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닷새가 지나 도착하게 된 유적의 앞에는 용병들과 상인들로 득실거렸다. 학생들의 시선은 유적에 가까워졌을 때부터 대지를 뚫고 나온 첨탑에 향하고 있었다.
교수들은 임시로 차려진 캠프로 들어가는 대신 그 옆에 준비된 새 캠프 안에 자리 잡게 하고는 미리 계약된 길잡이들을 배정했다.
대부분 무작위로 길잡이를 선택했지만, 몇몇 이들은 미리 이야기해 놓은 듯 안면이 있는 이들과 함께하기도 했다.
알렌도 그런 경우 중 하나였다.
“알렌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알렉시우스. 만나서 반갑군.”
알렌은 편지에 주고받은 대로 자신을 기다리던 알렉시우스와 합류했다.
율리우스 쪽을 돌아보니 그곳에는 에리니가 거미 다리를 까딱이며 다른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길잡이를 다 배정한 후 유적의 대략적인 설명을 듣게 되었다.
익히 수업에서 들었던 주의 사항과 목표를 다시 설명 들은 그들은 비상 탈출용 아티펙트와 유적의 일부가 그려진 지도를 받고 나서야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유적을 탐색한 지 몇 시간이 흘렀다.
“에반! 너무 들어갔습니다. 뒤로 빠지십시오!”
“크흡! 아, 알았다!”
알렌의 명령에 무작정 돌격하려던 에반은 몸을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잠깐 그의 몸이 멈춘 틈을 타 창이 날아들었지만, 에반은 능숙하게 창을 쳐 내고는 다시 정면을 가로막았다. 그때 알렌이 외쳤다.
“에리엘, 지금입니다!”
“알고 있어요!”
에리엘의 눈이 녹색으로 물들더니 빠르게 화살을 쏘아 냈다. 연속으로 날아간 세 발의 화살은 머리 위를 지나치더니 있을 수 없는 각도로 꺾여 떨어져 내렸다.
-퓨퓨퓩!
화살은 에반이 막던 리빙데드를 거쳐 틈을 노리던 샌드맨의 머리에 박혀 들었다.
그아아아────!
그 모습에 리빙데드가 분노했는지 괴성을 내지르며 밀어붙였다. 한 마리가 아닌 총 세 마리의 돌격. 좁은 통로를 가로막았기에 당장은막아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에반이 위험했다.
“끄으읍! 아, 알렌 아직 마법은 멀었…! 윽!”
에반은 소리치다 말고 머리를 틀었다. 푸른 마력이 그를 감싸며 순간적으로 그의 속도가 몇 배는 빨라졌다. 후웅! 창날이 머리를 스쳤다.
에반은 흥분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에 휩싸인 얼굴로 강하게 방패를 위로 올렸다.
깡!
투구의 맑은 울림과 함께 리빙데드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리빙데드가 멈칫거리는 틈을 타 에반은 거세게 한손검을 휘둘렀다.
콰직! 리빙데드가 휘청거리며 몇 걸음 물러섰다. 좁은 통로 탓에 세 마리 모두 움직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리빙데드는 생명체가 아니었기에 핵을 파괴하지 못하면 처리할 수 없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에반!”
에반의 목적은 처음부터 리빙데드를 처리하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에반은 인공 유적에서 지긋지긋하게 연습한 전술에 따라 뒤로 물러났다.
알렌이 손짓하자 실타래가 얽히며 황청색의 호른이 나타났다. 알렌이 호른을 붙잡고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리빙데드의 투구 사이로 녹색의 화염이 타오르며 괴성을 내질렀다.
그아아아아────!
세 마리의 텅 빈 갑옷이 돌격하면서, 마침내 물러난 에반의 앞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
‘부패의 비명.’
뿌────!
묵직한 저음의 파동이 회오리를 그리며 리빙데드와 부딪쳤다.
거센 바람이 리빙데드를 스쳐 지나갔다. 강력한 파괴음은 없었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푸스스-
살아 움직이는 갑옷들은 한순간에 산화되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삐걱대는 소리와 함께 부서져 내렸다.
전투가 마무리되었다.
“…후, 끝났네요.”
에리엘은 손마디가 저린지 손을 풀며 화살을 회수하러 움직였다. 아공간에 더 있다고 해도 화살은 소모품, 아껴 쓸 수 있다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 옳았다.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윌리엄이 에반을 향해 뛰어갔다. 에반은 주저앉으려던 몸을 급히 멈추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몸 풀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하, 하.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윌리엄은 애써 웃으며 그의 몸을 살폈고, 아무런 상처가 없자 안도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스틀라가 검신을 떨며 물었다.
「당신이 힘을 쓰면 이렇게 번거롭게 처리할 필요도 없지 않아요?」
‘그러면 조를 짜서 행동할 이유도 없지.’
「…으, 그래도 저도 좀 움직이고 싶단 말이에요. 요즘 제대로 검을 쓴 적도 없는데.」
‘어쩔 수 없지 않나.’ 베스틀라는 몸이 쑤시는지 허리춤에서 자꾸 꼼지락거렸다. 아카데미에 박혀서 제대로 검을 쓸 일이 없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그러나 알렌은 이번 실습에서는 철저히 팀으로서 움직일 계획이었다.
이 유적에 흑마법사, 혹은 마왕과 관련된 무언가가 있다는 자신의 가설을 입증하기 전까지.
“와! 이번에도 내가 말해야 할 건 없겠는데?”
짝짝짝-
손뼉을 치며 다가온 밀레드는 눈을 반짝이며 칭찬했다.
“에반은 너무 저돌적인 경향이 있기는 한데 지시는 잘 따랐으니까… 응응, 괜찮아. 에리엘도 빈틈을 찌르면서 보조 잘해 줬고. 윌리엄도 정석에 맞게 잘 움직였어. 그리고 알렌은 더 말할 것도 없는데….”
그녀는 궁금증과 기대가 가득 찬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마법, 시간 계통의 마법 아니지?”
“아닙니다.”
알렌은 딱 잘라서 말했다.
시간 계통의 마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직도 학계에서는 의견이 분분하기는 하다.
그러나 알렌은 시간은 물질의 변화에 따른 가정에 불과하다는 가설에 마음이 더 기울었다.
젊음과 늙음, 새것과 헌것, 탄생과 죽음까지.
아이가 영원히 자라지 않는다면, 물건이 영원히 낡지 않는다면 그것이 시간이 멈춘 것과 무엇이 다른가.
시간은 변화를 동반한다.
반대로 말해서, 변화하지 않는다면 시간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알렌이 처음에 회귀를 믿지 않았던 것도 이런 맥락의 일환이었다.
물건이 낡을 수는 있어도, 새것으로 변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냥 철을 산화시킨 것에 불과하지요.”
“역시 그렇지…?”
그녀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마법은 도서관에 들르면서 얻은 성과의 하나였다.
일어날 일을 일어나게 만드는 것.
이넬리아와 린벨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머리에 맴돌던 영감을 정리해 낸 것이었다.
다만, 이 마법을 사용하기엔 수많은 전제조건이 붙었다. 미래가 거의 확정적이어야 되고, 유기체에게 사용할 수 없으며, 계통을 완전히 정립하지 못했기에 어마어마한 마력이 소모된다. 뿐만 아니라 사용처도 한정된다.
하지만 알렌은, 이 마법이 시간 계통 마법이었다면 이런 형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게 이름 붙이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이제 이야기는 끝나셨습니까.”
“아, 알렉시우스. 혼자 다 하셨습니까?”
알렉시우스가 부산물을 담은 가죽 주머니를 들고 다가왔다. 그의 전갈 꼬리가 움직임에 맞춰 흔들거렸다.
“저 혼자 한 것이 아니라 에리엘 님이 도와주셨습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그녀는 짧게 미소 짓고는 진지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
“그래서…, 알렌 어떻게 할래요?”
에리엘은 유적에 출입하기 직전에 나눠 준 지도를 모두가 볼 수 있게 들어 올렸다.
검게 물든 지도의 위로는 일행이 움직인 거리만큼 밝게 변해 있었다.
그러나 밝혀진 부분은 지도의 채 1할도 채 되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도 이 유적의 초입에 머물러 있을 뿐이에요. 중요한 건 아직 1층에 있을 뿐인데 말이에요. 그런데 에반은 벌써 지쳤고….”
“아니, 나는 지치지 않….”
“에반.”
“크흠, 조금 쉴 필요는 있을 것 같군.”
“제 마력도 간당간당해요. 체력이 부족한 윌리엄은 말한 것도 없고요.”
윌리엄은 그 말에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얼굴이 붉게 변했지만, 일행의 치료를 담당하는 그에게 뭐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선택을 해야 해요.”
“후퇴할지, 더 나아갈지.”
“네, 맞아요. 지도의 더 많은 부분을 밝히는 게 점수가 더 클 테니까요. 마음 같아서는 더 나아가고 싶지만, 첫날이기도 하고 또,”
그녀의 시선이 한 발 떨어진 거리에서 헤헤 웃고 있던 밀레드에게 향했다.
“…언니에게 도움을 받으면 실습 평가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요.”
“맞아! 그러니까 신중하게 선택해. 이런저런 지식 같은 건 도움을 줄 수 있어도, 직접적인 개입을 하면 감점이니 주의하고!”
알렌은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할까. 이미 전투는 수십 번이나 치렀다. 경험은 충분하다는 이야기다.
아직 초입이기에 강한 함정이나 수호자의 존재를 볼 수 없다고 해도, 이미 여독을 풀 새도 없이 들어왔기에 체력적 손실이 컸다.
밀레드는 여전히 물러난 상태에서 개입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 이것도 다 평가에 들어갈 것이다.
‘더 무리해서 이동하는 것보다 휴식이 더 필요하겠지.’
알렌은 결정을 내리고는 입을 열었다.
“돌아가겠습니다.”
“…휴.”
에리엘은 내심 휴식이 간절했는지 안도했다.
밀레드는 활짝 웃으며 그의 결정을 지지했다.
“잘했어! 알렌 후배, 확신이 안서면 차라리 숨을 돌리는 게 더 좋은 선택이야!”
“그럼 가장 가까운 경로를 통해 돌아가겠습니다.”
알렉시우스는 잠시 지도를 살피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을 찾았는지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로 일행이 빠르게 따라붙었다. 윌리엄이 돌아간다는 말에 화색이 되어 힘을 짜냈다.
“헥, 헥…, 돌아가면 체력 훈련에 더 신경 써야겠습니다…. 하하.”
“그때는 내가 도와주지.”
“괘, 괜찮습니다.”
“사양하지 말게.”
에반의 말에 윌리엄의 얼굴이 살짝 파래졌다.
그렇게 일행은 처음 유적에 돌아왔을 때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유적을 빠져나왔다.
* * *
해가 저물어 주홍빛 노을과 옅은 달 모두 하늘에 떠 있는 시간.
유적의 입구 근처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책임질 생각인가! 너를 따라갔다 첫날에 탈락했다. 가문에서 알면 무슨 말을 할지…, 진짜 미치겠군.”
“아니, 공자님께서 먼저 선발대의 정보를 제공하라 하셨지 않습니까!”
“이 미천한 모험가 새끼가….”
“지금 길드를 무시하시는 겁니까?”
모험가는 길드 출신의 길잡이였던 건지 그는 나름 억울한 티를 내며 항의했고, 귀족 출신 학생은 이런 대접이 처음인지 헛웃음을 터트렸다.
“너, 지금 나한테 말대답을 한 것이냐? 감히…!”
“그럼 공자님은 제가 길드를 통해 계약을 맺었는데 거짓을 말하리라 생각하십니까?”
길잡이가 저렇게 행동하는 것에는 대사막으로 군대를 데리고 올 수 없다는 것이 컸으리라.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진짜 억울해 보이기도 한 것 같았고.
“이 새끼가 내 가문을 무시하….”
“공자님은 가문의 떼쓰기밖에 못 하십니까? 할 말이 있으시다면 직접 길드에 항의하십쇼. 이미 영상 기록 저장 구슬은 길드와 아카데미에 제출했으니 말입니다.”
“이, 이…!”
중부 바깥을 벗어나면 통할 권위가 여기서는 먹히지 않으니 남학생은 얼굴이 터질 듯 붉게 변했다.
길잡이는 주위의 시선이 그리 곱지 않다는 걸 느끼고는 급히 인파를 빠져나갔다.
“알렌, 뭘 보고 있으십니까.”
뒤를 돌아보니 윌리엄이 아직도 이름으로 부르는 게 어색한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저건….”
“벌써 탈락한 자들이 생긴 모양입니다.”
윌리엄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그는 그 사실이 퍽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벌써 탈락했다는 말입니까?”
알렌은 어깨를 으쓱이며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윌리엄이 옆에서 그와 걸음을 맞췄다.
“항상 욕심이 있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지요. 길잡이가 먼저 유적을 한 번 살폈던 선발대 출신이었던 모양입니다. 말하는 거로 보아 학생이 욕심을 부렸든, 길잡이가 먼저 정보를 흘렸든 깊은 곳으로 무작정 갔다가 당한 것 같네요.”
“아….”
윌리엄은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이었다.
“첫날인데 어째서….”
“능력과 욕심은 비례하지 않는 법이지요.”
그냥 유적도 아닌 초대형 유적.
나오는 유물의 질이 달라지니 욕심이 날 법도 했다. 더해서 실습에서도 좋은 점수를 받고.
그러나 일반 유적과 초대형 유적은 다르다.
보통 수호자를 해치우거나 요구하는 지식을 증명하기만 하면 되는 일반 유적과 달리 초대형 유적은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 거대한 크기에 흘러들어 온 몬스터와 유적을 돌아다니는 수호자 그리고 곳곳에 깔린 함정, 거기서 그치지 않고 특정 방이나 구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식도 증명해야 한다.
지금은 원리조차 모르는 함정에 당하면 행간에 떠도는 미신처럼 동료가 사라지기도 하고.
“…참, 갈수록 뭔가 허무한 기분이네요. 귀족은 다 엄청난 건 줄 알았는데.”
윌리엄이 뭔가 복잡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그래도 알렌과 에반, 에리엘은 다 좋은 쪽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윌리엄이 다급히 변명을 내뱉으며 알렌의 눈치를 봤다.
무언가 사연이 있을 것이다.
원래 귀족에 관해 온갖 말이 나도는 것이 당연하니까.
그렇기에 알렌은 뭐라 대답하지 않고 픽 웃으며 그저 앞으로 걸었다.
윌리엄은 알렌이 기분이 별로 상한 것처럼 보이지 않자 혼자 골똘히 생각에 잠긴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노을이 마지막 빛을 힘겹게 토해 내며 서쪽 끝자락을 붉게 물들였다.
유적에 도착한 지 첫날의 하루가 끝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