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 빙의를 싫어함-70화 (70/212)

제70화

대륙의 남단.

여러 국가와 종족이 어우러지는 동쪽과 서쪽 그리고 아인을 지배하는 여왕이 자리한 북쪽과 달리 남쪽은 인류의 흔적이 옅었다.

북쪽과의 길목을 막는 나스트론드 평야.

우거진 밀림과 가득한 몬스터.

온갖 미신과 이교가 활개 치는 곳.

그곳에서 살아가는 것은 리자드맨과 나가, 세이렌 그리고 하피 같은 희귀 종족들과 소수의 인간뿐.

몇 개의 도시밖에 존재하지 않는 이곳으로 일단의 일행이 수풀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쪽이 맞아? 이번에도 틀리면, 조금 화가 날지도 모르겠네~?”

“마, 맞을 겁니다. 스카이나 님.”

은근한 짜증이 서린 그녀의 압박에 길잡이를 자처하던 마법사는 몸을 떨었다.

“얌전히 연구나 할 걸, 괜히 지원했어. 그놈의 꼬드김만 아니었어도…, 하아.”

눈앞에서 마기의 변화를 관찰할 기회라고 하더니.

‘코빼기도 안 보이잖아.’

대륙에 나타난 마기의 흔적을 쫓은 지 몇 달이나 지났다.

처음에는 마왕이 나타날 징조가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었는데.

“이곳에 마기의 잔향이 남아 있습니다.”

급히 파견 나온 조사단의 책임자로서 그녀는 바르덴에게 속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번에도 틀리면, 그 망할 마도구 부숴 버릴 줄 알아.”

“…반드시 제대로 안내하겠습니다.”

베리트는 유물을 움켜쥐며 결연히 대답했다.

그를 동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빛의 마탑의 제자라며 거들먹거리던 그의 성격도 있거니와 일행 대부분이 몇 달간의 일정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쯤 돌아갈 수 있을까.’

프란시스카는 피로한 눈가를 문질렀다.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예언의 실현을 기다렸던 그녀는 라인하르트 영지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을 여기로 오게 만든 인물이 떠올라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바람의 마탑주, 그란델의 손자 휘스 아로나.

‘그 쓰레기가 그때 다가오지만 않았어도.’

어렸을 때 그딴 짓을 저질러 놓고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뻔뻔하게 다가오다니.

그와 같이 있다가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은 느낌에 자리를 피하다 조사단에 지원하게 되고 말았다.

그 결과로 몇 달간 온갖 고생을 하게 됐으니, 그에 대한 증오는 더 커질 수밖에.

‘하지만, 그래도….’

스르륵-

품 안에 손을 넣자 몇 번이고 읽어 구깃구깃해진 종이의 감촉이 선명했다.

‘그가 예언의 주인공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키메라 연구의 성과로 5위계로 올라서기도 했고, 변화 학파의 수장인 스카이나에게 틈틈이 가르침도 받았다.

그녀가 상념을 이어 가려는 순간, 앞서가던 남자가 소리쳤다.

“찾았습니다! 여깁니다! 이곳에 마기가 짙게 퍼져 있…, 웬 여자가…?”

정신을 차려 앞을 살펴보니 검게 변색된 지반과 초토화된 지형 사이로 여인 한 명이 쓰러져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여기에 민간인이…?”

“잠깐 기다려!”

마법사들은 마치 홀린 듯 다가가기 시작했다. 스카이나가 소리쳐도 소용없었다. 자리를 유지하는 것은 스카이나와 프란시스카 두 명밖에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스카이나 님!”

“여기에 민간인 따위가 있을 리 없잖…!”

“으…, 으음?”

여자는 마치 그들을 기다렸다는 듯, 그들이 다가온 즉시 눈을 떴다.

즉각적인 변화에 스카이나가 즉시 경계했다.

여인은 처량한 얼굴로 두려운 듯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는…?”

“몸은 어떠십니까! 혹시 다치신 곳은….”

가련한 몸짓과 청초한 얼굴.

무언가에 당한 듯 찢어진 옷자락과 어딘지 모를 애틋한 분위기가 합쳐져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

“저희는 마탑에서 온 조사….”

“베리트! 이 개놈아!”

스카이나가 베리트의 섣부른 행동에 분노한 얼굴로 다가서자, 그의 목이 움츠러들었다.

“누군지도 모르는데, 우리의 정체를 밝혀? 정말 미친 걸까~?”

“하, 하지만 정말 민간인이 맞….”

“닥치고 뒤로 빠져. 여기서부터 내가 심문하려니까.”

“예, 아, 알겠습니다.”

그녀를 보호하려던 그는 가라앉은 그녀의 눈동자에 급히 정신을 차렸다.

자신은 겨우 빛의 마탑의 제자일 뿐이지만, 상대는 변화 학파의 수장. 상대가 될 턱이 없었다.

“그래서…, 네 이름은 뭘까~? 출신은? 아니면, 조금 전까지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니~?”

“저는….”

그들의 다툼에 겁먹은 듯 지켜보던 여인은, 스카이나의 물음에 겨우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릴리트, 릴리트였…을 거예요.”

“릴리트였다?”

여인, 릴리트는 모여든 시선에 급히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

그런 그녀의 모습에 프란시스카는 위화감을 느꼈다.

“예…, 그것 말고는,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래, 그건… 평소에 다른 모든 이들에게 맞춰 주는 그녀만이 느낄 수 있는 그런 미약한, 조금의 느낌에 불과했지만….

“…아는 게 없어서 정말 죄송해요.”

프란시스카는 그녀의 눈이,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분명히.

* * *

와아아아-!

커다란 환호 소리에 시선을 내리니, 넓은 연무장에서 두 개의 인영이 거센 마찰음을 내며 검을 부딪치고 있었다.

정확히는, 어느 한쪽이 밀려나고 있다.

“벤자민, 그거밖에 못 하냐!”

“이 새끼 평민 주제에 잘난 체 하더니 꼴좋네?”

“부회장 뒤만 믿고 나댔으니…, 끝났네.”

아카데미에 소문이 퍼져 나가고 3일이 지나 예고한 대로 대련이 일어났다.

장소는 본관에 자리한 공식 대련장.

검은 책에 적힌 대로, 그가 알던 미래를 이어 나가고 있다.

제한 조건 없음. 타자의 개입 금지.

말 그대로 생사까지 주관할 수 있는 살벌한 대련.

…그렇기에 대부분의 이들은 치열한 접전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벤자민은 이를 악물고 공격을 가로막았다.

“선배, 그러게 왜 시비 걸어서, 응?”

“큽….”

예상과 정반대의 결과가 돌아왔다.

전격을 머금은 검격이 빠르게 몰아친다.

위에서 대각선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왼쪽 상단으로.

언제나 연습해 왔던 검의 감촉이 이렇게 낯설게 느껴질 줄 몰랐다.

“선배라고 지랄하더니, 잘됐네.”

“그러게, 적당히 나댔어야지.”

“근데 쟤 보충 반이라 하지 않았냐? 실력만 보면…, 최상위권인데.”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선배로서 실력을 내보이고, 아직 외부의 물이 덜 빠진 신입생들에게 경고해 주려 했다.

“선배님, 이것밖에 안 되면서 왜 거들먹거리며 보충 반까지 왔는지, 참.”

아카데미 내의 다른 평민 학생들에게 너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려 했을 뿐인데.

“보충 반이라고 만만히 보셨나? 아니면, 귀족을 누를 기회라고 보셨어? 응?”

“…그런 생각 아니었다.”

“사실대로 말해 봐요. 그럼 지금이라도 봐줄 수 있는데.”

“아니 진짜로 그런….”

우우──

뭐라 말을 하려던 그의 입에 닫혔다.

짓쳐 드는 비난.

연무장을 덮은 불투명한 막 뒤로 무수한 익명의 비난이 고막을 가득 채웠다.

“이런데요? 선배 유명하던데. 걸핏하면 시비 걸고 다니는 걸로.”

“…….”

벤자민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뜻이 있었다고 하나 벤자민의 행동은 내막을 모르는 이들에게 있어 등수를 믿고 나대는 오만한 평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럼 그냥 오든가, 새끼야.”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네. 그럼 이제 진심으로….”

벤자민의 실토 아닌 실토에 웃음을 드러낸 율리우스는 압축했던 전격을 풀어냈다.

“간다.”

쾅-

푸른 뇌전이 번쩍였다.

그에 맞서 핏빛의 마력이 터져 나갔다.

* * *

대련이 끝났다.

승리는 시종일관 우세를 점하던 율리우스의 승리.

벤자민은 대련이 끝난 즉시 바로 옆에 자리한 의무실로 이동했다.

‘이번 사건을 통해 놈은 학생회랑 본격적으로 적대하게 되겠지.’

결과만 보면 알렌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

아니, 그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도 이렇게 될 예정이었다.

과거에도 같은 일이 벌어졌지 않나.

하지만….

“……이렇게, 이런 결과는 아니다.”

흘깃-

낮게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일그러진 표정의 2황자가 보였다.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이냐…!”

“부회장님, 아니 황자 저하….”

벤자민은 쓴웃음을 지었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이런 결과를 원했던 것이 아니었지만….”

“모두 아카데미를 위한 일이었다.”

“제 사심도 섞여 있었지요.”

알렌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그의 모습을 응시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느냐!”

그의 몰골은 좋지 않았다.

온몸에 가득한 상처와 창백한 안색.

결정적으로 마력 회로의 상태가 너무 심각했다.

“이건 낫는다 하더라도 반이나 회복될 수 있을지…. 아마….”

곁에서 그를 진찰하던 치료사가 말을 흐렸다.

영구적인 부상.

말을 하지 않았지만, 지금 그의 전사로의 인생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평생 검을 잡을 수 없을지 모르지.

“그 아이도 진심으로 이러려는 생각은 아니었을 겁니다, 하하….”

벤자민이 떨리는 손을 담요 깊숙이 숨겼다.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가 의무실 내부에 감돌았다.

알렌은 한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이 모든 것을 보았다.

‘…이 대련을 막아 낼 수 있었을까.’

아니면, 그의 부상이라도 막을 수 있지 않았나.

그와 벤자민은 친분이 없다.

대화한 것도 3일 전이 처음이자 마지막.

논리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알렌이 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 이야기해도 같은 미래를 맞이할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가 아니었어도 다른 이가 겪었을 일이겠지.

‘정말 그런가?’

그들이 율리우스의 적이 되면 편하니 방치한 것이 아닌가?

이것 말고 다른 결과를 내는 것이, 정말 어려웠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어지럽게 겹쳤다.

자신과 아무런 친분이 없는 벤자민이었지만, 사람의 인생을 망가지는 걸 두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율리우스와의 대적하기 위해서 그의 희생은 필수불가결이다.

자신 혼자서 그의 모든 것을 상대할 수 있단 생각은 오만이 아니었던가?

아군이 필요했고, 명분이 필요했다.

죄책감, 회피, 맹목, 자기변명 그리고 위선.

그런 감정의 흔들림이 아니었다.

‘일찍이 각오했던 일이다.’

중요한 건 그 후의 어떻게 대처하는가이다.

회귀 전 홀로 대적한 것에 대한 한계를, 그 결과를 온전히 겪어 봤다. 어떻게 행동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에 고민했다.

그렇게 일이 벌어졌으니….

‘이제 움직여야 할 때.’

모처럼 만들어진 기회다.

알렌이 모종의 결심을 품은 채 의무실을 뒤로 했다.

통로의 안으로 쏟아져 내리는 빛이 극명히 갈렸다.

-와아아아

어둠이 내려앉은 통로의 반대편에서 환호 소리가 파도쳤다.

“율리우스, 괜찮느냐? 혹시 다친 곳이라도….”

“수고하셨어요! 선배라고 걱정했는데, 역시 율….”

“정말 이길 줄은 몰랐습니다. 당신 같은 망나니가….”

『──율리우스는 소설에 흔히 나오는 주인공과 달리 통쾌하게 후환을 잘랐다는 것에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저벅저벅-

『──이게 사이다지. 제대로 속을 망가뜨렸으니 다시 덤벼들 일은 없겠지. 호구처럼 봐줄 생각은 없으니까.』

대련장 밖으로 율리우스가 여러 여자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아, 형님! 여깁니다! 어디에 계셨습니까!”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잘 싸우더구나.”

알렌은 한 사람의 인생을 무너트렸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웃고 떠들고 있는 그가.

“하하, 보고 계셨습니까.”

혐오스러웠다.

“그래, 승리를 축하한다.”

“형님이 있는 걸 알았다면, 더 열심히 싸울 걸 그랬습니다. 하하하.”

참을 수 없을 만큼.

* * *

알렌은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기숙사로 돌아가도 상관없었지만…, 오늘은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알렌은 인적이 적은 골목을 걷던 중, 문득 입을 열었다.

“내 방법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나?”

「그건 모르죠?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요.」

“…이미 지나갔다라.”

「미래는 알 수 없어요. 정말 현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그런 우중충한 얼굴 하지 말고 앞으로 할 일이나 생각해 봐요. 과거가 후회스러우면 앞으로 잘하면 되구요.」

베스틀라는 웬일인지 말이 많았다.

「맞다. 저 검집! 이제 아카데미 생활도 안정됐으면 제 검집이나 새로 맞춰 주는 건 어때요? 원래 선물을 하면 받는 사람이나 주는 사람 모두 기분 좋아진다구요! 아까 신드리라고 했나? 실력이 괜찮던데 저한테 맞는 검집이나 찾아 줘요. 당신도 좋죠? 그쵸?」

“위로해 줘서 고맙군.”

「예?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요?」

흠-

알렌의 굳었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면 그런 걸로 하지.”

「……저기요, 진짜 그런 의도가 아니었거든요? 제가 누구 좋으라고. 진짜.」

무겁던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모든 일을 손아귀에 쥘 수는 없는 법이지.’

어떻게 행동할지 이미 결심했지 않나.

“그럼 돌아가도록 할까…, 오랜만에 최상급 어도유로 닦아 주지. 상이다.”

「…상은 무슨.」

베스틀라가 괜히 툴툴거렸다.

그렇게 발걸음을 돌리려던 때.

애옹-

갈색 털 뭉치가 옆 골목에서 튀어나왔다.

“이런 곳에도 길고양이가 사나….”

학생 중 한 명이 키우다 버린 건가?

잠시 고양이를 살피던 그가 멈춘 걸음을 재개한 그때.

“……?”

“…이곳에서 만날 줄이야.”

용사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여자.

하얀 눈 같은 백발과 무슨 생각인지 모를 멍한 무표정의 미인.

“…안녕하십니까.”

마리아 카리타스.

그녀가 골목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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