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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가 빙의를 싫어함-87화 (87/212)

제87화

초대형 유적의 7층, 최하층의 공동.

거대한 홀에는 황량하리만큼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차가운 회색 벽과 공동을 비추는 음울하게 느껴지는 빛 거기에 다 부서진 골렘의 잔해까지.

동산만 한 크기의 골렘은 세 개의 핵 모두가 파괴되어 바닥을 굴러다녔다.

알렌은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마왕과 관련된 무언가가 등장할 줄 예상했다. 하지만 그게 이렇게 규모가 커다랗게 벌어지리라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 그저 그뿐인 일이다.

그렇다면 당황할 필요가 있나?

‘우선 눈앞의 일부터.’

조원에 대한 걱정은 억지로 눌러 두었다. 지금 무언가 걱정한다고 뭐가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

알렌이 어느 정도 주위를 살피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먼저, 이 공간이 진동과 연관이 있을까?’

그들이 공동에 들어섰기에 지진이 발생했는지, 시간이 우연히 맞아떨어졌는지 모른다.

하지만, 뭔가를 아는 듯한 알렉시우스의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후자로 생각하는 것이 옳았다.

‘그렇다고 전자가 관련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얀 책에서 굳이 공동을 벗어나라고 말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알렌은 생각에서 벗어나 공동의 벽과 천장을 살폈다. 그곳에는 무언가에 긁어낸 듯한 흔적과 함께 벽화가 새겨져 있었다.

아쉽게도 긁어낸 듯한 흔적에서 별다른 정보를 얻어 낼 수 없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벽화를 살피며 알렌이 고개를 돌렸다.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나?”

「음…, 아마 대몰락 이전, 제가 살았을 때 있었던 괴물일 거예요.」

그녀는 보는 눈이 없자 곧바로 공중에 떠올랐다. 오랜만에 움직여서 기쁜지 검 자루의 끝이 살랑거렸다.

“고대 제국이 아니라, 더 전이라고?”

「네. 정체도…, 어느 정도 짐작도 되구요.」

남아 있는 벽화의 그림은 다소 알아보기 쉬운 모습이었다.

커다란 성채의 지하에 있는 괴물. 성채 위에 서 있는 병사들.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우.

그 후에, 지하의 괴물이 난폭하게 난동을 부리는 모습까지.

괴물의 그림은 다소 기괴하게 그려져 있었다.

누군가 실수로라도 괴물을 풀어 주는 것을 경고하는 것처럼.

그를 제외한 벽화들은 심하게 훼손되어 알아볼 수 없었다.

「이름은….」

“베드르폴니르.”

그녀가 깜짝 놀란 듯 칼날을 부르르 떨면 날아왔다.

「베드…, 아니 알고 있었어요!?」

알렌은 그녀의 반응에 유의하며 한 발 물러섰다. 아직 하얀 책의 비밀을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변명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따로 도서관에서 살펴본 책에서 읽어 본 기억이 있다.”

「아…, 도서관. 그럼…, 다른 것에 대해 아는 건 더 없어요?」

그가 대답하자 그녀의 목소리에 힘이 빠진 것이 느껴졌다. 알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름만 언급되어 있어서 잘 모르겠군. 고대의 괴물이라기에 이름만 말해 본 것이다.”

「하긴…, 가까운 곳에 있으니 정보가 있을 수도 있겠네요.」

그녀는 이해했다는 듯 다시 느릿하게 떠올랐다. 진정된 듯 목소리도 평소대로 돌아와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할래요?」

“글쎄….”

시간은 아직 더 남았다.

이제 십 분이 조금 넘어갔을까?

「진짜 울음소리 들렸을 때까지만 해도 놀랐다니까요? 간 떨어질 뻔했다니까. 엄청 오랜만에 들었거든요.」

유적은 계속해서 진동했고, 멀리서부터는 무슨 일인지 폭음까지 간간이 들렸다.

그러나 알렌이 자리한 장소에 무언가 오는 일은 없었다.

「어쨌든 빨리 빠져나가는 건 어때요? 진동이 점점 커져 가는 게 좋은 징조 같지는 않거든요.」

“당연히 그래야겠….”

알렌이 말을 멈췄다.

순식간에 자세를 낮추고, 베스틀라를 틀어쥐었다.

「알렌?」

펼쳐 둔 감지력의 범위 안으로, 누군가 발을 들이밀었다.

‘인원은 하나? 아니 둘이군. 사람, 아니 인간형인가? 다른 하나는 뭐지?’

강대한 활력이 전신을 돌았고, 요동치는 심장에서 실타래가 풀려나왔다.

오랜만에 제대로 쥔 검의 감촉에 감각이 낯설 정도로 예민해졌다.

감응력에 따른 감각의 농도를 스스로 조절해야 할 정도로 피부가 따끔거리는 감각.

‘상대의 마력이 엄청나다.’

자신의 비할 정도는 아니나, 웬만한 아카데미 학생의 몇 배에 달할 정도.

상대가 알렌의 존재감을 느낀 듯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실타래를 엮었다. 처음 견제로 시선을 잠깐 붙둘 정도면 족하다. 실타래가 순식간에 녹청색의 날붙이들로 엮여 통로를 꿰뚫었다.

그 순간 뇌전이 번쩍였다.

꽈릉!

통로의 어둠을 뚫고 간 날붙이들이 순식간에 분쇄되었다.

진청색의 뇌전을 머금은 검기가 파편을 흩뿌렸다. 단단한 바닥을 부수고 나아가던 육체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뇌전? 설마….’

이곳 같은 특수한 장소가 아닌 이상 탈출 아티펙트가 발동했을 것이다. 놈이 이 상황을 예견하지 않은 이상 있을 리가 없다.

알렌은 어디서나 머리를 들이미는 놈의 모습에 한순간 현실을 부정하고픈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시야 가까이로 상대의 모습이 보인 순간, 그는 달려가려는 걸음을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율리우스.”

상대도 순간적으로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곧바로 검을 내렸다.

“형님!”

갸오!

그들의 밑으로 자신을 잊지 말라는 듯 동동이가 울었다.

* * *

가까이 다가온 율리우스의 모습을 살폈다.

아카데미 교복 위로 가벼운 경장비, 아공간 아티펙트 대신 커다란 가방을 메고 있었다. 가방에는 무언가를 챙긴 듯 크게 부풀어 있었다.

“네가 어떻게…, 아니 묻지 않으마. 무언가 사정이 있겠지?”

보나 마나 뻔했다.

이것과 관련된 퀘스트가 있는 것이다.

알렌은 그 사실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을 막았다.

‘…검은 책에 이것과 관련된 내용이 없었다.’

검은 책의 1회차의 율리우스는 현재 다른 유적에서 혼자 승승장구하는 모습만 적혀 있다.

말할 것도 없었다.

미래는 달라졌고, 율리우스는 1회차에 없던 퀘스트를 받아 냈다는 말이다.

‘…이제 율리우스의 행보를 더 예측하기 힘들어졌다.’

알렌은 그 사실에 불안감, 내지는 아쉬움을 느꼈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움직이는지, 목표가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대략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대략적인 것과 정확하게 아는 것은 달랐다.

당연했다. 그만큼 검은 책을 통한 정보의 이점은 알렌에게 커다란 이득을 건네주었으니까.

누군가 어떤 행동을 할지 먼저 알 수 있다는 건 그보다 한 발짝 빠르게 행동할 수 있는 걸 의미한다.

검은 책의 의존을 깨닫고 이를 막고자 회귀 전, 1회 차의 기억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얻었으나 알렌은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검은 책에 의지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 그… 예. 맞습니다. 형님.”

율리우스는 준비한 변명이 무색하게 알렌의 배려에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준다면 조잡한 변명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형님은 어쩐 일로 여기 계시는 겁니까.”

“최단 돌파를 목표로 7층까지 움직이다가 이변이 생겼다.”

알렌은 이곳에서 있던 일을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알렉시우스와 밀레드를 만나면 들통 날 거짓이었으니까.

“유적이 흔들렸고, 그와 동시에 갑작스럽게 공간 이동의 전조가 발생했다. 아티펙트도 발동하지 않았고. 그 상태에서 겨우 몇 명이 탈출했지. 다른 조원들의 생사는 모르겠군. 나는… 보다시피 저항했고.”

율리우스는 알렌의 실력을 조금이나마 파악하고 있었기에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탈출해야지. 이 진동을 느끼고 여기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지 않나.”

유적의 진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도를 더하고 있었다.

쿠구구구궁-

“그럼 어떻게….”

알렌은 난감한 얼굴로 답을 하지 못했다.

그의 탈출용 아티펙트는 강제적인 공간 이동을 겪을 뻔한 뒤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그게 문제였다.

지상에서부터 이곳까지 내려오는 데 수십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남은 시간은 고작 십여 분.

대충 가늠했기에 그 정도지 사실 정확히 얼마나 남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율리우스, 너는 탈출 아티펙트를 가지고 있느냐?”

율리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대충 보스가 나타나면 처리할 생각밖에 없었다. 그와 동시에 혼란을 틈타 히든 피스를 챙길 생각뿐.

그의 아티펙트는 지금쯤 지상에 있는 자신의 침상 위에 굴러다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저도 아티펙트가 작동하지 않아서…, 하하.”

“그렇다면….”

유적의 층계를 부숴야 하나?

알렌은 몸속에서 들끓는 거력과 아까 느꼈던 바닥의 강도를 비교했다.

유적의 벽과 천장은 완전하지 않더라도 거인의 힘을 가진 알렌의 힘도 버텨 내는 곳이다.

수천 년의 시간도 유적을 풍화시킬 수 없었다.

‘물론 불완전한 시간 마법과 전력을 다한 공격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통제 불가능한 무력은 율리우스에게 경각심을 줄 것이고, 지금까지의 태도와 달라질 가능성이 존재했다.

그건 알렌과의 관계에서 실낱같은 틈을 낼 것이다. 그건 알렌이 가장 원하지 않는 사태였다.

‘일말의 경계조차 하지 않는 관계.’

지극히 이상적이고, 이타적이며, 인위적이다.

동화에서나 볼 법한, 콩 한 쪽을 얻더라도 반쪽으로 나누려는 형제.

그것이 알렌이 율리우스에게 구축하려는 인상이었으며, 아카데미에서 보여 줄 모습이었다.

“형님, 차라리 방법이 없다면 천장을 부수고 올라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곳에 가만히 있다가 유적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율리우스는 상상조차 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그렇지만, 너무 위험하다. 차라리 다른 길로 가서 방법을 찾는 것도 괜찮지 않겠느냐.”

“음, 그래도….”

“예를 들어 그래, 네가 들어온 통로에는 뭐가 없었느냐?”

율리우스는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이 들어온 쪽을 살피더니,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얼굴색이 변해 고개를 홱 저었다.

그는 어색한 표정으로 알렌이 들어왔던 통로를 가리켰다.

“제가 온 방향에는 몬스터랑 유적 수호자들끼리 섞여 길이 없습니다. 차라리 형님이 왔던 쪽으로 가는 게 나을 겁니다.”

그 모습에 이상함을 느낀 알렌이 감지력이 잠시 쭉 뻗으며 율리우스가 들어온 방향을 훑었다. 율리우스는 그 모습을 조마조마한 얼굴로 지켜봤다.

그곳에는 다른 몬스터와 유적 수호자들이 올라간 흔적이 거칠게 남아 있었다.

‘…거짓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런데 저 모습은 뭔가.

알렌은 이내 고개를 젓고는 현재 상황에 집중했다.

“그래도 만약 유적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갇히는 건 마찬가지다.”

“역시 천장을 부수고 탈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자신은 있고?”

“그건 해 봐야….”

율리우스는 알렌의 물음에 괜히 동동이를 쓰다듬었다. 동동이가 얌전히 손길을 즐겼다.

알렌은 심적으로 갈등했다.

‘패를 더 드러내는 게 옳은가? 아니면, 이곳에 도달했을 때처럼 함정을 역이용하는 방법은? 왜 이에 대해 대비를 하지 않았지?’

아카데미를 지나치게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팔강이 두 명이나 있고, 수백 년의 역사가 있다. 그렇기에 알렌은 실전임에도, 아카데미가 제공한 안전에 이상이 없을 것이라 방심했다.

‘순환교에 의해 타격을 받았던 일이 있음에도.’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그런 일이 있을 뻔했다. 그것 말고도 아카데미에 매년 벌어지는 사건·사고는 만만치 않았다.

그저, 아카데미의 빠른 대응과 적절한 보상에 수습되었을 뿐이다.

알렌은 잠시간 고뇌하다가,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다. 불완전한 시간 마법을 공개한다.’

육체 능력은 조정해서 기사 수준으로 하향. 그마저도 엄청났지만, 율리우스의 눈에는 대수롭지 않을 것이다.

그의 시선은 원작 소설을 기준으로 초점을 잡고 있으니.

알렌이 그렇게 결심하고 입을 열려던 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 수십 개의 발소리가 들렸다. 소설에서나 볼법한 타이밍이었다.

“알렌, 거기 있어요?”

“야! 율리우스!”

익숙한 목소리에 알렌의 고개가 돌아갔다. 율리우스도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레이첼…?”

“어? 아벨린?”

난감한 상황을 짐작하듯 순식간에 해결책이 마련되었다.

마치 운명처럼 그들을, 아니.

‘율리우스.’

행운이 율리우스를 따랐다. 마치 소설처럼.

율리우스는 이런 기막힌 우연에 그저 기뻐하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오…, 아벨린, 왔네?”

“이 나쁜 놈아! 왜 여기 있어!”

알렌은 그저 그 모습을 조용히 응시했다.

기회를 노리는 사냥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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