야기를 끝냈고, 베스틀라도 들었던 이야기였다.

“라인하르트 가문에는 형 노릇 못하던 형과 동생답지 않던 동생이 있었네.”

악마에게 몸을 빼앗긴 동생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 *

“잘 생각해 보고 답을 주게. 시간은 넉넉히 주지.”

철컥-

늦은 밤이 되어서야 모든 이야기가 끝났다.

알렌은 생각에 빠진 소네드와 아칸더스를 내버려 둔 채 다른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넬리아와 린벨은 오늘 밤만큼은 그의 시중을 들지 않고 옆 방에서 자리하기로 했다.

오늘은 혼자서 사색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베스틀라와 함께 텔레파시 기능이 담긴 팔찌 유물도 함께 맡겼으니, 서로 대화할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한 번 자리를 만들어 주려 했으니 적절한 시기이기도 했다.

저벅저벅-

어둡고 내려앉은 복도는 많은 생각이 들게 한다.

알렌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악마니 뭐니, 잘도 모르면서 떠들고 있다고.

“이것도 자꾸 말하니 익숙해지는군.”

그만큼 많은 사람이 자신과 동생의 일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제는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을 만큼.

알렌은 배려하듯 두 명을 쉬게 놔두고 나온 자신의 모습에 비웃음이 나왔다.

“뭘 생각해 보라는 건지.”

알렌은 그들 스스로가 끝내는 자신의 이야기를 받아들일 것을 알았다.

아칸더스와 소네드가 생각에 잠겨 있다는 말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고려할 것이 많아졌다는 그 증거.

지금까지 알렌과의 관계를 부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업을 비롯한 주변 인물에 대한 관계도 지금 와서 발을 빼기에 너무 늦어 버렸고.

그 모든 것을 다 알면서도 선심 쓰듯 배려하는 것처럼 말하다니.

알렌은 문득 자신이 전과는 조금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을 터.

‘…에반, 에리엘, 윌리엄.’

잘하고 있는 짓인가, 내가 하는 일이 옳은가. 답을 낼 수도 없고, 누군가 답을 내줄 수도 없는 쓸데없는 철학적 논쟁이다.

그러나 시간을 멍하게 보내기에는 답이 없는 문제를 고민하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을 터.

알렌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문고리를 돌렸다.

철컥-

오늘 밤만큼은 철학적 수렁에 몸을 담그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렇게 어두운 방으로 몸을 모두 구겨 넣은 순간, 방의 한구석이 유난히 어두웠다.

마치 빛을 끌어당기는 것처럼.

달빛 하나 없이 이렇게나 어둡다고? 알렌의 근육이 순식간에 태세를 정비했다.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간다. 아니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알렌의 목덜미에서 소름이 오소소 돋으며 숨결이 닿는 것이 먼저였다.

“아가는 감이 많이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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