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유적 입구에서부터 수 킬로미터는 떨어진 대사막의 작은 협곡.
수십 년 전에도, 수백 년 전에도 변화 없이 정체되어 버린 그곳에 작은 진동이 일었다.
쾅-
그 직후 지면이 박살나며 두 개의 인영이 뒤섞였다.
“이제 그만 죽어 주련-?”
비욘나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모래가 흩날리며 유적의 돌조각이 뿌려지는 가운데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자크니르의 몸이 찬란한 광휘로 뒤덮이며 그림자를 밀어냈다.
길게 늘어진 빛 위에서 먹물처럼 발밑이 물들며 인영이 솟아났다.
“아가, 3년 전과 달리 실력이 많이 약해졌네?”
“당신도 전과 그리 달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자크니르는 홱 몸을 비틀었다. 그가 펼친 광구의 벽을 뚫고 칼날 하나가 튀어나왔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스릉-
섬뜩한 칼날이 그의 뺨을 스쳐 지났다.
턱 아래의 그림자서부터 솟아난 칼날에 핏방울이 대롱거렸다.
자크니르는 가까스로 턱을 비틀어 공격을 피해 내고는 전방위로 수천 개의 광구를 흩뿌렸다.
파앙-
공기가 터져 나가며 반경 안에 있던 모든 것이 가루가 되었다. 비욘나는 어느 순간 사라지더니 절벽의 그늘 아래에서 여유롭게 걸어 나왔다.
“아가, 나 여기 있단다. 어디를 노리는 거니?”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자크니르는 입술을 깨물고 그녀를 노려봤다.
또다, 또 저 공격이었다.
자신의 방어를 꿰뚫은 수단이.
하늘의 방패.
물리적이든, 마법적이든, 심지어 정신적인 종류의 공격이든, 어떤 종류의 공격이든 막아 낼 수 있기에 그렇게 불리는 것이다.
“……주변에 모기가 자꾸 달라붙어서 말입니다.”
“어머, 그러니? 그럼 내가 도와줄까?”
그런데 그녀의 공격은 달랐다.
“아뇨, 필요 없습니다. 일은 스스로 처리하는 성격인지라.”
그림자만 있다면 그림자의 크기가 얼마나 작든지 간에 그곳에서 칼날이 솟아 왔다.
공간과 거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그림자의 칼날.
그 공격은 어디서 들어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도 겨우 반응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가 시종일관 굳은 얼굴로 답하자, 그녀는 사뿐사뿐 우아한 걸음으로 주위를 걸었다.
“왜 그런 표정이니? 누가 보면 내가 괴롭히는 줄 알겠다, 얘.”
비욘나의 눈꼬리가 보기 좋게 휘었다. 그녀의 태도에는 승자의 여유가 한껏 묻어 나왔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들이 전투를 벌이는 동안 시종일관 그녀가 우세를 점했으니까.
자크니르는 방어의 대가였기에 지금껏 버텼지만, 그 기다림이 승리로 이어질 가능성은 적었다.
“…그럼 아니라고 말씀하실 셈입니까?”
“내가? 설마.”
그녀는 잘못 들었다는 듯 과장스럽게 입을 가리더니, 정말 무고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잠시 오해가 있던 게 아닐까?”
그 가증스러운 태도에 자크니르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당신과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나는 데 아니라고 말씀하실 생각입니까.”
“음? 기껏해야 한 두 살 차이 아니니?”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팔강의 자리에 자리한 게 수십 년이다. 음지의 여왕으로 군림한 게 얼마인데 저런 태도를 보이는지.
“그런 말을 직접 하면 부끄럽지 않습니까?”
“부끄럽기는, 이렇게 젊은 몸을 되찾-.”
“─할망구가 지랄을 하는군.”
순간적으로 솜털이 곤두섰다. 비욘나의 웃음이 사라졌다.
그녀의 몸이 그림자로 녹아들었다.
쿠드득-
커다란 대검이 검붉은 오러를 머금고 공간을 깨부쉈다. 그녀가 있던 자리가 순식간에 박살나며 작은 구덩이가 생겼다.
그러나 그녀가 한발 늦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나타난 비욘나의 어깨 등위로 짐승이 물어뜯은 듯한 거친 상처가 생겼다.
“짐승왕!”
그녀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해 협곡의 위를 올려다보았다.
협곡 위로는 거대한 체구의 인영이 밤하늘을 등지고 서 있었다. 가이온의 얼굴에 진한 경멸이 여렸다.
그는 협곡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대검의 옆으로 작은 모래바람이 흩어지며 하얗게 센 귀가 드러났다.
“할망구, 정신이 나갔나? 그 나이 처먹고 그러고 싶나? 노망이 들어 가지고… 쯧.”
짐승왕 가이온.
그는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으로 대검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그의 등장에 자크니르의 눈이 크게 변했다.
“당신이 어떻게….”
“애송아, 노망난 할망구한테 밀리기나 하고 참 잘하는 짓이다.”
자크니르는 그의 비아냥에 얼굴이 붉게 변했다. 그러나 억울한 마음도 있었다. 그녀가 3년 만에 복수심을 품고 나타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잠시 방심했을 뿐입니다. 다시 한 번 붙는다면 결과는 다를….”
“그걸 실력이라고 한다.”
가이온이 말을 잘랐지만, 자크니르는 그의 말이 사실이었기에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단단해진 눈으로 다음에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하리라 다짐할 뿐.
“짐승왕, 어떻게 여기에 왔지? 내 움직임이 들켰을 리가 없을 텐….”
그녀는 무언가를 알아냈는지 순식간에 표정이 변해 그림자로 변한 칼날을 근처 바위에 던졌다.
바위가 깔끔하게 두 쪽으로 깨지며 그 안에서 작은 늑대 환영이 나타났다.
“…추적 마법?”
그녀의 혼잣말에 가이온이 시원하게 웃으며 답했다.
“대마법이다. 이름은 늑대의 몰이사냥이지. 어때, 잘 지었지 않나? 이 어르신이 직접 이름 붙였지.”
가이온이 으스대는 얼굴로 입을 열자, 그녀는 지하 밑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교수들 먼저 처리하는 건데.”
괜히 아카데미의 보복을 신경 쓴다고, 봉인만 해 두자는 의견에 동의한 게 문제였다.
자크니르 같은 놈들.
같은 가문 원들 아니랄까 봐 처음부터 끝까지 맘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그래서 할망구 인사는 됐으니, 끝까지 해 보기나 하자고. 오랜만인데.”
가이온의 입 안에서 날카로운 이빨이 흉악한 모습을 드러냈다.
“…….”
그녀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변했다. 언제든 감정을 조절해야 하는 게 암살자다. 그 정점에 서 있는 그녀에게 가이온의 도발은 하찮았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상황을 가늠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 물러나기는 아까운데….’
적어도 중상, 좀 더 바란다면 치명상.
죽이는 게 힘들다면 자크니르에게 자신이 받은 굴욕 정도는 주고 싶었다. 그러나 가이온을 뚫고 부상을 입힐 수 있을까?
‘목숨을 건다면 팔 하나. 그 이상은 불가능.’
만전의 그녀라면 모를까 한바탕 자크니르와 싸우며 체력을 소모한 그녀로서는, 팔강 중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그를 상대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하아. 아가한테 운이 따라 주네?”
삼 년의 굴욕이다.
자신이 부상으로 행방이 묘연한 틈을 타 기껏 일궈 놓은 세력이 조각나고, 부하란 것들은 그 틈을 타 그녀의 재산을 훔쳤다. 이제는 온갖 잡놈들이 자신이 새로운 음지의 지배자라며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녀가 평생 일궈 온 것들이 한 번의 패배로 사라져 버렸다.
그 때문에 복귀를 알리는 신호탄이자 복수를 할 겸 기습을 노렸던 건데….
“오늘은 날이 아닌가 봐. 어쩔 수 없네. 아가는 나중에 보자?”
“할망구, 먼저 시비를 틀고 어딜 간다고?”
가이온의 기세가 사납게 폭발했다.
지난 몇 년간 전투다운 전투를 못 해 본 그는 전투를 원했다. 삶과 죽음을 나눌 정도의 아찔한 싸움을. 그 희열을 느끼고 싶었다.
그녀는 호락호락하게 보내 주지 않을 듯한 그의 모습에 방긋 웃었다.
“어머, 그래도 괜찮아? 아가들이 위험할 텐데?”
그녀의 손가락이 하늘에서 추락하는 베드르폴니르를 가리켰다. 그 모습은 때마침 괴물이 하늘에서 습격하는 장면처럼 보였다.
“상관없다. 아이의 다툼이다. 그 정도는 알아서….”
“가이온.”
자크니르가 가이온의 어깨를 잡았다.
“가야 합니다. 저 괴물은 아직 학생들에게 이른 수준입니다. 이미 많은 학생이 죽었을 겁니다.”
“죽을 놈은 죽고, 살 놈은 산다.”
“가이온.”
그가 흐린 표정을 짓자, 가이온은 한숨을 내쉬더니 기세를 가라앉혔다.
“쯧, 오랜만에 싸움다운 싸움을 줄 알았건만….”
그도 알고는 있었다.
저 괴물이 자신에게는 별 것 아닐지 몰라도 아직 학생들에게 이르다는 것을.
그저 오랜만에 전투라고 할 만한 싸움에 억지를 한 번 부려 본 것뿐이었다.
“가라. 다음은 없다.”
“흥, 그건 내 마음이지. 아가는 안녕. 아참, 선물은 저-기 준비해 뒀으니까─.”
스윽-
그녀의 몸이 절벽의 그림자에 스며들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알아서 챙겨 가도록 해.”
그녀의 목소리를 끝으로 존재감이 완전히 없어졌다. 긴장을 풀 수는 없겠지만, 당장의 위협은 사라졌다 해도 좋으리라.
그녀가 가리킨 방향의 끝에는, 자크니르의 전 가문 원들이 노심초사한 얼굴로 전투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크니르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애송아, 손이 더 필요하냐?”
“괜찮습니다. 제 일은 제가 직접 처리하는 성격인지라….”
그의 어조에는 비욘나와 싸울 때도 드러내지 않았던 살기가 묻어 나왔다.
“혼자서 충분합니다.”
“그럼 나는 아이들이나 도우러 가보지.”
자크니르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협곡을 빠져나갔다.
가이온은 그가 가는 방향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집안 정리를 다 끝내지 않으니 저런 문제가 발생하는거 아니겠냐고.
“…이 몸이 할 말은 아닌가.”
잠시 하늘에서 내리는 별을 힐끔 본 그는 대지를 박찼다.
길고 길었던 사건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처참한 상태의 시신들. 알렌이 그들과 같이 다니기 전이였다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모습이었다. 심지어 한 명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유적은 베드르폴니르가 튀어나오면서 부서졌는지 통로에는 떨어진 파편이 가득했다.
시간이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부서졌던 유적의 조각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몬스터와 유적 수호자들이 뒤로 걸어온다.
시체에 있던 상처들이 회복하고, 망가졌던 장비가 원래대로 되돌아온다.
숨 한번 내쉴 시간 만에 따뜻한 온기를 품은 사람으로 변한 그들의 모습을, 알렌은 멍하게 바라봤다.
그렇게 거꾸로 돌아간 시곗바늘이 다시 정방향으로 돌아가며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처음은 공간 이동이었다.
[까, 깜짝이야….]
[다들 조심… 큽.]
[윌리엄!]
갑작스러운 이동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그들은, 곁에 있던 유적 수호자의 습격에 한 박자 늦게 반응하고 말았다.
[윌리엄, 괜찮느냐!]
뒤늦게 수호자를 해치웠으나, 이미 윌리엄은 중상을 입은 상태.
그들은 급히 포션으로 상처를 치유했다. 그러나 수십 시간 동안 유적을 돌아다니며 쌓인 피로가 중첩된 윌리엄의 안색은 이미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저는 괘, 괜찮습니다. 우선 사태 파악을….]
그러나 사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쿠구구궁-
유적이 지속적으로 흔들리며 통로의 저편에서 몬스터와 유적 수호자들이 세찬 물줄기처럼 쏟아져 나왔다.
안색이 변한 에반과 에리엘이 최대한 통로를 틀어막고 버텼다.
[에반! 조금만 버텨 봐요!]
[크흡, 알았다! 얼마든지 버틸 수 있으니 안심해라!]
에반이 가문의 비전을 선보였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기술이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지금 무리하지 않으며 언제 한다고요!]
에리엘도 자신의 역량 이상을 선보였지만, 끝도 없이 쏟아지는 놈들을 다 죽일 정도는 아니었다.
[바로크(Baroque)!]
결국, 에반이 가문의 유물까지 동원하고 나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암울했고, 나아질 기미마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 되자, 알렌은 씁쓸한 마음으로 이해했다.
‘…운이 나쁘군.’
그 말 그대로였다.
7층 지하의 공동.
그 시간 그 자리에 도달한 것도 우연이었고, 그때 공간 이동이 발생한 것 역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렇게 공간 이동 된 장소로 몬스터와 유적 수호자들이 몰려온 것도 마찬가지.
그저, 악운이 겹치고 겹쳐 일어난 사고였을 뿐이었다.
[윌리엄, 나한테 관심 있어요? 자꾸 그러니 저도 조금 신경 쓰이는데…, 네?]
[자, 장난은 그만두십시오. 비상시지 않습니까….]
그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자, 알렌은 묵묵히 그들의 마지막을 지켜봤다.
[이번 일 끝나면 만나요.]
[그….]
[단둘이서요.]
힘든 상황에도 그들이 평소의 모습을 보이자, 알렌은 희미하게 미소가 나왔다.
그렇게 그들의 끝을 준비하던 그때, 에반이 입을 열었다.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
알렌이 의아한 마음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어, 사람이 있네?]
저 통로의 꺾인 골목에서 특징적인 청발의 남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
[사, 사람이다!]
[저 머리색은… 라인하르트?]
[알렌말고 다른 라인하르트라면… 율리우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율리우스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신기하게도 그가 몬스터 사이에 있었음에도 아무도 그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아카데미에서 얻은 히든 피스인 망가진 은신자의 망토였다.
[…나를 알아?]
[예, 압니다. 알렌의 동생이 아니십니까.]
[그보다 도움 좀 주실 수 있나요? 사례는 반드시 할게요.]
그들의 요청에 율리우스는 눈알을 굴렸다. 율리우스는 그들의 모습을 힐끔 보더니 눈앞의 허공을 바라봤다.
[…음, 시간 아까운데.]
[예?]
[아니, 무슨 소리인….]
율리우스는 귀찮은 얼굴로 그들을 응시했다. 알렌의 조원들인 것 같은데, 그가 같이 있다면 모를까 없다면 그리 신경 쓸 대상이 아니었다.
[딱히 챙겨 줄 만한 조연도 없고.]
무지개 마안으로 그들을 살핀 그는 결정을 내렸다.
[너희들끼리 잘 해결해 봐~ 아니 잠깐만….]
그들을 무시하고 지나가려던 율리우스는 동동이가 향하려던 방향을 살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히든 피스를 챙기다가 몬스터나 수호자의 신경을 끌 수 있으니까….]
율리우스는 떠올렸다. 보충반에서 귀족들에게 당했던 수모를.
‘뭐? 품위가 없어? 귀족 같지 않아? 형과 비교되는 망나니?’
시원하게 승리했던 결투 이후로 나온 소리들. 야만적이었다느니, 심했다느니. 결투인데 무슨 상관인가.
그 후에 좋은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해도 마찬가지였다.
‘정식으로 사과도 했고, 화해까지 했는데도 마찬가지.’
한 번 씌워진 굴레를 벗기란 어려웠다. 만약 동동이가 없었다면 망나니란 이미지를 벗기도 어려웠을 터.
그는 경매장에서 구한 작은 아공간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전투에서 사용되는 물건 중 하나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서 시선을 끌어 주는 도구였다.
[시선이나 끌어 줘.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아니, 그게 무슨!]
[…당신의 형이 이 짓을 한 걸 안다면 어찌 될지…!]
콰과과광-!
커다란 폭죽 소리가 통로를 울리며 몬스터를 끌어들였다.
[시끄러워, 어차피 알려질 일도 없을 텐데 무슨 상관이야.]
몬스터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에반이 소환한 거대 조개의 소환 시간이 끝난 듯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럼 끝까지 발버둥 쳐 줘, 바이바이~]
율리우스는 비웃음 어린 목소리로 갈림길의 다른 통로를 향해 걸어갔다.
고대 유물의 지속 시간이 끝났다.
[에반, 어떻게 해야…!]
[윌리엄 당신이라도 살아 봐요. 내가 잠시 동안 막을-]
[아니 내가 막겠다. 너희 두 명이 도망-]
에반은 자신의 장담대로 끝까지 저항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만큼 그 저항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팔이 붙잡히는가 싶더니 한순간에 찢어졌다. 그 틈을 타고 몬스터들이 몰려들었다.
콰득-
소설에서 봤던 것 같은 유언은 없었다. 몸 곳곳이 찢어발겨 형상도 알아볼 수 없게 변했다.
그다음은 에리엘이었다.
[윌리엄, 만나지는 못할 것 같네요.]
[에리엘, 자, 잠깐, 안 돼, 안-]
그녀는 아공간에서 화살 더미를 들고, 마력을 폭주시키며 돌진했다. 그녀의 몸이 폭발하며 수만 개의 화살 파편이 전방으로 쏘아졌다.
윌리엄이 일그러진 얼굴로 도망쳤다.
그러나 누군가 나타나 도와주는 것 같은 기적은 없었다. 현실은 냉담했다.
우두둑-
얼마 지나지 않아 뒤에서 날아온 둔기에 그의 척추가 박살났다.
[나, 난 반드시 살아야….]
쿠직-
기어서라도 움직이던 그의 몸에 얼마 지나지도 않아 수십 개의 날붙이가 꽂혔다.
[카를 님, 제니, 에반, 에리엘, 알….]
반짝이던 빛의 동공이 어두워졌다.
윌리엄의 숨이 끊어졌다.
마지막에 알렌의 이름이 끝까지 불리는 일은 없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알렌의 의식이 다시 몸으로 되돌아왔다.
구슬은 처음과 다르게 잿빛으로 변해 빛을 잃었다.
소리가 들렸다.
[에반은 겉으로는 오만하지만 속은 여린 사람입니다. 자신 때문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항상 완벽함을 연기하려고 합니다.]
“알렌, 찾았잖아요. 당신을 찾은 분이 있….”
[에리엘은 자존심이 높지만, 장난을 무척 좋아하십니다. 그거 아십니까? 일부러 저와 에반 님의 반응을 보기 위해 오해할 만한 말을 하시는 것을.]
소리가 들렸다.
[알렌 님은… 공정했습니다. 차석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덕에 처음에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모두 정말… 좋은 분입니다. 제가 어울리기 주저할 만큼.]
“당신 괜찮아요? 상태가 너무 이상….”
[다른 분들의 평가만 말하면 조금 그러니 저도 말하자면… 저는 여동생을 찾고 있습니다. 제가 고아라고 말씀드렸던가요?]
소리가 들렸다.
[저는 옛날 노예로 팔려나갔던 여동생을 찾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무작정 아카데미로 왔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조금 헤맸습니다만….]
“애송아, 네가 사용했다는 기술이….”
[지금은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름밖에 생각이 안 나고, 저랑 같은 구불거리는 흑발이라는 것밖에 기억이 안 나지만요.]
소리가, 들렸다.
[언젠가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어두운 밤. 모닥불. 동료. 비밀. 서로의 꿈. 그리고 죽음.
소리가 멎었다.
“─아.”
더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다시는, 들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