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사건의 뒷정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짐승왕 가이온의 등장에 따라 현장은 빠르게 수습되었고, 교수들도 자크니르가 직접 구출해 왔다.
그들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해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다행히도 죽은 사람은 없었다.
교수진들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아카데미에 구원 요청을 했다.
아카데미에서도 발 빠르게 이번 사건에 대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카데미에서 의료진들이 대거 공간 이동을 통해 이동해 왔고, 엘릭서를 비롯한 귀한 물약을 아낌없이 지원했다.
그렇게 해서 총 집계된 사상자는 72명.
그중에 사망한 사람은 23명이었다.
초대형 유적에 실습을 왔던 141명 중 반절이 넘는 사상자에 놀랄 만도 했으나, 죽은 괴물의 시체의 크기에 다들 수긍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귀족 가문들은 이번 사태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번 사건에 대해 제대로 된 해명을 해야 할 겁니다!”
“아무리 사상자가 생기는 게 일상이라지만, 이건 심했지 않소?”
원칙적으로 아카데미에 들어올 때, 각종 안전사고와 뜻밖의 우연으로 인해 사상자가 발생할 수 있음을 명시해 두고 있다.
하지만 던전 실습 전 유적의 난이도와 각종 위험을 조사하는 건 아카데미의 몫이다.
그들은 이번 사태가 아카데미의 책임이라며 제대로 된 답변을 요구했다.
그러한 거센 반발에 대한 아카데미의 응답은 간단했다.
“이번 사건은 저희 아카데미에서도 충분히 책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비밀리에 이번 사태를 조사해 본 결과, 사건의 진범은 따로 있었습니다.”
아카데미에서 지목한 범인은 하늘의 방패, 자크니르의 전 가문이었다.
“자크니르 님의 협조를 통해 알아낸 사실에 따르면, 그들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자크니르 님을 손에 넣고자 전 팔강이었던 그늘진 여왕을 끌어들였으며 수많은 성유물을 사용해 교수들을 공간과 격리시켰다는 정황적 증거를 확보….”
아카데미에서 발표한 소식에 작은 이권이나 얻어 볼까 찔러봤던 귀족들을 기함하게 만들었다.
“뭐? 그늘진 여왕이 되돌아왔다고?”
“미치겠군. 부상을 입고 은퇴한 줄 알았더니….”
“…이러다 노려지는 거 아니오?”
그늘진 여왕.
삼 년 전까지 음지의 여왕으로 군림하며 수많은 이들을 벌벌 떨게 만들던 인물.
그녀의 복귀 소식은 아카데미 학생의 죽음 따위는 작은 일로 치부될 정도로 소란스러움을 자아냈다.
그렇게 학생들의 죽음으로부터 시야가 멀어졌을 때, 아카데미가 다시 한 번 충격적인 소식을 발표했다.
“그들이 부린 행패에 저희 아카데미는 이 일을 잊지 않을 것이며, 하늘의 방패 자크니르 님께서 그들을 직접 징치하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카데미는 자크니르 님을 도울 것이며, 어떠한 형태의 이득도 얻지 않을 것이라 확언….”
팔강이 직접 나서 그들을 징치하겠다는 것.
다시 말해 완전히 쓸어버리겠다고 선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평소 이와 같은 일이 발생했다면 제국 혹은 다른 팔강이 끼어들어 중재했겠지만, 이번엔 그들이 벌인 짓이 너무 컸기에 나서는 이도 없었다.
또, 망국의 왕가라고 해도 왕가.
내심 그들을 분란 요소로 바라봤던 이들도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자크니르의 전 가문은 사흘도 되지 않아 자신들이 만든 최고의 작품과 마주했고, 한나절도 되지 않아 전투가 끝났다. 전투랄 것도 없었다.
그의 선포대로 그들은 징치되었을 뿐.
그들이 가졌던 이권은 죽은 학생들의 가문에게로 돌아갔고, 평민인 학생들에게는 그 부모에게 만족할 만한 액수가 전달되었다.
남은 가문원들은 자크니르의 손에 모두 처형되었다.
“또한, 제대로 된 조사를 끝마치지 못한 조사대의 단장은 서클을 부순 뒤 지하 감옥에 수감할 예정이며, 남은 조사대의 단원들은 그 자리를 경질하고, 그동안 누렸던 권리를 박탈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아카데미에서 공표한 내용에 대해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한 번의 조사로 유적의 모든 것을 살피지 못 한 건 어찌 보면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건은, 그들의 처벌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학생들의 죽음이란, 그 정도 가치에 불과했다.
다른 신입생들은 몇 주간 임시로 휴식기를 가지게 되었다.
대마법을 사용한 영향으로 교수들이 도저히 수업을 진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훌륭한 학생이었으며, 아카데미에 어울리는 재기 넘치는 인재상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하며, 언제나 먼저 떠난 그들을 잊지 않겠….”
죽은 학생은 아카데미 내부에 위치한 공원처럼 조성된 묘지에 묻혔다.
아카데미 학생이 누릴 수 있는 혜택 중 하나였다.
초대형 유적이 아닌 다른 유적으로 실습을 떠났던 학생들은 자신들이 그곳에 가지 않은 사실에 안도했고, 죽은 학생의 친구들은 슬픔에 빠졌다.
알렌은 그들의 무덤을 한동안 쳐다보다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없었다.
발 닿는 곳이라면 걸음을 옮길 뿐.
그렇게 걸음을 옮기다 문득, 공원의 한구석에 눈길이 닿았다.
길게 늘어진 상아색 머리카락.
레이첼이 공원 구석에 쭈그려 앉아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렌도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뭘 하나.”
그녀의 곁에 알렌도 같이 앉았다. 레이첼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우울한 일이 있어서 여기 있어요.”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에는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우울하면 여기 있는 것보다 다른 곳에 있는 게 더 낫지 않나?”
“우울할 때는 웃긴 것을 보며 기분을 푸는 것보다, 그냥 더 우울해지고 싶거든요. 당신은 어때요?”
그녀의 고요한 하늘색 눈동자가 그를 비췄다.
“당신 상태도 별로 안 좋았잖아요. 지금은 괜찮아요?”
“…나는, 그래. 지금도 그렇게 좋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그러면….”
“하지만.”
알렌은 자신에게 다짐하듯 고개를 저었다.
“나는 괜찮다.”
“알렌, 당신 탓이 아니에요. 그냥 운이 안 좋은 사고였잖아요. 갑작스러운 공간 이동으로….”
“나도 안다. 나도, 알고 있단 말이다.”
그 사고가 자신 때문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그렇다고 쉽게 잊을 수는 없는 일이지 않으냐.”
“…그건 그렇죠.”
그녀는 그 감정까지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듯 풀죽은 얼굴로 그의 몸에 기댔다.
“그래도, 이겨 낼 수 있겠죠? 당신이니까.”
그녀가 달래는 듯한 어조로 그를 올려다봤다. 하늘색 눈에는 그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알렌은 괜한 걱정이라는 듯 작게 웃으며 평소처럼 대답했다.
“그래, 얼마 걸리지 않을 거다. 그럼 난 일이 있으니….”
레이첼은 일어나는 그의 흐트러진 옷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번 주말에 만나요. 북문에서.”
“그래.”
알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겨 낼 수 있나?’
잊을 수는 있고?
알렌은 냉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느 것도 쉽게 그러기는 힘들었다.
그럴 수도 없었고.
뒤돌아 걷는 그의 마음에 다시금 불길이 더해졌다. 불꽃은 전보다 더 크게 타올랐다.
* * *
쏴아아-
머리 위에서 뜨거운 물이 머릿결을 적시며 몸을 씻겨 냈다. 알렌은 우두커니 물을 맞으며 감정을 정리했다.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거운 물을 맞으며 생각에 잠기는 것은 그의 오랜 버릇 중의 하나였다.
피부의 결을 타고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알렌은 아카데미에서 지금까지 했던 행동을 되돌아보았다.
검은 책을 통해 벤자민과 율리우스의 대련을 알아채고, 그를 이용해 미래에 율리우스와 적이 될 2황자와 관계를 다졌다.
회귀 전에는 폐인으로 끝났을 벤자민을 치료해 줬고, 연금 마탑에 엘릭서의 제조법을 팔아 자금을 마련했다.
입학하기 전부터 카트린느를 통해 힘겨운 삶을 살았을 신드리 남매를 지원했고, 그들을 통해 순환교와 은밀하게 접촉했다.
아카데미의 대도서관에 가지 않는 날이 드물었고, 이넬리아를 통해 소규모의 경매마저 놓치지 않았다.
‘내가 했던 행동들이 부족했나?’
부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족했다.
알렌은 자신의 자리에서 대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 증거로 아칸더스와 카릭은 이제 조직의 정비를 끝마치고 며칠 내로 엘피스에 도착해 활동을 개시할 것이고, 린벨에게 맡겨 놨던 일도 해결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알렌이 한 행동으로는 미래의 율리우스를 상대로 철저할 뿐이었다. 현재의 그를 상정하지 않았다.
‘그럼? 현재 율리우스의 행동을 막아서 뭘 할 수 있다고. 지금 막는다고 진짜 율리우스가 돌아오나?’
아니었다.
자신이 노리는 것도 율리우스에게 당해 복수심을 가진 이들을 모으려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피해자들이 생기는 것을 감수하자고, 키메라 술사의 공방에서 다짐했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손이 닿는 곳에 있는 이들이라면 벤자민처럼 외면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애초에 율리우스를 되찾기 위해서는 뭐든지 하겠다고 결의하지 않았었나?
끼익-
수도꼭지가 돌아가며 물의 온도가 높아졌다.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다만, 너무 가까워진 게 문제였다.
‘그래, 율리우스가 그들을 죽인 게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너무 그들과 가까워진 게 문제다.
가족이나 부하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동등한 관계였기에 정을 주고 말았다. 너무 깊이 빠져들고 말았다.
한순간의 일탈이라고 느낄 만큼.
율리우스의 손에 모르는 이가 죽었다고 해서 알렌이 이처럼 동요했을까?
지금과 같은 분노를 느꼈을까?
‘아니지. 냉정하게 오히려 살아남은 생존자에게 접촉해 끌어들였겠지.’
어차피 놈은 과거에도, 지금도 행동이 바뀐 적이 없었다. 놈의 곁에 죽은 이들이 산처럼 많다는 건 회귀하기 전에도 알던 사실이 아니었나.
이런 광경은 문서로 수도 없이 접했다.
단지, 직접 느끼고 경험해 본 것이 처음이었을 뿐이다.
끼익-
수도꼭지를 비틀었다. 전보다 더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그래, 이건 기회로 활용할 수도 있다.’
율리우스에게 복수심을 가진 이들을 끌어들일 때, 그들을 공감시킬 수 있고 같은 경험을 공유했다는 동질감을 심어 줄 수도 있다.
끼익-
수도꼭지를 다시 비틀었다. 거인의 육체는 이 정도의 온도로 화상을 입지 않는다.
‘애초에 한 달 남짓 함께할 사이일 뿐이잖나.’
오히려 한 달의 시간을 통해 다른 이들을 끌어들일 명분을 얻었다면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앞으로 다시 조심하면 될 뿐이다.
다시는 이번과 같은 사태가 생기지 않도록.
철저하게.
끼익-
판돈의 크기가 더 커졌다. 그렇다면 이제 와서 물릴 수 있나? 아니면 새 게임을 하자고?
‘그럴 수 없지.’
이미 용의 등에 탄 신세다.
결말은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어느 누가 그렇듯 용에게 잡아먹히던지, 아니면 용을 길들여 용기사가 되던지.
“…자님!”
끼익-
시야가 흐려졌다. 아무래도 너무 더운 공간에 있는 영향인 것 같았다.
“…렌 공자님!”
끼익-
그래도 오늘은 더 온도를 높이고 싶었다. 그러나 시설 문제인지 오늘따라 온도가 너무 낮게 올랐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덜컥-
“알렌 공자님!”
욕실 문이 덜컥 열리며 흑발이 찰랑거렸다. 백단향이 가까워지며 자색 눈이 알렌의 눈과 마주 봤다.
“…린벨? 갑자기 왜….”
“세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으시길래 걱정이 되어서요. 근데 왜 이리 온도가… 앗, 뜨거라!”
그녀는 급히 몸을 움직여 수도꼭지를 반대로 돌렸다.
수도꼭지는 작은 소리 하나 없이 매끈하게 돌아갔다.
그녀는 그 후에 익숙한 듯 커다란 수건을 가져와 그의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알렌도 처음엔 놀랐지만, 익숙하게 그녀의 시중을 받았다.
옷까지 모두 갈아입은 알렌은 그제야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무슨 일이지?”
그녀는 근 세 달간 알렌이 시킨 일을 처리하느라 거의 보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가까운 시일 내로 몇 달 전부터 계획했던 일을 실행하기 위해 부를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헤헤. 공자님이 걱정되기도 했고, 엄마가 경매 일정 때문에 못 온다고 대신 가라고 해서요.”
그녀가 잘못을 숨기고 싶은 아이처럼 어설프게 웃으며 그의 머리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흠…, 뭐 때가 됐으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가 잘못을 언급하지 않자, 그녀는 환한 표정으로 가위를 천천히 움직였다.
“제가 없는 사이에 길게 자라셨네요. 공자님은 여기까지 맞죠?”
“그래, 거기까지면 충분하다.”
“공자님에 대한 건 저도 다 알고 있거든요~”
그녀가 우쭐한 얼굴로 머리를 손질했다. 그녀는 몇 달간 만나지 못했음에도 실력이 더 능숙해져 있었다.
“실력이 더 늘어난 것 같은데, 따로 연습했나?”
“네! 곁에 너무 지저분하게 사는… 아.”
그녀는 말하다 무언가 생각난 듯 잠시 굳었다. 그리고 다시 손을 움직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자님께 제가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게 누구… 설마.”
알렌의 짐작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문을 향해 소리쳤다.
“저도 까먹고 있었으니 곧바로 부를게요! 일리아나!”
그녀의 말이 끝나자 기숙사의 문이 열리며 한 소녀가 보였다.
쫑긋거리는 세모 귀와 입술 밖으로 드러나는 송곳니, 다소 창백한 인상의 잿빛 머리 소녀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공학부 소속 일리아나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