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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가 빙의를 싫어함-69화 (69/212)

제69화

고개를 돌리자 둥근 안경을 녹발의 남자가 야비하게 웃고 있었다.

“어쭈, 선배를 보고도 인사 안 하냐?”

알렌은 차분히 그를 살폈다.

녹발에 둥근 안경, 황색 눈동자. 눈가를 가리는 더벅머리와 표준어에 가까운 발음.

웃는 인상은 밉살맞아 보였고, 피부로 맞닿는 기도가 안정되어 있다.

알렌의 기준으로 봐도 괜찮은 실력.

‘2학년 10위 벤자민.’

이넬리아가 정리해 준 정보에서 봤던 이름 중 하나.

그리고 율리우스가 첫 사건을 터트리게 되는 당사자.

“왜, 내가 평민이라 꼽냐? 평민한테 먼저 인사 못 하겠어? 응? 아니면 뭐, 고오-귀하신 귀족님의 예법에는 하찮은 피랑 말을 섞지 못하는 걸로 되어있나?”

하이젤의 양옆에도 다른 선배들이 앉아 그를 압박했다.

그는 움직일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알렌은 손목에 찬 팔찌에 마력을 집중했다.

반경 1m도 안 되는 범위에 텔레파시를 전하는 유물.

[이 일은 내가 해결하지.]

음? 고개를 돌린 하이젤이 알렌을 보았다.

[알아서 해결할 테니, 나서지 않아도 된다.]

그의 말에 금방이라도 엎어 버릴 것 같았던 하이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 무시해? 선배 말이 말 같지가 않지? 하, 참.”

벤자민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으며 팔에 힘을 주었다.

거친 말과 다른 섬세한 마력 운용.

꾸욱-

놀랄 만큼 정제된 힘이 그가 일어설 수 없도록 막았다.

“니네들이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여기는 너희들 영지가 아니에요. 알아? 바깥에서 통하던 위세가 여기서는 안 통한다고.”

냉철하게 주변을 살피니 그들 주변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적었다.

오직 2, 3학년의 학생들만이 드문드문 있을 뿐.

알렌은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이해했다.

“빡치지? 응? 밖에서는 가문의 권위로 쓸어버리면 되는데, 여기서는 안 되니까.”

보통 갑작스럽게 폭언과 모욕을 듣는다면 둘 중 한 가지 행동을 할 것이다.

모멸감에 분노하거나, 기가 죽어 순응하거나.

그것도 상대가 자신보다 더 강한 힘을 가졌다면 후자로 기울겠지.

“그런데 이곳, 갈슈딘 아카데미에서는 실력이 전부라….”

“선배님 그만하시죠.”

그러나 알렌은 아니었다.

“…는 말, 뭐?”

“선배님의 의도는 알겠으니 그만하셔도 된다는 말입니다.”

“아니, 뭔 개소리-, 어….”

흠칫-

상대를 비웃어 줄 요량으로 고개를 돌린 벤자민은, 생각보다 평안한 알렌의 안색에 말을 멈췄다.

“그렇게 경고하지 않아도 마음대로 날뛰려는 생각은 없으니 연기는 그만하셔도 된다는 겁니다.”

“아니, 너는 뭘 아는 척을….”

“현재 신입생들을 억누르려는 목적이 아닙니까.”

이유야 뻔했다.

‘아직 아카데미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이들에게 보여 주려는 거지.’

이곳은 다르다고.

너희가 마음대로 날뛰어야 될 장소가 아니라고.

슬쩍 근처를 흘깃하자 1학년 신입생 몇 명이 당황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저희는 규칙에 맞게 행동할 테니, 선배도 그렇게 행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알렌은 그의 몸이 굳은 틈을 타 어깨에 올린 팔을 치웠다.

‘이 정도 마력량이면…, 4위계 중간 정도일까.’

마법사가 아닐 테니 실력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

“선배도 저희랑 피차 쓸데없는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을 것 아닙니까.”

“어, 어, 아니…, 그건 그렇긴 한데.”

그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순간, 하이젤의 옆에 있던 이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미친놈아. 거기서 고개를 끄덕이면 어떡해….”

“아, 미안하긴 한데…, 얘들이 이럴 줄 알았냐.”

벤자민은 언제 날 선 말을 했냐는 듯 난처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눈꼬리가 내려가니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유순한 인상으로 바뀌었다.

“이미 뭘 할지 잘 아는 애들한테 뭘 더 이야기해.”

수석이나 차석이라고 한들 상대는 2학년 10위.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그들보다 1년 더 노력한 천재를 이기는 것은 힘들겠지.

물론 알렌과 하이젤은 보통의 학생이 아니었으니 그대로 대항해도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만들어 나갈 평판이 중요하니.’

알렌은 현재보다 미래를 봤다.

“아마 며칠 후에 있는 대련도 그 일환인 것 같은데, 아닙니까?”

덤벼든다면 1학년들에게 차이를 보여 줄 수 있으니 이득이고, 순응한다고 해도 후에 있을 대련에서 분탕 종자를 걸러 낼 수 있다.

알렌의 확신 어린 말에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다가왔다.

남자 2명과 여자 1명.

“야, 텄다 텄어. 이번에는 안 되겠다. 보충 반 애들도 이러는 건 아니겠지?”

“와…, 역시 차석인가. 똑똑하당.”

“부회장님, 그냥 선후배 화합 때 확실히 하는 게 낫겠는데요?”

갈슈딘 아카데미의 학생회 일원들.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맞아서 다행이군.’

그들의 뒤로 알렌이 여태껏 기다리고 있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쩔 수 없구나.”

말 한마디에도 감출 수 없는 품격이 드러난다.

“보충 반을 상대할 때는 더 조심스럽게 접근하도록 하자.”

회색빛 머리의 미남자가 산뜻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는 알렌과 하이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반갑다. 내 이름은 일라이자 하뷔에론, 알드니아 제국의 2황자이자….”

회귀 전.

자신의 형을 잃고, 아버지를 잃고,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남자이자.

“지금은 부회장을 맡고 있지.”

율리우스에게 파멸을 맞이한 남자.

“우수한 인재를 만날 수 있어서 기쁘구나.”

“예,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일라이자 저하.”

드디어 그를 만났다.

* * *

모든 정규 수업을 끝마친 오후.

알렌은 필로소피아 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작전이 실패한 것을 깨닫자 빠르게 사과하고 자리를 떠났다.

벤자민은 미안하다며 나중에 따로 만나자고 했다.

알렌은 일라이자와 성공적으로 안면을 텄다는 것에 만족했다.

하이젤은 알렌이 그들과 대화할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고 흥미롭게 지켜보다 대화가 끝나자 교실로 돌아갔다.

그 이상 관계되고 싶지 않다는 듯.

“야, 들었냐? 아까 싸움 났다는데.”

“뭐? 어디서.”

“보충 반에서. 이번 신입생이 선배랑 싸웠다더라. 듣기로는 3일 후에 제한 없는 조건으로 대련한다는데?”

“아, 왜 나만 못 봤지. 아깝다.”

본관을 빠져나오는 학생들 사이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여러 학년이 같은 수업을 듣는 것이 흔한 만큼, 소문이 각 계층으로 도는 것도 빠를 수밖에 없었다.

알렌은 기숙사에 가까워졌을 무렵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알렌은 베스틀라를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하이젤이 말한 것에 대해 아는 것이 있나?”

「그, 그게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베스틀라는 약속대로 신수의 숲에서 돌아온 후 자신의 사정을 알려 줬었다.

“분명히 용족과 전쟁을 하던 중, 죽고 나서 눈을 떠 보니 검 안에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

알렌도 그녀에게 동생에게 악마가 깃들었기에 구하려 한다는 말을 알려 주었고.

“그런데, 하이젤이 말하는 걸 들어보면 뭔가 더 있어 보이는데….”

베스틀라의 검체가 그녀의 동요를 증명하듯 떨렸다.

“정말 아는 게 없나?”

「하, 하하. 그 남자가 잘못 알았던 게…, 아닐까요?」

알렌은 아무 말 없이 검을 응시했다.

베스틀라는 침묵으로 그의 질문을 회피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가까이 다른 사람의 발소리가 들릴 무렵, 알렌이 어느덧 멈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신뢰에는 신뢰로 답할 수밖에 없지. 언젠가 내 비밀을 알고도 침묵할 수 있나 보도록 하지.”

「……알았어요.」

필로소피아 관의 4층, 오른쪽 끝에서 3번째가 그의 방이었다.

방 3개와 거실, 부엌으로 나누어진 기숙사.

본래 저택보다 좁았으나, 혼자 지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니 이넬리아가 차를 준비해 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렌은 자리에 앉은 즉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어땠지?”

“새벽부터 총 11곳의 경매를 확인했지만, 영혼 혹은 공간 추적과 관련된 물품은 없었습니다.”

“…그런가.”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아무런 단서도 없는 것이 아쉬웠다.

“그에 관한 소문이라도 발견한다면 곧바로 보고를 부탁하지.”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악마 퇴치에 관련된 물품에 대해서는….”

“그것도 구할 수 있으면 구하도록.”

그녀는 동생이 악마에 빙의된 것으로 알고 있으니, 저렇게 말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아 그래, 린벨은 어떻게 됐지?”

“공자님께서 시키신 일은 순조롭게 진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음?”

“…명색이 시녀인데 시중들 시간이 없다고….”

알렌은 쓴웃음을 지으며 투덜거리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에 관해서는 이번 주말에 다시 이야기하지. 우선할 일이 있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다시 수색을 위해 나가 보겠습니다.”

“조심하도록 하고.”

그녀의 실력에 위험한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지.

이넬리아는 한순간 기쁜 미소를 짓더니 그림자로 변해 기숙사를 빠져나갔다.

“그럼 나는….”

촤르르-

책을 넘긴다.

『동생을 찾을 단서가 없다는 것에 낙담함. 이넬리아가 사라지자 ■■■■과(와) 이어진 책을….』

한 장 뒤로, 다시 한 장.

하이젤과 대화했을 당시 나타났던 그 알람들은.

『■■■■과(와) 이어진 책이 ■■의 위험성을 감지합니다! ■■■■이(가) ■■에 반응합니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 * *

하이젤은 내성 문을 빠져나와 거리를 돌아다녔다.

거리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엘프, 수인, 인간을 비롯한 주 종족들과 가끔 보이는 리자드맨을 비롯한 아인들까지.

하루에 한 번, 도시를 돌아다니며 사람을 구경하는 것이 그의 취미였다.

그가 기억하던 것에 비해 다소 낙후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다시 이만큼 문명을 일궈 냈다는 사실에는 가슴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대몰락이라고 했나.’

진실 일부분을 아는 그에게도 꽤나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도 죽고, 용사도 사라지고, 세상은 무너지고.

성검이 이곳에 있다는 소리만 듣지 않았다면, 저 멀리 바다의 너머로 향해봤을 텐데.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냐?”

의표를 찌르는 목소리에 숨어 있는 상대가 굳었다.

소리가 막다른 벽을 타고 울렸다.

“숨어 있는 거 아니까 빨리 나와.”

평소처럼 가볍게 웃으며 말하자, 그가 들어온 골목으로 한 명이 걸어 나왔다.

푸른 청발과 자신감 넘치는 얼굴.

점심까지 같이 있었던 자와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

“분명 잘 숨은 것 같았는데….”

율리우스가 조금 흥분한 듯한 얼굴로 나타났다.

“내가 시선에 조금 민감해서 그래.”

아주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로.

“역시 주인공인가….”

주인공이라…. 하이젤은 히죽 웃었다. 작은 속닥거림이 목구멍을 비집고 나왔다.

“주인공은 너희들이지.”

“어? 뭐라고?”

“그래서, 너는 무슨 일로 따라왔지?”

어떤 이유든, 무슨 볼일이 있든, 얼마나 좋은 제안을 하든, 하이젤은, 마왕은, 나는.

“내 이야기에 관심이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나는 재미없을 것 같은데.”

관계되고 싶지 않다. 누구든. 즐길 시간도 부족하니까.

“나도 알아. 그런데 들어 보면 다를 거야.”

율리우스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 마기를 탐색할 능력이 있거든.”

“그래서.”

그 새끼들이랑 관계되어 있다면 그 정도 능력이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그래서?

“마기를 느끼는데, 그게 나랑 상관있나?”

하이젤로 살면서 마기를 격발한 건 몇 개월 전 단 한 번뿐.

그것도 자신의 존재를 느낀 성검의 반응으로 인해 일으킨 무의식적인 반응에 가까웠다.

“상관없지. 그런데 내가 찾아냈거든.”

알렌의 때처럼 거리를 둔다.

“뭘 찾았든 나랑 관계 없….”

“마계랑 이어진 게이트를 발견했어.”

“뭐?”

그러나 그 생각이 깨어지는 것에 얼마 걸리지 않았다.

율리우스는 흥분을 진정시키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하이젤이 자신의 말에 반응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은 숨길 수 없었다.

“마족들이 나오는 게이트를 찾아냈다고.”

그 말에, 하이젤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율리우스는 원작의 내용을 되뇌었다.

‘게이트가 나오는 건 지금부터 반년은 있어야 하지만….’

막을 수 있다면 지금부터 막는 게 좋지 않나?

어차피 놔둬 봤자 마기가 쌓여서 게이트 브레이크 밖에 더 될 텐데.

‘발암 걸리는 그년은…, 지금쯤 마탑에 들어갔을까?’

상관없다. 이번 엔딩은 그년이 와도 그렇게 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딴 엔딩은 한 번으로 족하지.’

앞으로 나도 살아갈 세상이니, 망하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하이젤이 고개를 숙였다. 율리우스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섰다. 아마 하이젤도 기쁠 게 분명하리라.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 남은 건 안에서 할까?”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

“내 기숙사로 가자.”

율리우스가 웃었다.

“그래, 한 번 들어 보자. 무슨 이야기인지.”

하이젤 역시, 웃었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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