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귀족은 하나의 일을 행함에 앞서 여러 가지를 고려한다.
당장의 이득과 행동함으로써 얻을 결과, 그로 인한 영향과 미래에 어떤 결과로 찾아올지까지.
그 모든 것을 어릴 적부터 생각할 수 있도록 교육하며, 일상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도록 훈련받는다.
이것이 귀족의 제왕학이다.
세대가 지날수록 평민과 귀족의 격차를 벌리며, 어떤 후계자든 완숙의 나이로 접어들었을 때 가주의 역할을 맡을 수 있도록 만드는 원동력.
점차 기술이 발전하며 시대가 변함에 있어 평민들의 중요도가 높아지고 좀 더 다른 일에 쓰일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 목소리를 높일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알렌도 라인하르트 가문의 후계자로서 제왕학을 교육받았다.
그렇기에 항상 한 가지 일을 계획해 둠에 있어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건 2회차, 회귀를 한 직후부터 그 경향은 심해졌다.
몇 달 후 벌어질 일, 몇 년 후 이뤄질 일.
하루, 몇 주 단위가 아닌 몇 월, 몇 년 단위로 계획을 세우며 현재가 아닌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
알렌은 아카데미에 오는 것을 계획한 시점부터 그 이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까지 율리우스와 격차가 그리 크지 않았다. 오히려 알렌이 확실한 우위를 점하는 수준이지.
하지만 몇 년이 더 지난다면?
‘밀린다.’
그건 확언할 수 있었다.
알렌은 자신의 재능을 잘 알았다. 마법 하나에만 몰두해 수명, 끝에는 제물까지 바치며 얻은 결과가 여덟 개의 고리다.
그것도 한쪽에만 기형적으로 치우쳐진 반쪽짜리도 못 되는 8위계.
하나 혹은 두 개 아래의 위계에도 정면 승부를 한다면 장담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미 한 번 재능의 한계까지, 아니 한계를 넘어서 몸부림쳐 봤기에 알았다.
반면 율리우스는?
‘끝없이 성장한다.’
이번에 던전 실습에서도 그랬다.
상정하지도 못한 별의 성흔이라는 능력을 얻고 날뛰었다.
알렌은 놈의 성장을 막고자 최대한 보상을 빼앗고, 베스틀라를 비롯한 각종 기연을 빼앗아 용의 노심과 거인의 신체를 얻었다.
지금도 전력을 다한다면 7위계에 도달한 지 얼마 안 되는 이들까지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7위계라면?’
어떻게든 가까이 접근한다면 승률은 반반, 접근하지 못했을 때는 무승부를 노리는 게 최선이다.
7위계부터는 진정한 초인의 영역에 들어가게 되니까.
그건 한낱 생물로서 태어나 그 생명체 본연의 한계를 깨트리는 자들의 세상이다.
같은 7위계의 능력을 갖추지 못하는 한 그 세상에 발을 들이미는 것은 힘들었다.
물론 미래는 모른다.
거인의 신체가 지금보다 더 성장할 수도 있고, 베스틀라가 가르쳐 주는 요툰스베르드의 후반 비기(?技)가 얼마나 강할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알렌은 만약을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진정한 목적은 율리우스를 죽이는 것과 더불어 진짜 율리우스의 영혼을 찾아내는 데 있었으니까.
후자가 진척을 보이지 않는 만큼, 그 시간을 벌기 위해 율리우스와의 격차를 벌려 놔야 했다.
그래서 영지에 있을 때부터 계획한 것이, 이것이었다.
‘린벨을 짐승왕의 손녀와 친분을 쌓게 한다.’
그녀는 과거의 사건 때문에 허약한 상태인데다가, 오러와 마력 모두 소질이 없다.
그런 그녀에게 린벨을 접근시켜 친분을 다져 두고, 순환교와 접촉해 그들의 능력을 이용해 그녀의 체질을 치료해 준다면?
그렇게 짐승왕과 연이 맺어져도 좋지만, 더 나아가 제자가 된다면 제일 좋은 결과였다.
그와 동시에 순환교의 사도 자격을 획득해 그들의 세력을 일부 손에 넣는다.
‘성공한다면 격차를 더 벌리고 그만큼의 시간을 더 벌 수 있다. 하지만 실패한다면… 적이 더 늘어난다.’
그렇기에 도박이었다.
일리아나는 린벨이 알렌의 머리 손질을 끝마치고, 다과를 내올 때까지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따로 할 말이 있나?”
“아니요, 그냥 궁금해서 말이에요.”
한동안 관찰하는 듯한 시선으로 알렌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린벨을 저에게 보낸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어서요.”
덜컥-
그 소리에 차를 준비하던 린벨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놀란 표정을 짓다 곧바로 되돌렸지만, 이미 그 반응만으로 일리아나는 자신의 말이 옳음을 알 수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알렌은 린벨과 달리 그녀의 말에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가 알아챌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안 들킨다면 좋겠지만, 들켜도 상관없다.
애초에 린벨의 덤벙대는 성격을 알고 있기에 절대 들키지 않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간단해요. 이득이 없거든요.”
“이득이 없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나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첫 번째로 당신은 아니, 공자는….”
“편하게 부르게.”
“공자는 저를 짐승왕의 손녀인 걸 알고 린벨을 접근시켰을 거예요. 틀렸나요?”
알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그를 제외하고도 부회장을 비롯한 진짜 고위 세력들은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불쾌했다면 미안하군.”
“아니, 별로 불쾌하지는 않아요.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기도 하고, …같이 있으면서 나름 친하게 지냈거든요.”
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 슬쩍 린벨을 보았다. 린벨은 표정을 들킨 후로 알렌의 눈치를 살피고 있느라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의외로 진짜 친해졌나.’
이건 그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왜 이득이 아니라는 거지?”
“할아버지, 아니 짐승왕은 저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진한 자조의 기색이 여려 있었다.
“수인과 인간의 혼혈, 그런 주제에 마력과 오러 모두 자질이 없고 신체 능력도 좋지 못한 반쪽짜리. 거기에 정반대의 사상을 가지고 있기까지.”
그녀는 금방 표정을 되돌리며 설명을 계속했다.
“짐승왕은 저와 가까이 지낸다고 해서 부탁을 들어줄 사람이 아니에요. 오히려 무엇을 하고 지내든 아무런 관심도 없을 걸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에는 무언가에 대한 미약한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수인 연합 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더니, 가족끼리도 마찬가지인가.’
아니면 기대받지 못하는 처지에 대한 반발인가.
한쪽은 전통적인 가치를 지키며 초원의 삶을 살자는 쪽이며, 반대는 이제는 변화의 물결에 따라 도구를 쓰며 발전하자는 쪽.
보통 후자를 따르는 이들은 오러를 사용하거나 강한 힘을 가진 이들이 아닌 약자들이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저에게 상해를 입히는 것도 불가능하죠. 저를 인질로 잡으려 했다가 박살 난 가문도 있는 거 알아요?”
일리아나는 그 때문에 그나마 접근하는 이들도 완전히 사라졌다며 조소했다.
“그러니까 공자가 저에게 아니, 짐승왕에게 원하는 게 있다고 해서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접는 게 좋아요.”
일리아나는 그 말을 끝으로 목이 타는 듯 찻잔을 들었다. 알렌은 그녀가 충분히 갈증을 해결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그건 상관없다. 나는 공녀에게 관심이 있거든.”
공녀라 공녀…, 그녀는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라 생각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저요?”
“그래.”
그녀는 그 말의 진의를 살피듯 쳐다보다가 툭 내뱉었다.
“저한테 이성적인 관심이 있어요?”
“아니.”
“장난이 아닌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난 약혼자가 있다.”
“그건 알고 있어요.”
그녀는 이상한 것을 보는 듯한 눈으로 생각에 잠기더니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서 접근했고, 관계를 맺는 것이 요원해지니까 이제는 나에게 관심이 생겼다? 근데 또 이성적인 관심은 없고?”
“아니, 처음부터 짐승왕보다는 너에게 관심이 더 있었다. 정확히는 공학자로서의 네 재능에.”
알렌의 말에도 일리아나는 미심쩍은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흠…, 그게 더 이상한데요. 결국, 짐승왕의 관심을 받지 못할 걸 아는데도 저에게 접근한다고요? 저의 공학적 재능 때문에?”
그녀는 입가에 옅은 비웃음을 드러내며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저와의 결혼을 통해 할아버지와 인척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라는 게 더 그럴듯해 보이는걸요?”
알렌의 체면을 생각하지도 않는 무례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도발적인 말에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녀가 일부러 알렌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한 말임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알렌은 한 치의 변화 없이 그녀를 마주 봤다.
“그건 어떨지 모르겠군. 정말 짐승왕께서 너에게 관심이 없을까?”
“장담할 수 있을걸요?”
“글쎄, 그건 모르지. 아무리 관심이 없다고 한들, 손녀의 체질을 치료해 줬다면 반응이 없지는 않을텐데?”
“…네?”
알렌은 이 말을 듣고 있을 누군가에게도 들으라는 듯 입을 열었다.
“하나뿐인 손녀의 몸이 치료됐는데도 가만히 있을지는 모르겠군.”
알렌의 말을 이해했는지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며 그녀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각설탕을 옮기던 집게에서도 힘이 빠졌다.
알렌은 떨어지던 각설탕을 마력의 실타래로 잡아채 그녀의 찻잔에 넣어 주었다.
퐁당-
노란 동공에 여유롭게 미소 짓는 자신의 얼굴이 반사되었다.
“그럼 다시 한 번 물어보지.”
알렌은 그녀의 경악 어린 표정을 천천히 음미하며 입을 열었다.
“정말 장담할 수 있나?”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걸로 대답이 되었다.
* * *
알렌은 늦은 시간이라며 다음에 약속을 잡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린벨과 일리아나 각자 다른 이유로 떠나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알렌도 어쩔 수 없었다.
「…알렌 진짜 나가려는 거 아니죠?」
‘직접 도발했는데 나가지 않을 수야 있나.’ 알렌은 베스틀라를 허리춤에 메고 겉옷을 챙겼다.
일리아나가 들어왔을 때부터 느껴지던 존재감은, 그녀가 방을 나가고 나서도 사라지지 않고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난폭하군.’
역시 짐승왕답다고 해야 하나.
차라리 부르면 편했을 것을, 이런 식으로 불러내다니.
알렌은 기숙사를 빠져나와 그를 이끄는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는….”
그렇게 해서 도착한 장소는 우연하게도 낮에도 들렀던 공원묘지였다. 잠시 발을 멈칫한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흑색으로 변한 하늘에는 전에 보았던 것과 같은 광경은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언제나처럼 별빛이 반짝일 뿐.
평소와 같은 모습에도 누군가의 시선을 잡아끌 만큼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알렌은 그러한 광경에 집중할 수 없었다.
공원묘지의 중앙, 은하수의 아래.
밤하늘보다 더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남자가 눈길을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알렌이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무렵, 그가 입을 열었다.
“재밌는 말을 하더군.”
광폭한 노란 동공이 알렌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듣고 있는 걸 알면서도 말이야.”
그에게서 지독할 정도로 술 냄새가 나오고 있음에도 알렌은 전혀 방심할 수 없었다.
그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세계에서 단 여덟 명밖에 없는 팔강의 자리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이자, 일신의 무력 하나만으로 산을 부수고 나라를 상대하는 것이 가능한 존재.
물리적인 것을 넘어 개념적인 영역에까지 도달하는 살아 있는 신화.
짐승왕 가이온.
그가 알렌을 불러낸 존재이자, 일리아나와의 대화를 엿듣던 존재였다.
“짐승왕의 마음을 어지럽힐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심려를 끼쳐 드려….”
“아니, 그딴 건 됐다. 그보다 자신 있나?”
그는 다짜고짜 손을 저으며 알렌의 말을 끊었다.
그가 무엇을 물어보는지 알았으나 알렌은 쉽게 대답하기 힘들었다. 무슨 일이든 십 할의 확률로 장담할 수는 없는 법이다.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런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짐승왕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난폭하게 스며드는 살기도 함께였다.
가이온의 얼굴이 사납게 변했다.
「알렌, 이건 제가 도와줘도 못 이겨요.」
그와 마주쳤을 때부터 침묵하던 베스틀라가 단언했다.
알렌은 즉시 판단을 내렸다.
“예. 자신 있습니다.”
“그럼 됐다. 나중에 실패하면 다시금 보면 될 일이지. 지금 이야기할 계제는 아니다.”
그 말과 동시에 알렌을 압박하던 존재감이 가라앉았다. 가이온의 안색도 언제 사나웠냐는 듯 평온하게 변했다.
알렌은 그가 일부러 그렇게 행동했음을 알게 되었다.
‘술 냄새를 풍긴 것도 일부러인가? 아니면 진짜 취미일까.’
알렌은 세간에 도는 그의 소문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지금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검.”
“예?”
가이온은 두 번 묻지 말라는 듯 허리춤을 두들겼다.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검을 들어라, 실력이나 한번 보자.”
“아니 그게 무슨….”
알렌은 입을 열려 했지만 가이온의 행동이 더 빨랐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목소리가 들렸다.
“참고로 오 분 이상 버티지 못한다면, 만남은 그걸로 끝이다.”
순간적으로 섬찟한 감각이 경종을 울렸다. 검을 뽑을 새도 없이 옆구리에 팔을 둘렀다.
쾅-
알렌의 몸이 몇 걸음이나 밀려 섰다.
거인의 신체를 가진 후 오랜만에 느껴 보는 고통에 알렌의 눈에 경악이 실렸다.
“흠, 생각보다 단단한데? 그렇다면….”
알렌은 이를 악물고 검을 뽑았다. 그에게 따질 시간 따위는 없었다.
무슨 할 말이 있든 우선 눈앞의 전투가 먼저였다.
“좀 더 강하게 다시.”
콰앙-
의식이 잠시 날아갔다.
몸을 돌볼 새도 없이 본능적으로 어깨를 비틀었다. 어깨에 주먹이 스치며 몸이 빙그레 돌며 충격량을 해소했다.
“반응 속도도 꽤 괜찮군.”
다시 공격이 날아들었다.
이런 몸을 가지게 된 후, 처음으로 맞이한 진정한 위기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