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2주간의 던전 실습일 중, 둘째 날의 아침이 밝았다.
유적의 입구로 이어지는 네 개의 첨탑 근처에는 수백의 학생들과 고용된 길잡이, 그리고 부산물을 얻을 수 있을까 눈치 보는 상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알렌의 조는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아침 일찍 모여들었다.
모인 이들의 얼굴에는 조금씩 피곤함이 엿보였다.
당연히 하룻밤 만에 여독이 다 풀리지 않았다.
잠자리도 익숙하지 않았고, 씻지 못하는 불편함과 밋밋한 식사까지.
몸 상태를 완전히 회복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러나 이것도 극복해야 할 문제였다.
마왕이 다시 나타난다면 어쩌겠는가, 아니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과 같이 유적을 공략해야 할 때도 불평만 할 수 없을 것이다.
던전 실습은 미래에 겪을 실전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했다.
그게 아니라면 아카데미는 이미 상위 계층이 모여드는 거대한 사교계와 다름없을 것이다.
…지금도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만은.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조원들은 입장할 차례가 되자 뾰족한 첨탑의 중간에 있는 입구로 들어갔다.
말이 입구지 사실 첨탑의 창문을 부셔 만든 거나 다름없는 구멍을 넘어가자, 나선형 계단이 위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계단에는 먼저 들어간 학생들이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고, 중간중간에는 빛을 내는 광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첨탑을 다 내려갈 때까지는 위험이 없다.
알렌은 그 짧은 시간 동안 브리핑을 위해 일행의 주목을 모았다.
“잠시, 집중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시선이 알렌에게 집중되자, 알렌은 앞장서서 걸음을 옮기던 알렉시우스에게 입을 열었다.
“알렉시우스, 선발대에 참여해서 얻은 정보를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예, 어차피 숨길 생각은 없었으니 말해드리겠습니다.”
알렉시우스는 처음부터 알렌을 도울 생각이었기에 기꺼이 응했다. 그는 눈 깊은 곳에 기대감을 숨긴 채 입을 열었다.
“우선, 이 초대형 유적은 7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7층이라고…?”
“…생각보다 더 깊은데요?”
에반은 상상도 못 했다는 듯 침음성을 흘렸다.
에리엘은 자신의 생각보다 더 커다란 규모에 걱정이 든 것 같았다.
“…뭐, 뭔가 잘못된 저, 정보일 리는….”
윌리엄이 긴장했는지 다시 말을 더듬으며 묻자, 알렉시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유적은 7층, 아니 지하 7층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는 게 맞겠군요. 제가 직접 확인하지 못했지만, 아카데미가 자체적으로 파견한 조사대에서 직접 확언을 했습니다.”
그의 확답에 일행의 입이 다물어졌다.
당연했다.
아카데미에서 직접 확언했다면 거짓말이 아닐 테니까.
던전 실습 기간은 고작 2주.
그 안에 보통 유적도 아닌, 더 어려운 초대형 유적을 공략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래서 정보를 가르쳐 주지 않았던 거네요….”
에리엘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하, 하… 골탕 먹으라는 뜻만 있는 줄 알았더니 알아도 소용없을 거라 생각한 거로구나.”
“…그래서 어제 무리를 한 것이었군요. 규모가 규모인 만큼 조급해할 만했습니다.”
에반은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터트렸고, 윌리엄은 어제 탈락자가 발생한 이유를 깨달은 듯 작게 중얼거렸다. 심지어 선배들의 참여가 저조한 이유도.
선배들은, 던전 실습 때 신입생들은 공략하지도 못할 어려운 유적으로 간다는 사실을 이미 경험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윌리엄이 힘 빠진 목소리로 말하던 그때,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밀레드가 끼어들었다.
“자자! 다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렇게 포기할 거야? 지금 포기하면 성적이 나락으로 처박힐 텐데?”
“하지만….”
“하지만이고 자시고! 교수들이 너희한테 공략하라고 했어?”
“그건….”
에리엘이 말끝을 흐리자, 밀레드는 그것 보라는 듯 소리쳤다.
“아니잖아. 너희는 너희 최선을 다하면 돼! 그걸 위해서 내가 있는 거고, 아니면….”
밀레드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정곡을 찔렀다.
“너희들의 힘으로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움찔-
에반은 내심 그런 생각을 했었는지 몸을 떨었다.
“그럴 거면 선배가 왜 필요하고, 아카데미가 왜 필요하겠어. 여러 가지 위험을 헤쳐나갈 지혜와 경험을 선물하고 훈련시키기 위해 아카데미가 존재하는 거야.”
그녀의 원론적인 이야기에 일행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언제나처럼 헤픈 웃음을 흘리며 한 발짝 물러서 지켜보고 있던 알렌에게 눈웃음 지었다.
“자! 이제 우리 조장은 무슨 방법을 생각해 냈는지 들어볼까?”
밀레드가 다 알고 있다는 듯 알렌을 바라보자, 남은 조원들의 시선도 알렌을 향했다.
“우리 조장 후배님은 무언가 수가 있어서 지켜보고 있던 거 아냐?”
“…그건, 예.”
알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맞습니다.”
알렌의 시선은 첨탑의 계단을 넘어, 그 지하로 향해있었다.
“충분한 점수를 얻을 수 있을 만한 방법이.”
* * *
아카데미에서 던전 실습에 사용할 유적을 선정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신입생들이 공략할 수 없을 정도의 난도일 것.
앞으로 미래를 위한 유의미한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장소일 것.
이 두 가지를 고려해 유적을 선정한다면, 아카데미에서는 조사대를 파견해 유적의 심부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어떤 위험이 있는지 그리고 몇 층까지 존재하는지까지 조사한다.
그 후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면 용병과 모험가로 이루어진 선발대를 지원받아 내부의 지도를 작성한다.
선점권을 사용했기에 누구의 방해도 없이 유적의 정보를 수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보통 그렇게 선발대를 지원한 용병은 공략할 때 얻은 유물을 얻고 떠나지만…, 길잡이는 남습니다.”
그들을 통해 학생들이 유적의 정보를 얻을 수도 있고, 유적의 함정을 피해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알렉시우스는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멈추고는 전갈 꼬리로 벽 몇 군데를 찔렀다.
세 명이 함께 걷기에 부족한 복도, 회백색 바닥에서는 옅은 한기가 올라왔고 벽은 삭막하고 단단하기만 할 뿐 별다른 함정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알렉시우스가 찌르기가 무섭게 아무런 소리도 없이 빛무리로 이루어진 그물망이 나타나 앞 공간을 감싸 안았다.
화르륵-
닿지도 않았으나 앞쪽에서 느껴지는 열기만으로 에반은 목덜미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저는, 5층까지 내려가는 통로를 알고 있는 길잡이지요.”
“그 말은….”
윌리엄이 무언가를 떠오른 듯 놀란 얼굴로 되묻자, 알렌이 그의 의문에 태연하게 대답했다.
“예, 저희는 공략보다 어떤 조보다 빠르게 유적을 가로지르는 최단 돌파를 시도할 계획입니다. 최대한 낮은 층으로 향해서.”
“확실히 그것이라면 점수를 얻기에는 충분하겠군.”
“공략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포기하고 실리를 취한 다라… 좋은 생각이네요.”
그들은 그 생각은 하지 못했다는 듯 감탄한 기색이었다.
“고대 유물을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는 점만 빼면 말이지.”
밀레드는 이 작전의 마지막 단점을 이야기했지만, 일행은 흔쾌히 유물을 포기했다.
고대 유물은 나중에 얼마든지 구할 수 있지만, 점수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의외인 점은 윌리엄도 기꺼이 찬성했다는 것.
“저도…, 돈보다 중요한 것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점수도 상당히 중요하니 이게 더 옳은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심사가 복잡해 보였지만, 곧 평소의 그로 돌아왔다.
밀레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그들에게 주의를 환기했다.
“하지만 이 방법을 생각해 낸 게 알렌 혼자만은 아닐 거야. 어제 탈락한 자들도 따지고 보면 비슷한 방법은 선택한 거 아니겠어?”
“그렇다면….”
“서둘러야 한다는 거지.”
일행은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고, 서둘러 지도를 확인했다.
지도가 밝게 변한 곳은 지하 1층의 3분의 1지점.
이 주일 모두 같은 속도로 이동한다면 5층의 중간에 도달하고 끝날 것이다.
아니, 내려갈수록 더 강한 수호자와 함정이 존재할 테니 4층에서 발걸음이 멈출지도 모른다.
“안정적인 선택을 한다면 지금 속도로도 충분할지 몰라요. 하지만, 커다란 보상을 얻기 위해서는 당연히 위험을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에리엘의 눈빛은 명확했다.
“어떻게 하고 싶어요?”
나아가야 한다는 것.
비상 탈출 아티펙트가 있으니 목숨까지 걸지 않아도 된다.
잃는 것은 그저 한 번의 수업에서 얻을 점수. 수업 하나라고 하기에는 점수의 비중이 컸지만, 이 정도를 걸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그렇기에 이들의 선택은 그녀와 다르지 않았다.
“한번 해 보겠습니다.”
“크흠, 힘 좀 써야겠군.”
“찬성하지요.”
다들 찬성을 하자, 알렉시우스는 선발대로 들어왔던 경험을 떠올리며 지도를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그럼, 속도를 올리겠습니다.”
알렌 조의 심층까지 향하는 최단 돌파가 시작되었다.
* * *
일행은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지금까지는 최대한 안전한 방향으로 조금씩 움직여 지도를 밝혔지만, 빠르게 하층을 향하는게 목표인 이상 그렇게 행동할 수는 없었다.
“알렌, 전방에 방이 하나 있습니다!”
“계획대로 무시하겠습니다!”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요구하는 지식을 증명해야 한다.
아카데미에서 그러한 상황에 대비한 교육도 받았지만, 시간도 오래 걸릴뿐더러 빠르게 하층으로 가려는 알렌 일행과 맞지 않았다.
윌리엄은 아깝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망설이지 않고 방을 지나쳤다.
“전방에 샌드맨 둘! 리빙데드 하나!”
“리빙데드는 내가 상대하지.”
“그럼, 샌드맨은 제가 해치우도록 할게요.”
에반의 몸이 푸른 마력에 휩싸이며 전보다 몇 배는 빨라졌다. 그 상태로 검을 휘두르자 리빙데드기 저항할 틈도 없이 박살 났다.
에리엘은 그 사이로 녹빛으로 빛나는 단 하나의 화살만 발사했다.
획-
순식간에 날아간 화살은 순간 펑하고 터져나가더니 샌드맨 두 마리 모두를 벌집으로 만들었다.
“속도 늦추지 않고 그대로 가겠습니다!”
“부산물도 무시합니까?”
부산물을 회수하려고 다가가던 알렉시우스가 알렌의 말에 멈칫했다.
“그걸 회수하며 얻을 이득보다 빠르게 내려가는 게 더 중요합니다.”
알렌의 단호한 대답에 밀레드가 시원하게 미소지었다.
“역시, 알렌 후배. 잘 알고 있잖아!”
“그럼, 알겠습니다.”
알렉시우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일행은 주변을 탐색하지 않고, 최대한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향해 나아갔다.
“앞에 함정이 있습니다!”
“어떤 종류입니까!”
“단발형, 공격용인 것 같습니다.”
한눈에 함정을 탐지한 알렉시우스가 소리치자, 감지력으로 먼저 함정을 발견했던 알렌이 벽면 전체에 충격파를 흩뿌렸다.
파바방!
공기가 터져나가며 벽을 두들기자, 양쪽 벽면이 수축하더니 이내 쾅 하고 부딪쳤다.
일행은 벽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며 날리는 돌가루 사이를 통과했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악! 깜짝이야.”
“뭐, 뭐야.”
“쟤들은…?”
중간중간 먼저 출발한 조들과 마주쳤지만, 깜짝 놀라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볼 뿐 선뜻 다가오는 이들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중간에 환영함정으로 인해 혼자 다른 곳으로 향하던 에반을 데려오고, 커다란 소음에 몰려든 수호자들에 부상을 입은 에리엘을 치료하고.
사제의 힘을 보여준다는 알렉시우스의 강함에 의외로 놀라기도 하고.
마침내 윌리엄이 꺼멓게 죽은 얼굴로 흐느적거리며 달려갈 때쯤, 알렉시우스의 발걸음이 어두운 통로 앞에서 멈춰 섰다.
“헤엑, 헥… 다, 다 왔습니까?”
“잠시 확인 좀 해 보겠습니다.”
윌리엄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묻자 알렉시우스가 지도를 펼쳤다. 3분의 1쯤 밝아져 있던 지도는, 그 이후부터 삐뚤빼둘한 선을 그리며 밝게 빛나고 있었다.
“예, 여기가 제가 통과했던 통로가 맞습니다.”
“드디어…!”
알렉시우스의 확언에 일행의 표정이 밝아지자, 알렌이 전력을 재확인했다.
“에반, 몸 상태는 어떻습니까.”
“괜찮다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좋지는 않군.”
“에리엘은 어떻습니까.”
“저도 마찬가지예요.”
마력을 아끼지 않고 사용하며 마력이 떨어질 때면 포션으로 강제로 회복시키며 달렸던 만큼 일행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윌리엄은…, 말할 것도 없겠군.”
알렌은 쓴웃음 지었다. 진작에 체력이 떨어져 자가치료를 하며 달렸던 윌리엄은 반쯤 저세상에 갔다 온 표정이었다.
알렉시우스는 마경에서 살아왔던 것답게 체력이 괜찮아 보였고, 밀레드는 3학년이니만큼 이 정도 움직임도 문제없어 보였다.
하지만….
“오늘은 2층까지 진입하는 것으로 멈추겠습니다.”
일행의 상태를 확인한 알렌이 말하자, 에리엘이 우려하는 목소리를 냈다.
“알렌, 하지만 여기서 멈춘다면 최단 돌파를….”
“저, 저를, 헤엑! 생각해주지 않으셔도, 헤엑! 됩니다.”
윌리엄은 다리가 갓 태어난 새끼 양처럼 부들거렸지만, 짐이 되지 않으려는 듯 억지로 걸음을 몸을 움직였다.
그들의 태도에도 알렌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2층에 제일 먼저 도착한 조는 우리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돌아가 재정비한 후 다시 움직이는 것이 나을 겁니다. 한 번 경험해봤으니 다음에는 3층에도 내려갈 수 있을 테니 말이지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일행의 망설이는 태도에 알렌이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그럼 곧바로 2층으로 내려가도 되겠습니까? 다들 찬성하는 거 같으니 말입니다.”
알렌이 정말 움직일 듯 선수로 나아가자 망설이던 에리엘이 한숨을 쉬며 답했다.
“…제가 조급했네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으흠, 큼, 쓸모없는 과욕은 금물이지.”
“알렌의 말에 따르겠습니다….”
알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통로 앞에서 몸을 돌렸다.
“그럼, 2층으로 진입만 한 후 돌아가도록 하겠…?”
일행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알렌이 말하던 중 의문 어린 소리를 냈다. 알렌이 바라본 벽면에는 고대문자로 적힌 문장이 쓰여 있었다.
“알렌 님, 무슨 일이라도…, 아.”
알렌이 눈길이 향한 벽을 쳐다본 알렉시우스는 알겠다는 듯 의아한 눈을 한 일행에게 설명했다.
“이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출입구마다 적혀있는 글귀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예, 지금은 쓰이지 않는 사어지요. 그 뜻은 해석하기 어렵…”
“그건 내가 설명해줄게!”
밀레드는 자신의 차례라는 듯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나섰다.
그녀는 지금까지 알아서 잘하던 조원들 때문에 나설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언니는 해석할 줄 아세요?”
“응응. 2학년부터는 고대어를 교양 수업으로 선택할 수 있거든.”
“그렇다면 해석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럼!”
그녀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문장을 읽어내렸다.
?λο? ο κ?σμο? ε?ναι βαμμ?νο? ασπρ?μαυρο? και γκρι.
“온 세상이 흑색과 백색, 회색으로 칠해졌네.”
알렌이 그 글귀를 응시하고 있던 이유는 그 뜻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었다.
회귀 전에 지식을 얻기 위해 많은 연구를 했던 게 자신인데, 고대어 하나 익히지 못할 리 있겠는가.
다만, 앨런이 조용히 입은 다문 이유는 하나였다.
Τ?τε το φεγγ?ρι ?γινε κ?κκινο και πολλ? αστ?ρια ?πεσαν.
“그러자 달이 붉게 변하며 수많은 별들이 떨어져 내리니.”
그의 눈이 첫 번째 문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Ακ?μα και ο υψηλ?τερο? αστ?ρι απ? αυτο?? δεν ?ντεχε.
“그중에서….”
“으뜸의 별도 버티지 못했네.”
알렌이 뒷말을 이어서 말하자 밀레드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후배도 고대어 읽을 줄 알아!?”
“예, 마법 서적은 번역본을 읽다 보면 본문과 다른 뜻이 나올 가능성도 있어 최대한 원서로 읽으려고 공부했습니다.”
“…으음, 그렇구나.”
밀레드는 자신이 자신감 있게 나선 분야마저 알렌이 알고 있자 아쉬운 얼굴이 되었다.
알렌도 그녀의 기분을 눈치챘는지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앞으로도 이런 문장이 나오면 해석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후배도 할 줄 알지 않아?”
“저도 많이 아는 것도 아니다 보니 해석에 오랜 시간이 걸렸잖습니까. 더 잘 아는 사람이 맡는 게 더 효율적입니다.”
“흐흥, 그래?”
“예.”
그녀는 올라간 입꼬리를 가릴 생각도 없이 웃으며 답했다.
“그럼, 앞으로 고대어나 벽화 같은 게 나오면 내가 해석할게!”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알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려 2층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하나의 문장만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흑색과 백색, 회색빛으로 칠해졌더라….’
그의 생각에 따라 세 권의 책들이 그의 눈앞을 떠올랐다.
하얀 책의 단서를 찾던 도중에, 생각지도 않은 단서를 얻었다.
‘저 문장이 세 권의 책과 관련이 없을 수도 있지만….’
하얀 책과 유적의 연관성, 그리고 세 개의 색만 콕 짚은 이유가 그냥 일리는 없지 않은가.
그의 눈이 깊게 침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