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한순간에 지상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빛으로 이루어진 태양이 하늘에 떠있는 매의 날개를 노렸다. 빛이 폭사하며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태양이 검은 그림자를 집어삼켰다.
콰과과광-
빛이 폭사하며 괴물의 신형이 일순간 사라졌다. 알렌이 본능에 따라 감긴 눈을 부릅떴다. 공격의 잔해가 가라앉으며 드러낸 고대의 괴물은.
멀쩡하게 날고 있었다.
마치 알렌의 공격에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는 듯, 하늘의 제왕으로서의 풍모를 당당히 드러내며.
아니, 완전히 소용없지는 않다.
알렌이 눈을 가늘게 떴다. 괴물의 몸이 일순간 비틀거렸다. 놈도 피해를 입은 것이다.
놈도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명체였다. 단지 적들에게 얕보이지 않기 위해 공격이 소용없는 척 연기하는 것일 뿐.
수천 년간 봉인되어 있었으니 놈도 온전치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상대조차 할 수 없었을 테니.
고대의 괴물은 거인과 용에 비견되는 놈들뿐이니.
그렇다면 해답은 간단하다.
요툰스베르드 삼계 료스솔.
연거푸 빛의 태양이 떠올랐다. 용의 노심이 비명을 질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심장을 손으로 쥐어짜는 감각. 익숙한 고통이었다.
“베스틀라, 저 괴물을 안다고 했지. 승률은?”
베스틀라의 목소리는 시끄러운 전장에도 또렷이 박혀 들었다.
「이제 막 풀려났으니까. 알렌 혼자 싸운다면…, 삼 할이요.」
“율리우스랑 힘을 합친다면?”
베스틀라가 눈치를 보더니 작게 답했다.
「…당신 동생이랑 힘을 합친다면 반반, …아마도요.」
알렌은 그걸로 만족했다. 율리우스랑 싸운다는 말에 싫다고 고집 피울 것 같은가? 절대 그렇지 않았다.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할 뿐이지.
“진짜, 짜증나게 하네. 아아아아아!”
율리우스가 고함을 내질렀다. 아랫배에 박힌 뇌신의 각인이 뜨겁게 작열했다. 진청색의 뇌기가 얽혀 하나의 창이 되었다.
“좀, 내려와! 이 새끼야!”
[아스트라페αστραπ?(A)]
번개가 하나의 선이 되었다.
꽈르릉!
몇 번이나 직격당한 베드르폴니르의 날개가 넝마가 되면서 검은 피가 뿜어졌다. 흘러나온 피가 바닥에 닿아 모래를 녹였다.
베드르폴니르가 땅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그 순간마저도 놈은 반격했다. 신체를 감싸던 하얀 폭풍이 결국 몸을 묶던 쇠사슬을 떨쳐냈다.
힘겹게 버티던 미니마 부족과 아라흐니 부족이 나가떨어졌다.
고고하게 땅에 착지한 놈은 날개를 크게 펼치며 비웃음 어린 표정을 지었다. 하얀 돌개바람이 사방에 몰아치기 시작했다.
“────────────”
몰아치는 광풍 속으로 알렌의 발이 미끄러졌다. 이계 이르파스카더스. 걸음마다 눈을 현혹시키는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검은 밤의 장막 사이로 알렌이 파고들었다.
율리우스가 시퍼런 뇌전을 뿜어내며 괴물의 시선을 끌었다.
그 사이를 그림자가 파고들었다. 그림자에 녹아든 신형이 괴물의 사각을 찔렀다.
분노를 연료 삼는 최적의 일격을.
일계. 마나그람.
붉게 물든 검이 가속하며 날개의 아래를 노렸다.
투훅-
그러나 실패했다. 알렌의 일격은 괴물의 살갗을 찢어내지 못했다.
단단한 깃털에 의해 미끄러지듯 빗겨버린 일격.
베드르폴니르의 눈에 흉포함이 깃들며 칼바람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칼바람이 그림자를 찢었다. 알렌은 어느새 공격 범위의 밖에 자리해있었다.
일반적인 공격은 통하지도 않는다고?
알렌은 헛웃음이 나왔다. 실험체라고 한들 거인의 피부마저 갈라낸 기술이다. 그런데 깃털조차 베어내지 못하다니.
“저런 괴물이 넘치던 시대가 왜 멸망한 거지?”
「…글쎄요. 아마 거인이랑 용이랑 공멸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베스틀라는 모호하게 말했다. 용의 노심에서 뽑아낸 마력이 실타래가 되어 공간을 점유해나갔다.
근접전이 통하지 않는다고 해서 낙담할 필요 없었다.
자신의 장기는 마법이었으니.
실타래가 점차 늘어나며 얼기설기 엮여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 천둥번개가 떨어졌다.
꽈릉!
“시바아알!”
자잘한 공격이 통하지 않자 율리우스의 눈에 핏발이 섰다. 어이가 없었다. 이딴 걸 죽이는 게 퀘스트라고?
알렌이 양보하고 말 것도 없었다. 어떻게든 도움을 받아서 죽이는 게 먼저였다.
뇌신의 각인에서 마력이 모여들었다. 뇌전이 몰아쳤다. 강하게 대지를 박차자, 고열에 녹은 모래가 박살나며 파편을 뿌렸다.
쾅!
시야 사이로 알렌이 마법을 준비하는 것이 보였다. 율리우스는 손에서 뇌전을 모여들게 만들어 길게 늘렸다.
[케라우노스κεραυν??(A)]
기다란 채찍이 소리보다 빠른 속도로 공기를 꿰뚫고 괴물의 몸을 휘감았다. 순간적으로 놈의 움직임이 굳었다. 하늘에서 번개의 장대비가 쏘아졌다.
쿠르르르릉-
공기층이 울렁이며 우레가 울렸다.
“알렌-!”
“형님을 붙이거라. 그 잠깐 사이에 우리가 같은 나이가 되었구나.”
율리우스의 부름에 알렌은 냉정한 눈으로 수인을 맺었다. 손가락 사이로 반절의 실타래가 흘러내렸다. 바닥에 떨어진 실타래는 사슬로 엮여 땅속을 파고들었다.
남은 반절의 실타래는 흑색의 검이 되어 괴물의 몸으로 쏘아졌다.
“형님, 좀 더 강력한 마법을….”
알렌은 고개를 저었다.
“틈을 만들어주마.”
알렌이 손끝을 튕기자 모래 바닥에서 사슬이 튀어나와 괴물의 다리를 묶었다. 퍼덕이는 날개를 보니 당황한 것이 분명했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흑색의 검이 괴물의 몸을 두드렸다.
“────────────”
상처를 줄 수 없어도, 물리적으로 밀어낼 수는 있다.
베드르폴니르의 몸이 공격에 따라 흔들리며 괴성을 내질렀다.
이미 베드르폴니르에 대한 대강의 분석은 끝마쳤다.
바람을 다루는 고대의 괴물.
본능적으로 바람을 다루며, 현재는 이성적이지 않은 상태.
신체는 웬만한 공격으로 뚫지 못하며, 피에는 강한 산성이 있다.
하늘을 날 수도 있으며, 회복능력을 갖추고 있을 가능성도 유력했다.
‘어떤 능력을 숨기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의 모습만 본다면 내가 상대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직접 육체를 맞대며 상대하지 않는 이상 알렌의 마법으로 커다란 피해를 주기 힘들었다.
자신의 마법 중 한 개체를 상대하기 위한 마법은 모자라니.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율리우스의 눈에 순간적으로 탐욕이 떠올랐다.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퀘스트는 완료하면 좋다. 그것도 진실의 파편이라니, 당연히 궁금하지 않은가.
그런 차에 강력한 한 방을 꽂아 넣을 기회를 준다는데 마다할 리 없었다.
“형님, 잠시만 버텨주십시오!”
“알았….”
알렌이 대답하다 멈칫했다. 압도적인 마력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 마력은 율리우스의 가방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율리우스는 바닥에 떨어트렸던 가방에서 커다란 항아리를 꺼내 들었다.
‘…저걸 얻기 위해서 유적에 있었던 거였나.’
알렌은 놈의 욕심에 정말 질린 얼굴이 되었다. 아무리 보물이 중요하다지만, 목숨까지 걸고 구하다니.
심지어 놈은 유적을 따로 빠져나갈 방법도 생각해두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 진짜. 나중에 조용히 쓸려 했는데. 정령친화력도 부족하고.”
그는 몇 마디 더 구시렁거리더니 뇌전을 항아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항아리는 뇌전을 주입할수록 떨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잔금이 가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진짜 정령의 샘에만 갔어도 완전히 계약하는 건데, 시발.”
율리우스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얼굴을 찡그렸다가, 항아리가 완전히 부서질 듯 보이자 뇌전을 더욱 강하게 집중했다.
그렇게 시야가 전광으로 가득 차게 되는 순간.
쾅!
항아리가 박살났다.
항아리가 부서지며 나타난 것은 상체만 있는 거인이었다. 반투명한 몸에, 이목구비도 불분명한 거인.
거인의 몸 중앙에는 율리우스가 항아리에 주입한 뇌전이 공처럼 모여 있었다.
베드르폴니르는 거인이 나타나자 무언가를 느꼈는지 크게 발광하기 시작했다.
칼바람이 주위에 몰아쳤고, 자신을 묶어둔 알렌에게 공격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형님, 조금만 더 버텨주십시오!”
율리우스가 거인에게 뇌전을 더욱 집중시켰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베드르폴니르를 가리키자 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인의 머리 위로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쿠릉-
낙뢰가 떨어질 듯 공기를 진동시켰고, 거인의 팔로 번개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알렌은 한 손으로는 끊임없이 실타래를 엮어 녹청색의 검을 날리고, 한 손으로는 충격파를 터트렸다.
공간 자체를 밀어내는 공격에 바람이 맞부딪치며 알렌을 몇 번이고 비껴갔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다.
알렌은 마력을 미친 듯이 소모하며 괴물을 견제했다. 사슬이 끊임없이 발밑에서 나타나 괴물을 묶고, 움직임을 막았다.
“아직이더냐!”
“일 분! 아니, 삼십 초면 됩니다!”
욕심을 너무 부리는군. 알렌이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상자는 늘어만 가고 있다.
알렌과 율리우스가 쉽게 상대한다고 해서, 다른 학생들도 그러리라 생각하면 오산이었다. 거기에 근처에서 몰려드는 몬스터까지 합치면 상황이 결코 좋다고 볼 수 없었다.
‘할 거면 확실하게 해야지.’
율리우스는 괴물을 죽이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었다.
실수로 알렌이 죽이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그렇게 약속한 삼십 초가 지나갔을 때, 율리우스가 외쳤다.
“이제 됐습니다!”
모였던 뇌전이 거인의 손 위로 모여들었다. 모여든 뇌전은 하나의 거대한 망치로 변했다. 거인의 상체의 반만 한 크기.
그렇게 만들어진 망치를 거인이 휘둘렀다. 아니, 날렸다.
몇 분간 율리우스의 전력을 다한 마력이 인공 정령의 손을 빌려 펼쳐졌다.
[뮬니르Mj?llnir(A)](임시)
정령은 공격한 직후 형체가 흐트러지더니, 뇌신의 각인이 자리한 곳으로 흡수되었다.
소리가 터져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를 삭제한 망치가 매의 가슴을 때렸다.
쾅!
번갯불이 튀며 윤기 나던 흑색의 깃털을 불태웠고, 망치가 가슴팍을 움푹 파고들고 나서야 전진을 멈추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마무리도 해야지.”
율리우스가 히죽 웃으며 손을 내리자, 지금껏 기다렸다는 듯 수많은 번개가 매의 머리로 떨어져 내렸다.
콰릉!
번개가 다시 떨어져 내렸다.
콰르릉-!
수많은 번개 줄기를 무방비하게 맞고 있는 괴물은 숨이 끊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왜….’
무언가 이상했다. 증폭된 오감이 끊임없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베스틀라가 급하게 소리쳤다.
「알렌 빨리 물러나요! 어서!」
알렌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즉시 땅을 박차고 뒤로 물러났다.
율리우스는 퀘스트창을 켰다. 이제 보상이나 얻고 돌아가면 될 것이다.
[유적에 봉인된 고대의 괴물을 ‘직접’ 죽이고 재앙을 막아내십시오! 제한시간 : 3 : 31 : 18]
[보상 : 진실의 파편(???)]
“자, 형님! 이제 돌아갑시….”
어?
“왜 퀘스트창이 그대로….”
율리우스는 의문을 풀고자 고개를 돌렸고.
검은 그림자가 그를 덮쳤다.
콰가가강-
그 모습이 그가 기절하기 전 확인한 마지막 모습이었다.
* * *
율리우스의 몸뚱어리가 장난감처럼 허공을 날았다.
한 번에 장비까지 다 박살 난 그의 모습은 일순간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알렌의 시선은 율리우스를 덮친 괴물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놈은 허공에 있었다.
율리우스를 날린 그 자리 바로 위에.
곰곰이, 자신의 공격한 것이 저놈이 맞느냐는 의문에 가득찬 채.
고작 새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의 거대한 매가 의구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은 현실과 동떨어져 보였다.
상처 따위는 모두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렇게 잠시 율리우스를 바라보고 있던 괴물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알렌은 순간적으로 놈과 눈이 마주쳤다. 놈의 노란 눈에서는, 전과 같은 흉포함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한순간.
움직임을 놓쳤다.
─쾅!
“큭….”
베스틀라가 움직임을 보조해줬기에 막을 수 있었다.
알렌은 급히 일어섰다. 시야 앞으로 긴 고랑이 밀려난 거리에 따라 그려졌다.
베드르폴니르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이럴 리가 없다는 듯, 의문 어린 눈으로 알렌을 바라본 놈은 다시 날개를 세웠고.
시야가 흑색으로 가득 찼다.
─쾅!
봤기에 막을 수 있던 게 아니었다.
거인의 동체 시력, 감응력으로 증폭된 오감,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을 도와주는 감지력.
그 모든 것도 베드르폴니르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없었다.
알렌은 단 한 번이라도 스스로 공격에 반응하지 못했다. 모두 베스틀라가 먼저 움직여 주었기에 가까스로 막아내는 것이 가능했다.
반격은 여전히 불가능했지만.
몇 번이나 알렌에게 부딪친 괴물의 눈에 일순간 슬픔이 드러났다.
놈은 그리운 얼굴로 지금까지도 지상과 상관없다는 듯 쏟아지는 별을 바라봤다.
“─────이미 끝난 과거의 영광이로구나. 뇌신의 가호를 받은 놈도 그렇고…, 너도 마찬가지.”
알렌의 얼굴에 경악의 감정이 드러났다.
순식간에 감정을 지운 괴물이 고개를 돌려 알렌을 향했다.
“─────거인의 피를 이었기에 기대했건만…, 실망스럽군. 필시 검술도 우연히 얻은 것이겠지.”
실망감이 가득한 어조.
베스틀라의 검날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볼 것도 없겠어. 나를 깨워준 건 고맙지만…,”
지성이 깃든 노란 눈동자가 주위를 둘러봤다.
“─────강제로 깨웠으니, 그 대가도 치르도록.”
다시 괴물이 움직였다.
활짝 펼친 날개가 반짝이는 밤하늘의 아래에서 가속했다.
그가 아닌, 다른 이들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