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학생회의 서기, 로렌은 평민 출신의 학생이다.
열아홉에 아카데미에 들어와 올해로 스물셋이 된 학생.
그는 아카데미가 제시한 기준에서 턱걸이로 겨우 들어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재능의 기준선이 높은 곳이 이곳, 갈슈딘 아카데미다.
그의 재능은 아카데미 기준으로 봤을 때는 낮은 편에 속하더라도, 다른 어느 곳으로 파견을 나가든 기본 이상의 직책을 맡을 수 있는 인재라는 뜻이었다.
평범한 외모에 평범한 성격.
특출나지 않지만, 어디에도 모난 곳 없는 성품.
그는 학생회에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학생 중 하나였다.
“선배, 선배의 이름으로 편지가 도착했어요.”
“그래? 고마워.”
특별할 것 없는 일정을 마무리하던 중에 그에게로 편지가 도착했다.
하얀 편지지.
그 위로 특색 없이 로렌의 이름밖에 적혀 있지 않은 편지를 로렌은 의아한 얼굴로 보았다.
‘음…, 나한테 편지가 올 사람이 있던가? 성교의 일정은 모두 전달 받았을 텐데?’
올해로 사 년째.
작은 정보 전달하기. 특정한 명단 작성하기. 특정한 물건 경매장에서 구하기.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아카데미의 첩자로 활동한다는 것에 밤잠을 이루기 힘들었던 그는, 생각보다 안온한 생활에 마음을 놓게 되었다.
이번에 성교의 배신자만 붙잡는 일만 끝난다면, 그도 완전히 임무를 끝마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해이해졌다.
‘첩자’라는 자가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되었음에도.
그렇기에 로렌은 아무런 의심 없이 편지를 펼쳤고.
“…어.”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대들에게 순환의 제전을 요청한다.]
[그곳에서 상실, 순환, 현현 세 단계 중 현현의 증명을 하기 원한다.]
하얀 바탕의 위로 충격적인 선언이 적혀 있었다.
로렌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가 자기와 부딪쳤다는 사실도 몰랐다.
“아, 아얏.”
“미안하다.”
“로렌!”
그는 급히 사과하고는 밖으로 달렸다.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른 소리가 들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런 것에 신경 쓰기에는 한시가 급했다.
‘사제, 사제님한테 가야 해.’
이 사안은 자신의 선에서 해결할 수 있을 일이 아니었다.
로렌은 급히 엘피스의 비밀 거점 중 하나로 이동했다. 최대한 돌아서 이동했지만, 그를 쫓아온 사람이 있다면 들켰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로렌은 이 편지를 전하는 게 더 중요했다.
공업 지구의 외곽에 있는 창고.
평소 인적이 드문 이곳에 로렌이 급히 창고로 뛰쳐 들었다.
“사제님!”
쾅!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가벼운 식사를 하던 밀란 사제는, 그 상대가 로렌이라는 것을 알자 한숨을 내쉬었다.
“…놀랬잖나. 로렌 형제.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심호흡하고….”
그의 말에 크게 고개를 내저은 로렌은 숨도 고르지 않고 외쳤다.
“제전을!”
“뭐?”
“순환의 제전을 요청받았습니다!”
툭-
밀란 사제가 들고 있던 수저를 떨어트렸다. 그가 매우 놀란 얼굴로 입을 벌렸다.
“바, 방금 뭐라고 했나?”
“드디어, 드디어 때가 왔다는 말입니다. 사제님!”
로렌이 환희에 젖은 눈으로 무릎을 꿇었다.
황홀하게 치켜뜬 그의 눈동자가 소름 끼친 빛을 발했다.
“예언의 사도가 등장했습니다.”
* * *
던전 실습까지 열흘 남았을 시점.
드디어 그날이 되었다.
원작에서 하이젤과 다퉜던 세력 중 하나이자, 수많은 이교들 중 가장 큰 세력인 ‘이름’의 성녀 아벨린을 노리는 순환교의 습격이 이뤄지는 날.
‘원래는 이 습격에 신드리 남매가 합류하겠지만….’
카트린느가 운영하던 대장간에 그들이 일하고 있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본래는 자신이 그들을 거둘 생각이었는데.
‘나비 효과인지 뭔지….’
하필 자신에게 차인 그녀가 아카데미로 향했고, 그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지원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녀가 자신에게 미련이 남아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그만한 재능을 가진 다른(추가) 대장장이를 찾는데 골치 아팠을 것이다. 혹은, 전 약혼녀가 우연히 사고로 불우한 일을 겪거나.
“…여기가 맞나?”
본관에서 조금 떨어진 구역에 있는 별관. 학생들끼리 서류를 제출한다면 동아리를 만들 수 있는 곳. 그곳에서 율리우스는 약속을 잡았다.
‘아벨린을 지켜야 하니까.’
그녀에게 호감도 쌓을 수 있고, 신수를 키우기 위해선 그녀가 필요했다. 이교라고 해도 그녀는 성녀, 그녀의 쓸모는 무궁무진했다.
앞으로 잘만 키운다면 힐러 걱정은 없을 정도로.
율리우스는 별관 1층 구석의 교실 앞에 도착했다.
약속 장소가 맞나 고민하던 그때, 누가 문을 벌컥 열었다.
“율리우스 님!”
“왁! 놀래라. …아이린?”
율리우스가 놀란 얼굴로 한 발짝 물러나자, 아이린이 웃으며 그의 손목을 덥석 집었다.
“헤헤, 여기서 뭐하시고 계세요. 얼른 들어와요.”
“잠깐….”
교실로 들어가자 미리 도착해있던 6명이 율리우스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율리우스가 천천히 교실로 들어서며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아냐, 아벨린, 카트린느, 나타샤, 헬레나, 아이린, 바이론.
자신이 여태까지 모은 인재들.
이들이 모두 자신의 편이라고 하니 가슴이 든든했다.
아직 애매한 사람도 있는 것 같지만 어떤가, 시간을 들인다면 ‘올바른’ 결말을 위해 다 같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왜 이리 늦었느냐, 지각이노라.”
헬레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시계를 가리켰다. 율리우스는 10시가 넘어가는 시곗바늘을 보고 변명을 댔다.
“왕국에서는 중요한 약속일수록 늦게 오니까….”
“그렇다고 지각을 하지는 않느니라.”
그녀의 핀잔에 율리우스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
“다음부터 조심하거라.”
그녀는 율리우스의 사과에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구석을 바라보니 바이론이 굳은 얼굴로 석상처럼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바이론은 여성들만 가득한 공간에 있는 게 고욕인지 소리 없이 도움을 요청했다.
‘도와주십시오, 주군….’
‘미안하다.’
가볍게 그의 눈길을 외면한 율리우스는 특이한 울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갸호-, 갸호-
둥글둥글한 하얀 털 뭉치와 머리 위로 솟은 조그마한 보라색 뿔.
며칠 전 드디어 부화한 신수가 힘차게 울며 어느 여성의 품에 안겨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온 갈색 단발과 장난기 넘치는 얼굴.
신분을 숨긴 이단의 성녀이자 지금은 다른 곳에 있을 신수 해룡의 주인.
아벨린이 아냐와 함께 신수를 돌보고 있었다.
“얍! 얍! 자, 이거 성공하면 상 줄게. 응? 빨리해봐.”
갸호! 갸호!
“아벨린 언니. 그래도 신수인데, 나뭇가지 물어오라는 건 좀….”
“에이, 신수는 원래 이렇게 키워야 해. 너 신수 키워봤어?”
“아, 아뇨….”
“어허, 그럼 내 말 들어. 언니는 이미 한 번 키워봤단다.”
“…어, 그게… 언니 거짓말은 좀….”
아냐는 그녀의 말을 믿어야 될지 믿지 말아야 될지 고민했다. 그 사이 아벨린이 정말로 나뭇가지를 던지려는지 신수를 바닥에 내려놨다.
율리우스는 신수가 정말 움직이기 전, 자신이 지어준 자랑스러운 이름을 불렀다.
“동동아, 이리 온.”
갸호?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신수, 동동이는 고개를 돌렸다.
“율리우스, 제발 신수 님을 그렇게 부르지 마시죠.”
관심 없는 척 조용히 귀를 쫑긋대던 나타샤가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맞아, 동동이가 뭐야. 동동이가.”
아벨린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동동이가 어때서.”
율리우스는 억울했다.
동동이가 자신의 이름을 만족하는데 뭐가 문젠가.
“그치? 동동아.”
갸호-
“원래 애완동물 이름은 정감 있게 짓는 거랬어.”
“애완동물이 아니라, 신수 님입니다.”
“크흠, 그래 신수.”
“신수 님.”
율리우스가 대충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나타샤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려던 때, 그가 들어올 때부터 천천히 상황을 관망하면 카트린느가 끼어들었다.
“저는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녀의 말에 한 박자 늦은 나타샤가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선택은 신수 님의 몫, 신수 님이 선택했다면 그걸로 된 게 아닐까요?”
“…그래도.”
“만약 다른 이름을 줬을 때 받아들이지 않으면요?”
“…….”
“이미 결정한 이상 더 이상의 언급은 무용하다고 생각돼요.”
그녀의 반박에 나타샤는 안타까운 얼굴로 신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저도, 저도 율리우스 님의 말이 옳다고 생각해요!”
대화의 끼어들 틈을 찾던 아이린은 얼른 입을 열었다. 그녀는 검게 물든 눈에 조급함이 깃들었다.
“맞….”
“솔직히 처음에는 이상했지만…, 계속 들으니까 나름대로 괜찮아졌어요!”
아이린은 율리우스의 전 약혼자인 카트린느를 아닌 척 견제하며 말을 끊었다.
‘…왕도에 왔을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사이가 아니었는데.’
갑자기 율리우스 님이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사실이 무척이나, 무척이나, 무척이나 불쾌했지만 참았다.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빼앗길까 초조한 기분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카트린느는 그런 아이린의 모습을 보며 온화하게 웃고는, 한발 물러섰다.
아이린은 카트린느의 대응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정말이지.’
그 모든 광경을 헬레나는 재미있다는 듯 미소지었다.
이렇게 많은 여자들이 그의 어떤 점으로 하여금, 그에게 매달리게 만들까.
그녀는 암시장에서 보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더없이 차갑고, 폭력적이던 그 모습. 그러나 겉으로는 예의를 차리기도 하고, 비굴한 모습도 가끔 보였다.
그녀는 그 간격이 정말 재밌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조용히 눈치를 보던 바이론이 작게 거수했다.
“공자님, 이렇게 저희를 불러모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말에 대화하고 있던 모든 이들의 눈이 모였다. 바이론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꼴사나운 모습이지만, 여태껏 여자와 별 접점이 없던 그에게 여자들의 시선은 가혹했다.
갸호-?
율리우스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동동이를 쓰다듬으며 표정을 진지하게 바꿨다.
“아, 별거 아니야.”
율리우스는 표정에 주의했다. 지금 여기 모여 있는 이유를 들키면 안 되니까.
“다들 새로 만든 여행 동아리에 가입했으니, 첫 목적지를 정하려고.”
[조금 있으면 아카데미가 습격당하거든? 그래서 대비하려고 모였지.]
“알다시피 처음이 제일 중요한 법이잖아. 이런 건 통보하는 것 보다 다 같이 정하는 게 좋지 않겠어?”
[아벨린이 목표인 게 알려지면 노려질 게 뻔하잖아. 막으려면 서로 모여 있어야지.]
그의 말에 카트린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런 일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런데 모두 부를 필요가 있었어요?”
“서로 가기 꺼리는 장소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미리 불렀지.”
[다른 학생들이 희생될 수도 있지만….]
“나타샤는 엘프, 아벨린은 남부 출신이랬지? 다른 쪽은 다 인간이자 리브레 왕국 출신.”
[시간을 끌다보면 지원도 올테고, 공적으로 인정될 테고. 공적치가 엄청 쌓일 거라고.]
“각자 출신이 같아도 가고 싶은 곳은 다를 수도 있잖아. 이런 건 한 번에 끝내는 게 좋다고 생각해.”
[습격을 공론화시키는 것 보다, 이게 더 개이득이라고. 아 참, 순환교는 현상금도 있댔지?]
“뭐, 괜찮네. 응. 너희들끼리 밀어붙이면 나는 말도 못 하는데 불러줬고.”
“같은 보충반인데 챙겨야 하지 않겠어?”
그의 말에 아벨린은 어이가 없는 듯 웃었다.
“선배 이기는 보충반 학생이 어딨다고, 참….”
그 말에 나타샤는 무언가 떠올린 듯 입을 열었다.
“아, 대련하니까 생각난 건데…. 당신의 상대가 된 선배는 어떻게 됐죠?”
“모르겠는데. 아마, 병실에 있지 않을까?”
아벨린은 율리우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율리우스, 네가 원하면 치료해 줄 수도 있는데. 해줘?”
“됐어. 평판도 안 좋던데. 그런 놈은 치료해 줄 필요 없어.”
“맞다. 해줄 필요 없느니라. 어차피 그 남자는 치료가 됐으니.”
헬레나의 대답에 눈썹을 꿈틀거린 율리우스는 그의 뒤에 누가 있는지를 깨닫고 이해했다.
‘부회장, 2 황자라면 그런 부상이라도 치료할 수 있겠지.’
다음에는 완전히 끝내버려야지.
상념을 끝낸 그는 시계를 힐끔 보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럼, 우선 여행 동아리의 첫 여행지로 각자 원하는 곳을….”
습격의 예상시간은 아마 11시.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율리우스는 몸의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며 준비했다.
‘레이나한테 알렸으니, 알렌 형님 쪽은 알아서 하겠지.’
만약을 위한 준비까지 마친 율리우스는 자신만을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에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잠깐만.”
하루가 끝날 때까지.
* * *
첫 번째 선지자, ‘식어버린 불꽃’이 말했다.
“사도 후보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두 번째 선지자, ‘메마른 물결’이 답했다.
“무슨 문제? 더 이상 여력 없다. 시체의 물결, 막아야 한다.”
세 번째 선지자, ‘썩어버린 뿌리’가 속삭였다.
“키히힉, 헤헥, 사, 사아도 후보가아 두, 두 명이다아!”
네 번째 선지자, ‘바스러진 쇠붙이’가 비웃었다.
“하나는 거짓이고, 하나는 참이겠군.”
마지막 다섯 번째 선지자, ‘빈곤한 토양’이 물었다.
“검증이 필요하나? 마침 순환의 제전을 요청받았다.”
다섯이 말하고, 다섯이 답했다.
넷이 토의하고, 하나가 기록했다.
셋이 제안하고, 둘이 검증했다.
둘이 고민하고, 셋이 확인했다.
하나가 동의했고, 넷이 거절했다.
다섯의 토론이 끝났다.
“하나가 움직인다. 그리고 검증한다. 후에 판단한다.”
불이 꺼졌고, 물이 메말랐으며, 쇠붙이가 바스러졌고, 토양이 빈곤해졌다.
그리고 뿌리가 남았다.
“사도, 사도오, 크힉, 크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