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도착한 장소는 아카데미 야외에 있는 정원 중 하나였다.
티타임을 즐길 수 있는 자리 근처로 활짝 피어난 꽃들이 저마다의 매력을 뽐냈다. 그 화려함 뒷면에는 매일 노력하는 정원사의 노고가 숨어있으리라.
일라이자는 그곳에 있었다.
정원의 중앙.
정오의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음에도 주변의 분위기는 냉랭했다.
‘다른 이들은 데려오지 않았군.’
정원에는 그를 제외한 다른 인물은 없었다.
일라이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알렌이 정원으로 들어오는 기척을 느꼈음에도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그건 알렌이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 이어졌고, 그가 맞은편에 앉은 순간 감던 눈을 조용히 떴다.
“제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라이자 저하.”
“요즘은 초대한 주인이 객보다 늦게 오나?”
일라이자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의 심기는 매우 불편해 보였다.
“잠시 준비할 게 있어서 그랬습니다.”
이상할 것도 없다.
그의 태도를 본다면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에도 벤자민을 제국으로 데려갈 정도로 가까운 사이처럼 보였으니.
“리브레 왕국의 관습은 이 정도는 허용해주나 보군.”
“일의 경중에 따라서는 그렇지요.”
“그 정도는 미리 준비해놓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만큼 중요한 준비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하, 잘났군. 그래.”
알렌이 그의 비아냥을 가벼이 넘기자, 일라이자는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감정적이군.’
그러나 그의 태도는 벤자민 사건을 감안하더라도 생각한 것보다 조금 감정적인 부분이 있었다. 그의 이상함을 느낀 알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헌데, 저의 어떠한 부분이 저하의 심기를 어지럽혔습니까?”
알렌의 물음에 일라이자는 차가우리만큼 단호하게 답했다.
“늦지 않았나.”
“약속 시각에 맞춰 온 거로 압니다.”
“최소 삼십 분 전에 왔어야 하지 않았나. 너에게 이번 만남의 가치는 그것밖에 되지 않았나 보지?”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더욱 맞춰서…, 아.”
알렌은 그의 이유를 알 수 없었던 분노가 서로 관습의 차이에 대한 것임을 깨달았다.
리브레 왕국에서는 중요한 만남일수록 더욱 시간에 칼같이 맞춰온다. 그것이 이 만남을 위해 최대한 많은 준비를 했다는 성의를 나타냈기 때문이다 알드니아 제국은 달랐다. 준비는 모자란 자들이나 하는 것.
그들은 최대한 일찍 나옴으로써 자신의 여유로움을 과시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만남일수록 모든 준비를 철저히 끝내 자신의 진실함을 드러냈다.
일라이자 황자의 관점에서는 알렌이 이번 만남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착각할 수 있었다.
알렌이 먼저 한발 물러섰다.
“진심으로 사죄하겠습니다. 제국과의 관습 차이를 양지하지 못한 점은 제 불찰입니다. 만약 이 일로 심기가 불편하셨다면 자리를 파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일라이자도 서로의 인식이 달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편하시더라도 잠시 이야기만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라이자가 무의식적으로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생각에 잠겼다.
몇 분인지 모를 침묵이 지나 그의 입이 열렸다.
“…그래 한번 들어는 보겠다. 알렌 라인하르트, 무슨 이유로 나를 보고자 했지?”
한결 힘이 빠진 목소리였다.
“벤자민 선배의 일로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입니다.”
“뭐라?”
그는 무언가 할 말이 많은 듯 눈썹을 꿈틀거렸으나, 방금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벤자민 선배가 제 동생 때문에 깊은 부상을 입으신 것으로 압니다.”
“…그렇지.”
“그런 부상을 치료한 물건은 흔히 구하기 힘들겠지요.”
“그래서.”
공적치든, 돈이든 황자인 그에게 부족함이 있을 리 없다.
설령 부족하다고 한들, 제국에 지원을 요청하면 될 테니 벤자민의 회복은 당연하겠지.
하지만.
“선배의 부상은 시간이 늦어질수록 완전히 회복하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알렌이 무의식적으로 턱을 뒤로 당겼다.
신체는 재생할 수 있다.
문제는 마력 회로.
“이제 일주일이 지났으니…, 마력 회로를 완전히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나흘 안에 조치해야 될 텐데….”
“…….”
평온히 이어나가는 그의 어조에 일라이자가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회복시킬 방도를 찾으셨습니까?”
알렌의 눈이 곧게 그를 찔렀다.
일라이자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그를 치료할 방법이 있다는 거냐?”
그의 어조는 차분했지만, 들끓는 분노를 억누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조롱하고자 이 자리를 마련했느냐? 라인하르트 가문의 수준을 알겠구나.”
일라이자가 입가를 비틀었다.
“괜히 이 자리에 왔어. 이럴 줄 알았다면, 오지 않은 것만 못했을 것을.”
알렌은 화를 토해내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가 일어나려던 때, 변함없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 일은 내가 잊지 않….”
“있습니다.”
그가 한 박자 늦게 말의 의미를 알아들은 듯 눈을 크게 떴다.
“…뭐?”
감정이란 모호한 법이다.
호감을 쌓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부정적인 감정일지라도 조금의 계기만 주어진다면.
‘단숨에 다른 감정으로 변모시킬 수 있다.’
이를 위해 그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못난 동생의 잘못은, 형이 책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렌은 느긋하게 웃으며, 품에서 아공간 포켓을 꺼냈다.
“하급 엘릭서,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요.”
알렌이 웃었다.
티 하나 없이 순수한, 선의로 가득한 미소였다.
***
일라이자는 곧바로 움질일 수 없었다. 알렌이 잠시 그를 붙잡아두었기 때문이다.
“…아직 공개되지 않는 엘릭서라고?”
“예, 연금 학파에 검증을 거쳐 몇 달 후 공개될 예정이지만 말입니다.”
하급 엘릭서의 조제법.
이 레시피는 알렌이 회귀 전에 직접 유적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이 조제법이 묻힌 유적이 어디 있는지도 그만이 알고 있었고, 효과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레시피가 공개되는 건 아깝지만….’
그 대신 부족한 재화를 보충할 수 있으니.
알렌은 연금 학파에 하급 엘릭서의 조제법을 제공한 대가로 어마어마한 대가를 받음과 동시에 조제법이 공개된 이후부터 매달 일정한 로열티를 받게 되었다.
이제부터 경매장에 물건을 구할 때 금액이 부족할 일은 없겠지.
그 모든 일을 처리하느라 일라이자와의 만남까지 일주일의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검증되지도 않은 의심스러운 물품을 일라이자가 받으리라 생각하기 힘들었으니까.
“엘릭서의 출처에 의심이 든다면, 따로 확인해 보면 될 겁니다.”
“…아니, 여기까지 와서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지.”
일라이자는 아직 세간에 공개되지 하급 엘릭서를 준다는 것이 놀라웠다.
‘…충분히 숨길 수 있을 텐데.’
이것의 가치를 안다면, 아는 사람일수록 숨기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동생이 했던 일을 책임진다는 마음으로 엘릭서를 공개했다니….
“혹시 바라는 것이 있나?”
“이것으로 황자님의 마음이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친 것은 내가 아니다.”
“물론 벤자민 선배에게도 따로 만나 뵐 생각입니다.”
질문을 회피하는 알렌의 모습에 일라이자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그의 행동이 의심스럽다라도 어떤 도움이든 받아들여야 할 때였다.
“네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군.”
처음에는 그저 그런 인재 중 하나로 생각했다. 그런 인물은 제국에 수도 없이 많으니까. 그의 행동을 보고 조금 더 노련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한다는 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이렇게까지 하는 건가. 그것이 궁금했다. 벤자민에게 엘릭서를 전해야만 하지 않았다면 조금 더 대화를 해봤을 텐데.
‘제국의 권력을 탐하려는가? 그것도 아니면 아카데미에서 무언가를 꾸미기 위해? 정말 단순한 호의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라이자는 넘쳐흐르는 상념을 접었다.
아직도 고통에 신음하는 벤자민을 생각한다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다만…, 이 엘릭서가 정말로 벤자민을 완전히 회복하는 것에 성공한다면….”
일라이자는 진중한 눈으로 알렌에게 감사를 표했다.
“사례하지. 반드시.”
알렌은 겸양 어린 미소로 손을 저었다.
“동생이 벌인 짓인데 형이 책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알렌은 잠시 무언가 말하기 어려운 얼굴로 입을 우물거리다,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가?”
일라이자는 무언가를 떠올리듯 알렌을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답했다.
“이 일은 기억해두지.”
알렌은 약간 피로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일어나도록 하겠다.”
알렌이 대답을 하기 무섭게 일라이자는 그에게 받은 아공간 포켓을 챙겨 자리를 떠났다.
개인적인 인맥을 통해 엘릭서의 진위도 판별해야 될 테고, 연금 마탑의 움직임을 파악해보기도 해야 할 테니 며칠은 바쁘게 움직일 터.
‘이걸로 준비는 끝냈다.’
그의 성격상 알렌의 고민을 그냥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호의와 마지막의 머뭇거림 그리고 그의 온화한 성품까지 더해진다면 어느 정도 어려운 일이어도 손을 내밀겠지.
알렌은 멀어지는 그의 등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눈이 멀 정도로 밝은 햇빛이 눈가를 찔렀다.
‘엘릭서를 통해 마탑 도시에 연줄을 하나 만들어놨고….’
동생의 서클을 부순 그란델, 놈에게도 갚아줘야 할 빚이 있다.
7대 마탑 중, 바람의 마탑의 마탑주.
추정 8위계의 현존하는 괴물 중 한 명.
‘그것 말고도 흑마법사, 율리우스를 돕는 세력, 수확제에 도시를 노렸던 흑막, 책의 능력을 내린 누군가, 전 마왕 하이젤, 가문에 숨겨진 비밀….’
세계의 가호는 왜 율리우스와 자신을 돕는가.
시스템은 무엇이고, 김우신의 정체는 뭐지?
해야 할 일은 무수히 많았고, 알 수 없는 것들도 곳곳에 널려 있다.
이렇게 한가로이 있을 시간은 없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빌어먹게도, 심란한 제 속과는 다르게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
알렌이 일라이자 황자와 만남을 가진지 일주일이 흘렀다.
율리우스와 벤자민의 대련이 끝난 지도 2주가 흐른 시점.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이지만, 율리우스와 벤자민의 대련 결과에 대해 잊혀 가고 있었다.
그 사이의 기간이 짧게 느껴질 정도로 많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이미 지난 일보다 흥미로운 사건이 더 많았다.
“하이젤, 기록 1등 갈아치운 거 봤지?”
“…진짜, 아무리 중급 유적이라지만 신입생이 역대 기록 갈아치운 건 진짜 미쳤는데….”
“그 제국 최강, 피에르의 기록을 깼다는 거 아니야, 와.”
첫 번째는 하이젤의 기록 갱신.
아카데미의 지하에는 유적들이 넘쳐나는 대사막에 자리 잡은 것답게 학생들이 이용할 수 있는 인공 유적이 존재한다.
최하급, 하급, 중급, 상급, 최상급.
총 다섯 가지 등급으로 나눠진 유적은 실제 같은 함정과 몬스터로 이루어져 있었고, 유적을 성공적으로 끝마칠 때마다 시간을 측정한다.
그걸 통해 암암리에 내기가 벌어질 정도.
본래 유적 하위권의 순위는 잘 갱신되는 편이기에 그리 화제 될 것이 없었으나, 하이젤이 중급 유적의 기록을 갱신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역대 최고의 기록을 차지했던 주인이 현재 팔강의 일원 중 하나인 제국 최강 피에르 베르나프였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하이젤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느 의미로 미래의 팔강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했다.
두 번째는 신수의 부화.
이쪽은 첫 사건에 비해 그다지 화제 되지 않았다.
그러나 부화한 신수의 주인이 며칠 전 선배를 꺾은 것으로 유명세를 탄 율리우스라는 점과 알에서 부화한 존재가 보기 극히 드문 신수라는 것이 밝혀지자 달라졌다.
신수를 보기 위해 다른 학년에서 찾아오는 것이 빈번해졌고, 그의 이름이 더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선배 한 명이 퇴원했다는 소리는 이야깃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심지어 그 선배의 평판이 그리 좋은 것도 아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고맙다. 정말 고마워.”
그러나 벤자민은 만족했다.
“네 덕분에 나을 수 있었다. 진짜…, 진짜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평생 불구로 살아가야 했을지도 모르는데.
아무리 아카데미를 위해 그렇게 행동했다고 한들 달가운 결과일 리 없었다.
‘그리고….’
남쪽의 작은 도시에서 그를 이곳에 보내기 위해 노력한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그러니 자칫하면 발생했을 끔찍한 미래를 막아준 알렌에게 크나큰 은혜를 느꼈다.
“제 동생의 과오니 제가 해결해야 마땅하겠지요. 저는 당연한 일을 한 겁니다.”
벤자민은 일라이자와 함께 알렌을 찾아왔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일라이자는 바쁜 시간을 쪼개서 왔기에 금방 돌아갔다. 그렇기에 이곳에는 그와 알렌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라니.”
담담한 듯이 말하는 알렌의 모습에 벤자민은 그때의 감정이 북받치는지 콧등을 한 번 문질렀다.
“그건 절대 당연한 일이 아니지. 황자님께 들었다. 내게 사용한 것이 하급 엘릭서라고 했지? 그 귀한 걸 조금의 망설임 없이 줬는데. 뭐가 아니란 거야.”
“아니 그건….”
변명을 내뱉으려던 알렌의 말문이 막혔다.
황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당신을 이용했다.
이런 변명은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알렌은 상투적인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결국, 제 가족이 벌인 일이지 않습니까.”
“너는….”
그 모습이 겸손을 떠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진지한 눈으로 말하고는 허리를 숙였다.
“솔직히 귀족인 너에게 내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알렌의 손을 강하게 잡으며 자신에게 맹세하듯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힘을 주었다.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반드시 도와주마. 그 어떤 것이든.”
알렌이 할 수 있는 일은 난감한 표정으로 빨리 쫓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언제든지 불러라! 어? 부르라고!”
“…예, 알겠습니다. 그러니 어서 가기나 하십시오. 선배님.”
“하하하, 그래!”
아무리 알렌의 얼굴이 두껍다고 해도, 그 상황에서까지 철면피처럼 있기는 힘들었다.
그를 쫓아 보낸 알렌은 해의 반쪽을 잡아먹은 지평선을 바라보며 기숙사를 나섰다.
지금의 시간은 몇 주간 이어져 하나의 습관으로 굳어질 지경이었다.
미라아 카리타스.
그녀와의 시간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