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블레임은 제법 곤혹스러운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귀족들의 다툼에 끼어들었을 때의 위험과 이번 일을 덮음으로써 얻는 이득. 그리고 알렌과 충돌했을 시의 피해까지.
그는 제법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기에 곧바로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었다.
‘보고받은 정보로 살펴본다면 전투력만 6 위계, 차후 팔강의 자리까지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르나….’
지원을 요청한다면 해결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그의 주변 관계를 생각해 본다면 절대 먼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부득이한 충돌이 있지 않은 한은.
‘다른 쪽도 제법 협업을 오래 이어 오기도 했으니.’
여기서는 알렌의 의뢰를 받아들이는 편이 올바른 선택이었다. 판단을 끝마친 블레임은 고개를 숙였다.
“본래 귀족 간의 다툼은 끼어들지 않습니다만…, 이번 일은 예외로 봐야겠지요. 알겠습니다. 받아들이지요.”
그 말에 알렌도 더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다른 요구를 한다 해서 그들이 더 들어줄지도 의문이고, 우선 그들을 믿을 수 없었다.
이번 정보를 의뢰하는 것도 그가 생각하기에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최대의 선이었다.
“정보는… 조사가 다 끝난다면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다시 한번 피해를 끼쳐 죄송합니다.”
블레임이 깡마른 몸으로 시체를 짊어지고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팟-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건드리지 않는 판단이 옳았군.’
단방향이 아닌 양방향 공간 이동. 그것도 제대로 된 좌표까지 가지고 있으니…. 알렌은 내심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남은 마적들의 시체와 옅은 혈향이 풍기는 가운데, 알렌은 시선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자, 제대로 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그곳에는 블레임과 그의 대화를 엿들은 일리아나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엿들을 의도는 아니었지만…, 제 상황과 연관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아서 말이에요. 그러니, 전부 알려 주실 거죠?”
그녀는 방긋 웃으며 말했지만, 눈에는 힘이 가득 들어 있어 그리 좋은 의미로 보이지 않았다.
알렌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면 기절시킨 의미가 없어졌군.’
알렌은 헛수고로 인해 한층 힘이 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말해 줄 수 있는 것까지만.
* * *
알렌이 아카데미에 돌아온 지 이 주가 흘렀다.
아카데미 생활도 점점 평소와 같은 활기를 되찾았다.
죽은 이들을 잊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건 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 이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들은 이번 사건을 아카데미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는 사람은 일 년에 몇 명이나 나온다.
이번과 같이 많은 수의 사상자가 나온 것은 예외였지만, 아카데미의 역사상 없었던 일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아카데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대로 돌아갔다. 아카데미의 교수들도 부상을 털고 일어났고, 다른 학생들은 각자의 일에 매달렸다.
빈자리는 그대로지만, 얼마 지나지 않으면 다시 채워질 것이다.
아카데미에서는 반년에 한 번 입학시험을 치르니까.
그 사이 알렌이 짐승왕의 눈에 들어 제자가 되었다는 소식이 공표되었다. 몇 년간 없었던 팔강의 제자 소식에 한동안 아카데미가 떠들썩하게 변했다.
그 와중에 율리우스도 무슨 사건을 벌인 모양이었다. 따돌림을 당하던 여자애를 구했다느니, 가해자들을 박살내고 퇴학시켰다느니 말이 많았다.
심지어 신입생도 아닌 한 학년 위 선배의 일인 모양이었다.
알렌은 그가 한 행동에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율리우스, 그놈이 또 무슨 짓을 했구나 정도의 감상만 들 뿐.
그러나 알렌의 일상이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제출한 시간표에 따라 수업을 받고, 저녁에는 짐승왕에 불려가 대련을 한다. 남는 시간에는 베스틀라에게 검을 배웠고, 도서관도 하루에 한 번은 반드시 들렀다.
주말에는 봉사도 빼먹지 않았고, 누구에게나 성실하고 친절한 모습만을 보였다.
알렌은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듯 자신을 몰아붙였다.
그렇게 바쁜 일상을 보내는 주말 아침, 알렌은 차 향을 즐기며 티타임을 즐겼다.
“…흠, 저번보다 향이 더 깊어졌군. 어떻게 한 거지?”
“공자님의 권유대로 연금술을 시작한 이래로 손재주가 좋아진 덕분입니다.”
“그런가? 아무리 연금술을 시작했다고 해도 이렇게 차 맛이 바뀔 수 있나?”
연금술사들이 양조업이나 포션 개발, 찻잎의 개조와 같이 여러 일에 종사한다지만, 몇 주 배운다고 해서 이렇게 맛이 깊어질 수 있나?
알렌이 의문을 표하자, 그녀는 머뭇거리는 어조로 답했다.
“그게…, 사실 특별한 재료를 더 첨가했습니다.”
“어떤 재료지?”
“…요정의 가루입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왠지 모르게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요정의 가루는 어디서 나오는 거지?’
알렌은 들어 본 적 없는 재료에 잠시 생각했지만, 떠오르는 게 없자 그만두었다.
그가 알지 못한다면 연금술의 재료 중 하나이리라.
“수량이 충분하다면 앞으로도 종종 넣어 주게. 향이 깊어지니 더 좋군.”
“…어, 그게….”
“구하기 어려운 재료인가? 아니면 가격 때문에?”
“아, 아닙니다. 그, 예…, 알겠습니다. 준비해 두겠습니다.”
알렌은 그녀의 긍정에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그의 맞은편에 있던 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일리아나 공녀. 언제까지 내 시간을 방해할 생각이지?”
그의 맞은편에서 과자를 조금씩 갉아먹던 일리아나는 알렌과 눈이 마주치자 조용히 과자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얼굴로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공자도 여럿이서 함께 티타임을 즐기는 게 낫지 않아요?”
“아니, 나는 홀로 사색하는 걸 좋아하는지라.”
“저랑 사이가 좋아지신다면, 할아버지도 좋아하실 거예요.”
“언제는 관심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알렌이 일말의 틈도 없이 받아치자, 그녀는 입을 앙다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할아버지랑은 화해했어요. 화해라고 할 것도 없었지만요.”
일리아나의 허약한 체질이 치료된 지도 이 주가 흘렀다.
짐승왕에게도 그녀의 체질이 완전히 치료된 것을 밝혔다.
그는 겉으로는 잘했다고 한마디밖에 하지 않았으나 속으로 매우 흡족해 보이는 게 눈에 보였다.
린벨이 여기 없는 이유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그렇다면 린벨과 같이 훈련이라도 받지 왜 여기까지 왔나. 체질이 바뀌었다고 좋아하더니, 이제는 그렇지도 않나?”
짐승왕은 일리아나를 옆에서 돌봐 주던 그녀에게도 가르침을 내려 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 덕에 그녀는 매주 주말마다 그와 대련을 하며 부족한 점을 가르침 받게 되었다. 제자는 아니었다. 그거 가르침만 내려 줄 뿐.
그걸로 실력이 늘어날지 말지는 그녀에게 달려 있었지만, 알렌이 믿는 그녀의 재능이라면 반드시 성장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한창 오러 혹은 마력을 다루며 훈련에 매진해야 할 그녀는 왜 여기 있나.
“전에는 몸만 나으면 팔강이라도 노릴 것 같더니. 왜, 전과는 느낌이 다르나?”
“그게….”
그녀는 한숨을 내쉬더니, 착잡한 얼굴로 답했다.
“하…, 네, 맞아요.”
그녀는 전의 당당했던 태도마저 없어진 채, 회색 귀가 축 눕혀졌다.
“…처음에는 열심히 했어요. 훈련하는 대로 실력이 쑥쑥 늘어나는 게 눈에 보이니까, 의욕이 안 날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렇잖아요. 명색이 팔강의 피를 이어서인지 혼혈의 한계로 떠오르는 어중간한 오러와 마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벌써 웬만한 용병 정도는 이길 만한 자신감도 생겼고, 근데, 그런데….”
체질이 낫기 전에는, 변명할 수 있었다.
몸이 약하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기대를 채우지 못했다고. 마력과 오러, 둘 중 어느 것도 못 다루는 건 내 탓이 아니라고.
하지만 알렌 덕분에 체질이 다 낫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렇게 즐겁지는 않더라고요. 갈수록 훈련도 고되고, 직접 몸을 움직이는 것도 별로고요.”
설령 건강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전투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리라는 사실을.
“차라리 지금 배우는 공학이 저한테 훨씬 흥미롭기도 하고 말이죠.”
공학은 아니었다.
약한 체력으로 억지로 밤을 새우느라 몸살이 나면서도 즐거웠고, 새로운 발명품을 개발했을 때는 얼른 시험해 보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렇다고 훈련을 그만두겠다는 게 아니라…, 우선순위가 바뀌었다는 거죠. 이제는.”
그녀의 눈에는 전과 같은 일렁임은 보이지 않았다.
전에 없던 무력이 생기고 나서야 그녀는 과거의 그림자를, 열등감과 같은 감정을 벗어났다.
알렌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그녀에게 변화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처음에 만났을 때 말하지 않았나. 공녀의 공학적 재능에 관심이 있어 만나고 싶었다고.”
어쩔 수 없이 선택해 빠져들었나, 본래 성정이 전투에 맞지 않았나.
알렌은 그 모든 것이 상관없었다. 처음에 생각했듯, 알렌은 하나의 일에 많은 것을 고려하며 계획을 세운다.
그녀를 끌어들인 건 짐승왕에게 연결되는 징검다리라는 점도 있었지만, 그녀 본인의 재능이 뛰어나서이기도 했다.
‘미래에 수인들의 패러다임이 그녀 때문에 바뀌던가.’
몇 년 후의 일인지, 언제 그녀가 그런 발명을 하는지 모른다. 그때 그녀에게 관심도 없었고.
하지만, 그녀가 그런 발명을 한다는 사실만 알면 충분했다.
“그건…, 전에 말했던 것과 같은 의미인가요?”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알렌의 움직임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노란 동공이 날카롭게 변했다.
“어떤 것을 말하는 거지?”
“저를 치료하기 위해 순환교와 거래했다는 것이요.”
알렌은 침음을 삼키며 말을 골랐다.
그녀가 지부장과 알렌의 대화를 듣고 해명을 요구했을 때, 알렌은 교묘하게 말을 바꿔 순환교의 연줄을 통해 그들과 접촉했다고 설명했다.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순환교의 고위 인물과 거래를 했다고.
사도의 이야기는 단순히 순환교의 새로운 사도가 있었던 장소가 겹친 것뿐이라면서.
기절시킨 이유 역시 이교의 도움에 믿지 못하겠다며 거부할까 그렇게 한 거라고 설명했다.
절대 다른 마음이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고 사과하자, 그녀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알렌의 행동을 받아들이고는 용서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알렌 덕분에 평생의 약한 체질이 고쳐졌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는…, 같은 의미겠지?”
짐승왕과 접점을 갖지 못하더라도 그녀의 뛰어난 재능 때문에 찾아갔다.
짐승왕과 연결 고리를 강화하고자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순환교와 거래했다.
둘 다 같은 이유라고 봐도 무방했기에 알렌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일생일대의 고민을 하는 듯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녀는 결단을 내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말 그러시다면, 알겠어요. 이렇게 저한테 정성을 쏟아 주는 사람은 처음이네요. 그러니까.”
그녀는 숨을 한 번 삼키고 결심을 드러냈다.
“준비가 되실 때 불러 주신다면, 공자의 영지로 바로 찾아갈게요.”
“…정말인가?”
아직 영입 의사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휘하로 들어오겠다고?
“네, 공자도 그만큼의 정성을 보였는데 제가 답하지 않을 수는 없잖아요?”
그녀의 눈은, 그만큼 확고했다.
이미 결정을 되돌리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
알렌은 내심 마음 한 곳에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미소 지으며 자신이 생각하는 미래를 그렸다.
신드리 남매가 가진 양질의 대장 기술과 일리아나의 뛰어난 개발 능력.
거기에 소네드의 상업 능력과 아칸더스가 끌어온 인력 그리고 순환교의 사도 자리에 따라온 종교 세력까지.
‘또 아카데미에서 이어질 인맥까지 합한다면….’
그 미래에는 지금처럼 단순한 개인과의 전투 같은 양상이 되지 않으리라.
“그럼, 잘 부탁하지.”
“저도 잘 부탁해요. 앞으로도.”
그들은 밝고 환하게 웃었다.
서로 다른 상상을 하고 있음은 모른 체(채).
* * *
아카데미가 위치한 도시 엘피스는 수상한 이들이 함부로 넘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일 년에 몇 번이고 일어나는 각종 사고와 습격, 그리고 첩자와 같은 것들도 이사장의 묵인이 있기에 가능한 것일 뿐.
진정으로 그녀의 눈을 피해 숨어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은 없었다.
이사장의 실력은 도시 안에서라면 짐승왕도 상대하기 꺼려질 정도로 하나의 준비된 전장에 준한다.
그런 그녀의 영역을 몰래 침입할 수 있는 건 누구라도 힘들었다.
그렇다면 같은 팔강의 실력자가 침입한다면 어떨까.
그 침입자가 은신과 암살의 영역에서는 그 누구보다 독보적으로 뛰어나다고 한다면, 과연 알아챌 수 있을까?
“…흐음, 여기 들어오는 건 오랜만이네.”
등대는 자기 밑을 비추지 않는다.
그늘과 어둠에 가장 가까운 여왕이 그 누구도 모르게 도시로 숨어들었다.
그건 그 누구도, 심지어 이사장마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이 자신의 존재를 알았기에, 잠시 쉬며 정보를 모으며 상처를 치료할 공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그녀가 점차 사라지려는 그때, 눈에 익은 움직임이 보였다.
“아칸더스, 저녁에 도착했으니, 오늘은 도착을 알리고 내일 만나는 것으로 하도록 하지요.”
“여독도 풀어야 하니, 그러도록 하는 게 났겠소. 소네드, 그럼 어디의 여관이 낫….”
“제 경험에 따르면….”
상인들의 무리로 보이는 곳에, 어설펐지만 주인의 목을 물려다 도망친 사냥개의 움직임이 보였다.
“…어머, 여기에 있었구나?”
그녀는 계획을 바꿨다.
자신의 사냥개를 먼저 찾아보기로.
혼자 행동하기보다는, 누구라도 밑에 있으면 훨씬 편하게 일을 행할 수 있을 테니.
저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다 보면 찾을 수 있으리라.
검은 그림자가 은밀하게, 그들의 근처로 녹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