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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가 빙의를 싫어함-95화 (95/212)

제95화

포악하기 짝이 없는 기세가 일대를 짓눌렀다.

가이온의 체격은 객관적으로 봐도 알렌보다 머리 두 개는 컸다. 하지만, 정말 고작 그의 눈높이가 그곳에 있는 게 맞을까? 그보다 더 위에 있지는 않은가?

혹시 그의 눈이 하늘에 달려 있지 않을까 하는 우스운 생각마저 들었다.

불과 얼마 전에 상대했던 고대의 괴물보다 더한 존재감.

사람의 모습을 한 괴물인가, 괴물의 모습을 한 사람인가.

알렌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그의 존재감이 시야를 가득 채우며 조금의 움직임마저 주저할 정도의 긴장감이 피부 끝을 타고 올라왔다.

「정신 차려요!」

베스틀라의 외침에 알렌이 눈을 강제로 질끈 감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다시 본 그의 모습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처음의 공방 이후로 그는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가이온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맺혔다.

“오, 벗어났네?”

그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생각보다 더 괜찮군. 단순히 알렌이 사용했다는 빛의 태양 때문에 불렀으나, 생각보다 자질이 더 괜찮았다.

“눈 감은 건, 뭐 처음이니 어쩔 수 없다 쳐도.”

짐승왕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아까 때렸던 주먹의 감촉을 상기하는 듯했다.

“담력이 꽤 괜찮아. 몸도 튼튼하고.”

알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을 하지 못했다는 게 맞았다. 그의 압박에 대항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

그러나 가이온은 그런 알렌의 상태를 개의치 않는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알렌의 감각이 곤두서며 그의 일거수일투족, 그 모든 것을 담았다.

“음, 그래. 원래는 대충 치고받고 한 수 재간이나 봐주려 했는데…,  안 되겠다.”

그가 걸음을 멈춰 섰다.

“오 분.”

시간이 모자라지는 않나? 짧게 고민해 봤던 가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 분을 버티면 어르신의 제자로 받아 주마.”

“……진심이십니까?”

“처음부터 그럴 목적이 아니었나?”

위압감에 간신히 적응해 가던 알렌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에게서 뭘 봤다고 벌써. 이렇게 되면 일리아나에게 접근한 의미가 있었나?

‘아니, 그렇기에 더욱 그녀를 치료해야 한다.’

연결 고리를 더욱 긴밀하게 엮을 수 있으니까.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경청하겠습니다.”

경청까지 할 정도야. 기분 좋다는 듯 웃음소리를 흘린 가이온이 말을 이었다.

“삼 년 후, 넌 무조건 어르신을 따라 한 가지 일을 해야겠다. 동의하나?”

그 말을 하는 가이온의 모습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입가와 눈에 서려 있던 미소까지 모두 사라진 상태. 그 물음에 오히려 알렌이 의심스러웠다.

“…그게 전부입니까?”

“그래 전부다. 더도 말도 덜도 말고 단 한 번이지. 뭘 고민하는 거냐?”

솔직히…, 고민까지 해야 할 정도의 일인가?

너무 후한 조건이다. 팔강의 제자가 된다. 그럼으로써 얻을 이득은 명확하다. 전력의 증강과 높아지는 명성, 율리우스의 성장세에 따라잡히지 않고 격차를 유지할 수 있다.

「안 돼요!」

잃는 건? 삼 년 후에 있을 일 하나만을 처리하면 된다.

그 고민은 그때가 돼서 해도 늦지 않다. 이미 그때 율리우스랑 한 판하고 있을지 누가 아나?

「당신은 내 제자예요. 당장 거절하라니까요? 지금 고민하는 거예요?」

그 일이 너무 어렵거나 위험했다면 자신과 함께하지도 않았을 터.

「물론, 저 남자가 생전의 저와 비슷 아니, 더 약하기는 해도 많은 걸 가르쳐 줄 수 있겠지만, …그건 저도 해 줄 수 있어요.」

알렌은 결정을 내렸다.

“하겠습니다.”

「알렌!」

베스틀라가 소리를 질렀다. 평소의 그녀의 가벼운 성정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진지한 음색.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나랑 상의도 하지 않고!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제가 가르친 사람을 누구 마음대로 제자로…!」

‘미안하다. 하지만… 너는 몸이 없지 않나.’ 그녀가 목소리가 뚝 끊겼다. 잠깐의 침묵이 찾아왔다. 알렌이 하는 말은 명확했다.

가르침의 한계.

알렌과 베스틀라는 종족이 달랐다. 거인과 인간. 그녀가 알렌에게 거인의 몸을 가졌다는 이유로 그에 맞는 기술을 가르쳐 줬지만, 근본적으로 이해하기는 힘들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녀에게 나날이 검술을 배울수록, 자신의 한계가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범재(凡才)와 천재(天才).

알렌은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가르침을 따라오지 못했다.

그것을 해결하려면 압도적인 시간의 훈련으로 체득하거나, 그걸 옆에서 풀어 줄 선생이 필요했다.

그러나 홀로 날아다니는 그녀의 모습은 함부로 보일 수 없었고, 정작 알렌도 해야 할 일이 수두룩했기에 검 하나에만 시간을 쏟지 못했다.

「…그래도, 그래도!」

그녀의 말에 알렌이 대답하려던 때, 가이온이 불쑥 끼어들었다.

“이야기는 아직도 안 끝났냐?”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무슨 말이기는.”

그는 손가락으로 알렌의 검을 가리키며

“그 검, 에고 소드가 아니냐.”

알렌이 뭐라 부정할 새도 없이 그는 다 안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여기까지 올라오면 어느 정도 다 트이게 되지. 보아하니 제자가 된다니까 에고 소드가 말리려는 게 아니냐?”

“……예.”

“뭐, 흔한 일이기는 하지. 자기가 가진 구닥다리 기술이 밀릴까 봐 그러는 거다.”

「뭐라고요? 이 늙은이가! 감히 거인족의 검을…!」

“자신의 기술에 더 우월하다면 괜히 빼겠느냐? 자신 있으면 허락했겠지.”

「그건….」

“진짜 스승이라면 신경도 안 썼을 거다. 아니면… 어르신에게 제자를 빼앗길까 봐 겁난다든지.”

물론, 어르신은 자신 있지만 말이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크게 웃었다.

「하! 그래, 마음대로 해요! 알렌! 당장 저 노친네의 기술이나 배워요! 진짜 어이가 없어서 뭐? 겁나? 당장 콧대를 눌러 줄 거라고요!」

베스틀라는 시끄럽게 발광하면서, 검 전체를 부르르 떨었다.

그것만으로 상황을 다 파악한 가이온은 짓궂게 웃으며 물었다.

“어때, 허락했겠지?”

“…예, 허락했습니다.”

“그럴 거다. 이미 몇 번이나 써먹었던 적이 있거든.”

“에고 소드에 대해 잘 아십니까?”

가이온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오는 아이들이 어떤 신분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밖에서라면 에고 소드라는게 희귀했겠지만, 이곳에서는 그렇지만도 않지. 물론… 그것 때문에 아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가이온은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 말끝을 흐렸다.

알렌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사정을 묻지 않았다. 그건 아직 뚜렷한 관계도 없는 알렌의 입장에서 선을 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눈치 챈 가이온이 씨익 웃었다.

“훌륭하군.”

그가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알렌과 거리를 벌렸다.

“거기서 선을 넘었다면, 그걸로 끝이었을 거다. 서로 간의 거리를 아는 것이 제일 중요하거든.”

그게 무인의 거리든, 마법사의 영역이든, 아니면 서로의 관계든.

짐승왕의 웃음소리가 짙어졌다. 인제 와서는 킬킬거리는 노인네 특유의 웃음소리까지 섞였다.

“삼 분으로 봐주마.”

별의 세례.

그로 인해 확장된 감지력이 작은 영역의 모든 정보를 흡수한다.

“모처럼 괜찮은 놈을 봤으니….”

한계까지 확장된 오감이 무의식적인 움직임을 강제했고, 모인 정보는 예측을 넘어 일시적인 예지의 영역에 이르렀다.

“최대한 버텨라.”

알렌은 대답하지 못했다. 가이온의 신형이 길게 늘어졌기 때문이다. 현재의 움직임과 미래의 예측이 뒤섞였다.

알렌은 뒤로 물러서기보다 간격을 좁혔다. 가이온의 속도와 힘은 전번의 공격으로 눈치 챘다. 상대가 봐주고 있다면, 차라리 모든 것을 보이는 게 옳다.

검이 우직하게 위에서 아래로 내려쳤다. 베스틀라의 가르침에 따른 기교 없는 일격. 하지만, 역동적인 근육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무시할 수 없다.

그에 대한 가이온의 대응은 간단했다.

“하하, 힘 싸움이라니, 좋구나!”

가이온의 대검을 연거푸 휘두르며 알렌의 공격을 막았다. 손자의 재롱이라도 받아 주는 듯 장난스러운 모습에 알렌의 얼굴이 굳었다.

그의 힘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알았다. 그러나 아무런 영향이 없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알렌의 대응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베스틀라는 강대한 힘 앞에 기교는 의미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틈을 노리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알렌의 그림자가 솟아오른다. 한 걸음마다 그림자가 밤의 어둠에 녹아들어 무수한 잔상을 만들었다.

그림자는 순식간에 알렌과 뒤섞이며 가이온의 눈을 어지럽혔다.

가이온은, 단 한 번 대검을 강하게 휘둘렀다.

파앙-

공기가 터져 나가며 그림자가 바람처럼 흩어졌다.

“이런 거 말고 다른 거 없느냐? 예를 들면, 전에 썼다는 빛의 태양이라든가.”

틈을 놀리려던 알렌의 움직임이 단번에 꿰뚫렸다. 그런 미래를 봤다. 정해진 예측에 알렌의 몸을 강제로 멈췄다.

알렌의 미간이 꿈틀거리며 그 자세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분노에 벼려진 검이 몸을 비튼 자세에서 기묘하게 떨어져 내렸다.

가이온은 알렌보다 한 박자나 늦게 대응했다. 그러나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눈이 트였나? 아니, 아니야. 편법이군. 그것도 나쁘지 않지.”

“큽…!”

배를 파고든 주먹에 알렌의 몸이 경련했다.

“실제보다 못하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내장을 다 울리는 충격에 알렌의 몸이 굽어졌다. 거기서 가이온이 몸을 걷어찼다. 알렌은 피하지 못했다.

쾅-

알렌의 몸이 땅에 물수제비뜨듯 두어 번 부딪치다 겨우 균형을 잡았다. 몸이 순간적으로 어지러웠다.

알렌이 다리에 힘이 풀릴 뻔한 것을 겨우 참아 내자, 가이온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자, 어떠냐. 좌우 몸의 균형을 흩트린 거다. 굉장하지 않느냐.”

고개를 드니 여유롭게 대검을 돌리며 가이온이 걸어왔다.

알렌은 이를 악물었다. 상대는 오러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차이가 난다고?

차이가 난다는 것도 알았고, 당연히 진다는 것도 알았다. 삼 분을 버티라는 말 역시, 자신이 제자로 받아 주기 위한 명분일 뿐이라는 것도.

‘그렇다고 해도.’

이 정도라고?

거인의 육체, 베스틀라의 검 모두를 사용했음에도 손끝 하나 닿지 못했다.

지금도 증폭된 오감과 감지력이 그의 움직임을 예측했다. 그러나, 알 수 없었다. 알렌은 지금 보고 있는 게 맞는지도 확신하지 못했다.

예측으로 보이는 미래의 그는, 알렌에게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그와 달리.

“왜, 잘 안 보여서 억울하냐?”

가이온은 알렌이 무엇 때문에 당황했는지 아는 듯 껄껄 웃어 댔다.

알렌은 망설임을 버렸다. 검만으로 상대한다는 말은 오만이었다. 그도 검사이기에 자신도, 적어도 그의 앞에서는 검만을 고집해야 한다고 착각했다.

그는 그저 버티라는 한마디만을 했음에도.

실타래가 풀려 나왔다. 마법을 사용할 시간은 없다. 수인을 맺으려 드는 순간 끝날 것이다.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하는 틈을 줄 전사는 없을 테니.

그러니, 틈만 만든다면.

‘한 번의 기회를 노린다.’

알렌이 달려들었다. 격돌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알렌의 검 전체가 붉게 물들었다. 속도를 보고 피할 수 없다, 힘에도 밀린다. 그렇다면?

‘뼈를 주고 살을 취한다.’

실타래가 흑녹색의 기다란 창이 되어 가이온에게 쏘아졌다. 그는 위협도 안 된다는 듯 제자리에서 몸만 비틀어 공격을 피해 냈다.

알렌이 몸을 낮추고 오른발을 대지에 깊숙하게 박아 넣었다. 사선으로 올려 친 검격. 전력을 다한 공격에 그의 대검이 살짝 떠올랐다.

그 사이를 두고 수십 개의 흑녹색 창이 파고들며 움직임을 제한했고, 알렌이 바짝 몸을 붙였다.

대검의 거리가 나오지 않는 영역.

그 안에 들어온 알렌을 보며 가이온은 어림도 없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크흐, 좋다. 좋아!”

가이온의 거구가 제자리에서 가속했다. 손목이 비틀리며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알렌이 고함을 내지르며 손목을 잡았다.

“아아아아!”

고통을 감내한다. 부여잡은 손에 믿기지 않는 거력이 실리며 일순간 가이온의 몸이 멈췄다.

용의 노심을 비운다.

마력이 모두 빨려 들어가며 검이 빛으로 뒤덮였다. 가이온이 몸을 반응할 새도 없이 빛이 동그랗게 뭉쳤다.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같이 가자고?”

빛의 태양이 폭발했다. 대답은 없었다. 알렌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조금의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의아함에 눈을 뜨자, 검붉은 빛이 알렌의 검을 감싸고 있었다.

빛의 태양은 그 아래에서 몸부림치다가 작게 사그라들었다.

“제정신 차렸으면 어르신에게서 떨어져라.”

알렌이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서자, 그가 그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마지막에 무모하기는 했어도 괜찮았다. 암, 실력이 안 되면 같이 죽을 각오 정도는 해야지.”

죽을 각오 정도는 아니었다. 그 정도의 공격은 버틸 수 있으리라 자신하기도 했고, 자신이 부상을 대가로 팔강에게 한 방 먹인다면 그걸로도 충분하다 생각했다.

「…그걸 보통 멍청하다고 하거든요? 진짜! 위험하게 뭐 하는 거예요!」

‘뭐라도 보여 줘야 하지 않겠나.’

「버티다가 정 안 되면 항복하면 되잖아요! 누가 반드시 이기라고 했어요?」

알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합격이다. 너는 오늘부터 이 어르신의 제자다.”

가이온만 만족스러운 듯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마지막의 공격을 떠올렸다.

‘순수한 빛과 태양이라는 속성. 이거라면 충분하겠어.’

자크니르와 같은 신성이 섞여서도 안 되고, 이사장, 그녀나 그녀의 제자 마리아와 같은 인공적인 힘이어서도 안 된다.

‘적합자는 찾았다.’

그의 가늘게 뜬 눈이 하늘에 반달을 그리는 달에 닿았다.

알렌은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던 한밤의 산책이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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